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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 있는 밤
최 상 규
한도는 갇혀 있다. 네모반듯한 양철통 속 같은 공간. 자신의 체온의 반절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벽이 가깝다. 눈을 들자마자 시선을 차단하는 네모난 천장이 판판하게 물샐틈없이 막혀 있다. 두 쪽의 벽에 창문이 나 있다. 하나는 좁고 하나는 넓다. 그리로는 반짝거리는 대추나뭇잎 너머로 색종이 같은 푸른 하늘이 내다보이고, 싱싱하게 너울거리는 오동잎의 푸르름이 넘어들어오기도 한다. 창문은 언제나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으며 창살로 막혀 있지도 않다. 밖으로 나가자면 그보다 더 편리한, 나무만으로 된 외쪽 방문이 있다. 거기 붙은 관건장치는 벌써 오래 전에 망가져 못쓰게 되어 있다. 거기다 그에겐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할 법률적인 의무가 없다.
그런데 그는 갇혀 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일 주일에 여섯 번, 또 하나의 감방엘 다녀온다. 직장. 그는 거기에서 정오를 중심으로 아홉 시간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그동안에 자신의 인생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는 동작과 사고를 꼭 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두 개의 감방을 연결하는 노상(路上)이 그의 세 번째 영어(囹圄)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덮개가 씌어진 기다란 복도 같은 것이다. 그는 꼭 이십분 걸려서 그 길을 걷는다. 왕복 이십삼 분의 도보길. 그 노상에서 그는 혼자다. 발가벗고 싶으리만큼 신체가 자유롭다. 몸이 둥실 떠오를 것 같은 강렬한 하늘의 인력을 느끼며 휘황한 햇빛을 눈부셔한다. 그러나 그는 그 가늘고 긴 복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전엔 많이 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리곤 만신창이가 되어서라도 꼭 돌아와야만 했다. 그 지겨운 일상의 감방 안으로. 그래 그는 두 개의 플라스크를 연결하는 유리관 같은 통로의 안전성과 안정성을 체득하게 되었고, 있지도 않은 투명한 복개를 뚫는다는 만행을 그만두어버렸다. 거기다가,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는 해방의 희망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래, 감방을 모선으로 하는 무중력 공간의 유영(游泳) 같은 그 짓의 허망함을 깨달으면서, 세계는 그나마의 얄팍한 의미도 제시하지 않게 되었고, 물가를 걱정하고 이웃의 불행을 신나게 동정하고 부스럼의 특효약을 정성껏 알려주는 모국어의 다정스러움이 전달력을 발휘하지 않기 시작했고, 윤택하고 맑은 피부 빛깔이나 술병과 유리잔의 반짝임이나 코끝에 생겨나는 땀방울이나 딸각딸각 겨울 소리를 내는 얼음덩어리의 반투명의 빛깔 같은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흉기의 번쩍임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벡터로는 절대로 표시할 수 없는 하나의 긴 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통이나 악몽 같은……·거기엔 절분(切分)이 없다. 매듭이 없다. 하나의 순간을 길게 잡아늘려놓은 것 같은 구조. 하나의 미세한 점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찍은 사진의 일점을 또다시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촬영하고 그것의 일점을 다시 확대하여 사진 찍어놓은 것 같은 구성. 그 이분된 시간에는 일체의 규격이나 진행이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참으로 황막한 세계가 지각(知覺)도 기억도 추리도 효험이 없는 그 세계 속의 수인(囚人)은 아무것도 추적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계산할 수가 없다. 그래 그 속에서는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그 긴 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누적된 과거의 반추나, 어떤 가상의 종말을 향한 끊임없는 연동(轎動) 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러나 한도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육십칠 킬로의 체중은 무엇보다도 뚜렷한 그의 존재증명이고, 딸과 어머니와 아내에 대한 관심은 호적보다도 권위있는 그의 양심의 명함이고, 때로 혼자서 말기하여 남처럼 그를 충고하는 그의 남근은 그의 생물적인 자격면허증이다. 그래 그는 때로 잃어버린 고향같이 막막한 삶의 풍속에 아직도 자신이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식해야 하고, 그 의곡된 향수병의 습격을 받고는 우리에 갇힌 늑대가 되어버린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때 그는 짖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짖기도 한다. 으흐, 으흐, 으흐, 으흐……. 모든 것이 찌들어 말라버리는 슬픔과 아픔에 못 이겨 짜내는 소리. 목구멍 속에 갇히어 찰 튀어나오지도 못하는 그 소리는 여태껏 어느 짐승도 내어보지 못한 독창적인 포효 소리였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직장에서 돌아와 자신의 감방에 들어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에는 한동안 비가 멎고 햇빛까지 났었는데, 저녁때가 되자 또다시 허연 빗방울이 무수한 이빨들처럼 억수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된 지 열흘이 넘었으니 이제 지상엔 더 이상 젖을 것이 없었다. 그래 빗물은 모조리 지면을 흘러내렸다. 그것이 모이고 고여 하수구가 넘치도록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방 안으로 침입하고 있었다. 밖과 통하는 모든 구멍을 꽉 메우다시피 하며.
어린이는 인간의 표현이다. 강아지는 개의 표현이다. 그러나 비는 무엇의 표현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배후의 의지를 의심해할 만큼 고의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권에 가까운 포즈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스로의 중량을 이기지 못해 낙하하는 것뿐이다. 그래 비는 아주 솔직하다. 그런데 그것은 무수한 애환을 지상에 빚어놓는다. 비를 관망하고 있는 수만은 없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짐스럽지만 없는 것은 더욱 한스러운 법. 그의 책상 위에는 그러한 사진이 한 장 펼쳐져 있었다.
UNICEF 제공. 아프리카의 한발로 인한 어린 피해자. 발가벗은 흑인 아이 하나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옆모습이 찍혀 있다. 피골이 상접하게 바싹 말라붙은 몸. 흙투성이가 된 발이 엄청나게 크다. 툭 불거진 무릎 관절로 꺾이어져 예각을 이루는 종아리와 허벅다리는 모두 살이 붙지 않아 분간이 안 되게 가늘다. 궁둥이에는 우묵하게 속이 죽은 장골(腸骨)이 주걱을 재며놓은 것처럼 튀어나와 있다. 거기에서 뻗어 올라간 몸통은 다리에 가리워 등줄기만 보이는데, 튀어난 갈비뼈와 등줄기가 찌그러진 새장처럼 앙상하다. 솟아오른 견갑골의 모서리가 베니어판처럼 얇고 거기서 뻗어내려 땅을 짚고 상체를 받치고 있는 왼팔은 구부러진 막대기 같다. 상피병에 걸린 것은 손등의 피부. 손가락 끝마다 넓적한 손톱이 회다. 두 어깨 사이에 가느다란 목으로 연결되어 있는 머리통은 딴 사람의 것처럼 크다. 툭 튀어나온 울툭불툭한 뒤통수가 단단하게 햇빛을 받고 있고 지면을 향하고 있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눈이 향하고 있음직한 곳에 반쯤 주먹을 편 모양의 오른손이 멎어 있다. 하얀 지면에 손그림자가 손끝과 거의 맞닿아 있다. 아이는 분명히 땅을 긁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형상이다. 아이의 정수리에 돋아난 굽슬굽슬한 한줌의 빈약한 머리카락이 몇 개의 방이쇠울 모양의 실루엣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머리통이 아무래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 사고(思考)는 없다. 사고는 상당한 연령과 영양을 요한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없다. 적도(赤道)직하의 뙤약볕을 견디어내는 아이의 피부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햇빛의 뜨거움을 느끼고 있겠지. 아이가 머리통과 몸 전체로 하고 있는 짓은 뭔가? 알 수 없다. 그건 그 아이 자신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 아이는 지금 사진을 찍히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의 배경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의 동족을 위한 것도 아니다. 관계기사는 구호금품을 호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지구상 한쪽에서 그런 일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어쨌다는 건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나머지 사람들하고? 어둠이 빛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듯, 아무리 가물어도 언젠가는 비가 오게 되어 있다는 이치를 깨닫고 힘을 내서 살아남아달라고 아무리 성원해보았자, 기갈로 말라 있을 저 아이의 복구명에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저것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걸 배경으로 하여, 있는 값을 발휘하는 것은 무언가 하늘의 비정을 능가하겠다는 인간의 온정인가 저것과 상관없이 생존하며 또 그 생존을 계속하게 될 딴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영양소로서의 감수성인가? 굶주리고 있는 자식은 불쌍하다기보다는 미운 법이다. 죽은 아내의 체취를 옷장 속에서 맡아내고 흐느끼는 사내들이 있다. 어린 자식의 시체를 내다 묻고 돌아와서 토방 구석에 나둥그러져 있는, 그 아이의 버려진 신발을 보고는 통곡하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굶어 부황이 난 자식들을 끌어안고 우는 아비는 없다. 그런 때 애들이 울면 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울지 말라고. 만약에 그러지 않았던들 흥부는 눈물의 바닷 속에 익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도는 잡지를 덮었다. 먼 이국의 굶주린 이민족의 자식 하나가 닫혀졌다. 신발. 어린 딸의 운동화 짝. 어미를 따라 가버린 철없는 계집애. 빗신[雨靄〕을 찾다가 신발장 속에서 그걸 발견했다. 약간 낡은 것이었다. 신 속의 천에는 엷은 때가 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걸 보자 불현 듯 딸의 죽음을 느꼈다. 죽음으로밖에는 딸을 잃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지난 후였다. 그 지독한 상실의 감상이 울컥 뜨거운 것이 되어 치솟는 것을 억제하느라고 그는 눈시울을 붉혔었다. 그리고 아직도 얼마나 더 이 치사스러운 설움을 견디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작고 가볍고 때묻은 신발짝을 유리그릇을 깨뜨리는 심정으로 신발장 안에 집어던져버렸다. 장마가 시작된 무렵의 일이었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빗소리에 섞이어 가늘고 약하게 들려왔지만 그의 집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래 별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별로 걸려올 일이 없었고, 걸 일 또한 극히 드물었다. 그래 간혹 오는 전화는 잘못 걸려오는 것일 경우가 더 많았다. 전엔 그를 불러내려는 전화가 흔했다. 술이 란 혼자서는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가진 사내들이 술친구를 원하는 전화들이었다. 그게 점차 뜸해지더니 끊어졌다. 원래 그들은 제 나름대로 궁한 처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사용한 도수료의 몇 배가 되는 기본료와 전화세를 아까워할 주부가 없어 전화기는 그대로 존속했다. 그것은 작은 낭비의 구멍이었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통로이기도 했다. 가구로서가 아니라, 건축물의 일부로서. 일 년에 단 한 번 열리기 위해서라도, 집이라는 것에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문이 있어야 하듯이. 지독히도 꼼꼼히 그의 어머니도 그것만은 지실하고 있었다.
