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미래로 갈 순 없습니다. 從北정권의 등장을 막아야 합니다”
부산 민주화 운동 1세대 노경규씨의 박근혜 지지 선언
노경규
從北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하여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저 노경규는, 민주화운동 당시 김대중씨의 비서였고, 박정희 유신시대에는 부산, 경남의 민주화 운동 제1세대로서 국제사면위원회 와 민주헌정동지회 부산 책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긴급조치9호 투옥, 전두환 정권 당시 계엄포고령 투옥, 노태우 정권 당시 집시법 위반 투옥과 전국지명수배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산, 마산, 대구, 서울 교도소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부산, 경남에서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 시대에 고통 받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사과를 한 데 이어, 또다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던 아버지 박정희의 무덤 앞에서 한 통절한 사과와 화해의 말에 대해, 저는 그 진정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제 지나간 과거와 화해하면서 이번 大選(대선)의 국민 승리를 위해 박근혜 후보를 적극 지지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길만이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從北 세력에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온 국민의 간절한 소망을 받드는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2012. 12. 7
전) 국제사면위원회 부산경남지부 전무이사
전) 민주헌정동지회 부산 책임자
*노 경 규(盧 暻 圭) 1940년 (72세)
학력 : 경남고등학교 졸업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주요경력 :
* 김대중(민주화운동 시) 비서
* 신민당 중앙당 총무국장
* 평민당.민주당.국민당지구당위원장
*박정희 유신정권시에 부산,경남에서 재야단체인,
전) 민주회복국민회의 , 국민연합의 부산경남조직책
전) 국제사면위원회 부산경남지부 전무이사
전)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지부 조직책
현) 5.18 민주유공자
현) 민주화추진협의회 부회장
-70년대~80년도 초 까지 부산에서 활동
-80년도 중반부터 서울에서 활동
1. 긴급조치9호 투옥(박정희유신정권시)-부산,대구교소
2. 계엄포고령 투옥(전두환정권시)-부산,마산 교도소
3. 집 시 법 투옥(노태우정권시)-서울구치소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미래로 갈 순 없습니다.
-나는 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게 실망하였는가?
저는 대학생활중인 1961년경 , 부산의 동래 다리와 온천다리 밑에서 2년간 넝마주이 생활을 했습니다. 1970년 야당인 신민당 동래지구당 선전부장으로 출발, 다음해 4월27일 대통령 선거(박정희-김대중)를 거치면서 反독재 군사정권 타도의 험난한 골수 야당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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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 명단의 노경규 씨.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
1972년 부산 시지부 훈련부장으로 부산 각 지구당의 야당 당원들의 교육, 훈련을 맡고 있을 때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땐 정말 숨막히는 터널속의 세월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저 달의 뒷면 같이 차갑고도 캄캄한 시절이었습니다.
1974년 8월15일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피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름대로 뼛속까지 야당성으로 무장되었던 나였지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안보, 전방 철책선, 김일성이 마음에 들어와 정신적 혼돈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대한 전국적 저항운동은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1974년 11월 2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민주회복국민선언을 하면서 이 땅의 유일한 국민운동의 모태인 민주회복국민희가 결성되고 反유신 독재투쟁의 횃불이 올랐습니다.
이러한 全국민적 저항에 박정희 정권은 1975년 초 유신의 찬반과 대통령의 신임을 동시에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하게 되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운동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전국적 지부결성과 함께 국민투표 반대 투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산, 경남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른 지역보다 더욱 간교하고도 혹독하게 탄압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 부산, 경남지부 결성이 전국에서 제일 늦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저 역시 건강상의 문제로 매일 링겔을 꼽고 있어야 하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으나,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렇게 부산 경남이 무너질 수 없다는 심정뿐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저는 항상 활동했습니다. 정보형사들이 감시의 틈이 느슨한 부산의 비바람이 치는 날은 제가 조직활동을 하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민회의 부산경남지부를 은밀히 당시 야당 영도지구당사에서 결성하고는 그 결과를 제가 직접 가지고 상경하여 김종완씨(민주헌정연구회 이사장 역임)와 함께 동교동 김대중씨를 만나 전달, 보고 했습니다. 그때 문학가 요산 김정한 선생님의 친서도 같이 전달했습니다. �營�부산경남에서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 멤버는 요산 1인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국민회의의 부산경남 조직이 늦어진 내용과 부산 경남은 국민투표 반대가 아니라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지역임을 설명하니까 김대중씨는 “결과적으로 아주 잘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부터는 오히려 “국민투표 무효선언운동”을 해야 할 형편인데 부산 경남이 전국에서 제일 먼저한 결과라고 칭찬한 것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즈음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회원은 부산경남에서는 요산 김정한 선생님과 저 두 사람밖에 없었고 이후 엠네스티 부산경남지부의 지부장 김광일 변호사, 전무이사 노경규와 조태원, 김영일 간사 등과 일하면서 운동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 동아, 조선 광고탄압사태도 이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부산경남 지역의 엠네스티 활동을 이용한 민주화운동 방향은 요산, 김광일 변호사와 제가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 1974년과 75년은 민주회복국민회의, 엠네스티, 동아,조선 광고탄압 사태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이후, 민주회복국민회의 는 -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국민연합 등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아갔습니다.
