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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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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도산서원 재유사 행공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186 15.04.08 14: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산서원 재유사 행공기 陶山書院 齋有司 行公記

                                                            (在任; 丁亥9月~戊子2月)

 

 1. 서원의 역사

  순임금이 하수의 물가에서 도자기를 구움에 그릇이 거칠고 이지러지거나 흠이 없었듯이, 이 곳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질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던 곳에 서당을 열고 몸소 거처하시며 순임금에서 공자로 이어지는 학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1574년(선조7)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그의 문인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창건한 서원이다.

 1575년(선조8) 석봉 한호의 글씨로 사액을 받음으로서 영남 유학의 연총淵叢이 되었다.

서원의 설립 목적은 존현尊賢과 양사養士인데 기본적으로 유생들이 강당에서 학문하는 강학의 기능과 사우에 선현의 위패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제향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서원은 이러한 기능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향촌에 사회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성하여 지역 공동체를 이끌어간 정신적 지주가 된 곳이다.

 서원의 역사는 1542년(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이 문성공 안향을 모시는 사우를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하고 젊은이를 모아 학문을 강습하도록 하였다. 그 후 1550년(명종15)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교화를 국가에서 내리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폐하고 말 것이다.”하여 임금에게 올리기를 백록동규법에 따라 사액을 펴고,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아 소수서원이라 명명하여 사서, 오경, 성리대전 등 서책을 반포하게하니 서원의 사액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서원은 본래 정신을 벗어나 붕당으로 당권을 견제하며, 또한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려서 국가 재정과 병역을 약화시키면서 정치, 사회적인 폐단이 생기게 되어 1864년(고종1) 대원군은 서원, 향현사, 생사당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865년 노론 세력의 중심이었던 충주 만동묘의 철폐를 시작으로 전국의 사와 서원중 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 1000여개를 훼철하였는데 다시 남아 있는 서원 중에서 봉향 인물의 문묘 종사자 및 충절대의忠節大義가 뛰어난 자를 봉향 한 서원은 일인일원 一人一院 원칙에 의해 47개 만 남기고 모두 훼철하였다. 그 때 도산서원은 사액 서원으로 훼철되지 않고 남게 되었다.

 

2. 망기望記를 받으며

  공자보다 마흔 아홉 살이나 젊은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이 되어 있을 때, 거문고를 타면서 몸이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도 고을이 잘 다스려 졌다. 공자가 그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서 고을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하고 물으니 그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아버지처럼 섬기는 자는 셋이고, 형처럼 모시는 자가 다섯이고, 벗으로 사귀는 자가 열둘이고, 스승으로 삼는 자가 한 사람 입니다.(所父事者三人, 所兄事者五人, 所友者十有二人, 所師者一人)’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행동을 통제 해 줄 엄격한 분을 아버지로 섬기어야 하고, 선비가 학문을 함에 의문을 해소 해 줄 스승 한 분은 있어야 한다. 평소 퇴계 선생을 사숙私淑하여 흠모했지만 모실 기회가 없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체국에서 도산서원에서 등기 우편물이 배달 될 것 인데 집에 사람이 있는지 물어왔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붓글씨로 겉봉이 쓰여 진 큰 봉투였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근봉謹封에 ‘도산서원재유사망기陶山書院齋有司望記’라 쓰여 있고, 전통 한지 전지에 ‘도산서원재유사陶山書院齋有司 유학儒學 김부일金富鎰 정해丁亥 팔월八月’ 붓글씨로 크게 쓰여 있다. 그리고 묵인墨印이 눌러져있다.

 갑자기 두려워지면서 경외하는 마음이 온 몸에 퍼졌다. 나의 이름을 이렇게 크게 써서 도산서원 재유사의 임무를 맡겨 스승 모시기를 하게하는 것이다. 망기 받기까지 그 분 알기를 노력 한 것이 무엇이며 지금까지 준비 한 것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름을 욕되지 않게 잘 할 수 있을까?

