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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부활에 대한 올바른 자세/ 고린도전서 15:5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묻힐 경우 비용은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150달러면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 처리해 미국으로 가져가는 방법인데, 번거롭기도 하고 비용도 5만 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5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약 6천6백만 원이나 됩니다. 남편은 고심 끝에 비용이 들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이스라엘 땅에 묻히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참 불행한 가정생활입니다.
오늘 설교는 “부활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활에 반대하는 여러 이론들이 있었습니다. 시체도난설, 무덤 오인설, 기절설, 환상설, 신비설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진리로 믿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드립니다. 신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말씀이 204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막 10:33-34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냈고 무덤 문은 돌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총독의 명령에 의해서 로마의 군인들이 철통같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신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붓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니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여자들 곁에 서서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여자들은 이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보니 세마포만 보이고 예수님과 천사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미국 교회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다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너희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말해 보아라.” 학생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을 가장 존경합니다.”, “워런 버펫을 좋아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모두 각각 자기가 좋아 하는 사람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그 학생의 손을 붙들어 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말하라고 그랬잖아?” 그 학생이 손을 다시 올리며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 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약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려고 기도할 때에 주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자신들과 대화를 나누시던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셨고 그들에게 자신의 못 자국 난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 도마라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도마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손을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에 넣어보고 옆구리를 손가락을 넣어 봐야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에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못 자국 난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서야 주님에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그물들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희미하게 날이 새어갈 때 어떤 분이 해변에서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으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굉장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주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물로 뛰어들어서 헤엄을 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500여명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처형하려고 하는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햇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고 사울은 그 충격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주님을 만나 후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금식했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머리에 안수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보내는 ‘빌라도 보고서’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튀리키예에 가면 성소피아사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다 연구해 보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더 명확하고 확실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주님의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거짓 이야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거짓을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당시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가 되었으며, 후에 야고보서를 기록하였고, 결국은 그도 부활의 주님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모든 사람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살전 4:16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는 자들이 먼저 부활합니다. 나무나 식물들이 다 죽는 것 같지만 씨앗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도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믿는 사람들은 부활합니다.
고전 15:42-44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 몸은 썩을 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요즘은 돈 많은 사람들 중에 육신을 입고 영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동차 부품을 교체하듯이 몸이 고장나면 고장난 부분을 교체하며 영원히 살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헛된 욕심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날에는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됩니다. 사람의 육신은 욕된 몸입니다. 그런데 그날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삽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부활의 날은 우리에게 참된 만족의 날입니다. 그때는 눈물 흘릴 일이 없습니다. 슬픔도 없습니다. 질병도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누리며 영생할 것입니다.
유난히 질문이 많은 아이가 가족과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빠! 저건 뭐야?”, “응, 콩 심는 것이란다.”, “저건 뭐야?”, “고추.”, “아! 고추를 심었구나. 저건 뭐야?”, “벼를 심고 있단다.” 가족들이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길을 가다가 공동묘지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또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는 곳이지.”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맞습니다. 공동묘지는 사람을 심는 곳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심는다는 말은 다시 싹이 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공동묘지에서 믿는 사람들이 다시 날 것입니다.
때가 되면 불신자도 부활하게 됩니다. 불신자의 부활은 영벌의 부활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백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을 위하여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불못에 던져지는데,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계 20:15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위하여 부활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집니다. 우리는 사람의 부활을 믿습니다.
