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은 정겹다.
돌담길 안쪽에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자신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월의 풍상을 비켜 서 있을 것만 같다.
돌담은 질료인 돌이 변화하지 않는 견고성과 부패하지 않는 내구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서인지 모르겠다.
돌담길을 걷노라면 아름다운 세계가 나를 부르는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도 하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정든 눈빛이 언뜻언뜻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이 아주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돌담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거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다시 돌아갈 수 없어 한없이 그리운 그때, 그곳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손짓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 한밤마을의 아이콘인 돌담길
팔공산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밤마을 아이콘은 돌담길이다.
기록에 의하면 돌담 쌓기의 유래는 이렇다.
오랜 기간 잦은 홍수로 팔공산 바위와 돌이 깎이고 쪼개져 흙이 쓸려 내려가면서 분지인 한밤 마을에 쌓인다.
그러던 중 1930년 대홍수로 마을과 논밭이 돌밭으로 변하자 이 돌을 처리하기 위해 돌담을 쌓기 시작한다.
논과 밭을 되찾기 위한,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노력이었다.
돌담의 총 길이는 4㎞. 아래쪽은 넓고 위쪽은 좁은 형태로 높이가 1m 이상인 곳도 많다.
한밤마을 돌담길은 문화재청과 한국관광공사에 의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담길로 선정된 바 있다.
생존을 위해 쌓은 돌담이 한 세기가 가기 전에 관광 자원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는 천 년 역사를 간직한 부림 홍씨의 집성촌이다.
950년경 이곳으로 이주해 온 부림 홍씨의 입향조는 고려조 재상을 지냈던 홍란이다.
대율리는 심야 또는 대야(大夜)라 불리던 곳이다.
한밤이란 이름은 높은 팔공산에 가로막혀 한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심심산골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기도하고, 넓은 논을 뜻하는 한배미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대야가 대율로 불리게 된 것 또한 1390년경 홍로가 밤야(夜)자 좋지 않다고 하여 대야(大夜)를 대율(大栗)로 고쳐 부르게 된 후부터라는 견해도 있고 일제 강점기 때 등기부를 만들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이 마을 이름과 밤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대율리 어디에도 밤나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대율이란 명칭은 밤(夜)을 밤(栗)으로 고쳐 쓴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산물일 따름이다.
상매댁은 한밤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역사와 흘러간 세월의 애환이 손에 잡힐 듯 고택을 지키는 마당가 햇살은 청명했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은 소슬했다.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57호로 지정된 상매댁은 대율리에 남아 있는 20여 채 고택 중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남천고택이라고도 불려온 이 집은 당시 의흥현(義興縣)에서 제일 오래된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의 19대손 홍우태가 살림집으로 지은 집이다.
사랑채 대청 상부에 “숭정후 상지즉위이년 병신삼월십칠일 신시 수주 상량(崇禎後 上之卽位二年 丙申三月十七日 申時 竪柱 上樑)” 이라는 상량문은 이 집을 지은 때가 1836년(헌종 2년)임을 알려주고 있다.
홍우태는 집을 지으면서 자손의 번창을 위해 뒤뜰에 두 그루의 잣나무를 심고 사랑채에 쌍백당이라 쓴 현판을 달았다.
상매댁과 역사를 같이해온 뒤뜰의 잣나무 두 그루는 아직도 높푸른 기상을 하늘 높이 뿜으며 이 집을 살아온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전해주고 있었다.
“제갈공명의 사랑 앞에/한 그루 늙은 잣나무가 있어/ 가지는 청동같이 힘차게 뻗고/ 뿌리는 반석 같이 견고하다”라고 노래한 두보의 시에서 보듯 제갈공명 같은 지혜와 굳센 생명력과 강인한 상승의지가 잣나무 두 그루를 심은 이 집주인의 꿈과 희망이었으리라.
잔디가 잘 손질된 뒤뜰은 생각보다 넓었다.
돌담과 화단 사이, 윗면이 평평하고 이끼가 짙게 끼어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예사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팔공산 호랑이가 내려와 앉았던 자리라고 하니 어찌 보통 돌덩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던 신성한 곳이어서 새마을 사업으로 돌담길을 넓힐 때도 이것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원래 이 집의 형태는 ‘흥(興)’ 자형의 독특한 배치였으나, 광복 이후 중문과 곳간채 등이 헐리면서 지금처럼 앞이 트인 ‘ㄷ’자 형이 되었다.
현재 상매댁에는 사당과 쌍백당인 사랑채 그리고 안채 문간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무척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대청 위로 안방과 건넛방을 잇는 다락이 있다.
제사 음식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보니 전면과 후면으로 작은 창을 내 환기가 잘 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여름에는 더없이 좋은 피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측 부엌과 맛 닿아 있는 작은 다락도 인상적이다.