 옛날의 선현들은 서원에서 망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망보望報아뢰오’하고 큰 소리하며 마을을 들어서면, 망기의 주인은 세수를 하고 도포와 갓을 갖추어 쓴 후 병풍을 치고 자리를 마련하여 망기를 받들었다. 망기의 주인은 서원 쪽을 향하여 작은 상위에 망보를 모시고 재배하며 망보를 확인한 후 고이 접어 서상에 보관한다. 그런 다음 서원에서 온 사람에게 점심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약간의 노자를 준다. 스승에 대한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이렇게 정성스러웠거늘 오늘의 나는 너무 소홀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으로 이 날을 기다려 한복은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도포는 지금까지 크게 필요하지 않아 마련하지 못 하였다. 집안의 형님에게 준비 할 동안만 빌리기로 하고 빌렸다. 맏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가장 좋다는 안동포로 한 시아버지의 도포이다. 의관으로 겉을 바르게 함은 마음을 다스리는 기본이다.

 

 도산서원 재유사 망기 

 

3. 향알례香謁禮

 일몰 전에 서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만 듣고서, 이 기회에 도산서원의 이 곳 저 곳을 눈여겨 볼 겸 대구에서 조금 여유 있게 출발하였다. 서원 관리사무소 밖에서 두루마기 위에 도포를입고 유건을 썼다. 약간은 어색 하였지만 얼굴은 상기되어 발에 도포가 밟히지 않도록 옷깃을 살짝 들어 조심조심 걸으며,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聖씨가 상덕사尙德祠를 참배하고 휘호를 남기신 추로지향비鄒魯之鄕碑를 지나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에서 시사단試士壇을 바라보며 주자의 독서유감讀書有感을 읊조린다.

 

   半畝方塘一鑑開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떠있네.

   問渠那得淸如許    무엇일까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爲有源頭活水來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지.

 

 맑은 생각을 버리고 동재인 박약재博約齋로 들어가 별유사別有司께 큰절 올리고 나니, 도포를 입고 의관을 정재한 여러분이 계셨다. 벌써 모두 와 계신 것이다. 해가 지는데 재유사가 입재하지 않고, 도포를 입고 띠를 매지 않고 진도문進道門을 들어왔다고 꾸중하신다. 그러고 보니 도포입고 띠도 매지 않고 소요유逍遙遊했던가보다. 부끄러웠다. 도포를 입고 띠를 매지 아니한 모양이 창피猖披한 것인데 진짜 창피스러웠다. 현재의 서원에는 엄격한 규율과 질서만이 존재할 뿐이다. 새로 만난 분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별유사는 세 분이신데 이원대(李源垈. 眞城人. 居安東), 이육원(李毓源. 眞城人. 居서울), 이재근(李載根. 眞城人. 居安東)이시고, 재유사는 다섯 분이신데 임덕섭(林德燮. 醴泉人. 居醴泉), 이락(李洛. 眞城人. 居豊基), 이원철(李源喆. 眞城人. 居淸源), 이동필(李東弼. 眞城人. 居大田), 김부일(金富鎰. 安東人. 居大邱)이다.

 

 도산서원 재유사; 김부일, 이원철, 이동필, 임덕섭, 이락

 

 별유사를 제외하고는 대개 모두들 유사로서의 재임은 처음이므로 재유사로서의 임무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도포를 갖추어 입고 진도문을 통하여 들어오면 나감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학문을 하여 도로 나아감은 있으나 물러서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문을 통과하면서 깨우치게 함이다.

 전교당典敎堂의 계단을 오를 때는 서원의 일을 맡은 재유사는 동쪽 계단으로 오르거나 내려가야 한다. 전교당은 도산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강당으로 교수와 선비들이 이 곳에서 공자의 법과 도를 밝히고 강학을 하는 곳이다.

전교당에서는 사서 오경을 본원으로 삼고 소학과 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서원의 원규院規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고(父子有親),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정의가 있어야하고(君臣有義), 지아비와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長幼有序)는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非禮勿動)는 사물잠四勿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근면 성실하게 생활함을 가르치는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이 걸려있다.

