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전라남도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던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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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19:51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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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던 나주
동학농민운동 당시 나주에는 농민군의 발길이 세 번 닿았다. 황토현전투에서 크게 이긴 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을 거쳐 장성과 나주로 나뉘어 진출한 것이 그 첫 번째다. 당시만 해도 나주에서 농민군과 관군의 뚜렷한 접전은 없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부터 나주는 농민군과의 혈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때 나주와 남원, 운봉 세 곳만이 집강소 설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에 남원성은 곧바로 김개남 부대가, 운봉은 김봉득이 내려가 점령하였고, 오직 한 곳 나주만이 남았다. 그러나 나주에까지 집강소가 설치되었다고 믿었던 오지영은 1940년에 간행한 『동학사』에서 집강소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전라도 53주는 한 고을도 빠짐없이 모두 다 집강소가 설립되어 민간의 서정을 집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12가지 폐정개혁안을 실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관리의 문부(文簿)를 검열하며, 한편으로는 인민의 소장(訴狀)을 처리하며, 한편으로는 전도(傳道)를 힘쓰며, 한편으로는 관민(官民) 간에 남은 군기와 마필을 거두어들이고 집강소의 호위군을 세우고 만일에 경계하였다. 이때에 전라도에는 청소년까지도 거의 모두 도(道)에 들어 접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세를 따라 부랑자들이 한데 섞여 들어온 것도 물론 많았으며, 그로 인하여 온갖 부도불법한 일이 많이 생긴 것도 면치 못할 일이었다.
이로부터 세상 사람의 동학군 비평은 자못 분분하였다. 동학군들은 귀천빈부의 차별이 없다느니, 적서노주(嫡庶奴主)의 구별이 없다느니, 내외존비(內外尊卑)의 차별이 없다느니, 동학군은 국가의 역적이요, 유도(儒道)의 난적이요, 부자의 강적이요, 양반의 구적(仇賊)이요, 동학군의 눈 아래에는 정부도 없다고 하는 등 전라도 동학군의 기세는 날로 성하여 동으로 경상도가 흔들리고, 북으로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까지 뻗쳐 들어가는 모양을 보고 조선에는 장차 큰 변란이 일어나고 말리라고 수군거렸다.
나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동학농민군이 나주에는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야 순창 피노리에서 잡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그때 나주에는 ‘잘났다 오중문, 글 잘한다 오중문, 쌈 잘한다 오중문’이라고 하여 나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오권선이 접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주목사 민종렬이 거느린 나주성이 끄떡하지 않자 태인접주 최경선이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출한 것이 그 두 번째다.
최경선은 오권선과 합작하여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듣고 전봉준은 8월 14일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나주성으로 와서 동문으로 들어갔다. 전봉준은 관아에 들어가 나주목사 민종렬을 설득하였다.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합의하에 전라도 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단행하고 있으니 나주목사도 협조해달라고 하였으나 민종렬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민보군(民保軍, 양반과 부호 세력 및 향리들이 조직한 군대)은 전봉준이 성 밖으로 벗어나기만 하면 포를 쏘아 죽이려 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같이 온 부하 10여 명과 자신의 옷을 벗어서 주며 “이것은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옷인데, 몇 개월째 더위와 장마 속에 먼 길을 다니느라 땀과 때가 너무 끼었다. 바라건대, 당신들이 사람을 시켜서 빨아놓고 기다려 달라. 우리가 영암을 다녀오는 데 사나흘 걸릴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면 옷을 갈아입게 해달라”라고 하였다. 그 말에 민보군은 전봉준이 다시 올 적에 죽여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전봉준 일행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야 피노리에서 잡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갔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영암 내동리 쌍고분군
내동리 쌍고분군은 한 봉토 내에 대형 및 소형의 이음식 독널이 여섯 개 묻혀 있다. 하나의 봉토 안에 여러 개의 독널을 매장했던 사실은 가족묘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일상에 쓰이는 항아리로 만든 독널과 대형 전용독널이 공존하고 있다.
세 번째는 9월 2차 봉기 후 전봉준이 거느린 농민군이 삼례, 논산, 공주로 올라가고 김개남 부대는 남원, 청주로 갔을 때였다. 그때 손화중과 최경선 부대는 일본군의 나주 해안 상륙에 대비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가 패배로 막을 내리고 만 11월 말에 광주로 후퇴하여 해산하고 말았다.
금성산은 나주의 서북쪽에 위치한 나주의 진산이다. 호남정맥 입암산에서 시작하여 방장산, 문수산을 거쳐 영광 태청산에서 곁가지를 타고 내려오다가 우뚝 솟은 해발 451미터의 산이다. 네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남쪽은 다복봉(多福峯), 서쪽은 오도봉(悟道峯), 동쪽은 노적봉(露積峯), 북쪽은 정녕봉(定寧峯)이 주봉이다.
나주시내를 에워싼 정녕봉에 오르면 나주평야와 영산강이 굽이도는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곳 나주와 무안, 영암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장마 때마다 홍수가 극심했던 지역이다. 넓게 펼쳐진 다시평야, 나주평야를 비롯한 영산강가의 논밭들이 영산호를 막기 전에는 수해를 입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이 지역 사람들이 ‘광산 큰애기 오줌만 싸도 물이 넘친다’고 아우성을 쳤을까. 나주평야는 특히 가운데를 흐르는 영산강이 감조하천인 데다 하상이 높기 때문에 거의 매년 범람과 침수가 반복되었다. 관개시설이 불량하여 영산강은 더욱 가뭄의 피해가 큰 곳이었으나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으로 하구에 하구언을 축조하고 중상류에 댐을 막아 그 피해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곳 평야 지방에서 불렸던 노래가 바로 「나주 들노래」다.
[뜰모리]
바람 불고 해서리 올 줄을 알면
어리사 어떤 부인이서 따러를 갈게
저리사 어떤 부인이 허허
무슨 소린 줄 내 몰라
어리사 저리사 허 저리사······.
[장원질소리]
우리가 석양판 되얏으니
이제는 지심도 다 매고
소를 타고 우리 쥔네 집에 들어가서
닭마리 잡고 권커니 자커니
우리 농부 땀 흘리고 그랬으니
한 잔 걸게 먹고
권커니 자커니 합시다······.
나주의 영산강가에서 여기저기 바라보면 빛고을 광주의 무등산과 영암의 월출산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지척에 도사리고 있다.
나주곰탕 곰국에 밥을 말아 국밥식으로 낸 것을 곰탕이다. 나주곰탕은 전라남도 나주의 향토음식으로 나주에서는 약 20년 전부터 나주의 5일장에서 상인과 서민들을 위한 국밥요리가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나주곰탕으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던 나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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