“전화 받아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 그를 향하여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늙은 그녀는 젊어서 과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부의 매력을 조성하기 위해서 과부의 쓸쓸함을 치맛자락처럼 끌고다니는 법을 알지 못했다. 미진함과 억울함이 한동안 그녀의 주름살을 더 늘게 했지만, 그녀는 결국 체념하는데 성공했고, 그 다음부터는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자신의 생애를 인두를 가지고 다림질하듯, 조금씩조금씩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그녀에겐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 사리를 아는 여자치고 누가 시어머니만큼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며 며느리만큼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랴. 그녀는 아내에게 배반당한 아들을 누구보다도 가엾게 생각하는 한편 때묻은 옷을 벗어던지듯 집을 버리고 나간 며느리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특권을 침묵 속에 누리며 자족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른이지만 주재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심각한 책임감에 눌려 살 필요가 없었고, 혹시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과부가 되어서도 남자의 그늘에서 살아나가야 되는 생리와 체계 때문에 그 체계를 거부하고 나간 것이 그의 아내니, 그들 두 여자는 고부간이라는 관계 말고도 충분히 서로 적대적이어도 좋은 사이인 것이다. 충성스러운 노신(老臣)의 그것과 같은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그는 대청마루로 나가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받아본 그는 놀랐다. 뜻밖이었다. 상대방의 목소리와 이름을 듣고 나서도 얼른 무슨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웬일이지?·…· 하도 뜻밖이라서……. 그럼. 만나야지. 거기가 어디지? ·……알아 ……알고말고. 손바닥만한 동넨걸……. 혼자? 웬일인지 궁금하군. 하여튼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걸어가야 하니까 좀 시간이 걸릴 거야. 넉넉 잡고 삼십분쯤……. 그래요, 그럼.”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는 그를 어머니의 시선이 맞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 자식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저의가 나타나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좀 나갔다 와야겠어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누구냐?”
그녀는 모가 나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모르실 사람예요. 서울서 왔군요.”
“이 우중에 서울에서 일부러?”
“저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구요.”
“누구진 모르지만, 숫제 집으로 오랄 걸 그랬지. 집이 이렇게 비어 있는데…….”
“뭐,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만,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찾아오기도 힘들 텐데요.”
“하기야…….”
“만나봐서 묵어가게 된다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올까요?”
“……·아니다. 그럴 것까지야…….”
“염려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어머니. 범용과 정도와 상규(常規)의 표상. 세상에 어떤 어머니가 나이 사십 넘은 자식의 혼을 선동하겠는가. 그는 어머니가 내어주는 양말을 받아 신기 시작했다. 만약에 이 양말을 아내가 빨았더라면 아내가 저 역할을 맡았었겠지, 생각하니 쓴 냄새가 났다. 좀더 심했을 것이었다. 대사는 그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겠지만, 어조는 좀더 은근했을 것이고, 시선은 좀더 천박했을 것이고, 표정은 좀더 근엄했을 것이었다. 그건 욕심이었다. 매점매석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악랄한 착한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남자를 새장 안에 가두어두고 싶어한다. 귀여워서가 아니다. 남자란 가두어두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는 방종한 생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업이란 엄정한 구실 아래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남자를 놓친 상태로 살아야 하는 여자의 슬픔은 대단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사랑을 뻔히 알면서도 짖궂게도 늦게 귀가하는 남자들은 아무리 억울하대도 파렴치하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것이, 오른편 등이 가렵다는데 왼편 등을 긁어주고는 남편을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얼빠진 아내에 대한 보복이라면 좀더 덜 유치한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왼편 뺨을 때려주고 나서 오른편 뺨을 아프겠다고 하며 어루만져주는 따위.
그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때, 나가기를 귀찮아 하는 표시를 슬며시 보여주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지켜야 할 예절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표정 은 조금도 평화로워지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댓돌에 내려서는 그를 보고 말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게 되겠구나.”
“그렇게 되겠죠.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잡수세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신고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때 그녀가 또 말했다.
“다녀오너라. 하지만…… 조심해라.”
“예!”
“아니. 네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어쩐지 그 여자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리더라.”
강하게…… 강(强)하게? 강(剛)하게?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목소리를 어떤 의미로든 걱정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혜를 가진 인간은 한 컵의 물에 최소한 한 숟갈의 설탕을 넣어야만 맛을 보아 설탕물임을 알아낼 수 있지만, 그런 게 없는 파리는 설탕가루 몇 알만 넣어도 금방 설탕물을 알아낼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감각인가? 여자의 본능은 그런 건가? 그렇다면 아무래도 여자는 가련한 동물이다. 그만큼 많은 슬픔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볼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 요란스럽게 우산을 펴들면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될수록 일찍 들어오겠어요.”
그리고 문을 나서며, 마지막 말로 어머니의 입을 봉해버린 자신은 약간 유머러스하게 잔인한 동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검은 우산 밑에 만들어진 빗방울 없는 작은 공간에 머리와 어깨를 처박고 그는 거리로 나섰다. 좌우로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너머로도, 또 그 너머로도, 집들은 비를 맞으며 옴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것들이 비를 맞는 소리가 공간에 가득했다. 소란한 빗소리는 또 빗물이 흐르고 있는 길바닥에서도 자디잔 비말과 함께 튀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 소리는 들려왔다. 순전히 의사전달만을 목표로 하는 가지각색의 간소화된 개인적인 목소리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살고 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비에 젖기를 싫어하는 육체들에게 끈끈한 피부를 입혀가지고 저마다의 빗방울 없는 공간에 갇히어가지고……. 그 구획 된 공간들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문들…… 창문들…… 통로들……. 그 안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살고 있었다. 결국 죽음 앞에서는 무색해질 그 하찮은 비밀들을. 집. 집이라는 게 결국 그런 거다. 제각기 그 속에 들어앉아 죽어갈 준비를 남모르게 하고 있는 장소다. 누구는 십구 번지, 누구는 백십구 번지…… 하며 정해놓고서, 흉악하리만큼 쉬 숨겨가며 산다는 게 고작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죽음의 경사스러운 탄성을 열심히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의 우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강도와 길이가 폐활량과 일치하지도 않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강렬한 단속음. 죄인들이다. 이 풍진세상에 죄없는 아이들을 출생시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할 수가 없는 죽음을 그것들에게 마련해주곤 엄청나고 진절머리나는 미래를 또 장만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이 그저 무사한 출생을 경하하고 있는 묵은 인간들은.
어느 똑똑한 인술(仁術)의 박사는 초인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다. 그는 신생아가 우는 것은 태내에서 항상 듣고 있던 모체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니까 안정감이 깨어져 우는 것이라 추측하고, 임신부의 자궁에 소형의 마이크를 집어넣어 거기로 울려오는 심장의 박동음을 녹음했다. 그걸 삼백 명의 우는 아이에게 들려 주었더니 팔십 퍼센트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임부의 심장음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는 불티나듯이 팔렸다. 아직 그 물결은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갓난아이들의 울음을 그쳐놓고 나서는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출생 후 2주만 들려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애들이 너무 잠만 자서 정상적인 발전을 할 자극을 잃게 되어 낭패라니 그건 결국 그 2주 동안 갓난아이의 소음을 잠재우는 마약 같은 것 아닌가? 이미 다 그 짓들을 하고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새로 생긴 아이의 그 소리만은 듣기 싫어 미안하게 하지 않게 그 입을 틀어막는 비열한 행동을. 누가 뭐래도 아이들은 운다. 울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럼 그걸 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갓난아기가 죽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첫 단계인데……. 그 아이의 죽음을 고의로 만들어낸 건 바로 저희들 아닌가? 그건 결코 부당한 소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야 한다. 찡그리지 말고, 웃지도 말고, 같이 울면서 들어야 한다. 자신들의 죽음은 생각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것처럼 엄중한 금기로 따로 돌려놓을 만큼 두려워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죽음을 만들어 내놓는 모든 우리는 잔학스럽고도 무지한 죄인들이다. 그래, 원죄란 바로 그거다. 죽어야 될 우리가 죽음을 낳는다는 것이 그 죄를 용서할 자는 없다. 따라서 아무도 대속(代贖)해줄 자도 없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걸 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이다. 신생아를 붙들고 통곡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모르는 천치만 빼놓고는 새끼를 감싸고 사냥꾼의 창에 찔리어 죽는 물개의 어미도 그 원죄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현대인은 사고를 기피한다. 반성을 두려워한다. 죄에 관한 것은 기독교인에게 맡겨놓고, 벌에 관한 것은 형무소에 맡겨놓고, 그들은 즐겨 천박한 코머셜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들은 바쁘다. 무엇에 바쁜지는 따질 것 없이 그들은 시간이 모자라 허위적거린다. 걸으면서 껌을 씹고, 술을 마시면서 밥을 먹을 정도로 그들은 시간이 걸리는 투쟁이나 노력을 통한 획득을 싫어한다. 그래 그들은 사랑조차 기피하고 이성(異性)을 까다로워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자도 사랑도 아니고 간단하게 성교다. 그것도 인스턴트로. 그러므로 그들은 여자를 갖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기를 원한다. 그것도 공짜로. 그러한 그들의 식성을 알아차려 그들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확성기와 구호(口號)다. 그래 구호의 숲이 번창하고 합창이 파도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들은 뉘앙스를 원치 않는다. 음미를 싫어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번에 꼴각 삼킬 수 있는 매끄러운 당의정 같은 것이다. 그래 그들을 가르칠 교리는 진리와는 먼 거리의 것이라도 좋으니 단순해야만 한다. 결국 논의(論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광신자(狂信者)의 특성이 그들을 통어할 수 있는 지도원리인 것이다.
