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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 권역
낙선재(樂善齋)
상량정(上凉亭)이 보이는 낙선재 화계(花階)
만월문(滿月門)
상량정(上凉亭)
만월문에서 본 상량정(上凉亭)
상량정(上凉亭)
승화루(承華樓)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閒靜堂)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를 중심으로 취운정(翠雲亭), 진수당(進修堂), 장경각(藏經閣) 등의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憲宗, 1827년~1849년 재위, 1834년~1849년)이 즉위한지 13년 (1847년)되던 해 낙성을 본 건물이다. 헌종이 사랑하는 여인 경빈 김씨(慶嬪 金氏)를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헌종 임금은 임금이 되고서야 장가를 들었다. 왕대비가 주관하는 국혼령(國婚令)이 발동되었다. 전국의 처녀는 영이 떨어지면 시집가는 일을 연기하며 기다려야 한다.
3단계에 걸쳐 왕비감을 선발한다. 많은 후보를 단계마다 줄이다가 세 번째 간택 때가 되면 세 여인만 남게 된다. 그 중의 한 여인이 왕비로 낙점되고 혼사를 치렀다.
그런데 헌종은 떨어진 두 번째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왕혼(王婚 : 임금이 선택한 여인과 동거하는 혼인)을 하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김씨 여인을 위해 왕비전에 멀리 떨어진 , 그것도 궁이 다른 창경궁에 , 그러면서도 쉽게 다닐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지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는 낙선재 경내는 대략 8,000여평으로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인 동쪽에 석복헌이 있으며,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어 이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수강재와 석복헌은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위해 그 이듬해 (1848)에 지어졌다. 낙선재는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대조전(大造殿)이 불탔을 때는 순종(純宗)이 이곳에 기거하였고, 순종 비인 순정황후(純貞皇后)와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德惠翁主)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왕비가 1989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여 낙선재는 다섯 궁의 전각들 중 가장 최근까지 왕실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영왕비 일가가 현대식으로 개보수하여 사용하던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 상량문에 따라 헌종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침전으로, 석복헌은 경빈 김씨의 침전으로, 수강재는 순원왕후의 침전으로 꾸며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하였다. 이 세 채의 집들은 언뜻 보면 서로 닮아 보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제각기 많은 변화가 있다. 같은 반자를 달았으면서도 그 방법이 다르고 , 문창호를 바른 미닫이를 달았으면서도 창살이 서로 다른 형태로 짜여져 있다. 그런 가운데 기둥 사이의 문짝이나 창문짝의 짜임새도 그 비례감과 아울러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조화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순조 28년(1828년)에 지은 창덕궁 후원 안의 연경당(演慶堂)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선재는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리만큼 다양한 건축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집 뒤편으로는 건물의 형태를 따라 꺾어 돌린 쪽마루가 쭉 놓여서 어느 채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고, 쪽마루 끝에는 난간이 나지막하게 둘러져 있어서 더욱 운치를 돋운다.
넓은 앞뜰과 뒤뜰에는 상록수와 꽃나무가 우거진 중에 드문드문 정자도 배치되어서 아담한 정취를 자아낸다. 특히 북쪽 후원에는 큼직한 장대석으로 쌓아 꾸민 화강석 화단이 있고, 그 화계 위에 육우정이 배치되어 있다. 화단을 가르는 정교한 담장과 굴뚝들이 그 높이를 달리 하면서 화단의 꽃나무와 알맞게 키를 맞추는가 하면, 군데군데에 석분, 괴석, 연지 등이 배치되어서 균형과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양식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밀원이구나'하는 느낌을 금치 못하게 된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이다. 그 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낙선재 옆으로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은 이들을 모두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의 대문은 연경당 대문과 같은 이름인 장락문(長樂門)이다
경훈각 뒤에 있는 화계(花階)이다. 언덕을 층층이 깎아 돌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하고 단마다 꽃을 심은, 글자 그대로 '꽃계단'이다. 한국 전통 정원에는 화계가 많다. 한국은 산과 언덕이 많은데다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보통은 산을 등지고 집을 짓게 된다. 따라서 집 뒤엔 비탈진 곳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이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화계를 쓴다. 창덕궁에는 경훈각과 연경당, 낙선재에 화계가 있다.
