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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의 진실
중국의 역사책인 (남제서)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위나라는 100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대파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 문장의 오류를 찾아보라.
먼저 위나라는 중국 삼국시대 때 나오는 위가 아니라 북위를 말한다.
기병은 말을 타고 있는 병사다.
그럼 중국 북방에 있는 위나라 기병이 바다를 뛰어넘어 백제로 진격한 것인가?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해석한다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위(北魏, 386년~53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에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화북에 건국되어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진 왕조이다.
첫째, 북위의 기병이 고구려를 거쳐서, 즉 고구려가 길을 비켜주어 백제를 공격했을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북위의 국력은 고구려를 압도할 정도가 되지 못하였고 북방의 패자였던 고구려가
타국 병사가 자신의 영토를 지나치는 것을 그대로 용납할 리가 없다.
둘째, 위나라가 말을 배에 실어서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말을 바다에 실을 만큼의 배가 북위에 있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술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였다.
중국에는 100만 마리 말을 실어 바다를 건널만한 능력이 있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가 다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자존심 강한 중국이 자신들이 패한 역사를 기록해 놓았으니 거짓말 일리는 없다.
결국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당신은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것은 바로 대륙 백제 !!! (즉, 중국 대륙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백제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만 있지 않았다.
중국의 산둥반도, 남서부, 일본의 구주(일본의 남부지방) 등에도 있었다.
중국 허난성의 백제마을
중국 허난성 (河南城)의 수도 정주에서 낙양시 방향으로 버스로 달리다 보면 숭산 소림사가 나오는데
그 입구 간판에는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보인다.
우리 옛 선조들이 한강 이남을 하남이라고 하였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하듯이
중국에서도 황하 이남을 하남 지방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의 역사적 사실
그런데 재미나는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편 개로왕 21년을 살펴보면
"개로왕이 인부들을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을 따라 둑을 쌓아 사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국내 사학계는 숭산을 경기도 하남시 동쪽에 있는 검단산으로 추정하지만 만일 이 기록이 한반도의 하남 지역이 아닌 앞서 중국 허난 성에 위치한 숭산 부근의 상황이라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빙혼의 견해>==============
빙혼이 방금 삼국사기 백제편 제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기간 20년>을 찾아보니
<蛇城之東至崇山之北>구절이 나온다.
무슨 글을 쓸 때 이렇게 단어 하나에 목을 걸면 글의 방향이 잘못된다는 것을 알고나 쓰는지 모르겠다.
<숭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성>이라는 지역이다.
사성이 어디인지 밝혀 놓고 숭산을 이야기해야지 숭산을 소림사 숭산으로 착각하는 짓은 미친 것이다.
이 구절의 숭산을 소림사 숭산이라고 치자.
만일 사성이 다음과 같은 곳이라면 개로왕은 한강에서 중국 정주에 있는 숭산까지 백성들을 동원하여
서을 쌓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대륙백제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엉터리 주장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성(蛇城)>
충남 천안시 직산면 군동리 산 10-4번지에는 “사산성(蛇山城)”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성(蛇城)”에 관한 기록이 2군데 보이고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책계왕 즉위년조에 보이는 “왕이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대비하였다(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 備之)”는 기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책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의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라는 기록이다.
여기에 보이는 “사성(蛇城)”은 직산에 있는 “사산성(蛇山城)”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기존에는 사성을 풍납토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이병도, 1976)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구산토성
(龜山土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고(방동인, 1974) 현재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
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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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가 배워온(강단사학자들이 쓴 국사) 국사 지식으로는 백제가 중국 허난성 숭산 인근에 위치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백제 의자왕의 장남 융의 묘지석
그렇지만 만일 삼국사기의 숭산이 중국에 있었던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국내 역사학자들이 백제는
당연히 한반도 한강 부근에만 위치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백제의 위치를 선정했다면
이는 반드시 수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외에도 흥미있는 사실은 숭산 근처 낙양시 북망산에 가면 1,920년에 출토되었던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의
장남인 부여 융 (AD 615~682)의 묘지석이 보인다.