 향을 피우고 예를 갖추는 향알 시 재유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의 전날 해지기전에 서원에 들어와 박약재에 보관중인 시도록時到錄과 전임안前任案을 기록하고, 선생님과 맑은 정신으로 교감하기 위하여 조용히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고, 곧 분향례 할 마음으로 조용히 앉아 있으면 관리인이 사당문을 열고 배석에 초석草席을 펼치고 전교당에 왕골자리를 펴면 참례자가 남향을 향하여 꿇어앉는다. 관리인이 댓돌에서 ‘분향 아뢰오’하고 아뢰면 읍한 후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사당의 마당에 배석한다.

 사당의 동쪽계단을 올라 기둥 밖을 돌아 중문으로 들어가 재유사 한사람은 향을 받들고 한사람은 향로를 받들며 분향하는 재유사는 자리에서 향을 세 번 올리고 고개를 숙여 엎드렸다가 일어나 받든 향로와 향을 상위에 내리고 배석으로 돌아가서 두 번 절하고 다시 사당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굽혀 존경의 예를 표시하며 받들어 살피고 뒤로 물러난다.

 퇴계 선생의 위패는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 다섯 글자이고, 월천공의 위패는 ‘월천조공月川趙公’ 네 글자이다. 월천 조공은 선생이 아니라 공으로 쓰여 있다. 선생 앞에서 제자로서 선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산서원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삼가 하여야 한다. 오직 퇴도 선생만이 선생이고 선생 전에 선생 없고 선생 후에도 선생 없다‘

 사문斯文의 고풍古風에서 삼관(三館; 成均館, 校書館, 承文館)의 관리만이 선생이라 호칭 하였는데 문주회文酒會에 참여한 자들은 비록 현달한 관직과 귀인이라도 문과에 급제하지 아니하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大人)이라 불렀다.

 향알은 향만을 사르며 선생을 뵙는다는 의미이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일출 전에 상덕사에 배향된 퇴도 이선생과 월천 조공의 위패를 개독開?하여 받들어 모신다. 이것을 봉심奉審이라 한다. 이때 분향만하고 모사에 술을 따르는 예(?酒灌地)는 하지 않는다. 향교와 서원은 선생님의 학덕을 기리는 곳이다. 조상을 받드는 제례에서는 조상의 혼백이 지하에 계실지 모르니까 뢰주관지를 하지만 학덕을 기리는 선생의 향알례에서는 학덕이 지하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뢰주관지를 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묘대제는 왕가의 조상에 대한 제례니까 뢰주관지를 하지만 성균관 향교 서원은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제례이니 뢰주관지를 아니한다.

 초하루 보름의 분향은 제향祭享에서 강신례降神禮의 분향과는 성격이 다르다. ‘아뢴다’ ‘뵙는다’는 뜻을 육신이 없는 혼령이나 선생의 학덕에 나타내는 약식 의절儀節이다. 그러므로 초혼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4. 불천위不遷位 기제사忌祭祀

  섣달 초여드레.

이 날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불천위 기제사 날이다. 불천위는 국가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에 대하여 사후에도 영원히 그 공로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신주 앞에 향화가 끊이지 않고 제사를 받드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조정에서 명하여 이루어지는 국천國遷이 있고 지방의 유림에서 학문이나 학덕이 두드러진 인물에 대하여 공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향천鄕遷이 있다. 불천위 기제사는 종가의 가묘에서 제례를 행한다. 이때 재유사는 제수 장보기와 상덕사에서와 같이 봉향 봉로를 담당한다. 제수를 장만하는 장보기는 기제사에서 중요하여 별유사와 재유사가 직접한다.

 다른 날 보다 일찍이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 신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이란 곳은 언제나 활기차고 삶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상인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먼저 오늘은 퇴계 선생의 불천위 기제사 날인 줄을 아는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퇴계 선생을 숭모하며 공경하는 마음이다.

안동 지방의 제사상 차리기는 소문이 났지만 쇠고기 산적용 꼬지 장만하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고, 규격과 정성이 가지런하다. 학문하는 선비가 벼슬에 높이 오르라고 고등어高等魚를 쓰는 것이 이 지방의 속마음 인 듯 하다. 장보기 하여 준비해 온 제수는 일일이 품목과 수량의 단자를 쓰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여 근봉謹封하고 별유사와 재수사는 제수를 받들어 종택 사랑마루에 단자에 쓰여 진 순서로 진열한 후 종손께 아뢰어 품목과 수량을 낭독하니 종손께서 확인 검수한다.

