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문익환
광주여
빛고을이여
뼈 쑤시는 겨레의 아픔이여
금남로와 충장로여
피 묻은 거리거리여 골목골목이여
1980년 5월이여 겨레의 불꽃이여
불꽃 튀는 겨레의 분노여
죽음으로 죽음으로 죽음으로 아우성치는
겨례의 부활이여
알몸으로 일어서는 겨례의 함성이여
그 함성 속에 번뜩이는 지성의 칼날이여
드디어 밝아오는
민족사 속을 도도히 흐르는
겨례의 뜨거운 마음이여
5월 27일은 민중민주항쟁이 꺾인 날이 아닙니다
피의 항쟁이 온 겨례의 가슴가슴에 번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그날을 회고하며
추모사를 바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었다고 조사를 바치려는 건 더욱 아닙니다
당신은 오늘의 싸움이요 내일의 승리입니다
온겨레의 해방이요 자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당신 앞에 엎드려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건 겸손을 가장한 위선입니다
우리는 이제 외치고 있을 틈도 없습니다
토론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크다거나
네 목소리가 작다거나 하며
목소리 경쟁이나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4반세기에 걸친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마음만 있으면
다같이 목을 내미는 일만 남았습니다
6년전 당신이 그러셨듯이
군사독재의 연장을 꾀하는 모든 음모를 분쇄하면서
양코배기든 쪽발이든
군사독재와 한 퍠거리가 된 것들은
단호히 물리치며
당신 앞에 무릎 꿇리면서
5월의 산천은 해마다 싱싱하게 푸르러 갑니다
그 위로 벽오동꽃 물든 나팔소리
넘실넘실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민주와 통일을 향한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오늘 아침에도 풀포기들은 눈부신 햇살을 받아
이슬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모두 털고 일어나
활짝 열린 새 지평
우리의 시대 민중의 시대
평화와 사랑의 새 세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펄럭이는 당신의 깃발
자유와 평등의 깃발을 앞세우고
쏟아지는 눈물 미소로 훔치면서
그날이 오면
아 마침내 그날이 오면
모든 독재 억압과 착취가 무너지고
모두 모두 사촌보다도 가까운 이웃이 되는
그날이 오면
휴전선 말아올려 담배불 붙여 물고
백두한라의 물을 길어다 막걸리를 담가 마시며
빼 마디마디 마다 눈물로 녹아내리도록
춤을 출 그날이 오면
아 마침내 그날이 오면
평용아
남용아
재영아
태경아
규영아
정식아
희남아
경철아
재평아
재서야
지영아
광수야
금희야
인배야
동운아
숨이 막혀 그대들 이름 다 부를 수 없구나
광주를 떠난 기차가 서울을 지나 원산 함흥을 거쳐
종성 회령에 다달아
이제 다 늙어버린 형님 동생을 만나
얼싸안고 울다 숨이 넘어갈
그날이 오면
아 마침내 그날이 오면
살아남았던 우리들 땅에 묻히고
그대들은 손뼉치며 일어서리라
일어서서 역사의 빛이 되리라
역사의 주인이 되리라
자주하는 겨례의 자랑스런 주인이 되리라
광주여
겨례의 빛고을이여
우리의 아픔 새겨
새록새록 돋아날 꿈이여
밝아오는 새 아침이여
1986.5.18. 늦봄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