곳곳에 TV의 화면이 번쩍 거렸다. 전파사에서는 빗속을 뚫고도 음파를 발사하고 있었다. 여성(女聲)합창이나 중창에서 튀어나오는 무성음, 특히 마찰음을 들으며, 남아 있는 생의 가능성 같은 결 돌연히 느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기묘한 순간에 미래는 반짝 빛을 발하고, 세계가 폐허라는 느낌이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물질적인 쾌적감을 전신에 가득히 채워준다. 그때 ‘지금’ 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화려한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것은 환원불가능한 영원으로 승화한다. 일찍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보다 더 오래 살았고, 지금보다 더 높고 귀한 것을 원했고, 지금보다 더 절실한 절망과 풍요로운 고뇌를 겪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결코 폐허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세계가 의미를 잃어 얄팍하게 말라비틀어져 있고 아무리 그 앞에선 자신이 푸석푸석 무너져 주저앉는 잿더미처럼 쓸모없이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사라진 과거에 비해 좀더 미래에 접근해 있는 것이며 아무리 황량한 바람이 불고 보기 흉한 몰골들이 횡행하고 가슴아픈 매연이 들어찬 거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과거에 비하면 새로이 피어나는 꽃밭인 것이다. 미래가 있는 더욱 처참하게 부셔지면셔도 성애라고 하는 물질적 인 존재의 뜻을 성숙시켜줄, 죽음에 이르는 미래가 있는 화원. 미래 그것은 내일 끝장이 날지, 모레 끝장이 날지, 십 년 뒤가 될지, 이십 년·뒤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 끝장은 지금은 아니다. 그래 그 끝장을 면제받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축복받은 것이고 또 끝장은 반드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귀한 것이다. 죽지 않는 생물은 없다. 그리고 죽은 생물은 이미 생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투영되지 아니한 삶은 무의미한 것이며, 우화(羽化)를 전제로 하지 않는 유충(幼史)의 연동(蠕動)은 정말로 징그럽고 혐오스럽기만 한 시각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을 살되 죽음을 산다. 그래 때로는 궁금하고 답답함에 몸부림치다가, 태양이 바다에 질 때에는 빨갛게 불에 단 쇳덩이를 물 속에 집어 넣었을 때와 같은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확인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떠나는 포시도니우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공간이 넓어졌다. 거리가 넓어졌다. 색깔이 다양해졌다. 가게들이 다양해졌다. 그것들은 구멍이 뚫어진 밀실이 아니었다. 거리를 향해 개방된 아가리들이었다. 함정이었다. 올가미였다. 그 하나하나마다 임자들이 도사리고 앉아 빨려들지 않는 먹이를 증오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의 장사놀이처럼 물건을 사지 않으면 놀이가 성립이 안 된다고 억지를 써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약방이 있었다. 책가게가 있었다. 양품점이 있었다. 다방이 있었다. 그리고 DP & E. 이발소가 있었다. 식당이 있었다. 구둣방이 있었다. 문방구점이 있었다. 페인트 가게가 있고 또 양품점이 있었다. 다방이 있었다. 미장원이 있었다. 또 책방이
있고 페인트가게가 있고 운동구점이 있고 자전거포가 있고, 일용품점이 있고 꽃집이 있고, 은행지점이 있고 지물포가 있고, 오토바이센터가 있고, 양복점이 있고……·그 곁에 또 하나의 양품점이 있는데, 그 유리창 속에 분홍색 다리의 모형이, 거꾸로 땅에 묻힌 시체의 그것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mesh 그물, 눈, 코, 함정, 올가미. 그것은 또 그물 모양의 직물의 규격표시 단위이기도 하다. 80메시 하면 1인치의 길이에 80개의 코가 있는 직물을 말한다. 여자의 스타킹의 메시는 마이크로라는 접두사가 붙는 것에서부터 삼태그물눈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걸 신는 여자들의 성정(性情)의 다양함을 따르지는 못한다.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자의 의류를 좋아하는 성도착(性倒錯)이 있다. 원시신앙에 관한 용어를 빌려 점잖게 페티시즘(呪物崇拜)이라고 부른다. 여자의 양말을 좋아하되 주물로서 그것에 경도하는 게 아니라 그 메시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도착증도 있다지만 그래도 그건 여자를 그냥 사랑하는 것보다는 상당히 단순화된 신앙이다. 여자 옷의 진열장은 여자를 노리는 그물이다. 그러나 공공연히 거기 말려들지는 않지만, 거기 정신을 빼앗기는 사내들도 많다. 눈길을 끄는 옷을 보았을 때 먼저 그 안에 담길 여체를 생각하는 색정광이 얼마나 될까? 이미 있는 자기 여자의 몸에 머릿속으로 그 옷을 입혀보는 자상스러운 남편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런데 그 옷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는 사내들이 또한 있다. 의상도착. 그저 보고 만
져보는 정도에서 몸소 입기까지 하는 정도에까지. 여자가 되고 싶어서도 아니고, 남자이기가 싫어서도 아니고, 순전히 옷이 좋아 미치는 것이다. 늠름하게 수염을 기르고서 서양 중세의 귀부인의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 사내가 있었다지…….
도시는 커다란 그물이지만 소도시는 좀 규모가 작은 그물의 집단이다. 비가 내려도 폭풍우가 들이쳐도 그 그물은 걷어지지 않는다. 그 그물의 도열(堵列)을 무시하고 걷는다. 자꾸만 걷는다. 그러다가 골목길로 들어가는 승용차에 막혀 잠시 멈춰 선다. 눈앞에는 새 건물이 서 있다. 병원이다. 깨끗하게 도장된 벅이 빗물에 젖어 더욱 신선하게 시선을 흡수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물이다. 그 옆의 아이스크림 집이나 그 뒤쪽의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병원은 결코 병자의 낙원이 아니다. 실로암못도 아니고 구빈원도 아니다. 아무리 소독된 백색의 그물이지만 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병자를 노리는 그물이다. 병자를 잡아가는 건 병마가 하는 것이다. 의사는 질병과 공범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특수한 장비와 기술로 질병과 전쟁을 한다. 그결 좋아서 할 리는 없다. 모든 착한 일과 마찬가지로 해야 하니까 하는 거다. 그들은 일종의 선택된 용병(傭兵)이다. 보수는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보수를 지불하는 사람이 돈을 내고 나서 착한 일을 하고 난 사람과는 달리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으니 병원도 그물임을 면할 길이 없다. 그 그물은 거리의 어떤 그물보다도 죽음과 관계 깊은 것이지만, 병자 이상으로 그들은 죽음을 싫어한다. 그래 가장 복받은 의사는 피부과 의사라나. 환자가 죽지도 않고 또 낫게 낫지도 않으니까.
또 길이 막힌다. 네거리다. 차가 지나간다. 요란한 폭음을 빗물과 함께 튀기면서 비닐처럼 번들거리는 차체 위에서 빗방울이 부서지고, 그것이 또 길건너 가게의 불빛을 튀겨낸다. 어느 사이엔가 가게들엔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것이 무수히 낙하하는 빗방울들 때문에 지혜로운 눈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자상하고 섬세한 손끝처럼 떨리고 있었다. 멀리, 가까이, 앞쪽에도, 뒷쪽에도 차가 지나가고 길이 트인 후에도 그는 그냥 멎어선 채로 그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왜 그렇게 재미스럽고 정답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길가에 멈춰서서 비를 맞으며 마치 좋은 꿈을 꾸고 반짝 잠이 깼을 때와 같은 상쾌감과 쾌적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아무런 새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가 갇혀 있는 방문에서 가벼운 노크가 들려온 정도일 뿐이었다.
집에서 나온 지 이십분 만에 그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그 작고 초라한 왜식집에 도착했다. 재빨리 우산을 접으며 열려진 문간에 들어서자 후끈하는 열기와 냄새가 엄습해왔다. 테이블이 여섯 개밖에 안 되는 작은 홀이었다. 그 안에 갇힌 후덥지근한 공기를 몇 개의 소형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며 흔들고 있었다. 세 사람이 그 속에 잠겨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낯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손님이라곤 그들뿐이었다. 맨 안쪽 테이블 하나에 맥주병과 글라스 등이 치워지지 않은 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조리대 뒤에서 낯익은 젊은 조리사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테이블 사이의 좁은 통로로 해서 그리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시네요.”
“음. 오랜만이군. 그런데…… 누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해서 나왔는데…….”
“아, 여자 손님 말씀이죠?”
“그래요, 여자 손님. 여기서 전화를 걸었던데…….”
“네. 여기 이 자리에 앉아 계셨죠. 그러다가 조금 전에…… 아, 저기 들어오시는군요.”
조리사의 시선을 따라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여자가 문 안에 들어와서 우산을 접고 있었다. 숙인 고개 옆으로 흘러내린 머릿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매없는 검정색 블라우스에서 뻗어내린 팔이 희고 길었다. 바지가랑이가 그다지 넓지 않은 베이지색 슬랙스가 유행에 뒤떨어져보이지는 않았다. 우산을 접어 카운터 곁에 세워놓은 그녀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아!
아무의 입에서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별안간 웃었다. 그도 웃었다. 그녀가 잽싸게 테이블 사이로 해서 그에게 다가왔다. 꼭 소녀처럼 발랄한 동작이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조그맣게 젖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 사이를 못 기다리고 어딜 갔었지?”
“잠깐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만……. 오신 지 오래됐어요?”
“아니, 방금. 막 들어와서 이 사람한테 물어보고 있는 중이지.”
“그럼 다행이네요. 교통순경 아저씨가 아주 친절하시더군요. 차를 요 앞에 세워놓았더니, 치우라고 해서요.”
“차를 가지고 왔어?”
“네. 그런데 비가 오니까 그것도 불편하군요.”
“비가 올 때니까 편리한 점이 또 있겠지. 하여튼 우선 좀 앉아야지.”
그들은 맥주병이 서 있는 그녀가 앉았었던 자리에 마주앉았다.
“전화 받고 놀라셨죠?”
그녀는 앉자마자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오며 물었다.
“그럼. 너무도 뜻밖이었으니까.”
“기습예요, 기습. 더 놀라시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녀의 웃는 입은 작게 닫혀 있을 때와는 달리 시원하게 넓었다. 그 사이로 정갈하게 늘어선 치열이 청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고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약간 좁은 듯한 미간을 중심으로 수평으로 갈라진 눈썹 이 여전히 진했고, 경계가 뚜렷한 맑은 이마에는 전혀 주름살이 잡혀있지 않았고, 약간 서글픈 느낌을 주는 눈빛이 전과 다름없이 서늘했고, 평평한 콧날이 인중의 선과 변함없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고……. 그런데 뺨과 눈 언저리가 약간 그늘져 보이는 것은 그녀의 나이를 알고서 보기 때문이었을까…….
가게 아가씨가 글라스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으려는 것을 그가 막으며 말했다.
“아냐. 그건 필요 없고, 나한텐 소주를 갖다줘.”
소녀가 돌아가자 그는 또다시 그녀는 얼굴을 향했다. 그녀의 거의 일분 동안이나 그를 마주 쳐다보다가 눈부신 듯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그가 말했다.
“변하지 않았군, 거의 조금도. 여전히 아가씨야.”
“하지만 아가씨가 아녜요.”
“물론 아니지.”
“그러니 이젠 애들 다루듯 하지 마세요. 명실상부한 어른이니까요.”
“그러지.”
“하지만 어른 대우는 싫어요.”
“까다롭군.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돼서 이렇게 훌쩍 나타났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왔다구.”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옛날 같으면. 하지만 남의 아내가 된 사람이 지금은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진부해요, 그런 얘긴.”
“진부하더라도 할 수 없어. 연유를 좀 말해보자구. 도무지 현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래.”
