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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 李之蘭 | |
이지란 초상화(용인 경기도박물관 소장) | |
생애 | 원 지순 2년/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조선 태종 2년(1402년) 4월 9일 (7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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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원 간섭기 고려 함경도 북청주 건주여진족 거촌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북청군) |
사망지 | 조선 동북면 함주군 함흥목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함흥시) |
본관 | 청해(靑海) |
자 | 식형(式馨) |
다른 이름 | 퉁두란(佟豆蘭),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1] |
시호 | 양렬공(襄烈公)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관직 | 작위: 청해백(靑海伯), 청해군(靑海君) 직책: 금패천호(金牌千戶),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동북면도안무사, 도병마사, 문하시랑찬성사 |
주군 | 조선 태조 → 태종 |
가문 | 청해 이씨 |
부모 |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 어머니: 미상 |
배우자 |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 尹氏, 초취부인) 군부인 강씨(君夫人 康氏, 후취부인) |
자녀 | 장남 이화상(李和尙) 차남 이화영(李和英) 삼남 이화미(李和美) 사남 이화수(李和秀) |
주요 참전 | 황산대첩 |
기타 이력 | 조선 개국공신 1등 조선 정사공신 2등 |
사당 | 서울 종묘 공신당(功臣堂), 북청 청해사, 오산 가수동 청해백사, 남양주 독정사당, 포천 청해사, 북청 삼의사 |
이지란(李之蘭, 1331년 ~ 1402년)은, 여진족 출신이며 고려 말 조선(朝鮮) 초의 무관이다. 여진족 이름은 퉁두란(佟豆蘭)으로서, 성씨(姓氏)는 퉁(佟, 동)이고, 이름은 두란(쿠란투란티무르, 古倫豆蘭帖木兒, 고륜두란첩목아)이다. 자는 식형(式馨)이고 불교 법명도 식형(式馨)이다.[2] 아울러 그는 청해 이씨의 시조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李成桂)와는 의형제를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후에 이(李)씨 성을 사성받아 개명했다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고려의 무장으로써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으며, 조선 개국에 동참해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여진 출신으로 원(元), 몽고제국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3]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라부카가 일찍이 서쪽을 정벌할 때 큰 별이 우물 지붕 위에 드리웠는데, 천기를 관장하는 자가 이를 보고 "이는 계명성(샛별)이라 그 아래에서 반드시 위인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이후 이지란이 태어났다고 한다(《이지란신도비》).
공민왕(恭愍王) 20년(1371년)에 휘하의 백호(百戶) 부카(甫介)를 보내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내투하였고[4] 청해(靑海, 지금의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휘하로 들어갔다.
우왕(禑王) 6년(1380년)에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倭寇) 토벌에 종군해, 지리산 근교 운봉(雲峯)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구를 대패시키는 공을 세웠다(황산대첩). 동왕 9년(1383년) 7월에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로 쳐들어왔는데, 이두란은 북청의 천호로써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 육려(陸麗),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과 함께 이들을 쫓아 서주위(西州衛), 해양(海陽) 등의 곳에 이르러 우두머리 6인을 베었다. 8월에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쳐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하였다. 당시 이두란은 어머니가 사망하여 이두란은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으로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고 한다(《고려사》). 그러나 길주(吉州) 벌판에서 선봉으로 나섰다가 호바투에게 패하였다.
우왕 11년(1385년)에는 함흥(咸興) 토아동(兎兒洞)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昌王)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공양왕(恭讓王) 4년(1392년)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이어 명(明)으로부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가 그 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막는 데 힘썼으며, 태조 8년(1398년)에는 명의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제수되었고 이어 판형조사 의흥삼군부사 중군절제사에 보직 변경 임명되었다.
태조가 물러난 후에도 정종(定宗) 원년(1399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보임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과거 군관 시절에 여러 전쟁터에서 많은 인명을 죽인 것을 속죄하기 위해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5]
태종 2년(1402년) 4월 9일에 죽었으며, 죽기 전에 태종에게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他國)에서 죽게 되었으니 내 시신을 태워 본토에 장사지내어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태종에게 "조심조심 덕(德)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라"는 신하로써의 당부를 남겼다. 태종은 이지란이 죽자 사흘 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그의 청대로 장사지냈으며 시호(諡號)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향년 72세.
《태종실록》에는 또, 이때 명의 사신 축맹헌(祝孟獻)이 태평관(太平館)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지란이 사망하자 태종은 왕이 직접 태평관에 행차해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지신사 박석명을 보내면서 자신의 불참 사유를 이지란의 죽음이 아닌 왕 자신의 병 때문이라고 전하게 하였다고 한다(사관은 이 일에 대해 나라의 대신(이지란)이 죽은 것을 사신이 알지 못하게 해서 사신이 마음 편안하게 연회를 즐기도록 하려는 배려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태종 10년(1410년) 조선 태조의 다른 공신인 조준, 조인옥(趙仁沃), 태조의 왕자인 이화와 함께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2] 후손들이 그의 글을 모아 《청해백집》(靑海伯集)을 지었다.
《이지란신도비》에는 이지란의 용모에 대해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여인과 같았다."고 적고 있다. 한국의 경기도박물관에는 이지란의 초상이 소장되어 있는데, 박물관에 기증되기 전까지는 이지란을 모신 포천의 청해사(靑海祠)에 소장되어 있었다. 가슴까지만 그린 반신상으로 조선 후기에 사당에 모시기 위해 원본(전신상)을 발췌하듯이 베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지란은 여진족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성계의 최측근으로써 왕조의 개창에도 가담한 공신이었으며, 그의 자손 역시 대대로 조선 조정에서 중용되었다. 이지란 사후 300년 뒤인 영조 50년(1774년)에 세워진 《이지란신도비》에는 이지란의 선대 가계에 대해, 증조부 부해(浮海)가 원(元)에서 전공을 세워 오천호(五千戶)에 봉해졌고, 이지란의 아버지 아원(雅遠, 아라부카)는 원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이지란이 조선에서 중용된 뒤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다.
이지란에게는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와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 강씨(谷山康氏) 두 부인이 있었다.[6] 상산군부인 강씨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강보대(康普戴)의 딸(이지란신도비)로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친정 조카딸로, 이지란은 조선 태조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태종실록》에 실린 이지란의 졸기에는 이지란에게 화영(和英) · 화미(和美) · 화수(和秀) 세 아들(《이지란신도비》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고려사》에는 화상(和尙)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고 하며, 《이지란신도비》에 따르면 아들들 모두 상산군부인 소생이다.
한편 청해 이씨는 이지란이 중국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의 먼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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