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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라
출 4: 10-17
꼭 한달동안 세계인의 잔치인 한일월드컵대회가 오늘 저녁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축구 잔치가 한국에서 열린 것만으로도 우리 나라를 세계로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된 것도 대단한 일인데 우리 축구가 세계인들이 처음엔 가장 약체팀으로 취급받다가 이번 대회를 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경이의 대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한국축구의 실력도 세계사람들이 인정하게 된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기계신 성도 여러분도 처음엔 사실 한국축구가 4강까지 오를 수 있다고 희망사항일뿐 그것은 그림의 떡처럼 여겨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축구가 4강까지 올라가게 된 것도 기적이요 신화처럼 여기게 된 것이 현실에 이뤄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히딩크란 한 지도자의 지도력과 그 지도력을 따르며 전심전력을 다한 한국의 젊은 축구 선수들이요 그리고 또 하나는 500만 700만의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 질서를 지켜가며 응원하고 4700만 한국인 전체가 한마음으로 응원을 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유학생들이 그곳 영국 사람들이 월드컵전에는 코리아를 잘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개고기를 먹는 아주 후진국 사람으로 여겼는데 이번 월드컵 대회때 한국축구와 한국인들의 질 높은 질서의식으로 열광하는 응원부대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Korea! Korea! 하면서 한국유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유학생이 자기 집에 머물기를 원하고 있다고 자신이 한국인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눈물겨운 글이 신문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비단 한 사람의 유학생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더 기쁘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4강에서 결승까지 올라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까지 가면 교만해 질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그치게 해 주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이번 월드컵대회를 통해 우리모두에게 주신 정신적 영적 선물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은 우월감과는 다릅니다. 우월감은 자기주제파악도 모르고 공연히 우쭐하는 교만감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감은 우월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우월감을 가진 사람도 소수가 있긴 하나 대부분 한국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는 열등감에 있습니다. 패배감에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 꽉 차있습니다. 나는 승리할 수 없다는 패배감으로 꽉차 있습니다. 열등감과 패배감을 가지면 희망이 없습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의욕마저 잃고마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인생을 승리하거나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포기하면 체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병중에 병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한국 축구선수들을 볼 때 우리는 서구의 선수들을 이길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 선수는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체력도 당할 수없고 키도 운명적으로 서구선수들보다 자기 때문에 아시아에선 잘 할 수 있으나 구라파나 미국이나 남미 선수들 앞엔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4강에 올라와서 우리와 겨루었던 독일선수들 보세요, 확실히 우리나라 선수보다 목이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공이 뜨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키 싸움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애석하게도 1대 0으로 지고 말기는 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이며 강국인 폴란드와 포루투칼과 아태리와 스페인까지 이겼을 땐 우리는 자신감을 갖게된 것입니다. 체력을 단련하고 준비하면 저들보다 더 강한 체력을 가질 수 있고 키 작으면 또 다른 전술로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축구도 서구선수들과 조금도 뒤지지 않는 게임도 하고 앞으로 잘 하면 월드컵에서 최고우승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된 줄로 믿습니다.
이와 못지 않게 수백만이 그라운드에서나 길에서나 응원을 했는데 그 질서의식 앞에 세계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누가 우리민족을 질서가 없는 후진 민족이라고 깔볼 수가 있습니까? 충분히 선진국다운 성숙한 시민의식을 한국축구선수의 실력 못지 않게 우리민족 모두에게 자신감을 가지게 한 줄로 믿습니다. 이런 저력과 실력과 단합된 힘을 이번 월드컵 대회 때만 나타내선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이 정치에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힘이 경제에도 나타나 선진국으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힘이 사회에 도덕적인 생활에도 미쳐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힘이 지금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에 다시 영적인 파워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부흥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한국사람에겐 신바람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번에 한국 선수도 한국사람도 신바람이 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바람이 해석해보니깐 "성신바람"이란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신바람이 불어오니깐 초대교회 성도들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적인 역사를 나타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써 처가살이 40면을 지내면서 완전히 열등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그에게 큰일을 맡기실려고 가시덤불 불꽃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불러놓고 보니 모세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러놓고 보니 모세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건져내야 되겠는데 모세는 "나는 못합니다" "나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계속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본문 14절에 하나님도 너무 답답하셔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자신감을 다 상실하고 열등감에 빠진 그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에게 말 잘하는 그 시험을 아론도 부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하셨습니다. 