소주와 안주접시가 왔다. 소녀가 그걸 내려놓는 동안 그는 땅에서 튀겨오르는 빗물에 젖어 다리에 휘감기는 바지가랑이를 끌어올렸다. 그러느라 허리를 구부렸다가, 맞은편에 있는 그녀의 발을 보았다. 역시 젖어 있는 가랑이 끝에서 두 개의 엄지발가락에 각각 딸린 네 개씩의 발가락들이 나와 예쁜 장난감처럼 가지런히 샌들 끝에 올려놓여져 있었다. 꼭 두 개의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하나씩 쥐어 비틀어보고 싶은…….
“제가 따를게요.”
그는 잔을 들어 그녀로부터 술을 받았다. 그녀의 잔엔 거품이 꺼져버린 누런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새로 맥주를 따랐다. 푸그르르 거품이 이는 꼴이 시원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잔을 받아 손바닥으로 감싸쥐며 입을 열었다.
“고적을 보러 왔어요.”
“고적?”
“명승고적이 아닌, 저만의 고적(古跡)을요.”
“나 말인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적. 맹랑한……. 그러나 결코 불쾌하진 않았다. 그는 술잔을 들었다. 냉장고 속에 넣었던 것이라서 감촉이 싸늘했다. 그는 잔을 들어 업에 대고 그 감촉을 홀딱 마셔버렸다.
“고국이라고 말할 걸 잘못했어요.”
“마찬가지지. 그런데 왜 갑자기……. 왜, 잘 안되나?”
“그렇지 않아요. 얘기할게요. 사흘 전에 출발해서 영남지방을 한 바퀴 돌고 왔어요. 함께요. 출장이었죠. 그런데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장마 중이라 별 재미는 없겠지만, 또 그런 대로 다른 맛이 있을 거라며 여러 군데를 다녀야 하니까 아무래도 차를 가지고 가야 편리할 텐데 운전수 노릇 좀 해달라구……밖에서의 내조를 요청하더군요. 충실히 해냈죠. 그리고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천안을 지나서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어요. 기기서 잠시 쉬었죠. 기기서 점심을 먹었어요. 코피도 마시구. 그러는데 뜻밖에도 햇볕이 잠깐 나더군요. 젖은 산천에 갑자기 검은 구름 사이에서 햇밧이 내리바치니까 그건 꼭…… 색깔을 잘못 칠해놓은 폐허 같았어요. 그걸 보고 있자니까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버렸어요. 먼저 차로 돌아왔죠. 아무것도 보지 않기로 하고 있는데 눈이 부셔요. 식당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더군요. 서류가방을 들고. 중요한 것이 들었다면서 차를 잠가놓으면서도 가지고 내렸던 거죠. 순간 저에게 지혜가 생겼어요. 서울까지 가는 데 약간의 불편은 있을 테지만, 다른 지장은 없게 되어 있었어요. 그 가방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냥 차를 몰았죠. 뒤는 돌아보나마나구요. 그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어요, 그리고 방향을 돌려 국도로 해서 도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아까 도착했어요, 경위란 그것뿐예요.”
말을 마친 그녀의 목이 말랐던 것처럼 맥주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입에 물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아주 맛이 없군요, 저도 그거 한 잔 주시겠어요?”
“그러지.”
그는 잔을 비웠다. 그리고 그걸 그녀에게 내말고 술병을 들었다.
“결국 탈주자로군.”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찾지 않을까?”
“어떻게요?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겠죠. 그러다가 화가 났겠죠. 하지만 거기서 언제까지나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만큼 멍텅구리는 아니니까, 무슨 차에라도 편승하여 서울로 올라갔겠죠. 그리고 거기서 기다리겠죠.”
“불행하군, 그 친구.”
“그렇지 않아요. 전 돌아갈 테니까. 좀 기다리기가 속상할 테지만, 그 사람은 하루 동안에 삽 분 정도밖엔 속상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볼일을 많이 타고난 사람예요. 그리고 그 볼일을 다 해치울 소질과 능요. 그러니까 제가 잠깐 도망친 것을 속상해하는 것도 제가 필요한데 없어서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도덕적인 부당성을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야지. 누이로서는 해줄 수 없는 일까지 다 해주었지 않아.”
“자기 맘속처럼 잘도 아는군.”
“왜 몰라요, 그걸?”
그리고 그녀는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잔이 그에게로 왔다.
“소주로 차게 해서 마시니까 시원하네요.”
“술꾼 같은 소럴 하는군.”
그녀는 대답없이 사르르 웃었다. 구리고 하얀 아래윗니 사이로 껍질을 벗긴 땅콩알을 집어넣었다. 그는 그 다음 말을 잇고 싶었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센 머리가 나셨대요.”
“별…….”
“잘 안 되시는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당돌함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자꾸만 마음속이 안으로만 엉켜들어 하얗게 기화(氣化)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반문했다.
“어떻게 알지, 그걸?”
“보여요.”
“맞았어. 잘 안 되고 있어.”
“아주요?”
“음, 그런 편이야. 갔어, 아이하고. 여러 달 됐지.”
“죄송해요.”
“여기 앉아 있는 게 불편하군.”
“그래요. 어디 딴 데로 갔으면 좋겠어요.”
“어디로 갈까. 우리 집에 갔으면 좋을 톈데, 어머니가 계셔.”
“속상하시겠어요, 어머님께서. 보시는 분이 더 안타깝겠죠.”
“그런 게 괴로운 일이야. 참, 아버지께서는 안녕하신가?”
“네. 서종이 내외가 잘 모시니까요.”
“이젠 서희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
“안 도와줘요. 도와주어서도 안 되지만, 저희들이 잘 해나가요.”
“그래야지. 누이로서는 해줄 수 없는 일까지 다 해주었지 않아, 서희가?”
“서종이, 요즘도 어쩌다 저와 단둘이 있게 되면, 선생님 얘기, 해요.”
“그래? 잊지 않았다니 고맙군.”
“그리구 미안해해요. 저 때문이었다구, 그리고 아버지 때문이었다구요.”
“별소릴. 서회가 그때 내게 올 수 있었대도, 지금쯤 또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장담해?”
“그건 그래요.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구요…….”
“그만두지.”
“네, 그만둬요. 고국(故國)으로 족해요, 제겐.”
“그것도 잊어야지.”
“잊어요?”
선풍기가 별안간 쌔앵 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벽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바늘 끝처럼 날카로웠던 맨 끝의 반문을 자신을 향해 발했던 것인지 몰랐다.
그는 그 말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거예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네요.”
“그렇지.”
“약간 임신을 할 수 없듯이, 약간 사랑할 수도 없어요, 저는.”
“그러나 아무렇게도 할 수 없는 때는 못 하는 거야.”
“잊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럴까?”
“그건 누굴 위해서가 아네요. 누가 누굴 위해서 사랑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앞으로도 없구요. 그걸 한다는 건 순전히 저 자신을 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가짜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스스로 속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요.”
그는 그녀의 배후에 달무리 같은 공허를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보았다. 공허에 대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누가, 누굴 위해주고 위해주지 않고는 따질 것 없이, 그 두 가지는 아주 친밀한 두 개의 음부(昔符)이다. 하나가 소리를 내면 또 하나가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그는 공명했다. 그의 내부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생겨났다. 부싯깃에 볼이 붙듯이 그러나 어듬 속에서 발생 한 불빛이 암흑의 공간을 채워주듯이 그것이 그녀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을까? 그는 엄지손가락과 인지를 보비작거렸다. 두 손가락의 뼈끝을 싸고 있는 두터운 육질(肉質)과 피질(皮質)이 서로 늘리고 밀리어 소리없논 마찰을 불안정하게 계속하였다. 목적도 보상도 없는 그 작은 동작이 표피가 각질이 되다시피 굳어버린 풀그릇 같은 그의 마음을 자꾸 건드렸다. 그건 감히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연민을 닯은 일방적 공격의 욕구였다. 그것이 그녀의 내부에 어떤 반응올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또 그녀를 위해주고 싶은 그의 남성으로서의 비속하나 보시적(布施的)인 소망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마음속의 공허를 채워줄 어떤 음향이나 냄새나 열기를 발생시켜준대도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덧없는 환상. 환상에의 도취. 그녀의 공허는 그거라도 필요로 할 만큼 청백하게 가난한 것일까? 그럴 만큼 소박하고 겸허한 것이 되어 있을까?
“나가요, 그만.”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러지. 무얼 먹으면 좋을까?”
“그게 아니구요. 어디 가서 마음 폭 놓고 좀 취해보고 싶어요.”
“그럴 만한 곳이 없어, 이곳엔. 우리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말이야.”
“하긴 그렇겠군요. 원체 작은 도시니까요. 맨 아는 사람들 투성이겠군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고…… 나 혼자서도 가고 싶은 데가 한군데도 없는 곳이야. 그런데 서희하고 둘이서라면 더욱 그렇지.“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었어요. 그렇다면 딴 곳으로 가죠. 차가 있으니까요. 아직 시간도 이르구요.”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그녀는 재우쳐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니.”
“그럼 된 거예요. 바람 한번 쏘이시는 거예요.”
“되지 않았어.”
“늙으셨군요.”
“맞았어.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아마 내가 더할 거야. 아까부터 나는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서희와 공범자가 되는 스릴을 미리 맛보기까지 했었어. 그러나 막상 나선다 생각하면……그 다음의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꼭 잘못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될 것 같은 심정이야. 그런데 나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갇히어야 한단 말이야.”
“저도 돌아가요. 돌아가기는 싫어요. 그래도, 돌아가야만 하고 또 그래야 편해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녜요. 그러나 돌아가야 편하도록 되어버렸다는 건 슬픈 일예요.”
“그럼 왜 왔지.”
“아까는 햇볕이 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해가 진 시각이거든요.”
“달도 없는데?”
“하지만 이건 새로 시작된 시간예요. 차를 가져오겠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러지. 어차피 여기에서는 나가야 하니까.”
“아녜요, 제가 꼭 탈주를 시켜드리겠어요.”