사랑방에서 백수白壽의 노종손께 인사를 드렸다. 진성이씨 외의 타 문중에서 온 재유사에게는 특별히 안부를 물으시고 참례함에 고마움을 표시 하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총명한 정신에 학처럼 고고하고 맑은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안부를 물으시고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젊은 기력을 보여 주었다. 조용히 말씀하는 모습을 보며 도덕경의 ‘최고의 도는 물과 같다’ 는 말을 떠 올렸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으로 물러나 차종손을 모시며 제사에 참례 하는 제관을 접빈 하였다.

 

    恭惟千載心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

    秋月照寒水    가을 달빛이 차거운 물에 비춤 이로다.

 

남송의 유학자 주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중 한 구절이다. 1500년 후 공자의 도학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 하였다.

‘추월한수정’의 ‘추월한수’는 시의 한 구절이다. 추월한수정은 도학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정자의 대청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리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의 현판이 있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란 뜻이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강학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린 곳으로, 퇴계를 기리는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이다.

 당초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1654~1726이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안타깝게도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서원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회의을 열었다.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어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의 현판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의 제자인 홍낙섭의 글씨이다. 그리고 도학연원방은 종손 이동은 옹의 숙부인 원대圓臺 이원태의 글씨이다. ‘추월한수정’과 ‘퇴계선생구택’은 근세의 설암체로 유명한 이고貳顧 이동흠이 썼다.

 

5. 향사례享祀醴

상고시대 성현들은 모든 것에 삼가는 마음으로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재개하는 마음으로 처음을 시작하고 끝을 마무리하였다. 지금의 초하루는 옛날에는 전부가 길일吉日이었다. 봄과 초하루, 아침은 모두 새로 시작하는 의미이다. 일 년의 제사는 봄과 가을春秋에 한달의 제사는 초하루와 보름朔望에 하루의 제사는 아침과 저녁朝夕에 지낸다.

 도산서원의 봄 향사례는 봄의 가운데인 이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가을 향사례는 가을의 가운데인 팔월의 두 번째 정일丁日에 거행한다. 나라의 제삿날과 겹치거나 뜻밖의 일이 있으면 하순의 정일에 거행하고 하순에 정일이 없으면 해일亥日을 쓴다.

 성균관과 향교의 석존대재나 각 서원의 향사를 왜 정일로 택일하느냐 하는 문제는 일진日辰에 정이 드는 날이 옛날의 공휴일이기 때문이다. 관리들에게 열흘마다 하루의 휴가를 주어 집에 돌아가 목욕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는데 한달에 있는 이 세 번의 휴가를 상완上浣 중완中浣 하완下浣이라한다. 미리 이월 초하루 향사례때에 향사에 참여할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전교당에 자리를 열어 헌관 및 축관, 집례의 망기도 내었다.

 초헌관初獻官은 풍산인 류석호柳錫浩, 아헌관亞獻官 진원인 박용택朴鎔澤, 종헌관終獻官 영일인 정태수鄭泰守, 분헌관分獻官 의성인 김종선金宗善이다. 축은 진성인 이상섭李相燮, 집례執禮는 평산인 신항열申恒烈이다. 재유사는 향로와 향을 받들고 살피는 봉향奉香과 봉로奉爐를 맡았고, 연로하신 헌관을 위치로 안내하는 알자謁者와 찬인贊引, 술 말통과 술잔을 받드는 사존司尊과 봉작奉爵, 존작尊爵 등이 정해져 제사를 집행하는 집사분정례執事分定禮가 끝났다.