그 후에 모세가 자신의 열등감과 패배감을 치료받은 후에 그는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로왕을 꺾고 400년간 고생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너 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의 육신의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인병, 영적인병도 치료해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장애인은 비로 육체는 불치의 장애지만 영적으로 건강하여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보다 더 보람있고 더 행복하게 사는 장애인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장애인으로 맹인박사 강영우씨입니다. 제가 이번 7월 중순에 포천한국기도원에서 장애인들만 모이는 전국 장애인들의 부흥회에 강사로 말씀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을 준비하는 목사님이 저에게 "건강한 사람들에게 부흥회 하시는 말씀 그대로 해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중풍병자 말씀이나. 소경거지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등감이 치료되고 자신감을 갖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째로, 항상 오늘보다는 내일을 지금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꿈을 가지게 될 때 열등감은 치료되고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한국 축구를 변화시킨 우리 나라의 영웅이된 사나이가 바로 거시 히딩크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 축구의 감독이 되면서 현재는 문제도 많고 불리한 조건이 있으나 이 선수를 자신의 방식대로 훈련하면 세계적인 선수가 되고 세계적인 수준까지 할 수 있다고 늘 희망을 불러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내일 잘 할 정도로 사는 모세에게 장차 가나안 정복의 꿈을 심어주고 이스라엘의 대지도자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실패했으니까 현재의 처지가 어려우니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어렵다고 미래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등감이요 패배감입니다. 오늘은 넘어졌으나 내일은 다시 일어 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실패했으나 내일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의 힘이 열등감을 치료하고 자신감을 갖게될 줄로 믿습니다.
히딩크가 그렇게 무섭게 모질게 훈련을 시켜도 선수한 사람에게 격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 감독이 선수들의 등을 한 사람씩 주물러줍니다. 실수했어도 다시 껴안아 주면서 귀속에다가 무슨 말을 해줍니다. 영어로 했을 텐데 한국선수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페널티킥에 실패한 이을용이나 안정환을 그 다음에 출전시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계속 출전시킨 것은 감독이 너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사랑의 싸인입니다. 안정환이 이런 감독의 사랑을 알고 맘속으로 울면서 뛰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몇 번 부를 줄 아십니까? 두 번 불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가는귀가 먹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사랑하므로 이름 부르게 됩니다.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을 것입니다. 성공하는 지도자는 아랫사람의 이름을 잘 외우고 불러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장군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으로 달래고 설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설득에 모세는 다시 힘을 얻고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성도가 자신감을 갖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날 사랑하고 계심을 믿을 때 오는 것입니다.
셋째로 열등감을 치료하려면 창조의식의 신앙을 가져야 해결됩니다.
본문에도 모세가 말을 못한다고 이유를 대니깐 11절에 누가 입과 귀와 눈을 만들었느냐? 그 만드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을 만드신 분이 그 입에서 말을 하게 하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는 어느 그릇도 꼭 필요해서 쓸모 있기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인생의 토기장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필요한 존재요 쓸모 있는 존재이기에 만드시고 보내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것이 창조신앙입니다. 왜 나 같은 존재는 쓸데없고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열등감에 빠져 있습니까?
열등감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입니다. 키작고 기본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한 한국축구 선수를 히딩크를 통해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히딩크가 바로 날 위해 십자가까지 달려죽으시면서 나의 죄를 다 씻어 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드신 우리 하나님께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드신 우리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열등감과 패배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치료받으시고 이제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셔서 인생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출 4: 10-17
Ⅰ. 서 론
어떻게 하면 좀 더 분명한 믿음을 가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고,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해 본다. 그러나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확신이 섰다가도 돌아서면 불안한 심리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지적해 주신다. 실천의 문제이다. 기도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서 확신을 가지는 그런 단계를 넘어서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성경 말씀의 내용은, 모세가 이미 그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양을 이끌고 호렙산에 올라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구원할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사건이다.
Ⅱ. 실패와 좌절로 보낸 40년
모세는 애굽에서 공주의 양자가 되어 가지고 40년 동안 궁중 교육을 받고 호의호식 하면서 잘 살았다. 그러나 모세가 40세가 되던 어느 날, 자신의 조국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민족을 구해야겠다 생각하고는 애굽을 돌아보는데 그 때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 모세는 그것을 말린다는 것이 그만 화가 나서 그 애굽 사람을 죽여 버렸다. 이 일 때문에 모세는 오히려 같은 동포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를 만났고, 그 사람의 딸과 결혼해서 40년의 세월을 양 기르는 목자로 살아갔다. 처음에는 화려했던 궁중의 생활이나 당당했던 과거의 그런 삶들이 그리웠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세는 그런 것들을 다 잊어 버리고 이제는 정말 평범한 양지기로서 생활했다. 어쩌면 모세에게는 이것이 더 마음 편한 생활이었는지 모른다.