세계는 온통 휙휙한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 위를 어둠이 덮고 있었다. 그 어둠으로부터 비는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지상에는 수없는 빛의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거기에서 각기 광도와 색도를 달리하는 빛들이 뻗쳐나와 빗방울의 공간에서 서로 부딪쳐 흘어지고 있었다. 비에 젖은 무수한 면(面)들이 번들거렸다. 음흉한 괴물의 눈들처럼 깊이를 나타내지 않으며 그것들은 이동과 정지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들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면팔방에 숨어 있는 눈들이 발사하는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 하나 놓치기를 아쉬워하는 굶주림과 악의의 시선들이었다. 아무리 평범을 가장해도 그것들이 점점 밀도를 높여 집중해옴을 그는 의식하고,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흔들어 달라붙은 것들을 털어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다시 조여들었다. 빈틈없는 비닷물처럼 벽과 지붕이라는 갑각(甲殼)에서 벗어나 취약하고 초라한 옷가지만을 결친 채 서 있는 무방비상태의 그를 또다시 주먹만한 심장 속으로 몰아넣어 가두어버릴 기세로. 그러나 그에겐 숨을 곳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오그라붙은 고환 속으로라도 움츠러져 들어가서, 대굴대굴 빗물과 함께 구르며 흘러 하수도 구멍으로라도 들어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불빛과 빗방울과 시선과 번들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 그 고압의 투명한 밀폐탱크 속에서는, 멸형술(滅形術)이 없늠 한 잠적(潛跡)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젠 스스로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 탱크 밖으로. 이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엔 없었다. 그리고 그걸 그녀가 도와주려고 하고 있었다.
‘잘못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될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멀리 날아가 홀연히 유성(流星)처럼 타버리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기만 하다면, 그대로 우주 공간으로까지라도 직진하는 것. 영원한 미아(迷兒). 하지만 그건 이미 그 지상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신(神)보다도 항구적인 인력의 지배하에서도. 그런데 자의로는 고아도 될 수 없고, 미아도 될 수 없는 것은…… 누군가가 그 행복한 참새가 되는 것을 그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광년(光年)은 모르되 죽음은 알면서도 조금도 살기를 서슴지 않는 그들은 밀실에 처박혀 있는 것을 눈감아주기는 할지언정 한 생병이 자유로이 절멸하는 것은 극력 방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장했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인가? 그들 자신도 별로 기대를 걸지 못하고 있는 미래의 도래에 대비키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버러지 한 마리한테라도 버림받는 것이 싫어서인가? 그러나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은 버림받기 싫어하는 그들로부터의 행복한 잠적도 아니고 자유를 행하는 절멸도 아니었다. 그런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그가 그런 걸 원할 리가 있겠는가. 그가 원하는 것은 고작 잠깐 동안의 심호흡이다. 탱크 밖의 저압의 공기로 힘껏 폐를 한번 팽창시켜보는 것이다. 그래 출발하려는 거다. 돌아온다. 돌아온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 숨만 좀 쉬어보고, 전신의 관절이나 한번 작동시켜보고, 바위구멍에다 대고 소리라도 좀 질러보고……. 그리곤 다시 돌아온다. 심새는 수천 킬로 떨어진 무인도를 찾아가 구명을 파고 한 개의 알을 낳은 뒤 별의 위치로 항로를 측정하여 원위치로 돌아온다지 않는가.
그런데 케이슨씨 병이라는 게 있다. 가스 전색(栓塞)에서 오는 잠수마비(潘水痲痺)다. 포유동물이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면 높은 수압으로 인하여 수중의 질소가 몸 안으로 녹아들어온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와 갑자기 그 압력이 제거되면 질소는 가스로 변하여 거품의 형태로 혈액 속에 유리된다. 그러면 이것이 혈액순환을 폐쇄하여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서히 압력을 조절 제거하논 해압실이라는 게 고안되어 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그리고 그에겐 해압실 같은 설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늙었다고 표현한 서희는 옳았을까? 그러나 또 일찍이 지금처럼 진지하게 그가 지금 이후를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지금보다 더 현명하고 지금보다 더 사려깊었던 것이 있었을까? 지금보다 더 미래에 접근하여 자신의 물질적 존재의 성숙에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있었을까? 불올 무서워하는 것은 늙음이다.
금제(禁制) 악에 양순한 것은 늙음이다. 그러나 늙음은 부끄러움이 아닌 것이다.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늙은 지혜가 편리하게 느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돌아가야 편리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 슬픈 서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차를 가져왔다. 진하지 않은 회색빛이라는 것을 거리의 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윤택한 외피가 갑충의 그것처럼 반들반들 빛나는데 그 위로는 끊임없이 차디찬 빗방울이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인간의 분비물과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두 사람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로써는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을 그는 했다. 그리고 인간의 부수물로써는 그것이 지나치게 거창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거꾸로 거기 부속되어버리는 심정으로 차에 올랐다. 철컥 닫히는 문소리가 또 한 번 감금되는 것이라는 선언을 했다. 창유리는 막혀 있었다. 차 실내에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기 냉각기가 가동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길거리에서 사먹던 싸구려 아이스크림 냄새가 별안간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거기에 서희에게서 전해져오는 엷은 냄새가 섞이어들며, 그는 또다시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묻고 있었다.
어떤 쪽으로 갈까요?
먼저 바다를 생각했다. 비오는 바다. 어두운 희색으로 변색된 바다. 아무리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 비구름이 아무리 육박해와도 그 구면을 일구러뜨리지 않는 바다. 우산을 받고 하는 해변의 산책, 칙칙한 창틀에 기대어 내다보는 전망. 그런 것은 없을 것이었다. 새까만 밤의 어두움뿐이리라. 오직 그날의 남은 몇 시간과 다음날의 처음 몇 시간만이 주어진 그들에게 바다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단속하는 파도 소리에 아무리 정성들여 귀를 기울이며 어둠 속을 응시해봐도 바다는 절대로 갈라져주지 않을 것이고, 설사 갈라져준다 헤도 거길 통해 찾아갈 약속된 땅이나 복지는 없었다. 그리고 바다까지의 그 긴 여로는…….
도시로…… 그들을 모르는 생판 남들 속으로. 뭘하지? 그 남들 속에 끼어 우리를 좀 알아달라고 보비작거릴 것인가? 비오는 거리를 헤매며 아이 쇼핑을 하는 시늉을 하나? 저속한 밴드의 울림에 맞추어 덩실거려지지지도 않는 몸으로 춤을 들썩거릴 것인가? 기묘한 불빛 아래서 심각한 음주를 하나? 일부러 타락한 척 정거장 대합실에 앉아 남의 험담이나 하나? 타인은 필요없었다. 없어도 되었다. 아무도 남이 필요하지 않은 일, 또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결국 잠깐 만난, 마음이 맞는 남녀가 한 일이란 그런 종류의 일 아닌가? 결국 밀실 아닌가? 결국, 안올 넘보려는 자에겐 밀실로 보이는 감방에 들어가서 죽음을 사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지 않은가?
아스팔트 포장은 되어 있었지만, 노면은 완곡한 굴곡으로 연속되어 운전을 하고 있는 그녀도 한가롭지 않았다. 더구나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이 버스 아니면 트럭 이어서 저속으로 달려도 전혀 마음 놓을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러나 두어 군데 갈랫길을 지나고 낮은 고개를 하나 넘고 나자, 그것은 뜸해졌다. 그래 그들은 별로 방해를 받지 않고 헤드라이트가 비춰내는 빛의 동굴을 쫓아 빗소리를 헤치며 달려나갔다. 창 유리가 꼳 닫히어 밀폐되다시피 한 차 안은 시원했다. 그리고 차에 부딪치는 미세한 빗방울 소리와 엔진의 부드러운 진동음이 약하게 전해올 뿐 조용하기까지 했다. 그는 가끔 그녀는 돌아보았다. 마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보아보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똑바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피곤한 기색을 예상했지만, 흐린 조명을 뒤로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전혀 그런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길 모퉁이 저편에서 강력한 빛살이 뻗치며, 길 바깥쪽 들판 위의 공간에서 빗방울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차가 속도를 늦추자 두 개의 휘황한 불빛이 나타나 그들을 쏘아보며 돌진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한쪽으로 비켜서는 옆으로 그들의 차까지 혼들리도록 땅을 울리며 육중한 콘테이너가 지나갔다.
사나운 운전이었˙다. 긴장했던 얼굴을 풀며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기어를 바꿔넣는 손움직임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피곤하지? 먼길을 왔는데, 또…….”
“괜찮아요, 아직.”
그러나 · 그녀는 잠깐 후 대답했다.
“대신, 해주실래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면허증이 없는걸.”
“그렇게 단속이 심한가요?”
그는 또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아니. 그건 핑계야. 사실은 자신이 없어. 오래 안 해본 데다, 노면이 이렇게 젖어 있으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씹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것도 핑계야. 그것보다도 오늘은 맡기고 싶어, 송두리째.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서희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야. 잠시 자신의 주인이기를 그만두고 싶은 때가 있는 걸 알고 있었지. 서희도 겪었겠지만……. 지금이 나는, 그런 때야. 서희도 그런가?”
“아직은, 약간요. 대신…….”
“음. 대신……?”
“담배를 피우고 싶어요.”
그는 자신도 한참이나 담배 피우는 것을 잊고 있었음을 생각해 냈다. 그는 담배를 한 개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걸 그녀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녀는 그걸 두 번 빨았다. 그리고 그 연기를 지그시 가두어두었다가 호르르 토해내며 도로 담배를 그에게 내밀었다.
“됐어요.”
“많이 피우나?”
그가 그걸 받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아뇨.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구요. 마음에 안 들었죠?”
“그렇지도 않아.”
“그럼 한 번만 더요I
그가 또 담배를 내밀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두 번을 빨고는 담배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길고 엷게 뿜어내던 연기의 끝을 흔들며 그녀는 말했다.
“이제 조용해졌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카스테레오의 버튼을 눌렀다. 툭 튀어나오는 음향이 차내를 채웠다. 그는 깜짝 놀랐다. 시벨리우스였다. 일순에 시간은 거꾸로 치달려 그녀와의 과거의 한토막이 생생히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불의의 매체의 작용으로 되살아나는 과거는 그 하나하나의 토막마다 독특한 냄새를 지닌다. 어떤 음향이 매체가 되었을 때는 더욱이. 그는 그 돌발적인 사태에 잠깐 당황했다. 그러나 음악은 그것에 상관없이 정해진 진행을 흔들림없이 이어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의 회상은 끊어졌다. 그리고 음악은 생전 처음 듣는 음향처럼 서먹서먹하여 그 속으로 말려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꾸 그를 놀라게 하고 있는 그녀의 처사를 신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이든이 있어요. 바흐도 있어요. 그러나 이 기계로는 오르간 소리가 너무 가냘퍼서 못 듣겠어요. 비발디는 괜찮아요. 라 트라바간차가 있어요. 그저 채우는 거예요. 귀에 익은 음향으로 이 공간올 채우는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이렇게 따로 앉아 있는 건 지루해요. 부어든지 들어야 해요. 시간을 짓이겨야 해요. 한순간이라도 멍청하게 보낸다는 건 절대로 부당한 일이에요. 무얼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시간과 시간이 맥없이 이어져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예요. 그걸 길게 잡아늘리며 맥없이 따라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예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둘 중에 매달려야만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거였어요, 알고 보니까. 그래 거기 발을 디디고 있는 거예요, 항상. 고국에의 기억예요. 그래 이런 것까지 가지고 다녀야만 되었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
“하지만 이건 제가 일부러 계획해서 한 것은 아네요. 또 그렇다고 해서 제가 현재의 문제에 부실한 것도 아니구요. 아마 그러한 발판이 없었던들, 저는 아마 오히려 흔들려 거꾸러졌던가, 아니면…….”
