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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시 모음-대회용시-김태근 추천시 23편
-하동 박경리문학관에서 5월 7일에 개최되는
<전국 차시낭송대회시>참가 하실분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이해인
차 한잔 하시겠어요
사계절 내내 정겹고 아름다운
이 초대의 말에선
연둣빛 풀향기가 난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
설렘을 진정시키고 싶을 때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우리는 고요한 음성으로
“차 한잔 하시겠어요?” 한다
낯선 사람끼리 만나
어색한 침묵을 녹여야 할 때
잘 지내던 친구들끼리 오해가 쌓여
화해의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도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 한잔 하시겠어요?” 한다
혼자서 일하다가
문득 외롭고 쓸쓸해질 때도
스스로에게 웃으며
“차 한잔 하시겠어요?” 하며
향기를 퍼올린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이 말에 숨어 있는
사랑의 초대에
언제나 “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커피포트
양곡
물을 끓인다 차를 끓인다
벗은 나에게 술 보다는 차를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태생으로 술에 약한 나를 위해
먼 길을 머다 않고 벗은 날아와
커피포트 하나를 선물로 사주고 갔다
혼자인 채로 가끔 나는 커피포트에
차를 끓인다 우정을 끓인다
끓인 물에 차가 우려질 동안
벗과 지내온 세월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차 한 잔을 마시다가보면 벗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벗의 건강을 염려해 보기도 한다
함박눈이 뭉텅뭉텅 쏟아지는 오늘 같은
오후에는 하얗게 어두워지는 허공 쳐다보며
하염없이 어두워지는 하늘 쳐다보며
물을 끓인다 우정을 끓인다
찻잎 말리기
최영욱
잘 비벼져 말린 찻잎을 털어 너는 것은
고행이자 수행이다
뒤틀린 것을 펴는 것은 상처를 덧나지 않게
갈무리하는 것이라서 그래야만 맑은 향을 얻을
수 있는 거라서 잘 펴서 맞는 온도에 너는 것이다.
두껍게 널면 숙성 시간이 길어져 차맛이 탁해지고
너무 엷게 널어 숙성의 시간이 짧아지면 그 깊은 맛이
없어질 터라서 수행처럼 고행처럼
묵묵히 차분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여
젖은 몸을 옹그려 더욱 옹그려 바스락거릴 때
그들을 거두는 것인데
그것들은 제 향을 자랑하지 못해
서로가 서로를 부르며 바스락거리며 웅성거릴 때
살며시 다독여서 밀봉되어야만 하는데 그 안쓰러움은
기다림 같은 것일 터인데
제 몸을 피워 사람들을 당길 날을
숨죽여 기다려도 보는 것일 터인데.
차 맛내기 - 加香
최영욱
상처 난 몸들을 다시 솥 안에 넣을 때는
화상에 조심해야 한다.
데이지 않게 타지 않게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그들의 상처 난 몸들을
쓰다듬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솥 안에서 숨죽였던 향들을 피워 올리다가
서서히 제 몸의 향기를 안으로 갈무리하는데
어느 순간
향이 멈춘다
향이 멎는다
이 순간은 화엄 같은 시간이라서
그들은 뜨거움과 비벼짐과 말림과 밀폐의 고통을
마침내
끝내는 것인데
허나 아직은 내 몸을 풀어 향을 피울 때는 아니라서
몸을 풀 시간을 기다리며 한 줌씩
다시 포장되는 것이라서
내 향을 피워 사람들의 마음을 뎁힐 시간은
아직 먼 시간이라서 가만히 숨죽이는 것이다.
차 우리기
최영욱
다관에 물을 붓는다
식히지 않은 끓는 물을 붓는다
그것들은 뜨거운 물속에서
진저리치는데
진저리 치면서 향을 피우는데
그 향은 멀고도 가까워서
안쓰러운데
툭 투둑 몸서리치면서
제 모습들을 찾아가는데
말렸던 몸을 펴는 것인데
상처 같은 것을 펴는 것이기도 할 터인데
나는 홀로 그 향이 쑥쓰러워
살며시 고개를 틀기도 하다가
그만 향에 홀리고야 마는데
무엇엔가 홀리면 염치를 잃는다는 것
그 말은 다향 같은 말이라서
늘 세상에도, 그 향기에도 져야하는 것이다.