Ⅲ.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염려하는 모세
그런데 모세가 이렇게 양지기가 되어서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고 나니까 그 때서야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를 다시금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이제 다시 애굽으로 가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을 하셨다. 모세는 가로 늦게 인생의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모세가 잃어버렸던 과거의 그 꿈을 다시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 기뻐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모세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늘날 까지 40년을 양치기로 살면서 옛날에 배웠던 그 모든 학문들을 다 잊어버렸고, 과거에 공주의 아들로서의 그 당당했던 위풍도 사라져 버렸다. 권세도 없고, 지식도 없고, 젊음도 가버렸는데 이제 와서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지 못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오히려 두려웠다. 답답했다. 걱정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털어 놓았다. 3장 13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냈다고 그렇게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만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그렇게 물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사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오던 지난 430년 동안 애굽에 동화되어 가지고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수 많은 우상들을 함께 섬기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은 그 신들의 힘으로 애굽을 벗어나리라고는 꿈 꾸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모세를 보냈다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 이시길래 이렇게 강한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말씀한단 말인가? 도저히 못 믿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다. 3:15을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밝혀 주셨다.
EX)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종파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찾아가서 현혹시키면서 물어보는 질문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런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번역본에는 그저 하나님, 여호와, 주님 그렇게만 표시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엘, 엘로힘, 엘샤다이, 아도나이, 그리고 여호와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왜 여기서는 '여호와'라고 표현하셨는가? 여호와라는 이름은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한 번 하신 약속들은 절대로 어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성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이 이름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은 과거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그 자손들을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며, 그 자손들에게 가나안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 이름의 의미와 같이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선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고 하는 그 뜻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모세, 네가 가기만 하면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이루겠다.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하나님의 강렬한 의지를 듣고서도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말했다. "그러나(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말이죠)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40년 동안 모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좌절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40년 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나가서 일을 벌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셔도 나서지를 못했다.
Ⅳ.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표징을 몇가지 주셨다.
1) 먼저 2절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세가 쥐고 있던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양치는 지팡이를 땅에 던졌는데 그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면서 뱀으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놀라서 그 뱀을 피하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뱀을 피하지 말고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의심하리라고 생각하느냐? 좋다. 그러면 네가 가서 이 일을 행해 보라 그러면 이 일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 너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믿게 할 것이라 하셨다.
2) 그리고 둘째는 6절을 보니까 모세에게 '네 손을 품속에 넣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그 손을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보니까 그 손에 문둥병이 생겨나서 손이 눈 같이 희어 졌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손을 품에 넣으라 하셔서 또 그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그 손이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자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말씀하셨다. 8절을 보니까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하셨다.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주셨다는 것이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두 가지 표징을 나타내 보였는데도 그들이 믿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강물을 조금 취하여 육지에 부으라 그러면 그 강물이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하셨다. 물이라는 것은 이 당시 애굽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생명의 근원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당시에 애굽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나라였다. 그러니까 나일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그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그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강물이 피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애굽이 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이 표징은 애굽에게 있어서는 아주 위협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아주 큰 힘이 되는 표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강력한 표징을 모세 자신이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Ⅴ. 표징으로도 믿지 못하는 모세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이런 표징을 얻고 난 뒤에 모세가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 '예, 그럼 이제 제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했는가? 아니다. 13절을 보라.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였다. 