  집사분정은 향사의 엄숙함과 정성스러움을 더하기 위하여 면밀하게 각자에 맞게 소임을 나누었다. 헌관 및 축관, 집례를 비롯한 모든 유생들은 이틀 전에 입재하여 진도문을 나가지 아니하고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며 때때로 예의를 지켜야할 규범과 행동을 익힌다. 예절은 절개와 지조를 지켜 스스로를 고상하게 만들고 절의를 존중하여 자기를 상대방보다 낮추어 겸손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여 넓은 바다에 이르는 것이 선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생간례牲看禮는 제물로 쓰일 짐승을 살피는 것이다. 오후에 유사가 진도문 밖에 살아있는 돼지를 맞이하여 진도문으로 들어와 전교당 앞뜰에 옮겨 놓으면 헌관이하 모두 남쪽을 윗자리로 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 보고 차례로 서서 제물에 쓰일 짐승을 맞이하고 유사는 짐승 앞에 이르러 북쪽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충(充;제물로 쓸 수 있도록 살이 쪘습니까?)’하고 아뢰면 헌관이 ‘돌(?;제물로 쓸 만큼 살이 쪘다.)하고 대답한다. 또 유사와 헌관은 서쪽과 동쪽으로 향하고 제물로 쓰일 짐승에 이르러 남쪽과 북쪽에서 세 번 아뢰고 대답한다.

 봉존례奉尊禮는 의례에 쓰일 술의 량을 검사하여 술 항아리를 봉하는 예이다. 원위元位인 퇴도 이선생은 다섯 말이고 종향위從享位인 월천 조공은 세말을 봉하여 전사청典祀廳에 보관한다. 잘 숙성된 술을 항아리에 옮겨 담을 때 “한말이요, 두말이요” 하고 헤아려 정확하게 한다.

 척기례滌器禮는 향사 의례에 쓸 모든 기물을 정성껏 씻어 말린다. 조두俎豆, 희준犧尊,희우犧牛와 희상犧象, 爵, 등의 하나하나 삼가하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물은 미리 받아 조심스럽게 소리나지 않게 깨끗이 씻는다.

 석미례淅米禮는 의례에 쓰일 쌀을 씻는 과정이다. 해가 진 저녁에 유사는 전사청에 보관되어 있는 쌀과 기장을 받들어 빗자루로 길을 깨끗이 쓸며 진도문으로 나가 몽천夢泉에 도착하여 쌀에 손을 닿지 않고 아홉 번을 정성스럽고 깨끗하게 씻은 다음 다시 전사청에 받들어 보관한다. 의례에 쓰여 질 물품이 나오거나 들어갈 때 헌관 이하는 모두 전교당 계단 아래 차례로 서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다. 그 옛날에는 서원 앞 강가에 도착하여 배에 올라 강물 가운데 들어가서 아홉 번 씻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갈라 놓았다고 한다.

 진설례陣設禮는 여러 가지 의례에 의해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마련된 제수를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큰 흐름에 의해 둥근 제기는 동쪽에 모난 제기는 서쪽에 쌀과 기장을 담아 진설하고 잣과 대추는 오른쪽에 부추?菹와 무우菁菹는 왼쪽에 시생豕牲은 앞쪽에 진설한다. 유사는 제수를 진설할 때 진설도陣設圖를 들고 사당에 들어가 그림을 살피며 가지런하게 하여야 한다.

 향사례는 축시丑時 정각(01:00~03:00)에 헌관은 예복을 갖추어 전교당 마루 동쪽에서 서향으로 선다. 다른 모든 직분을 맡은 제관은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읍례하고 집례는 사당 앞에 먼저 들어가 홀기笏記를 큰소리로 읽는다. 홀기를 읽는 소리는 조용한 밤에 더욱 크게 들리고 어슴푸레한 어두움은 엄숙함을 더한다.

 알자가 헌관을 모시고 손을 씻게 하고 계단을 오른다. 헌관은 노령이었지만 질서 정연하게 세 번째 계단을 오르시고는 잠시 숨을 돌리고 의식을 봉행 하였다. 상덕사의 세 번째 계단을 약간 넓게 한 것은 건축학 적인 미와 노령의 헌관을 위한 배려이다.

축관은 ‘선생께서는 공자와 맹자에게 전해 얻으셨고 도학은 정호程顥, 정이? 그리고 주희朱喜에게 이어 받으시어 우리나라에 모아 이룩하여 유학자의 표준이 되시었습니다.’하고 선생의 학덕을 칭송하며 참제원은 엎드려 재배 하였다.