중국 광서성 장족자치구 백제향
지난 96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 방송팀이 베트남 인접지역인 중국 광서성 장족 (壯族) 자치구 일대를
탐방하여 제작한 역사스페셜이 방송되었는데 이 당시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에서
우리나라 전남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식 맷돌과 외다리 디딜방아 및 서낭당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더욱이 장족 자치구에서 지내는 명절 풍속은 고대 한국의 명절처럼 정월 보름과 단오절을 경축하여 즐기고
있으며 민속춤인 삼현 춤을 출 때에는 둥근 원을 그리면서 삼현 금이라는 악기로 반주하는데 남자의 박자에
따라 노래하고 춤추면서 둥근 원둘레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데 이는 삼국지 동이전 마한 편에 나오는
우리나라 강강술래 춤과 흡사하다.
지난 67년에 김상기 박사가 <백제의 해상진출과 요서 경략설>을 백산학보에 처음 발표한 이후로
70년대 국사교과서에 중국 대륙 해안지역에 있었던 대륙백제에 대한 서술이 잠시 있었던 적이 있었고
97년에는 사학자 이도학 씨가 한반도 백제 세력이 아닌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근초고왕 시절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설은 중국사서인 자치통감을 포함한 여러 역사책 속에서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사학계(식민사학자들)에서는 아직까지 대륙백제를 공식적인 학술이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교과서에 백제가 대륙으로 진출한 흔적만 보일 셈으로 화살표 표시만 되어
있다.
<1>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 대륙 백제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 문헌을 찾아보자
○. 자치통감 영화 2년 정월 조에 "처음 부여는 녹산(만주 송화강 유역)에 거쳐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쇠약해져서 서쪽 연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하지 않았다" 를 보면 당시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만 있지
않고 중국 만주지역에도 진출한 세력이 있었다.
○ 또한 후한서 건광 원년 조에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백제를 의미)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는 기사를 보면 백제세력이 한반도를 넘어서 만주 지역까지 진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당시 4C 초에 북중국은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 파장이 고구려와 백제에게도 미쳐
이들의 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고구려 미천왕과 백제의 비류왕
시절 (AD 4C 초) 양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요동 낙랑군과 요서 대방군도 정벌하여 사라졌기 때문에
백제는 자연 고구려와의 국경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AD 371년 백제 근초고왕 시절, 근구수 태자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누르고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륙에서의 독자적인 백제세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외 중국 송서와 양서 백제 조에는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위치했었다"
는 기록과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
소유하였다 " 라는 기록이 나오고,
○. 통전 백제 전에도 "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데에서 백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 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으니
유성(지금의 조양 시)과 북평(현 노령 시) 사이에 있다" 라고 밝히고 있다.
기타 중국 사서에 나타난 백제 관련기록
○. 자치통감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백제는 진(晉)대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 구당서 “ 백제의 영토는 남으로는 바다건너 월주 (越州)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 북사 “ 백제국이 진대로 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 주서 “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 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는 중원을 차지했다.”
○. 만주원류고 “ 금주, 의주, 애훈(중국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다.”
<2> 한국 역사서에 기록된 대륙 백제
한편 한국 역사서에도 대륙백제에 대한 흔적이 있는데,
○. 삼국사기에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 즉 AD 19년에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 고 전하고 있어 만주 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 또한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기사가 나온다.
○.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는 “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중국대륙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비롯한 백제의 식민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백제는 진나라 때 5호의 침입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졌을 때 중원에 진출하여 백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나오는 여러 중국 및 국내 사서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백제는 출발부터 졸본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로서 중국 대륙에 있다가 점차 그 세력과 판도를 넓혀서 한반도를 거쳐 왜 열도까지 정벌해 나간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고대국가로서 일제 반도사관에 의해 그 실체가 왜곡되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로 전락하였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대륙 백제의 건설
삼국시대 정복군주라 함은 우선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그리고 백제 근초고왕을 들수 있다.