그래도 모세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애굽이라고 하는 그 현실의 벽이라는 것이 너무나 두껍고, 너무나 높아서, 그 속에 들어가서는 도저히 믿음으로 일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현실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으로 살려고 하다가 한 번 좌절한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이 현실의 세계를 산다는 것이, 또는 믿음으로 이 현실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에게 어떤 표징을 한 번 주신다면 내가 믿겠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함께 하신다는 어떤 분명한 체험을 하게 해주신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표징을 주시거나, 함께 하신다는 어떤 체험을 주면 하나님을 100%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그랬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표징을 주셨다. 그래도 모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것 보다 더한 체험을 어떻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그렇다. 엘리야가 한 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 수 많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아합왕에게 쫓겨가지고 생명이 위태롭게 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주 깊이 좌절해 버려가지고는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위로해 주셨다. 나중에는 이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엘리야 앞을 지나치셨다. 강풍이 불어서 산이 갈라지고 바위가 터지는 힘을 보여주셨다.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일어나는 위력을 보여주셨다.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말씀도 해 주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어땠는가? 하나님의 그 능력앞에서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고 하는 확신은 가지지 못했다고 했다.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한 날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의 모습으로 잠시 변화되신 적이 있었다. 그 때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던 두 사람이 누구인가? 한 사람은 모세고, 한 사람은 엘리야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실상 구약의 인물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의 그 능력을 보고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공통되는 몇가지 사실이 더 있다. 첫째는 이 두 사람이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확신가지고 내가 가겠다고 나섰을 때 사명 주신 것, 아니다. 아직 확신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뜻을 행하라고 하셨다. 둘 째는 이들이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그 사명 이루려고 실천 했다는 것이다. 비록 현실이 무섭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억지로나마 그 뜻을 행하려고 실천했다. 세 째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그 뜻을 실천했을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더 강한 능력과 그 큰 역사를 그 현실 속에서 체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무서워했던 현실, 자기들이 도망쳐 왔던 그 현실의 세상 속에서 여전히 역사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있지만, 아직까지 이 현실의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는가? 교회에서 찬송은 하고 기도는 하지마는 현실을 향해 발을 돌리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얼어 붙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체험 주셔야 믿겠다고, 은혜 주셔야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들을 이 현실 속에서 한 번 실천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되는가? 성령을 통해서 찔러 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을 이 현실 속에서 한 번 행해 보시기 바란다. 마음은 가졌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행해 보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 없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그 큰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확신과 큰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이 현실이 두려우십니까? 마10:28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하셨다. 내 인생의 진정한 창조자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수 있기 바란다. 그리고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행하기를 바란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세상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라헬이라는 여인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야곱이 이 여인을 만났을 때 이 여인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7년을 수일처럼 여기면서 기다렸다고 했다. 아직 결혼 안한 자매님들, 이런 남자 하나 있으면 좋겠지요? 라헬도 야곱을 사랑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 결혼해서는 이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언니와 더불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면서 살았다. 이제 겨우 돈 좀 벌어서 정착해서 살려고 남편 따라 가나안을 찾았는데 그 목적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길바닥에서 아이를 낳고서는 그만 죽어 버렸다. 그래서 이 여인이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 이름이 너무 슬프니까 야곱이 나중에 이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인생이 슬프다는 것이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저 한 남자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 남자의 사랑을 차지하려다가 싸웠고, 그러다가 길에서 죽었으니 그게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우리도 그렇다.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면서 살아 가지마는 우리가 꿈꾸던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지는 않다. 그리고 막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는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Ⅵ. 결 론
여러분,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벧전2:9의 말씀을 보니까 우리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새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다. 그러면 우리를 그렇게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이다. 마6:33을 보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다. 우리가 우리 행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 현실 속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한 번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주께서는 다른 모든 것은 더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주님의 그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주님의 더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참된 기쁨과 감격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삶이 되기 바란다. 우리가 행할 때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리라 믿는다.
출 4: 10-17절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들의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앞에 놓여진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시대를 탓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장벽은 바로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두려움입니다.
가나안땅의 비전 또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혓던 10명의 정탐군들에게는 하나님의 꿈이 아닌 두려움이 가득한 재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임을 기억하고 올해의 비전에 도전합시다.