1976년 서울에선 3.1 구국선언이 있었고, 바로 김대중씨의 옥중성명서가 발표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구국선언문과 옥중성명서의 부산경남 배포사건으로 1977년 5월경 동래경찰서에서 9일간 거의 잠을 재우지 않는 철야조사를 당했습니다. 6월초 불온유인물 제작살포 및 反정부 불온단체 조직 음모(부산 경남의 재야조직) 라는 긴 이름의 혐의로 중앙정보부 부산분실(대연동) 지하실로 연행되어 혹심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몇번의 의식을 잃는 등 인간 이하의 모욕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부산대학교 후배 조태원씨와 함께 1979년 3월 경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부산교도소에서 첫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부산 재판과정의 법정투쟁에서 저를 응원해주시던 김광일, 이흥록, 홍남순 변호사, 심응섭, 임기윤, 최승묵 목사,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과 부산 경남의 동지, 후배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전국 1차로 사진 지명 수배를 받으면서 1년간의 도피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쳐 2년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후 또 다시 명동성당에서 백기완씨, 한영애 씨등과 함께 군중선동혐의 집시법 위반으로 입건 투옥되었다가 1987년 6.29선언 후 석방되었습니다.
제가 김대중 씨와 헤어진 이유를 설명드려야겠습니다. 저와 김대중씨와의 결별은 그가 정권을 잡기 훨씬 전인 평민당 시절 大選 즈음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김대중씨와의 민주화운동과정에서 그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한 솥밥을 먹던 비서로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기 때문에 정치 前科(전과) 4범이 된 것입니다.
김대중씨와의 관계에서 개인적 뒷이야기들은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젊은 시절 저의 정치적 소신과 한 정치 지도자와의 관계에서 저의 소회는 너무나 절망적이고 세상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이해 못하고 있는 데 대해서 참담한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 사람인 김대중 씨를 모시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저는 한번도 지역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지만 정치인 김대중, 인간 김대중에 대하여는 환멸을 느꼈습니다.
*김정일에게 국민 모르게 혈세를 퍼주고-그것은 핵으로 돌아오고-김대중은 노벨상으로 돌아오고 이게 뭡니까.
*1987년 온 국민의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김영삼, 김대중이 단일화만 되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고도, 4자 필승론을 내놓으면서, 한편으로는 '김영삼 씨가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양보해서라도 단일화 한다”고 끝까지 말하다가 '나는 이번에 아니면 나이가 많아서 다음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는 김광일 변호사와 나는 동교동 문을 나서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고, 대선 패배 후 느닷없이 컴퓨터 부정 운운 할 때는 인간적 혐오감마저 들었습니다.
* 특히, 김대중 정부 하에서 전국의 피를 토하듯 외치며 싸워온 민주화운동의 동지들을 분노케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들이 비리로 줄줄이 감옥을 갈 때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동향 출신인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실망감입니다.
정권을 잡자 말자 그가 한 말 “어느 누구라도 비리를 저지르고, 청탁을 하면 패가망신 시키겠다”고 하던 노무현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노무현은 본인과 가족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문재인은 “나는 민주화세력의 대표이고, 안철수는 미래 세력의 대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정도 얄팍한 경력으로 이 땅의 처절했던 민주화운동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됩니다. 본인이 분명히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재인은 도리어 과거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무덤에는 참배를 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묘소 참배는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과거로 가는 열차를 탔고, 지나간 역사의 쓰레기통만 뒤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이명박 정부에 갖다바친 530만 표, 그 책임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이 잊을 리 없습니다. 그 자신의 입으로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실수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