살청으로 푸른빛을 얻다
권현형
푸른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살청(殺靑)이라는 말이 놀라웠다
무쇠 솥에 찻잎을 덖어서 맛보는 자의
사지가 부드러워지고 혀의 독(毒)이 빠지는 순간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를 말함이라면
껍질 안에서 이미 딱딱해져 있거나
아직 몸이 촉촉한 강낭콩의
푸른빛을 벗기고 앉아 있을 때
모처럼 둥근 고요가 양푼 가득 찾아오듯이
대청 아래 묶인, 흰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짐승의 시간을 지나는 것이라면
무연하게 깜박이는 흰 빛을 말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겁게 시퍼런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
어두워져가는 악양의 무쇠 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저녁 해가 손바닥만큼 남은 빛으로
지리산 골짜기의 광활한 비의를 거둬들이고 있다, 살청이다
화개(花開)
도종환
찬물로 얼굴 씻고 쪽문 열고 나가니
백매화가 엷은 새벽의 가지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오디주 한 주전자와 큰 대접에 찻물을
가득 담아 건네주고 간 처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어장애가 있는지 말을 잘 못하면서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알아듣게 하려고
애를 쓰는 처자에게서 산복숭아꽃 향이 풍겨나왔다
칠불사로 가는 이 골짝에 들어온 지 스무 해
혼자 사는지도 그 절반은 되었을 거라는 안주인은
동생이 죽어 어제 고향에 갔다고 했다
관향다원(觀香茶園)
관세음 아니라 향기를 통해 세상을 관하는 이와
차 한 잔 하고 싶어 지었을
이름 예사롭지 않은 민박집 아래로
십 리 이십 리 벚꽃이 피어 화개는 꽃으로 출렁거렸다
우리 속에도 출렁거리는 것이 많아
밤 깊도록 우리가 지닌 세속의 칼 그 양날에 대해
오랜만에 속맘을 털어놓던 도반도
일찍 깨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붓 들어 내 남은 날이
섬진강 모래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화심에 수백 만 개 향기의 촛불을 켜들고도
화려하기보다 은은한 벚꽃처럼 살 수 있기를
며칠째 비어 있는 방명록 여백에 적었다
백매도 산벚꽃도 가만가만 숨을 쉬는
사월 아침 화개 관향다원에서
하동 시편
정희성
봄이 뭍으로 와서 맨 처음 발 디딘 곳이
섬진강 하동초구 어디쯤일까
섬진강 하동초구 팔십리길을
하루는 말고 한 닷새쯤 걸어봤으며
꿈길 같은 그 길로 바람이 불어
벚꽃이 수천수만 소쿠리 지고 가면
배꽃이 또 수천수만 소쿠리 피어나던 것을
최참판댁 뜨락에 수북이 부려놓고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퍼가라고 눈짓하듯이
그 녘 인심이 그렇게 넉넉한 건지도 몰라
언젠가 진주에서 술대접 좋이 받고
거나하게 취하여 이 길을 지나더니
다주불이라고 술 대신 내어놓은
야생차 그 맑은 향기에 정신이 들던 것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들여
햇 봄 묵은 정 다 퍼주고서는
그만 혼자 쓸쓸해지는 평사리 봄밤 같은
벗이여 우리네 삶이 녹차향만 하던가
벗이여 우리 삶이 녹향향만 하던가
인생의 맑은 차 향기가 되라
정호승
등을 달아라 봄바람이 분다 / 등불을 밝혀라 봄비가 내린다
손을 잡아라 섬진강과 함께 / 춤을 추어라 지리산과 함께
지금은 하동 차나무에 새움이 돋는 거룩한 시간
푸른 빗줄기 사이로 찻잎도 푸르다
지리산은 아들을 키우듯 야생의 차나무를 키우고
섬진강은 딸을 낳듯 하동녹차를 낳는다
바람아 불어라 등불을 밝혀라
지금은 우리 모두 만등헌다의 성스러운 시간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마음의 귀를 열어라
우전이 빙그레 미소 짓는 소리가 들린다
일찍 일어나 소나무에 앉은 아침의 어린 새들처럼