가장 큰 장벽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생각을 싫어하십니다. 심지어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의 때도 선지자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렘29:11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가 부딪친 삶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괴롭고 답답해도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고후4: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셔도 인간의 연약함이 스스로를 부정적인 생각속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이 모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80세의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제국의 지배자 바로를 상대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부르심은 모세를 일어서게 하지 못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감춰져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을 보면 80세의 노인이요, 40년동안 그가 한 일이라곤 처갓집의 일을 돕고 양을 친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200만명쯤 되는 백성을 이끌고, 더구나 바로가 다스리는 애굽 땅에서 바로를 상대로 그의 백성을 이끌고 나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바로를 상대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비전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스티브 아터번은 <누가 변화를 꿈꾸는가? Flash point>란 책에서 두려움의 실체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아들 조셉 나폴레옹은 어렸을 때 병사들이 옆에서 대포를 발포하는데도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겁을 먹지 않고 용감하게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바다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하가 하루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려고 그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어린 왕자는 겨우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후에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내어 ‘포성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왜 바다를 두려워하느냐?’고 묻자 이 소년은 말했습니다. “병사들이야 내가 명령하면 내 말을 따르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통제의 영역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도 꿈을 꿀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전을 이루려면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밀당을 하는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도전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모세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새해의 비전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바로 그점을 파고 듭니다. ‘너는 안돼’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너를 봐, 그런 비전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죠. 그래서 포기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의 비전을 이루는데 지금 내 모습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점을 모세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노력하십니다. 모세는 끝까지 자신의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설득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래 네 모습을 보니까 넌 안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세야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서 낼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없어"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가 이방왕의 신하가 된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사람은 너 밖에 없어”라고 말씀합니다. 소심하게 포도주 틀에서 먹을 양식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그래 미디안족속에게서 나라를 구할 사람은 너 밖에 없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 여호수아에게 ”그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시죠. ”성가대 지휘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 교사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밖에 없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니까!’라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모세의 응답은 부정적인 것 뿐이었습니다. 무려 6번이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포기하려고 하니다.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를 보낸 분이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네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내게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래도 안되자 지팡이로 뱀을,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함으로서 눈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여전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론까지 그에게 도울 자로 붙여주었지만 모세는 끝까지 못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번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끝까지 부정적인 생각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스누피라는 4단 만화 가운데 한 남편이 매사에 부정적인 자기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습니다. 작가인 부인은 어떤 주제로 글을 쓰든지 항상 글의 첫머리에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라고 문장을 시작합니다. 보다못한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좋은 글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써보지 그래?”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 데요?” “음,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하면 어떨까?” 부인이 남편의 조언을 좋게 받아들여서 큰마음을 먹고 첫 문장을 다시 썼습니다. “옛날 옛적에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큼 뿌리가 깊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끝까지 모세를 설득하셨을까?”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일을 맡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고 도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겠다고 말하는데도 못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세상에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사람이 모세밖에 없는 것처럼 모세에게 집착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세를 포기했더라면 우리는 모세를 못난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목동으로 죽어간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모세를 설득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이 세상에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이 세상에 그 여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애굽에 있던 60만명의 장정 가운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에 매달립니다. 이 마음의 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긍휼히 여기지 않았더라면 그를 내치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고통과 슬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들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이끌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달래고 을러서 가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모세는 장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4:18절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모세는 애굽에 가는 목적을 출애굽이 아닌 형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축소시킵니다. 이 말씀의 뉘앙스를 깊이 생각해보면 모세는 장인이 막아주기를 기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모세의 기대와 달리 유달리 믿음 좋은 장인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합니다.
한번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깃들면 그 생각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도자가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희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희망은 금방 절망이 되고, 실패의 밑거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4:19절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이렇게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의 실체를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중학생때 반에서 1번이었습니다. 겁도 많고 소심했는데 주사를 맞는 일에는 가장 먼저 맞았습니다. 누가 맞고 아파하는 걸 보면 주사맞기가 더 싫으니까 제일 먼저 나가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런 나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가 우리반 2번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끝까지 이리저리 피하다가 마지막에 주사를 맞았죠. 한번은 제가 짖궂게 그 친구를 끌고 먼저 나가 주사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끌려나와 주사를 맞은 친구는 주사맞는 시간 내내 웃더라구요. 두려움은 직면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는 풀무불 큰 화로를 앞에 두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으로부터 마지막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금신상에 절하면 목숨을 살려주리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 순간 이 친구들은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단3: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어진 그들의 대답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대로 죽겠습니다.”
왕은 분노했습니다. 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놓는데 이들의 태도는 뜻밖이었기에 왕은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승진과 밥줄을 죄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좋은 학교를 갈 수 있을까?’ ‘‘어떻게 먹고 살까?’ 앞날을 두려워합니다.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뛰어드는 일은 좀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처럼 할 수 없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의 두려움을 아셨던 것처럼, 우리의 두려움을 아십니다.
강아지를 두려워하는 한 어린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 강아지가 가까이오기만 해도 기절할 듯이 울었습니다. 어느날 아빠가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강아지 곁으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아지에게 자기를 물면 혼내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자기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빠가 자기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그리고 크게 사랑하시는 줄을 안다면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요일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게 할 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