낙선재 뒤뜰에 있는 보름달 모양 문-만월문(滿月門)과 여섯모 누각이다. 위 사진은 만월문을 승화루(承華樓)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반대 방향에서 만월문을 보면, 동그라미 한 가운데로 멀리 백악(白岳, 지금 북악산) 봉우리가 보인다. 만월문 뒤 누각은 이름이 '상량정(上凉亭)'이라고 씌어있으나,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보면 평원루(平遠樓)라고 되어있다. 일제시기에 이름이 바뀐 듯 하다. - <우리 궁궐 이야기> 에서 옮김.
고려말 문인 이규보 선생은 樓와 亭을 구분하여 정의하였는데, 樓는 '이층으로 된 집(重屋)'으로서 누마루 밑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거나 마루가 지면으로부터 높이 솟아있는 것이고, 반면에 亭은 마루를 높인 것이 아니라 원래 높은 곳 위에 세운 집이기에, 공간이 개방되어있고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이라 하였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상량정'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평원루'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궁궐지>의 창경궁 편을 보면, '낙선재는 17간 반짜리집으로 2간 5량에 기둥의 길이가 8척 3치이고 양통은 2간으로 8척식이며, 도리통은 6간으로 8척씩이고 앞퇴는 4간씩이다.
낙선재에는 청나라의 엽지선이 쓴 '낙선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딸린 집채인 남행각 12간에는 장락문이 나 있고 서행각 15간과 외행각 15간에는 중화문(中華門)이 나 있으며, 그 동쪽으로는 소금마문(小金馬門)이 나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은 일각문으로 행랑채보다 지붕이 솟아올랐다. 이런 문을 '솟을대문'이라 부른다. 여염집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호칭한다.
문 좌우로 행랑채가 있다. (궁궐지)의 남행각 12칸에 해당한다. 무사석 세 켜로 듬직하게 기초하고, 위로 사괴석 세 켜를 또 쌓았다. 그 위로부터는 벽돌인데 운두가 두꺼운 벽돌을 쌓아 올리다가 갑자기 그것의 반정도의 두께밖에 되지 않을 얇은 벽돌을 쌓아 마감하였다.
운현궁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변화 있는 담벼락 축조법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장락문(長樂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最應)의 글씨이다.) 행랑채 바깥벽을 이렇게 축조하면,
1. 불에 쉽게 연소되지 않는다.
2. 장마 때 빗물이 벽체를 적셔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3. 도적이나 적이 공격할 때 쉽게 뚫고 침입하지 못한다. 는 세가지 큰 이점이 있다.
골목마당에서 디딤돌 하나 딛고 문에 올라서게 되는데, 널빤 문짝이 달린 문지방이 돌이고, 중앙에 홈이 파져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격이 이 만한 집에는 주인이나 객이 외바퀴 수레인 초헌을 타고 드나들기도 한다. 문지방의 홈은 외바퀴가 지나갈 자리이다.
이런 방식은 고구려 성문에서도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고구려 성문자리를 평양에서 발굴하였다. 거대한 문지방이 제자리에 남아 있었고, 그 문지방엔 수레가 지나갈 수 잇게 바퀴 지나갈 자리에 홈을 팠다. 그로 인해 고구려 수레 축의 폭이 얼마인가를 알게 되었지만 편의를 도모한 지혜를 볼 수 있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돌기단위에 세운 낙선재 본채는 정면 6간, 측면 2간의 단층 팔작지붕 초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서쪽 옆간 앞쪽으로 한칸쯤을 돌출시켜 높직하게 누마루를 꾸몄기 때문에 장락문을 들어서면 그 누마루가 정면으로 보인다.
