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이 과연 계시다면,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건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더도 말고 ' 한 말씀 만 하소서' 하고 애원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겐 더 많은 고통을 주신다.
고통을 통해 성장, 단련 시킨 후 당신의 큰 일꾼으로 쓰신다는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죽을 수도 없었던 고통을 받아들이며 더 깊은 글을 보여주셨던 박완서 선생님
우리들은 선생님의 글 속에서 드러난 우리 삶의 자리의
기쁨과 슬픔, 분노에 공감하고 그분의 표현에 감탄, 감사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하느님께 순명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욕심 내지 않는 영혼의 뒷모습은 눈물나게 아름답다는
영원한 진리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
박완서 선생님은 '작가는 빛이 드는 곳보다 그늘 진 곳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22일 별세한 소설가 박완서씨(80)와 친분이 있는 김영현(56) 실천문학사 대표는 "박 선생님은 '작가는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며 어려운 사람들 곁에 서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울먹였다.
고인과 김 대표는 1984년 소설집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 함께 작품이 실린 후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박씨는 이 소설집의 표제작을 썼고 김 대표는 이 책에 단편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두 사람은 사제지간처럼 각별하게 지냈다. 문학계에서는 김 대표가 고인의 아들 노릇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김 대표는 "문학계의 큰별이 졌다"며 "박경리 선생님과 함께 여성 작가의 양대 산맥을 이뤘는데 얼마 전 박경리 선생님에 이어 박완서 선생님도 떠나 보내 착잡하다"고 밝혔다.
평소 김 대표와 박씨는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두루 다녔다. "여행을 다닐 때면 비싼 곳에 묵으려고 하기 보다 부러 소박한 모텔에서 주무시곤 했다"며 "유명 작가답지 않게 명성에 얽매이지 않고 소박했다"고 회상했다.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박완서 선생님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한 몇 안 되는 분"이라며 "625 동란의 혹독한 아픔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따뜻하게 승화시킨 감각이 탁월하다"고 경탄했다. "얼마 전 뵐 때까지만 해도 건강해 보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돼 정말 안타깝다."
김영하(43), 은희경(52), 이외수(65)씨 등 문인들도 자신의 트위터 등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고인은 22일 오전 5시20분께 경기 구리 아차동 자택에서 지병인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1953년 결혼 후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장편소설 '나목'이 월간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돼 문단에 들어왔다.
이후 6·25 동란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 여성 억압 등을 다루며 주목 받았다. 특히, 유려한 문체와 일상에 대한 중년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현실적인 감각을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 발인은 25일 오전이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첫댓글젊으셨을때 참 미인이셨네요.. 많이 서운합니다..얼마전에 선생님의 책 못가본길이 더 아름답다를 사놓고 읽지도 못하고 있었네요..ㅠㅠ 가톨릭신자여서 더 정이 갔는지 모르지만 인자하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살아오신 삶이 그다지 평탄치는 않으셨던것 같은데 이제는 부디 주님곁으로 고운 발거음 하셨길 바라며 평안한 안식을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젊으셨을때 참 미인이셨네요.. 많이 서운합니다..얼마전에 선생님의 책 못가본길이 더 아름답다를 사놓고 읽지도 못하고 있었네요..ㅠㅠ 가톨릭신자여서 더 정이 갔는지 모르지만 인자하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살아오신 삶이 그다지 평탄치는 않으셨던것 같은데 이제는 부디 주님곁으로 고운 발거음 하셨길 바라며 평안한 안식을 기도드립니다..
중딩교과서에 실린 선생님의 작품 '자전거 도둑'을 이야기 하며 현존하신 소설가 중에 그래도 아이들이 많이 알고 있는 분이어서 1달전에 박완서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기도 해야 겠네요.
영정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