근초고왕 (346~ 375)
광개토대왕 (391~ 413)
장수왕 (413~ 491) : (괄호안의 년도는 재위기간)
백제의 최대 전성기와 고구려의 최대전성기가 공교롭게도 모두 위진남북조 시대(220~ 581),
그 중에서도 5호16국 (316~439, 123년간) 시대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
(5호16국 : 한(漢)나라가 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사마씨가 세운 진(晉)은 남쪽으로 천도하여 동진(東晉)이 되고,
북쪽은 북방 5개의 오랑캐가 16개의 국가를 세운 중국 최대의 분열기이다.)
고구려, 백제가 팽창한 시기는 바로 중국의 분열기이다
중국에 대륙백제를 건설한 왕은 고이왕 (234~286)인데, 중국은 당시 위, 촉, 오의 삼국지 시대(222~ 280)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팽창과 위축은 중국의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중국이 분열과 혼란에 빠질 때, 고구려와 백제는 공격적으로 나오고 힘을 확장하지만 중국이 단일 왕조로
통일되면 중국은 주변국의 위협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첫번째 국가 과제가 되어 자신들이 분열시에 힘이
커지고 위협이 된 고구려, 백제를 공격한다.
수나라,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단순히 중화 자존심 싸움만은 아니다.
중국의 분열은 고구려, 백제의 전성기이다
중국의 분열기는 백제, 고구려에게 팽창의 기회이지만, 반대로 신라에게는 불리하다.
왜냐하면 신라의 주적은 백제인데, 중국이 분열되면 백제는 중국 대륙에 있는 영토(대륙백제)가 확장되고,
이는 백제의 국력 신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의 통일기에는 백제, 고구려 위축되고 반면 신라는 팽창의 기회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가 중국의 통일기인 당나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나라, 당나라로 중국이 통일되면서 백제는 대륙백제를 잃고, 고구려는 수, 당의 침입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고구려, 백제의 힘이 저절로 약화되는 어부지리를 신라는 얻었다.
중국의 통일과 대륙백제의 붕괴
진흥왕 (540~ 576)이 정복활동과 함께 3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가 바로 백제 성왕때 대륙백제가
붕괴된 이후(532)인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다.
대륙 백제의 소멸과 신라의 성장은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왜 진흥왕대에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쥐고 세력을 팽창했는지에 대한 어떤 의문도 없이
그저 진흥왕 순수비의 위치만 외우는데 급급했다.
대륙의 정치상황이 그대로 한반도로 전해지고, 한반도 안의 국가간의 세력균형이 바뀐다는 것을 몰랐고,
그것에 대해서 거시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국사책도 없었다.
만약 중국이 계속 분열되어, 고구려가 중원을 차지하고, 백제가 대륙백제를 유지했다면
신라는 감히 삼국통일 시도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삼국시대를 공부할 때는 중국 대륙의 정세를 우선 살펴보아야 삼국의 흥망성쇠를
거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숲을 볼 수가 있다.
중국사를 모르고 그저 삼국간의 역사만 공부하면 원인도 모르고 결과만 암기하는 오류와 지적인 낭비에
빠지며, 결국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보다가 지나간다.
천문학, 기상학으로 밝혀진 삼국의 강역(박창범교수)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현,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검증한 결과
삼국의 활동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혀냈다.
그는 이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애초에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3> 삼국사기 천문기록에 대한 연구
당초 박 교수는「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베꼈거나 꾸며낸 것이라는 일본 천문학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박 교수는 이를 검증하기 위해 삼국시대의 천문상태를 재현한 프로그램을 짜고 이를 대학의 중앙컴퓨터에
연결해 가동시켰다.
시간이 흘러 방대한 관측결과가 나타나자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과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
일식현상 등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정확하게 컴퓨터의 계산과 일치했으며,
이들은 중국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록이었다.
삼국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실험결과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삼국에서 주기적으로 관측한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최적 관측지점이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동부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초기 신라의 경우 중국의 양쯔강 유역, 백제는 발해만 유역, 고구려는 백제보다 더 북방에 최적 관측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내 역할은 과학적인 실험결과를 제시하는데 까지이며, 삼국의 관측지점이 왜 중국 동부에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몫“ 이라고 말한다.