3.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나머지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들도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며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려고 못자국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니 너무 기쁘기는 한데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주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눅 24:48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신 목적 중에 하나는 성령 받은 사람들을 증인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행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이 되려면 먼저 봐야 합니다.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증인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손으로 만지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고, 손으로 만지지도 못했고,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도 못했는데 눈으로 본 것처럼 믿어집니다. 손으로 만진 것처럼 믿어집니다. 주님의 음성을 귀로 들은 것처럼 믿어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본 것처럼, 만진 것처럼, 들은 것처럼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증인의 삶은 가벼운 삶이 아닙니다. 무거운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증인은 재판에 나아가 자기가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증인이라는 말은 μάρτυς(마르튀스)라고 하는데 ‘죽음으로 증거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형수가 곧 처형당하게 되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증인이 나타나서 “이 사람은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증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만약 가짜로 증언하다 들통나면 사형수도, 증언한 사람도 같이 죽었습니다. 그때는 증언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는 말은 신앙생활에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여가생활이나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심심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아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인된 삶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4. 우리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5:58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여기서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이란 확고부동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큰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음의 자리에 갔을 때에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순교도 받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확고부동한 자세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고 자신들도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보면 작은 문제들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자세를 포기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문제 때문에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 때문에 흔들립니다. 심지어 목회자가 맘에 안 들어서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 했었는데 생활이 좀 더 좋아지니 세상에 취해서 흔들립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계속해서 흔들리는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론은 합력하여 선을 우리는 것입니다. 결론은 승리입니다. 결론은 영생입니다. 결론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 때문에 신앙이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3일의 비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항상 웃고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악조건이 몰려 와도 침착하고 평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항상 웃고 항상 평안한 비결이 있나요?”, “나는 3일의 비밀을 알아요!”, “3일의 비밀이 무엇인가요?”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3일을 조용히 기다리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러나 3일을 조용히 기다리고 나니 부활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저는 그 믿음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죽음 후에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주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942년 11월 28일에 세계적인 대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 동부의 도시 보스턴이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보스턴 대학(Boston College) 미식축구 팀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지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해 지역 리그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던 보스턴 대학은 이 날 열리는 마지막 한 경기만 이기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은 홀리 크로스 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과의 경기뿐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져 본 적이 없었던 보스턴 대학과는 달리 홀리 크로스 대학 미식축구 팀은 그 해 성적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긴 게임보다 진 게임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보스턴 대학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스턴 대학의 코치와 선수들 중에는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게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반부터 홀리 크로스 대학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보스턴 대학 선수들과 응원단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워낙 강팀이었고 역전의 기회는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보스턴 선수들은 몸이 무거웠고 한 번 뒤지기 시작한 점수는 쉽게 좇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12대 55. 리그 최강이던 보스턴 대학의 참패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실망에 빠졌습니다. 경기 후 선수들은 서둘러 해산했고, 응원단도 말없이 각자 집으로 흩어졌습니다. 선수들과 스텝들, 학교 동문들과의 축하 파티를 위해 인근 나이트클럽을 예약해 두었던 보스턴 대학 측은 파티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 경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선수들은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는데, 그리고 기도했는데, 자신들이 정상에 서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는데,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선수들은 그 날 밤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결과를 주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원치 않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음 날, 1942년 11월 29일 아침 주요 신문들은 ‘시내에서 대형 화재. 수 백 명 사망’이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전 날 밤 ‘코코넛 그로브(Cocoanut Grobe)’라는 보스턴 시내의 대형 클럽에서 불이 났는데 492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클럽은 전 날 보스턴 대학이 경기를 이긴 후 축하 파티를 열기 위해 예약했다가 취소했던 바로 그 클럽이었습니다. 그날 경기를 이겨 거기에 갔다면, 그들은 파티를 했을 것이고 그들도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다보면 이해되지 않은 일들,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어떤 것에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확고부동한 신앙의 자세로 서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에 따라 살면 결국은 승리합니다. 결국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프지만, 지금은 눈물이 나지만, 지금은 서럽지만, 훗날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고 간증거리가 될 것을 믿으시기고 절대 확고부동한 자세로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5.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고전 15:58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주의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군을 세울 때 어떤 분들은 자기가 먼저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거절하시는 분들에게 “이번에 하시지요”라고 권면하면 거절하시는 분들의 답변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요.”, “해 본적이 없어서요. 나중에 할게요.”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런 답을 하시더군요. “여러분, 해 본적이 없어서 못하십니까? 초등학교 입학 해본 후에 다시 입학합니까? 뭐든지 한번 해 보고 다시 해봅니까?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이든지 다 처음 하는 것입니다. 안 해본 것을 하려면 무엇이든 어렵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두려워 말라는데,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기도해 보고 하겠다’고 하는데, 기도해 보지도 않고, 하지도 않을 거면서, 하기 싫으니까 ‘기도해보고 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의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날을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학교 법대 출신으로 시카고 트리뷴(The Chicago Tribune)지에서 법률부서 편집자로 일했던 리 스트로벨(Lee Strobel)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는 철저한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는 누구의 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적어도 두 가지 증거를 확보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에야 기사를 실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일단 확인해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그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사이비 집단에 빠져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건져 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그는 윌로우크릭교회(Willow Creek Church)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님의 ‘기독교의 기초’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자기가 기독교에 대해 오해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체계적으로 조사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전공한 언론학과 법학을 기초로 해서 영적인 탐구에 나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든 종교와 인생의 의미가 한 가지 핵심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리 스트로벨은 부활의 증거를 찾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9개월이 지난 어느 주일에, 수많은 부활의 증거를 모아둔 노트 앞에서 단단했던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에 오히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1년 11월 8일.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그동안 제 삶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삶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실 저는 헤아릴 수 없는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저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길로 행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저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최선을 다해 믿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저의 삶을 인도하여 주소서. 이 순간 이후로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전의 길에서 돌이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제부터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리 스트로벨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첫째, 이전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 이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의 일에 힘을 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