“왜 갑자기 말이 많아지지? 그만해둬.”
“철없는 회향벽(懷鄕癖)이 아녜요. 옛날에 같이 듣던 음악 몇 곡을 듣는다고 무슨 일이 잘 되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전 그러지 않기를 스스로 택할 힘을 잃었어요. 삼십이 넘도록 자신을 돌볼 틈도 없이 거기 매달렸던 동안은 저는 저 자신의 주인이었어요. 그러나 일단 거기에서 벗어나자, 그 후로는 맨 후회하는 일 투성이에요. 그 사람과 결혼한 것도 그런 상태에서였죠. 저는 스스로 택하질 못했어요. 거꾸로 당했어요. 그러나 그건 좋아요. 전 거기에 따라 제 생애를 꾸려가면 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저를 잡아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무너져내리는 저의 구세주가 되어주든가, 아니면 저에게 노예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폭군이 되어주든가……. 그런데 그 사람은 저에게 자꾸만 선택을 시키는 거예요. 그리곤 가장 모범적이며 선진적인 남자라고 스스로 뽐내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저는 어떤 발판을 굳게 디디고 있는 거예요. 옛날의 발판을 지금도 여전히 디디고 있는 거예요. 어이없게도 말예요.”
“그만. 그만해두라구.”
“비 때문일까요? 아네요. 늘 그래왔어요. 그걸 누르고 있던 건 전부가 허사였어요. 후회와 자책으로 뒤범벅이 된 형편없는 얼굴을 덮어씌우고 있는 가면의 껍데기였어요. 하지만 전 그 가면을 벗어던지지는 않아요. 그 지저분한 얼굴이 그런 대로 굳어지기까지는요. 그리고 지금은…… 그걸 조금 들어올려 바람을 통해보는 것뿐예요. 이것만은 제 선택예요. 그러나 다시 쓸 거예요. 더 단단히 쓸 거예요. 내일이면 전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될 거예요. 그런데 지금만은…….”
“조심해! 차가 오고 있어.”
그녀는 급히 길가로 차를 비켰다. 그리고 차를 정지시켜버렸다. 빈 택시 한 대가 빨간 공간을 싣고 공허한 진동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러고 나자 새까만 암흑이 왔다. 어느 틈엔가 라이트가 꺼져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득하게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고적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그 솔직함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궁금해 하는데 왼편 뺨으로 서서히 그녀의 입김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들어 어둠 속을 더듬어 그녀의 얼굴을 찾았다. 그의 손끝에 그녀의 뺨이 닿자, 와락 그의 목에 싸늘한 팔이 휘감겨왔다. 그는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받아 안았다.
긴 도정이었다. 그것은 멋없이 지루하게 늘어놓아져 구불구불하고 긴 선이었다. 그들이 지나온 궤적은 하나의 기다란 관(管)과 같은 차체에 꼭 맞는 터널이었다. 빗속으로 뚫려진 짙은 어둠과 척척함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밤 속으로 뚫려진. 그래 한가한 유영이나 시원한 소요 같은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그것은 억압적이며 강제적인 지루함을 떼칠 수 없는 도정이었고, 그들의 체력이나 체중에 비해 엄청나게 무겁고 큰 차체까지 끌고가야 하는 길이었므로 굴욕적인 긴장과 배려를 강요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했다. 사십오분간이란 일순의 과거를 수십 시간처럼 잡아늘려 짓이겨가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끝에 하나의 미소한 종점에 무사히 도달했다.
국립공원. 절경과 고찰(古刹)이 있는 명산. 그리고 그것들은 비와 어둠의 배경 속에 깊이 묻히어 있었고, 또 그날의 그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다만 몇 시간이라도 세계를 잠가버릴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주차장은 포장이 된 광장이었다. 빗물이 괴어 흐르는 뒤로 또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고, 두 개의 수은등이 그 모양을 적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한 구석에 버스가 두 대 있었고, 승용차도 몇 대 세워져 있었다. 그 안쪽의 이층 건물은 마치 새벽의 기골 역사(驛舍)처럼 할 일 없는 불빛을 분주히 튀겨내고 있었다. 그 옆쪽으로 난 높은 계단 윗편으로 수십 채의 집들이 저마다의 업종을 표시하는 간판등을 높직높직이 치켜들고 산허리를 타고 늘어서 있었다. 눈곱만큼도 친밀감이 가지 않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것들은 시정의 것들과는 또 다르게 위장된 그물들이었다. 아무도 내다보지 않고 있었다. 드리워놓은 채, 비 내리는 밤을 버려두고 있었다. 이제 그들 둘은 스스로 그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곳에만 있을 수 있는 그들의 것을 구하여.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습한 공기와 빗방울이 와르르 부딪쳐왔다. 차 안에서 식었던 피부에는 금방 후줄근하게 끈끈함이 달라붙었다. 차라리 빗방울이 피부에 닿았다. 그녀는 차를 잠그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우산을 들고 따라갔다. 트렁크를 열었다. 몇 개의 백이 었었다. 그녀가 그 중의 하나를 꺼내들고 트렁크를 다시 잠갔다. 그가 백을 받아들고 그녀가 우산을 들었다. 그는 빈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안았다. 그리고 우산 아래의 비 없는 공간에 두 머리를 모아넣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아무 의논도 하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가 이빨이 아프면 나머지 한 사람도 따라 아파질 만큼, 그들은 그때 서로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밤은 가로등을 위해 있거나 한 것처럼 그것은 높고 밝았다. 그리고 그것은 밤이 아니라 비를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 차가 다니지 않는 포장도로를 건넜다. 그리고 또 그들은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새집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한 여자가 졸리운 얼굴을 하얗게 펴며 그들을 맞이했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 또 몇 사람 TV앞에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들의 안중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겉은 한식집 같았는데 내부구조는 서양식이었다. 바닥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창문엔 냉방기도 달려 있었다.
최고로 좋은 방예요. 욕실의 더운 물은 지금 나오지 않지만 원하시면 넣어드리겠어요. 비가 오니까 선충기만으로도 되겠지만 원하시면 에어콘을 돌려드리겠어요. 아래서 스위치를 넣어드려요. 부득이 이건 요금을 내셔야 하니까요. 그리고 뭐 불편하시거나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전화로요. 단 열두시 이후에는 곤란해요. 저회도 모두 밤을 새울 수는 없으니까요. 실료는 지금 주셔도 좋고, 내일 아침에 주셔드 좋구요……. 식사 준비는 지금은 어렵겠어요. 모두 새로 준비를 해야 되니까요. ……차를 가지고 오셨군요. 열쇠를 주시면 안전한 저희 집 차고에 갖다 넣어드릴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요. 그게 저희 집의 자랑이지요…….
그 자상하고 분별없는 여자는 문을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방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고 나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들은 덩두런히 서서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의 손잡이에서 잘깍 하는 소리가 나자 그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향했다. 각자의 눈이 분명하게 뜨여져 있었다. 그리고 게으름처럼 얼굴 위를 흐르고 있는 피로의 빛은 내심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그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려 했다. 그는 얼른 한 손을 들어 인지 끝으로 그 입을 막았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이끌고 갔다. 그녀는 손톱끝만큼의 저항도 없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 둘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가 한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추쳤으나 그는 얼른 눈을 감고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두 사람의 체중을 받은 쿠션이 멎 번 부드럽게 흔들리다가 멎었다. 그들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희미했다.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기이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들은 반듯이 천장을 향하고 침대 위에 가로누워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말이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입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돌연히 그를 배반하고 사고(思考)를 은폐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때 말이란 습관과 같아서, 순수한 것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진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산처럼 분출해버리고 싶은 뜨거운 용액 같은 것이었다. 그걸 두개골로 누르고 있기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일초 일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체중이 부쩍부쩍 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또 그의 내부를 압박해왔다. 그때 다행히도 그녀가 침묵을 깨주었다.
“목욕을 해야겠어요.‘
“그러지.”
그는 목소리가 잠기어 목쉰 소리를 냈다.
“먼저 하겠어요?”
“아니 먼저 해.”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오른팔 위의 무게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시야 안으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지그시 그에게 밀려내려왔다.
“왜요? 왜 그러세요?”
“뭘?”
“그렇게 피곤하세요?”
“아니야. 피곤해서가 아니고…… 어서 목욕이나 해.”
“그 동안 뭘 하시겠어요?”
“글세…… 음. 난 잠깐 나갔다와야 되겠군.”
“왜요? 어딜요?”
“어머니께 연락을 해드려야겠어. 조금 더 올라가면 간이 우체국이 있는 걸 알고 있어.”
“여기서 거시면 되잖아요?”
“여기서는 서희가 걸어야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건 아주 작은 생존의 절차야. 최소한 돌아간다는 것만이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여?”
“그건 그래요.‘
“그럼 나갔다 올게.”
“네.”
“그럼 안녕. 잠시 동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도 일으켜세웠다. 그녀의 입술은 낮은 곳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고여들었다. 그는 창백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하여 눈을 감으며 그녀의 작은 입술에 작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언젠가 그녀의 남편을 꿈에 본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실제로는 만난 적도 없었고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서희의 남편이라고.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눈곱만큼도 적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는 무슨 숙적이나 천적을 만난 것처럼 이를 갈면서 그 말을 들었다. 서희의 남편은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도 갈색 이었고 양복조차도 갈색이었다. 꼭 사진에서 본 셀레베스심의 니켈 광(鑛)의 색깔이었다. 이건 틀림없이 도깨비의 색깔이구나 하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데, 언제 한번 만납시다 하고 청해왔다. 언제? 어디서? 그건 어느 시골의 닷새만에 서는 장날이었다. 그게 최후 시장이라 했다. 동시에 그게 세상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벌써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산의 일각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돌연한 기상의 이변으로 괴이한 구름이 급작히 발생하여 맹렬한 속도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그 무서운 산사태에 휩쓸리어 시장 안의 모든 사람은 전멸하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꾼들은 천연덕스럽게 짐을 싸고 있었다. 도저히 그 붕괴를 면하여 다음 장터로 출발할 수가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리고 사나이는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고풍의 책갈피를 폈다. 영문으로 된 금언집 스˙타일의, 활자가 엉성한 책이었다. 사나이는 그 왼편 페이지의 맨 위 두 줄에다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심이 굵은 4B 연필로. 그건 후일의 참고를 위한 행위였다. 이제 죽음이 눈앞에 닥쳐 세월이란 것이 없어져버린 시장 한복판에서 하는 짓이 그것이었다. 밑줄치는 금줄의 활자는 아물거려 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금언의 주인공인 모랄리스트의 이름도 찍혀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나이는 눈치빠르게도 그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폴스타프죠, 폴스타프. 갈릴레오보다도 비겁하고 링컨보다도 위대한 폴스타프죠. 그는 모멸의 웃음을 웃었었다. 그게 어떤 놈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에겐 후일이 없단 말이다. 너도, 나도, 우리의 후손도, 그따윗 걸 참고 할 후일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네가 하는 짓은 또 만나자고? 언제? 어디서? 왜?…….