아직 학계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그것도 다른 분야의 학자가 제기한) 「돌출적인」 이론이 일반인에게
직접 소개되면 불필요한 오해와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의 내용 가운데 40% 정도는 자연현상과 관련된 기록인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나머지 60%의 기록만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쉽다“ 며
그 「40%」의 가치와 효용성을 강조했다. ('97 월간동아 2월호 기사중 일부)
"삼국시대 천문관측 연구논문을 발표한 이후 국사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식민사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천문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 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 “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근거가 없는지를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결과만 놓고 말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장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들만의 것이냐고 반문했다. “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연현상 기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
고려시대에 집필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삼국시대에 일어난 일식(日蝕)이 67회,
행성 (行星)운동의 이상현상이 40회, 혜성(彗星)의 출현이 63회, 유성(流星)과 운석(隕石)의 낙하가 42회,
기타 14회 등 총 226회의 많은 천체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사서에도 나타나는 이러한 천문현상 기록들은 각국 고대과학의 수준과 역사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천문현상에 대한 우리의 고대 기록들은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다.
그런데 이 천문현상 기록들은 순수 과학적인 그리고 과학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학에도
그 응용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천체에 대한 기록을 당시 주변 국가들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써 과학 문물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또한 특정 국가가 남긴 천체 관측기록을 분석하여 정세변화, 강역의 위치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천문현상 기록뿐만 아니라, 지진(地震), 홍수(洪水), 태풍(颱風) 등의 기상학적, 지질학적 기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자연현상 기록은 다양한 가치를 갖는다.
이 기록들을 이용하여 본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천체 관측 기록으로 부터 관측을 수행한 나라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일식과 같은 현상의 경우
달 그림자가 지구상의 모든 곳에 드리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만 식(蝕)의 진행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여러 해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관측자의 위치, 곧 그 국가의
위치가 되리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본 연구에서 일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는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들에 대응하는 천체역학적으로 계산한 실제 일식들의 진행상황을
동아시아 전역에서 조사하여, 그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를 찾는 방법이다.
다음 쪽에 나오는 세 도표의 평균 식분도는 신라(24회)와 백제(19회)와 고구려(8회) 에서 기록한 일식 중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들의 평균식분을 보여준다.
윤곽선 안쪽 지역으로 갈수록 평균식분이 크며, 이것은 곧 그 기록을 남긴 국가의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의 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이, 세 경우 모두 한반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식 기록 횟수가 적은 고구려의 경우에는 최적 관측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백제나 신라의 경우보다 북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적 관측지가 확실히 보이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각국의 관측자가 발해만과 양자강 유역에 각각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의 위치를 찾기 위한 두 번째 방법으로는 앞의 방법과 정반대로 개개의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지역을 바로 그 국가의 위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 쪽의 세 도표에서 잔 점들을 찍은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1개, 2개 또는
그 이상의 일식들은 기록이 되어 있음에도 볼 수 없는 지역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 기록된 일식을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앞에서 보인
최적 관측지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관측자가 경주에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관측 가능한 24개 일식 중 2개를 전혀 볼 수 없다.
백제와 신라가 현재 중국의 동쪽 지방에 있었다는 생각은 최근 일부 재야 사학가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그들의 주장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천체 관측만을 이용한 본 연구 내용에서만 생각하면, 왜 기존 역사관과 달리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중국대륙에 있다는 결과가 나왔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기록이 중국기록을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다.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연구되어왔다.
천체역학적 계산과 사료 비교를 통해 그들은 적어도 5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천문현상 기록들은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191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이러한 연구결과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과학사 서적들에도 이런 주장이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구미에서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같은 문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제와 신라가 실제로 중국대륙 동부에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일식기록도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 관측 기록들일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 연구의 결과는 삼국의 위치가 분명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는 심하게 왜곡된 것이고, 바로 잡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진실에서 벗어나 이(異)민족이 보고 싶은 대로 왜곡시켜 후손에게 전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박교수의 연구결과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천문학으로 고조선사도 증명
그는 단군에 대하여 또 무엇을 밝혀냈다는 걸까?