1칸 규모의 작은 다락이지만 요즘의 베란다처럼 난간을 설치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키 높이에 맞춰 물건으로 올리고 내리기에 수월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상매댁의 설계는 철저하리만큼 실용적으로 되어 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납공간과 이동 동선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기능성 주택이라 할만하다.
안채가 실용성을 강조한 공간이라면 사랑채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대청과 방이 나란히 위치한 정면 3칸의 ‘-’자형 사랑채는 안채 앞 좌측으로 조금 비켜선 자리에 위치해 있다.
어느 고택에서나 느끼는 바이지만 우리 조상의 풍류와 실용을 아우르는 삶의 지혜는 여간 경탄스럽지 않다.
한밤마을에 위치한 상매댁은 독특한 형태의 건축양식을 간직하다 광복 후 중문과 곳간채가 헐리면서 ‘ㄷ’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 뒤뜰 잣나무 두 그루 높푸른 기상 뿜어
한밤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상매댁은 산의 생김새에 따라 지은 양지산(필봉)을 바라보는 북향집이다.
이곳은 남쪽의 팔공산을 포함한 네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어 ‘네 봉지’라고 불리는 자리이다.
안채 대청에서 바라보면 이들 네 개 봉우리가 모두 바라보인다.
상매댁이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까닭은 이 집안의 재력, 9대에 걸쳐 5천석 살림을 살았던 가세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풍수지리학적 배려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에도 설득력이 있다.
한밤 마을은 항해하는 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형, 즉 행주형(行舟形)에 속한다고 한다.
팔공산에서 흘러내리던 남천이 두 길로 마을을 에둘러 흐르다 마을 입구에서 다시 합류한 형세이고 보니 위에서 보면 영락없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의 모습이라는 것.
행주형은 길지임이 틀림없지만, 길지로서의 발복을 다하기 위해서는 키와 돛대와 닻 등을 구비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배는 망망대해를 순풍에 돛달고 항해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상매댁은 행주형 한밤마을의 돛에 해당되고, 그 돛은 부림 홍씨들의 풍수지리적 믿음과 기원이 만들어 세운 것이라 하겠다.
지금 상매댁의 주인은 부림 홍씨 29대손 홍석규씨다.
그는 15년 전부터 노모를 모시고 이곳을 지키고 있다.
상매댁을 찾았을 때 홍석규씨는 군 관계자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재를 털어 집을 보수하고 관리하기에 힘이 많이 드는 듯했다.
그가 분개하는 것은 문화재 관리비 지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택을 대하는 지자체의 자세인 듯했다.
고택의 입구에는 다른 전통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대청이라 불리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대청은 조선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효종과 숙종 때 다시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32년에 다시 창건된 것으로 학사(學舍)로 사용되던 곳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의 건물로 서측퇴간(西側退間)에만 간주(間柱)가 서 있는 누각형의 건물이다.
지난 9월 이곳에서 안치환, 원미연, 윤사월, 팝패라가수 류정필, 퓨전국악연주단 등 인기가수들이 출연한 작은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 일이 이 집주인을 격분케 한 사건(?)인 듯했다.
방송 제작의 메커니즘에 비추어 생각할 때, 아마도 작은 음악회는 그 기획의 취지와는 달리 고택의 가지런한 자태와 적막한 풍정을 흩트려 놓았을 것이었다.
고택에 대한, 고택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방송사와 그 관계자들의 태도가 도무지 상식 밖이라는 것이었다.
홍석규씨는 고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세속을 향해 분개하고 있었다.
그의 분개는 자신 만의 것이 아니라 부림 홍씨 가문의 것이기도 하고, 그의 분노는 작은 음악회를 주선한 지자체와 방송사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잘못된 문화를 향한 것이었으리라.
고택의 정신과 고택의 위의를 지키고자 하는 고택 주인의 격노는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편의밖에 모르는 그릇된 세태를 향해 질타하는 아픈 목소리로 들렸다.
상매댁을 찾은 날은 탱자 향기와 떨어지는 나뭇잎이 발길을 더디게 하는 가을이었다.
홍란 옹이 이곳 한밤 마을을 무엇을 찾아, 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천 년 전 한 선비가 팔공산 북쪽 육지 속의 섬 같은 이곳에 첫발을 내디딜 때, 하늘빛이 저렇게 맑았을까. 그러했을 것이다.
상매댁을 나서며 고택을 문화재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지자체마다 다투어 전개하고 있는 고택체험의 참다움이 어디 있는지 곰곰 생각해본다.
햇살 눈 부신 돌담길이 뒤따라오며 그게 무엇이냐? 고 채근하는 듯하였다.
부림 홍씨 후손들이 불천위 조상으로 모시는 고려 문하사 경재 선생이 남긴 가훈 시 일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강현국
시인·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