기념품이나 선물용 토산품을 파는 길가의 가게들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비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끔 한쪽 구석문만 열어놓고 있는 가게의 불빛이 길바닥에까지 비쳐나오고 있는 것이 더욱 쓸쓸해보였다. 그러나 몇 개의 음식점은 환하게 불을 켜놓고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인 듯한 사내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는 문득 갈증을 느꼈다. 물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독한 것을 마시고 싶은 갈증을. 거기다 우체국에 들어가 전화를 신청해놓고 기다려야 할 시간이 그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두어 군데 교환대의 중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이십 분쯤은 결릴 것이었다. 그는 저만큼 가로등 뒷쪽에 물러앉아 한쪽 구석만 볼을 켜놓고 있는 우체국 건물을 놓아둔 채 전화가 있어 보이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본 대로 흘 안은 비어 있었다. 카운터 비슷한 책상 위에는 전화가 있었고 그 곁탁자 앞에는 핫팬츠차림의 아주 젊은 아가씨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열려진 문 안으로 그가 들어서자 소녀는 가볍게 일어서며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바람이 통할 듯싶은 자리를 찾아 앉아 소주를 달랬다. 안주는 도토리묵이 좋다고 했다. 어디선가 라흐마니노프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소녀는 훤히 홀로 통해져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 제 손으로 안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금방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장거리 전화를 걸어도 좋으냐고 하니까 좋다고 했다. 전화를 신청했다. 지급으로 부탁했다. 소녀가 앉아 탁자 위에는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커다란 배터리에 결박당해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은 거기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변비한 곳에서 저련 소녀가……? 그는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라디오의 볼룸올 약간 높여놓았다. 악기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듣고 있었을까? 즐기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러지 않았대도 그걸 그냥 틀어놓고만 있었대도 장한 일이었다. 그래 그녀가 술과 안주률 가지고 왔을 때 그는 말했다.
“아가씨도 꽤 음악을 좋아하나보지?”
“뭐를 좋아해요? ”
술병의 마개를 따며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문했다.
“저 음악 말이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 저거요? 저게 무슨 음악인데요? 전, 조금 있다가 거기서 연속극이 나올 시간이기에 그냥 켜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소녀는 솔직했고 그는 무색해져버렸다. 그는 내심을 숨기기 위하여 얼굴을 굳히며 좀 큰 잔을 갖다달랬다. 어느 사이엔가 음악은 중단되고 CM 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글라스를 갖다놓곤 재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 만면에 기대의 표정을 떠올리며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홉 들이 잔을 반 이상 채워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소녀의 손이 닿았던 도토리묵은 내버려두고 김치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었다. 잠깐 잊고 있었던 시간이 강철판처럼 딴딴하게 눈앞에 부딪쳐왔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환영을 흩버리러는 것처럼. 그러나 환영 같은 것은 애당초에 있질 않았고, 따라서 눈앞에서 걷히어지는 것도 없었다.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길바닥에는 척척
하게 젖은 광선이 흥건히 괴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새까만 산의 허상이 거꾸로 서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들은 여전히 솔직한 수직의 낙하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 배후의 거대한 산올 넘고 또 산을 넘고…… 어머니는 멀었다. 영원히 복귀할 수 없는 어머니의 뱃속은 기억에조차 없었다. 소리쳐 부르기만 하면 어떠한 위험이나 공포로부터도 안전하게 감싸 안아주던 망각의 낙원은 젖은 유적만 앙상히 매달린 흉곽이 되어버려져 있었다. 눈만 감으면 언제나 멀리서 빛나던 한 고요하고 작은 바위는 먼저 죽은 사람과 먼저 죽지 않은 사람을 다같이 원망하고 시샘하는 죽음의 장난감이 되어있었다. 무어라고 말을 할까. 전화가 통하면 거기를 향하여 무슨 말을 골라서 이야기를 할까…….
식물이면서 식물이 아니려는 어머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남을 시샘하는 어머니. 인간이란 이 세상에 잠깐 삽입되었다가 누구의 손엔가 거두어지는 존재임을 믿으려는 어머니. 어머니를 알 만큼 늙어가지고도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줄 수 없는 아들은 죽음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러나 남자라는 세습적 지위만을 어떤 경우에라도 솔선해서 인정함으로써 어머니로서의 권익을 지키려는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는 또 자식 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무조건 부당한 일이다. 괴로워하는 아들의 어머니 노릇을 하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다. 일찍이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 그분에게도 어머니가 있었고, 또 그 위에도 어머니가 있었고·……, 그러고 보면 세상은 별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상한 일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꾸준히 죽음을 낳아놓으며 살아남으려 애쓰는 것과 함께……. 그러나 자식이 어머니를 죽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어머니는……. 전화벨이 울렸다. 소녀가 받았다. 소녀가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얼른 달려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닌 “여보세요” 였지만, 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저, 한돕니다.……네. 궁금하실까봐서 전화 걸었습니다. 좀 먼 데 와 있어요…… 부득이해서요. 나중에…… 네. 그런데 오늘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네. 내일 아침 출근시간 전에 돌아가겠어요. ……염려마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아주 쉬운 말을 한 것도 같았고, 아주 어려운 말을 한 것도 같았다. 전화를 끊었다. 소녀의 똥그란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얼마지?”
해변에서 깨어진 파도가 쏴아 물러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별것이 아니었다. 다음 파도는 또 밀려온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결국, 별일이 아니다. 바다란 원래 그런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건 엄격히 말해서 진행이 아니다. 방향도 목표도 없기 때문에. 그 중의 한 작은 주기(週期)가 끝난 것뿐이다. 그것도 그들 모자간이라는 협소하기 이를데 없는 관계 안에서의. 결국 그들 모자간의 그 통화는,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사업은 그런 것을 끊임 없이 무수히, 요구해온 것이다.
다시 서희가 있는 방문 앞에 돌아와서야 그는 생기를 되찾았다. 잠깐만 놓아두면 모발처럼 멋대로 자라나는 내부의 곰팡이를 그래서야 잊을 수 있었다. 그걸 잊지 않고는 지금껏 애써서 그들이 마련한 그들만의 밤은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밤을 좀더 홀가분하게 지내기 위해 그는 손톱을 깎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밤에 좀더 열중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소주 한 병으로 갈증을 달래기까지 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아무리 아끼려 해도 아껴지지 않는 생애의 아주 작은 한순간을 꼭 떼내어 최대한으로 길게 지속시켜보는 자의의 정성스러운 작업. 잊지 않아도 좋을 과거를 제작하며 한순간이라도 죽음을 디디고 있어보려는 처절한 노력. 현재란 순간이 환원불가능한 영원임을 인식하고 난 후의 불행하고 고난한 행위. 행복이란 원래가 오해인 것이다. 꼭 우리가 지금 행복해야만 한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방의 문짝은 번호가 표시된 하얀 플라스틱 패가 달린 평범한 것이었다. 손잡이는 쉽게 돌아가고 방문이 열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배신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기를. 그가 돌아오기를.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복귀의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복귀의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의식이 그를 감격케 했다. 그는 가슴 한가운데가 지르르 저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또 그의 두개골 전체가 찬란한 발광체로 변하는 쓰라림을 느꼈다. 그는 큼직한 종이꾸러미를 안고 몸을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는 천천히 몸의 방향을 바꾸어 방문의 안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처음에는 천천히 그걸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꽝 소리가 나게 그걸 밀어닫았다. 그리고 잠깐 여유를 두었다가 자물쇠를 꽉 눌러 잠갔다.
그는 엄청난 행사를 하나 치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일부러 그녀의 얼굴은 정시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탁자 위에 유리병 소리가 나는 종이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난 후,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만을 보게 될 새로운 시력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걸리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건너왔다.
“그런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는 가슴속에 끊어오르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일부러 무의미한 말로 시간을 끌었다.
“그러시길 잘하셨어요.”
“왜? 목욕이 오래 걸렸던가?”
“목욕은 아직 안 했어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하지.”
그는 눈을 감고 있는 채로 말을 이었다.
“봤지, 지금? 문이 닫혔어. 잠가버렸어. 안에서 밖을 잠근 거야. 세계를 이 방 밖에 가둬버린 거야. 그 순간부터는 우리는 자유야. 이 방 안, 세계의 바깥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호장한 선언올 듣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정적이 시작되었다. 그래, 그는 또 한 번 강철판처럼 딴딴한 시간의 벽을 느꼈다. 그는 꿈틀 몸을 움직여 눈을 떴다 그녀는 있었다. 똑바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굳어 있었다.
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세우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갑자기 진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목인형(木人形)의 슬픔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래 그는 성급히 물었다.
“왜? 왜 그런 얼굴로 있는 거지 ?”
작은 입술이 떨리는 것처럼 주저하다가 열렸다.
“소용없어요.”
“소용없다니? 무엇이?”
“문올 잠그신 거요. 세계를 가두신 거요,”
“그게 소용없다니?”
“잠가지질 않으니까요. 가두는 건 세계의 편이지 우리는 아니니까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지?”
불길한 예감이 매캐하게 머릿속을 물들였다. 그는 성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갔다. 그 곁에 앉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릎이 닿았다. 그러나 얼굴은 멀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두 눈 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잠시 그의 눈올 마주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눕혔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대고 소근거렸다.
“좀전에 사람이 왔었어요. 경찰에서요. 그래 늦게 오시길 잘하셨다고 한 거예요.”
“경찰관이? 무슨 일로?”
그는 머릿속의 피가 일시에 증발되는 것 같은 경악을 느끼면서 물었다.
“차에 대해 묻더군요. 확인을 한다구요. 차종과 번호도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차를 보고서 찾아 들어온 거예요.”
“아니, 왜? 차가 어쨌기에?”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았대요. 그 차를 찾아내어 잡아두라고요. 그 사람의. 짓예요. 그 사람의 보복예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 구석까지……?”
“그게 놀라워요, 하지만 그 사람은 발도 넓고 수단도 비상하니까요. 그럴 만도 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저열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그 경찰은 어떻게 하고 갔지?”