노래를 부르는 세작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중작이 어머니처럼 토닥토닥 자장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대작이 아버지처럼 천천히 논길을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차를 끓여라 하동의 왕의 녹차를 끓여라 / 차를 들어라 녹차의 왕을 들어라
하동녹차 속에는 풍경소리가 들어 있다
하동 녹차 속에는 지리산을 넘나드는 흰구름이 들어 있다
하동녹차 속에는 지리산을 휘감아 도는 섬진강의 강물소리가 들어 있다
보라 쌍계사 부처님도 하동녹차를 드신다
하동녹차를 드시고 빙긋이 웃으시며 말없이 말씀하신다
차 한잔을 하면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차 한잔을 하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차 한잔을 하면 남의 허물이 내 허물로 보이고
차 한잔을 하면 누구나 부처님으로 보인다
지금은 천년 세월이 천년향으로 우러나오는 고요한 시간
여기 차의 고향 하동에서
천년 고요의 차향기를 맡아라
고단한 인생의 맑은 차향기가 되라
삼월 눈 속에 차를 마시다
박남준
산에 들에 꽃들 저만큼 노란 생강나무꽃 여기 분홍 진달래꽃 피어나더니
비바람 불고 우박, 진눈깨비, 함박눈 퍼부어댄다
사람 사는 일도 때로 그러하리
뜰 앞의 청매화꽃 홀로 피어 그 눈보라 다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찻물을 달여 설중매 한 송이 차 한 잔 마시네
남실 기울이는 푸른 찻잔에 바람과 구름과 별빛
청춘의 여름이며 노을 붉던 가을
폭설의 지난겨울이 파랑을 이루며 찰랑거리네
문득 풍경 한 편을 떠올려보네
살아 지은 죄 안고 다시 돌아가는 날
한 그루 어린 나무 아래 누워야겠다 생각하네
그 나무의 가지가 되고 푸른 잎이 되어
새들의 노래에 귀기울여야겠네
사과나무라면 사과꽃을 피우겠지
감나무라면 붉은 홍시를 꽃등처럼 내달겠지
고운 꽃의 향기라면 바람 불러모아 구석구석 나누겠네
가지마다 익어간 열매들로 어느 가난한 아이의 배를 채우겠네
살아서는 다 쓰지 못한 나의 시 한 편
나 그때서야 한 그루 나무의 꽃으로 세상에 전하겠네
-시집<<적막>>(창비)
어떤 제다법(製茶法)
복효근
전주에 가면 다문(茶門)이라는 찻집이 있어
그 쥔장은 야생차를 고집하는데
그 냥반 따라 순창 회문산 야생차를 따러 갔다
여린 찻잎 다시 말하면 차의 잎 / 차의 입, 차의 입술
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차나무의 입을
그 야들야들한 갓난아이의 입술 같은 찻잎을
잔인하게 또옥똑 따는 것을 보고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어린 잎순들을 달구어진 가마솥에 넣고 덖어서
꺼내어 덕석 위에 쏟아 놓고 / 손으로 부벼서 찻잎에 상처를 낸다
찻물이 잘 우려나오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러기를 아홉 번이라
아아 잔인하고 모진 제다법이여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차를 시음해보시라
갓 만든 차를 다관에 담고 물을 붓자
영영 죽어버린 줄 알았던 찻잎들이
잘 익은 물 속에 / 제가 마신 회문산의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다 풀어내 놓는데
아홉 번의 가마솥 모진 연단을 연록색 향기로 빚어내 놓는데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초나무에 매달렸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
물고기처럼 다관 속에 노니는데
그 차를 마시고도
그 찻잎의 흉내를 한 자락이라도 내지 못할 량이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다시는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염치(廉恥)
최영욱
茶잎 따는 날이면
어김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착하고 어린잎들을 키워낸
저 큰 산에 엎드려 한 번 절하고
다시 그 착한 잎들에게 용서하라 용서하라
무릎 꿇습니다.