최근 들어서야 단군시대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국사학계(식민사학계)에서는 아직도 단군을 신화시대로만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사서로는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들 수 있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엮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편년체 역사서다.
여기서는 역대 단군 임금들의 행적 등이 일일이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라는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라는 낙인이
찍혀 외면돼 왔다.
이 서적들이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들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박 교수와 같은 천문학자의 눈에는 이들 책도 달리 보였던가 보다.
"위서라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군조선에 관한 책에도 천문현상이 기록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아시아 제국들은 천체현상이 지상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주술적 믿음하에 천체운행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거지요. 그렇다면 이들 책이 위서야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바로 당대의 천문 현장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방법은 삼국시대 천문기록 검증과 같은 식입니다."
박교수에 따르면 이들 단군 역사서에는 모두 12회의 천문 현상에 관한 기록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로 가장 많고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다섯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 그리고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 군데씩 기록돼 있다 (도표참조).
<4> 기상분석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행성 결집에 대한 기록이다.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라는 한줄의 글귀가 그것인데 제13세 단군인 흘달단제 50년(무진년) 즉 B.C 1733년에
다섯 개 별이 누성 (동양천문학에서 표시하는 별자리 이름)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 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컴퓨터로 샅샅이 조사했다. 검정결과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으로 부터 B.C 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
이 해 7월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고,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다. 천문학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한편 B.C 1733년을 기점으로 하여 오행성이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 80년 전인 BC 1953년
2월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연수가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3천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계산결과
0.007% 즉, 세계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 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이었다.
오행성 결집 형상과 함께 박교수 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두 기록 두 사서 모두 제 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남해조수퇴 3척이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다.
조수면의 변화는 달과 태양의 조석력에 의해 일어나므로 천체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오행성 결집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22일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 넣었을 가능성은 0.04 %에 지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일식기록에서도 4년의 오차가 발생한 게 2건이나 된다는 점이다.
BC 935년에 근접한 일식기록으로는 6세 기자임금 2년 (BC 918년) 7월의 기록과 32세 단군 추밀 13년
(BC 837년)3월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 때에는 일식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확히 4년 후에는 각각 대응 시킬 수 있는 일식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연대 계산상 오차가 있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단군시대 일식과 관련해 박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사실 일식현상은 그것이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현상이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 밖에 안돼 의미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에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개의 일식기록 중 5개의 기록 (4년 후로 계산한 2개의 기록까지 합치면 모두 7개) 이 실제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2개는 연도뿐 아니라 월 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 고 박교수는 밝혔다.
일부 사학계도 연구결과 인정
연구결과 박 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적으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천문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 합니다.
특히 단군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록은 중국보다 월등히 앞선 연대이기 때문에 중국 기록을 베낄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서들이 후대에 추가 윤색되었다는 점도 있으나 상당부분은 단군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 교수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교수 (단국대사학)와 박성수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박교수의 천문학적 연구결과는 기성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이며, 단기고사나 단군세기를 이제는 정식으로 연구해 볼 때가 됐다고 밝혔다."
또 그 동안 단군등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상고사학회측에서는
학회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에 박교수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실었으며,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문헌사적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한 천문학자의 집요한 연구결과가 기존의 학문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학문들이 분할돼 자기의 영역만 찾을게 아니라 인접 학문들과 공동보조를 맞추면 의외의 소득을 거둘 수
있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박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사학자들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를 다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침묵만 하고 있는 기성역사학계.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이제까지 자기들이 쌓아온 엉터리 연구업적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기성역사학자들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것인지, 침묵은 미덕이 아니며 자신을 죽이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우리 한민족을 말살하는 가장 악독한 방법이다.
[출처] 대륙 백제의 진실과 그 역사적 사실|작성자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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