“전후 사정을 다 짐작하는 눈치였여요. 그러니까 절 자동차 도둑 취급을 안 했죠. 그러나 말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면서, 일단 차의 열쇠와 면허증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더군요. 그 차가 제 소유가 아닌데, 그 차의 소유자가 차를 찾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합법적인 처사라고 하면서요. 그리고 나중 일은 잘 모르지만 자기가 돌아가서 보고를 하면 곧 차주와 연락이 되어, 그 다음 절차에 대해서는 또 지시가 있을 것이니, 자기가 다시 연락을 해주겠노라고요. 그리고 저보고는 그냥 여기서 쉬면서 좀 기다려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 달라는 걸 내주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그걸 받아가지고 돌아갔어요. 그 이상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입을 다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국화잎 같은 얼룩진 무늬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천장과 그의 눈 사이의 공간을 투영한 작은 기포가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오른편 윗쪽을 향하여 비초듬한 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여가던 그것들은, 잠깐 멈추는 듯했다간 다시 급속한 이동을 시작하고, 멈칫 했다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땅바닥에 엎드러져 코를 부딧쳤올 때와 같은, 노랗고 매운 감각이 그 허공의 기포와 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이동과 정지의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 예요. 그러나 사실 예요. 이제와서 그 사람을 욕하거나 원망하거나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사람에게서 무슨 이해나 너그러움 같은 건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아까 신청했던 전화도 취소해버렸어요. 할 말이 없어져버렸으니까요. 생각해보면 피장파장아에요. 그 사람은 자기나름대로 현실에 대응을 한 것 에 불과하죠. 그 날쌔고 정확한 솜씨를 오히려 칭찬해주어 마땅하겠죠. 하지만…… 아네요. 졸속한 처사라고 해도 그 사람을 나물랄 수는 없죠. 문제는…….”
그래, 우리다. 문제는 ‘우리’ 다,
그는 탁자 위의 종이꾸러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 방에서 나가기까지는 그들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고 누굴 들어오게 할 필요도 없게 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들. 그게 금방 사이에 아주 천덕스러운 종이 꾸러미 하나로 타락되어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고 기능도 발휘할 수없는, 아니 오히려 커다란 쇠망치로 산산히 부수고 싶은 것으로서 거기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젠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졌어요. 이 방에서는 세계를 잠가버릴 수가 없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도리어 그 반대예요. 이건 투명한 유리벽 속예요. 우리가 그 속에 갇히어가지고, 전후좌우, 위아래로, 송두리째 노출되고 있는 거예요.”
새까만 암혹, 암혹 속에 숨어 있는 수없는 눈들, 귀들, 그 한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빛의 구멍. 그 속에 발가벗겨져 놓여 있는 두 개의 무력한 미물. 끄자. 빛을 끄자. 그리고 이 작은 구멍도 없애버리자.
“죄송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따라서 그녀의 머릿결이 그의 턱 끝에 비비어졌다.
“이게 지금까지의 전부예요.”
그는 그녀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따로 떨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어 보여주었다. 그녀의 배후에 달무리 같은 공허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두 눈에 힘을 주려 애쓰고 있었다. 생에 열의를 가지는 건 의무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의가 아니면서 열의를 잃는다는 건 무책임한 일이었다. 산다는 것은 무슨 보복도 아니고 화풀이가 아니기 때문에 출생도 죽음도 보복이나 화풀이의 한 형태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런 것을 당할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죽어서는 안 되었다, 죽음을 살지언정. 그는 그녀가 더이상 시들어질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다시 그녀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하나의 작은 싸움이 끝난 거야. 그래 우리는 이대로는 ‘우리’로서 있을 수가 없이 되어버렸지. 그렇다면 그 다음은 빤해. 두 손을 들고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다시 한 번 알몸뚱이로 싸움을 시작하든가, 그 둘 중의 하나야.”
그녀의 침묵이 두 번째 것의 방법을 묻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좀더 힘을 주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탁자 위에 있는 저 꾸러미. 저 속 한구석에는 삶은 계란 네 알이 들어 있어. 우리는 아직 저녁밥을 안 먹었거든. 그래서 마련한 우리 몫의 저녁 식사야. 그걸 먹어야지. 그러자면 그 장소를 찾아야지. 우리의 싸움은 관객을 필요로 하는 흥행물이 아니고, 먹는다는 것은 은밀할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런 곳이 있겠지. 그걸 찾아야지. 이 쓸모없는 방은 버리고, 그런 장소를 찾아나서야지.‘
그래요. 그래요. 그녀가 그의 가슴에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밤. 이 밤뿐이야. 그 동안 우리가 쫓기지 않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져보는 것. 고작 그거야. 그리고 이 방법밖에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없어. 뜻이 정해졌으면 행동은 빠를수록 좋아. 밤이 자꾸 가고 있으니까.”
그녀가 별안간 그의 어깨에 매달리는 듯했다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그도 따라 일어섰다.
“가자!”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았다. 잠깐 얼굴을 마주 본 뒤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인 누웠던 자리에 약간의 주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발치께에서는 차에서 가지고 내린 여행용 백이 손도 대지 않은 채 처음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이키더니, 탁자 위의 작은 백만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끌었다. 그들은 훈으로 걸어갔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절컥 자물쇠가 열렸다. 그들은 복도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들이 여전히 깨어 있었다. 문 곁에 세워둔 우산을 찾아들었을 때, 안내하던 여자가 그들을 내다보았다.
짐올 가지지 않고 나가니, 산보라도 나가는 줄 아는 모양, 그대로 앉아있는 채였다. 그러나 아까와는 기묘한 관심의 빛을 보이는 시선이었다. 문 밖으로 나섰다. 빗발은 조금도 가늘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들어올 때와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었다.
우산을 켰다. 그리고 그 한 개의 우산 밑에 두 사람의 머리를 넣고 그들은 출발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갔다. 빗방울이 그들을 감추어주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을 두려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포장된 길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주차장 앞의 이층 건물에는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주차장을 비추고 있는 두 개의 수은등도 여전히 켜져 있는 채였다. 그들이 타고 온 회색빛 승용차가 비를 맞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계단의 중간에서 멎어섰다. 그들은 잠시 서 있다가 담배를 피웠다. 두 사람이 담배 한 개피를 피우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들에겐 매우 길게 지나갔다. 그들은 그 뒤로도 그냥 서 있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그들에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들 쪽에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빗소리뿐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이 멎어 있는 상태였다. 멎어 있지 않은 그들의 내부를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또 담배를 피웠다. 문득 멀리서 빛이 비쳐왔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빛은 차츰 다가왔다. 자동차의 불빛이었다. 택시였다. 그것이 드디어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계단 아래쪽에 와서 멎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렸다. 그 틈에 그들은 나머지 계단을 내려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차에서 내린 건 남녀였다. 하룻밤의 야합을 위하여 도망쳐 나온 도시의 찌꺼기였다.
두 사람의 체온이 미지근하게 남아 있는 자리에 그들은 들어앉았다. 차는 곧 되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운반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크게 뜬 눈으로 앞쪽을 보고 있었다. 후줄근한 차내의 공기가 불쾌함 따위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차체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자리의 운전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무모한 짓으로 되어 있는 완전한 남이었다.
얼마 안 가 세거리에 나섰다. 왼쪽은 그들이 좀전에 달려온 좁은 길이고, 오른쪽은 가까운 도시로 나가는 큰길이었다. 차는 비에 젖은 길에서 미끄러지기까지 하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늦은 시각을 의식하고 있는 운전사는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아대며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주 오는 차도 없었고, 그들을 앞질러 가는 차도 없었다. 그 넓은 탄탄한 길은 온통 그들의 차지였다. 운전사는 도사처럼 초연한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자신이 싣고 가고 있는 중대한 운반물 내용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차가 고개 마루에 접근했을 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반쯤 뜨인 눈 끝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물올 닦아.”
그가 가만히 속삭이는데, 차체가 술렁 내려앉는 느낌이 왔다. 번쩍 고개를 들어보니 차가 고개 마루턱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앞쪽에, 도시 상공에 엉겨 있는 뿌우연 빛의 덩어리가 보이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비가 오는 채로 날이 밝은 지상에서 그들은 헤어졌다.
대도시의 역. 대합실 안은 끈끈하고 축축했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채인 도시에서 빠져나온 많은 사람들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제각기 또 다른 도시를 향하여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두 개의 플라스크를 연결하는 기다란 관을 통하여 생체조직에 들어감으로써 생명을 갖게 되는 고형(固形) 결정체― 바이러스의 생리가 그 하나하나의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난막을 뚫고 들어가는 맹목적인 정충의 운동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몸에 꼭 맞게 깜깜하게 밀착되어 있는 뇌옥 따위와는 관계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생은 이어져나간다고 하는 것을 터득하고 난 사람들처럼 태연스럽게. 무수한 생의 세편(細片)들, 미세한 순간들. 스스로의 죽음으로 세계가 정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억울해하기 때문에 죽어라 하고 생을 아낄 뿐이지, 삶이나 죽음이, 식물이다 광물이다 액체다 기체다 하는 것과 같이, 존재의 영원성의 한 작은 양태라는 것을 알기 겁내는 영장류 생물들.
그들은 서서히 이행(移行)해갔다. 그리고 그 속에 끼어 그녀는 작은 백 하나를 달랑 어깨에 메고 사라져갔다. 전날 밤에 버리고 온 모멸의 현장 따위는 멀리 팽개쳐둔 채, 곧장 열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간 것이었다. 용서를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머지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돌아간다는 말을 남겨놓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로도 그의 망막 속엔 그녀의 모습이 한동안이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더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에게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세계의 중심 이 아니었고, 신(神)을 만들기 이전부터 무력했던 인간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없어진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나머지 일은 고작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기억을 한동안 유통시켜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아주 공허하고 의미없는 일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해서 그는 또 생의 뒷자리에 혼자가 되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뇌옥으로 돌아가는 첫 버스를 탔다. 얼마 안 있어 차가 며날 것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는 도착을 할 것이고, 집에 들어갈 것이고, 어머니가 지은 아침밥을 먹을 것이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을 할 것이고…….
무사했다. 위성이 되어 사라지지도 않았고 미하가 되어 헤매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비도 무사히 내리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은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그는 앞의자 등에 붙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마를 얹고, 무거운 머리를 말기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유리된 또다른 눈으로 까마득한 높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 내부의 알몸뚱이는 바싹 말라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찾는지는 모르지만 땅 밑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의 배경도 아니었다. 한발 때문에 기갈에 시달려 뼈와 가죽만 남은 검은 소년처럼. 그것은 엄숙한 자신의 양태였다. 그런데 그것은 아프리카의 소년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어지러움은 두개골의 내부가 새까맣게 변하는 감각으로 변했다.
오욕의 한 긴 순간이 지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긴 장마 속의 짧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마는 또, 절분이 없는 더욱 길고 긴 순간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끝-
2016년 11월 1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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