허나 절을 하고 무릎을 꿇으면서도 그 어리디
어린잎들의 목을 툭툭 끊는다는 게 여간
힘들고 미안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로 인한 香이 여러 고운 이들의 몸을 감싸고
너로 인한 국물이 여러 설운 이들의 몸을 덥혀
妙用이 일어날지니
어김없이 올 봄에도 茶밭에서 절하고 무릎 꿇을 것입니다
용서하라 어린 찻잎들아
부디 용서하라
우리 주고받은 곡조 짙은 상처들아
어디 香 좋은 茶 한잔 마주하시거든
절 아니래도 무릎 꿇지 않아도 좋으니
머리 숙여 합장 한 번은 어떨까 싶습니다.
뜨거움에게
김남호
너무 뜨겁지는 말아야 한다
뜨거운 것은 불안하다
그 열기도 두렵지만
결국은 식고 말 거라는
그 체념이 더 두렵다
식기 위해 잠시 뜨거울 뿐인데
호들갑스러울 건 없다
너무 식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식어 가는 것은 우울하다
모두 떠나고 달랑 하나 남은 그림자,
그림자는 우울하다
그러나 두려워 할 건 없다
식어 차가운 건 모두
뜨거워 깔깔거리는 것들의 미래!
적당한 그리움으로 따뜻하거나
적당한 외로움으로 차가울 때
찻잔 속의 너를
한 모금 한 모금 지우는 거다
쌍계사에서 차(茶)를 마시며
설송 정상구
안개 속 꽃 입김
오솔길 넘어
뻐꾹뻐꾹 / 뻐꾸기가
산울음 토한다
하늘 헤집는
아지랑이 바람 / 아이라이
겨울고개 넘어
초록색 눈동자로 / 여무는데
아 / 나는 / 쌍계사 주지방에서
지하(智霞) 스님과 / 함께 차를 마신다
가슴으로
흘러드는 / 빛 한 줄기
머얼리 구름 속
초의선사가 / 손짓한다
웅숭깊은 / 신라의 꽃
김대렴(金大廉)의
차씨 심는 삽소리
은은한 종소리와 함께
향내로 이어지는 / 노을녘
자비의 사명(四溟)망루 / 한 가락 실을 던지며
서산대사가 방문을 연다
하동 땅 화개골에서
정공채
오늘 마침 신미초하(辛味初夏) 긴 가뭄 끝에
반갑고도 고운 초여름 비가 줄줄이
우리나라 남녘에 복되게 내려주고
나는 고향 땅 하동 지리산에서
쌍계사 차의 시배지
깊은 화개동천 서러운 길가
반야원(般若苑) 작은 객다점(客茶店)에 주저앉아
마알갛고 조요로운 죽로 받은 작설차
그 떫은 담미와 청향을 삼킨다.
혼자서 몇 잔째 비에도 젖은 마음
담소도 그리워하며 마신다.
조선창살 너머 화개옥류(花開玉流) 건너면
산자락도 길게 펼쳐진 장죽다전(長竹茶田) 위로는
오, 짙은 비안개냐 내려깔린 운무(雲霧)냐.
오오랜 자생다목( 自生茶木)밭 가득히 덮치며
신라적 아득한 손길로 매만지듯 하구나.