 제공사례祭公事禮는 의례를 마치고 향사례의 섬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축관과 집례 앞에 조사曹司가 앉아 집례가 의례를 시행 할 때 예의에 벗어난 일이 없었는지 자세하게 물으면 묻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하고 예의에 벗어났으면 서로 꾸짖고 한다. 이번의 항사례는 예의에 벗어남이 없으므로 모두 칭찬 하였다.

 행음복례行飮福禮는 전교당에 자리를 마련하여 음식과 복주福酒를 나누어 먹는 의례이다. 술과 음복을 차린 상이 각각의 개인 앞에 잔마다 술을 따르고 초헌관의 잔은 초헌관이 먼저, 아헌관의 잔은 아헌관이 먼저, 종헌관의 잔은 종헌관이 먼저 들고 모든 참례자가 잔을 들고 읍하며 마신다.

음식을 나누기 전에 향약을 읽는讀約 순서가 있다. 헌관이하 축관, 집례 모든 참제원이 전교당에 둘러 앉아서 아침의 맑은 목소리로 읽는다. 이번에는 제일 젊은 본인이 여러 어르신 앞에서 낭독했다. 주자선생이 백록동 서원에서 강학 하면서 배움의 규칙으로 제시 하였던 백록동 서원 학규, 퇴계 선생이 고향 예안의 풍속이 점차 퇴폐 해 질 것을 우려하여 향약을 세워 진흥 하였던 예안향약禮安鄕約, 송나라 여대균呂大均이 고향 남전의 규약을 창제하여 후세에 모든 향약의 모범이 되는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등을 읽는다. 독약을 하는 것은 향촌에 사회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성하여 지역 공동체를 이끌어 가며 정신적 지주가 되기 위한 다짐이다.

   척기례 滌器禮

 

 6. 행공을 마치며

 망기望記를 받고 첫 행공의 감회로 향알례 봉행, 가묘 배알, 정알례 봉행, 향사례 봉행, 불천위 기제사 참례 그리고 종가 어르신과 내방객의 접빈 등으로 이어지는 재유사의 임무를 한번도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받들 수 있는 것은 큰 다행이었다.

 매월 초하루 보름과 몇 번의 참례를 빠지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의 배려와 주위에서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박약재에서 잘 때마다 겨울 외풍은 호흡기가 약한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고 목침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오직 퇴도 이선생과 감응하기 위하여 재개하고 익숙해 질 수 있었다.

 도산에 달뜨는 밤이면 선생님의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 매화시를 읽으며 퇴계 선생과 나의 마음은 같다고 생각했다.

 

    獨寄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갑도다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 끝에 달 떠올라 둥굴고 둥굴도다

    不須更喚微風至     굳이 미풍이 불지 않아도

    自有淸香滿院間     절로 이는 맑은 향기 뜨락에 가득하도다.

 

  오늘날의 우리사회는 모든 것이 편리하고 간소화 되어졌다. 대한민국은 서구의 나라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구미형 합리주의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범위한 황폐를 극복 할 수 없다. 논리보다 정서를 중시하고 선비 정신을 부활시켜서 품격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 품격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한다.

  도산서원 지난 세월 동안 선비를 키워왔다. 오늘도 선비를 키우기 위해 엄격한 질서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예를 간소화 하면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예를 엄격히 하고 전통을 지키니 사람이 넘쳐나고 있다. 예를 간소화 한 일부 서원은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도 못하고 있다. 근원지가 있는 물은 세차게 솟아 끊임없이 흘러 밤낮을 멈추지 않는다. 깊은 곳이 있으면 그 곳을 다 채운 후에 넘쳐 흘러 끝내 사해에 이르게 된다. 학문의 근본이 바로 서 있는 자는 이와 같은 것이다.

  최고의 도학을 면면히 이어 가는 모습으로 계시는 종가의 이동은 옹에게 재유사로서의 소임을 마쳤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니 사랑방의 기둥에는 퇴계 선생의 입춘시가 붙어있다.

 

    黃券中間對聖賢     경전을 펼쳐 놓고 성현을 마주하니,

    虛明一室坐超然     밝고 텅 빈 서재에 초연히 앉았네.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또 보게 되니,

    莫向瑤琴嘆絶絃     아름다운 거문고에 줄 끊어졌다고 한탄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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