누마루 밑을 보면 소용돌이치는 구름 문양과 마주치게 된다. 나무는 삭아 가고 있지만 구름 문양은 아직 뚜렷하다. 누마루는 허공에 떠 있는 다락같은 마루이니, 그 밑에 구름이 있다는 것은 그 위가 천상의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으로 기둥머리에 대들보를 걸고, 그 틈으로 도리를 올려놓았다. 창방과 도리 받침 사이에는 소로를 기웠고, 창방머리는 초각(草刻)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알맞은 물매 곡선에 안허리의 굽음새도 알맞게 잡혀 있다.
누마루 뒤에는 방1간이 있고, 동쪽 2간이 대청이며. 다음 2간이 방이다. 누마루의 높은 초석과 그 뒤쪽의 기단부에 설치된 빙렬무늬분합문의 아(亞)자살 , 방의 세 살문과 장식창호 등 그 하나하나의 구성이 한 결 같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낙선재는 'ㄱ'자 형의 조촐한 집이다. 여염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창살의 무늬가 여럿 채택되어 위치에 따라 변화가 있고 아름답다고 손꼽을 수 있다.
건너방에서 작은 마루인 내루로 올라가는 문은 둥근 만월문(滿月門)이다. 건물 내부에 이런 만월형의 보름달 문이 만들어지는 일은 쉽지 않다. 대청에 앉아 맞은편을 보면 장락문이있는 행각이 보인다. 그 중에 살대무늬가 아름다운 분합문이 눈에 뜨인다.
한국인은 방ㆍ대청에 앉아 내다보는 자리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성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안마당은 반듯하다. 동편에 샛담이 있는데 꽃담의 무늬가 의미심장하다.
뜻을 판독한다면 (여기는 사귀를 물리친 청정의 세계이다.그 속에서 님과 함께 무궁무진하게 살고 싶다)이다. 다니며 무늬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큰 재미에 속한다.
후원에는 취운정(翠雲亭)·한정당(閒靜堂)·상량정(上凉亭)이 위치하고 있는데 낙선재의 앞과 오른쪽에는 행랑이 있어서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있으며, 행랑 남쪽 가운데에 장락문(長樂門)이라는 출입문이 나 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ㄱ자형의 낙선재가 나타나는데 사대부들의 주택 사랑채를 닮은 소박한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에 누마루 등이 딸려 있다. 가운데 3칸은 퇴를 개방하였고 나머지는 분합문이나 회벽으로 벽체를 꾸몄는데, 분합문의 창살무늬가 다양하고 섬세하게 꾸며져 여성들이 머무르는 궁중의 건물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누마루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한 벽으로는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붙여 자유롭고도 아름다운 벽면을 장식하였다.
낙선재의 동쪽으로 잇대어서 석복헌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석복헌에 이어서 동쪽으로 같은 규모의 수강재가 있다. 이 세 건물 사이에는 행랑이나 담이 있어서 서로 독립된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 세 건물 뒤로 조성된 후원은 장대석으로 여러 단의 꽃계단을 꾸미고 각 단에는 사철에 알맞은 화초를 심었으며, 건물에서 연결되어 나온 굴뚝이 조경의 한 요소로 꾸며져 있기도 하다. 후원의 담장 역시 조경에 큰 몫을 차지하는데 벽돌을 구워 여러 가지 형태의 무늬를 벽에 치장하였다. 장수(長壽)무늬·고리무늬·석쇠무늬 등이 꾸며져 있다. 후원 동쪽으로는 꽃무늬 담장 사이에 월광문(月光門)이라는 출입문이 나 있는데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있고, 안쪽에 좌우로 미닫이 판문이 달려 있다.
후원 맨 뒤편에는 별당(別堂)인 한정당(閒靜堂)이 있다. 사대부주택의 별당과 같은 간결한 구조의 건물로 한 끝에 누마루를 갖추고 있으며 집 앞뜰은 잘 정돈된 수목을 심었고 그 사이로 괴석(怪石)들을 놓아, 한가로우면서 조화 있는 자연스러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낙선재 일곽의 건물은 후원의 빼어난 조경으로 더욱 돋보이고,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첫댓글 낙선재 뒷쪽 동궁권역은 출입이 제한된 곳으로 저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낙선재 뒷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문이 열려 있을때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온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