지리산 화개차
정영자
세상의 어지러움
차 향기에 사라지는
지리산 화개마을
찻잎 따서 바쁜 봄 날
잔잔한 그리움도
꽃이 될 수 있었네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 따라
오백 단 높은 구름
칠불암에 이르면
좋아한들 기다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새잎 녹차
부드러운 것
덕석 자리 위에 비비고 비비는 뜻은
상처 속에
향기로움 있었나니
물소리 청아한 초록 숲 계곡에는
얼룩진 세상의 때 무너져 흐르고 있었네
야생차를 마시며
최금녀
지리산 자락에는 차 끓이는 냄새가 난다
산 깊은 곳 맑은 곳에서
야생차 한 잔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입안이 달아오른다
눈 쌓인 토치카에서 마주친
열일곱의 눈망울과
자욱한 피보라 계곡의 스케치가
목으로 넘어간다
목에서 가슴으로 넘어간다
불길로 울먹이며 넘어간다
바람소리에 따끈한 물 부어
다시 우려내어
단번에 마시고 나면
바람은 어느새 달아나고
어디서 산새가 더 깊은 맛으로 운다
산새소리 잔에 남아 우러나고
이 겨울 지리산에서
저희들끼리 몸 비비는 바람소리 들으며
야생차 그 깊은 맛에 취해
산새와 단둘이
한 잔 또 한 잔,
다심(茶心)
김필곤
사십대(四十代) 인생의 허허한 적막을
술로도 명예로도 어쩌질 못해
모든 걸 훌훌 털고 청산에 들었네
눈알이 핑핑 도는 생존의 도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둥거려 봤지만
얻은 것이라곤
피곤함과 쓸쓸함 그것뿐이었네
제아무리 애써도
꾀꼬리 같은 노래는 얻을 수가 없고
제아무리 살아도
풀잎 같은 인생은 살 수가 없었네
오늘은 그윽하고 깨끗한 청산에 들어
주인 없는 산나물에 청아한 솔바람
돌돌돌 석간수로 차를 끓이니
무심다(無心茶) 무심률(無心律)로 흰구름 돋네.
지나치지 않음에 대하여
박상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침 신문도 우울했다.
지나친 속력과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신념을 바라보며
우울한 아침,
한잔의 차는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케한다.
손바닥 그득히 전해오는
지나치지 않은 찻잔의 온기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는
향기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지나친 세상의 어지러움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세상의 빛깔과
어디 한 군데도 모나지 않은
세상살이의 맛을 생각한다.
ㅡ시집『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 문학아카데미(1997)
세작
윤의섭
더 이상 우려낼 게 없다
물갈이 몇 번 모든 향기가 사라진다
오늘도 후줄근하게 헹궈져 잠을 청한다
꿈이라도 쥐어짜낼 수 있을지 몰라
연거푸 물 먹고 허우적거리는 내게서
차츰 빠져나가는 지난날의 향기들
바짝바짝 우려내는 마른날의 향기들 내게서 멀리 떠나갔지만 이젠
너무 가까이 와버린 쓸쓸한 무취
아무 맛도 없는
퉁퉁 불은 몸뚱이를 뜯어먹힐 수밖에
그래도 주전자 속을 두둥실 떠다니며
더 이상 줄 게 없는 내 향기 살던 방에
마지막으로 한 차례의 뜨거운 폭포 같은 물을 쏟아 주오
희미한 너무나 희미한 살맛 찾아오르게
ㅡ시집『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문학과 지성사(1996)
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靑磁 茶器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잔의 茶를 들자.
ㅡ시집『神의 하늘에도 어둠이 있다』, 미래사(1991)
운림방(雲林房) 茶
허형만
흐르는 바람결에도 결마다
소리가 다르고
살포시 퍼지는 햇살에도 살마다
빛깔이 다르듯
끓이는 茶에도 茶마다
맛도 향기로움도 제각기 다르나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아는가, 雲林房 茶
지리산 화엄유곡
신새벽 이슬 머금은
화계차는 어떠하며
대흥사 청아한 독경 소리에
눈 트이고 귀 맑아지는
초의차는 어떠하며
무등산 눈발 속
수줍어 혀끝만 내민
춘설차는 또 어떠한지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아는가
雲林房 茶
ㅡ시집『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 지성사(1999)
녹차를 마시며
박영희
설명서에 쓰인 대로
설록차 한 스푼 찻잔에 넣고
물을 붓는다
꿈틀꿈틀,
찻잔 속은 누에들 천지다
짓눌린 몸 일으켜 세우느라 아우성이다
너를 기다리는 일도
너를 떠나보내는 일도
이만큼의 시간이었던가
참으로 삽시에
잊고 산 기억들 파릇파릇 눈을 뜨고
겨우 바닥을 채웠던 마른 잎들
다시금 되살아나고
어찌 기다림의 아픔 없이 목을 축이랴
어찌 목 잘리는 희생 없이 향기 있으랴
ㅡ시집『팽이는 서고 싶다』, 창작과 비평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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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