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움직이는 동안 중생은 윤회할 수 밖에 없다. 마명보살은 대승기신론에서 마음이 움직이면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윤회를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전후 상하로 움직이는 마음을 정지시켜야 한다. 그럴 때 밖의 세계를 탐색하는 논리적인 사고가 멈추어진다. 이런 논리가 바로 절대 진실을 끝없이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논리는 지식을 만들어 낸다. 이 지식으로써는 결코 지혜의 세계를 가늠할 수 없다.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은 깨달은 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심이다 고 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이 소란스런 마음을 침묵시키기 위해 참선을 한다. 선이라는 말은 하나를 본다는 뜻이다. 하나만 있으면 논리가 필요없다. 하나 이상의 무엇이 나열되어 있을 때 논리적 분별이 나온다. 그러면 실제를 그르치는 차별심이 생기게 된다.
보시함으로 해서 공덕이 쌓인다. 공덕이 쌓여야 계율을 지킬 수 있다. 먹을 것이 비축되지 않은 자는 계율을 지킬 수 없다. 계율을 지키지 못한 자는 인욕할 수 없다. 계율은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인욕하는 자만이 정진한다. 정진은 참고 견뎌야 한다. 정진하는 자 만이 선정에 들어갈 수 있다.
선정이 무엇인가. 선정이 바로 참선이다. 선이라는 말은 범어Dhyana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는선나(禪那)라고 했었는데, 언제부터 나(那)자를 떼 버리고 선이라고만 쓰고 있다. 그러므로 참선이라는 말은 선을 참구한다는 뜻이고 선정이라는 말은 참선을 해서 정정(精定)에 드는 것을 뜻한다.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앞 네 개의 바라밀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참선은 목적상 전혀 이익이 없다.
'보시하지 않는 자는 참선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참선해도 된다.하지만 자기억제로 만족해야 한다.'
참선하는 자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지혜는 참선인 선정과 함께 작동한다. 그러므로 지혜 없는 참선은 있을 수 없고 참선 없는 지혜는 죽은 지식만 양산하게 된다.
사람들은 참선을 하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틀린 말이다. 대승불교를 일으키신 분은 마명보살이다. 그 분이 쓴 대승기신론에서 범부들의 참선은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지 죄업의 몸을 갖고 즉신성불하는 방편이 아니라고 하셨다.
석가모니불 다음의 부처는 미륵부처다. 미륵부처가 오기까지는 56억 7천만 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는 사바세계에서 부처가 결코 나올 수 없다. 나온다면 보살처태경은 위경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선만 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지 2500년이 지났는데도 그 어느 천지에도 부처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장좌불와가 아니라 장립불와한 수많은 초기 고행 수도승이라 하더라도 부처의 이름을 갖고 입적한 사람은 없다.모두 다 소승존자에 이어 대승보살로 이어 오다가 중국에 와서 대사와 조사의 호칭을 갖고 사라져 갔다.
그 기라성 같은 중국의 선장들 가운데서도 어느 한 사람 자기가 부처가 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모두 다 조사의 지위에 올라 가 있었다. 단지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들을 부처로 추앙하다 보니 진짜 부처의 값어치가 고승의 수준으로 도매금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짝퉁을 보고 진품이라고 하면 진품은 너무 억울하다. 전혀 아닌데 겉모양이 조금 비슷하다고 해서 진품이라고 하면 그 진품은 짝퉁 때문에 최고의 희소 가치를 잃게 되고 만다.
부처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고승들을 보고 부처라고 하면 부처의 신분을 위협하게 된다. 그 스님을 치켜 올려준다는 것이 도리어 삼계도사이신 부처님을 메쳐 땅바닥에 곤두박질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혹시 부처가 되었는지 모르잖아요.' '부처는 그렇게 조용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진동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려고 하면 먼저 수기를 받아야 한다.수기 없는 부처는 연각승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떤 스님들은 십신범부들이라 하더라도 참선에 의해 모두 구경각을 얻는다고 한다. 황제의 씨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다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씨 하나만 갖고 나대다가는 모함에 의해 참수당할 수 가 있다. 황제의 자질이 있을 때 황제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부처도 그렇다. 불성만 가졌다고 해서 당신이 부처라니, 또는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자질을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부처로의 회귀가 가능한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불교수행의 목적이 참으로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스님들은 참선을 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된 스님이나 신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라. 그러면 부처가 된다.' '참선을 가르치는 스님은 왜 부처가 되지 못하셨는지요?'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여섯가지 마음을 닦아야 한다. 아무나 참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참선의 효과를 보려면 먼저 이러한 마음을 닦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진전된 참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형식만 갖추고 있을 뿐이다. 대집법문경에 나오는 여섯가지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한 번 살펴보자.
중생들을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우선 가져야 한다.그래야만이 자신에게 짜증내는 마음이 없어진다. 둘째는 안타까운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럴때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참선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서야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셋째는 기쁜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넷째는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탐욕이 나를 동요시키지 못한다. 이 네가지를 우리는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사무량심이라고 부른다.
거기다가 이제 형상에 끌리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그러면 그 형상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마지막에는 결정심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모든 의혹심이 사라진다. 이러한 마음이 기초가 될 때라야만이 선정의 세계에 들어 갈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참선을 하는데 자동적으로 다섯가지 장애가 나타난다고 육바라밀경은 말씀하시고 있다.
탐욕심이 일어난다. 이것은 보시를 하지않고 바로 참선 수행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꾸 성질이 난다. 왠지 모르게 언뜻 언뜻 짜증과 귀찮음이 일어나게 된다. 셋째는 미친 사람처럼 마음을 방종시킨다. 넷째는 잠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다섯번째는 참선에 대한 회의가 계속 일어난다고 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참선의 토대는 공덕을 닦은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공덕을 닦는다는 것은 터전을 고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터전이 굳건하지 못하면 그 어떠한 누각도 그 위에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말은 기신론에도 아주 잘 나온다. 참선을 할 때 심한 번뇌에 시달리는 것은 전생에 지어놓은 공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럴 때는 한사코 버티지말고 얼른 일어나 공덕부터 지으라고 권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