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부오트
양피지는 불타 없어질지라도, 글자는 여전히 하늘 높이 솟아오릅니다.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에도 유대인의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양피지는 타버리고 생명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토라와 신앙의 영원한 글자들은 여전히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1년 전, 츠엘라 게즈와 남편 하나넬은 넷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중 테러리스트들이 그들의 차를 향해 총격을 가했습니다. 츠엘라는 중상을 입었고, 하나넬은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들은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대신 아들을 무사히 분만했습니다. 비극적으로도 츠엘라는 그날 저녁 늦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격이 일어나기 전,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 아기의 이름으로 마음에 둔 '라비드(Ravid)'라는 이름을 말해 두었습니다. 하나넬은 장남의 이름이 라비(Lavi)라 두 이름이 비슷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망설였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름다운 이름이라며 고집했습니다.
아기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동안, 하나넬과 그의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아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바로 ‘라비드 하임’이었습니다.
그날 바로 이스라엘 군은 이번 공격의 주범인 테러리스트를 추적해 찾아냈습니다. 작전 도중 테러리스트는 다시 총격을 가했고 곧 사살되었습니다. 그 후, 작전 지휘관이 하나넬에게 상황을 알리러 왔습니다. 아기의 이름이 지어졌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라비드 하임입니다.”
지휘관은 눈에 띄게 감정이 북받쳐 자리를 떠났습니다. 잠시 후 그는 돌아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 이름도 라비드 하임입니다.” 하나넬은 그를 껴안았습니다.
비극은 더욱 가슴 아픈 전개로 이어져, 아기 라비드 하임은 15일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하말라흐 하고엘(הַמַּלְאָךְ הַגֹּאֵל: 나를 구원하시는 천사)’을 불렀습니다. 이는 부모가 잠들기 전 아이에게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이럴 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이 산산조각 난 뒤에 과연 무엇이 남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유대인의 역사와 삶 속에는 슬픔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깊고, 파괴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라는 우리에게, 비록 신성한 것이 깨져버렸더라도 더 깊고 영원한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가르칩니다.
부서진 석판
모쉐가 두 석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유대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석판을 손에서 내던져 산 아래에서 산산조각 냈습니다. 현인들은 그 순간 이미 거룩함이 사라졌고, 글자들이 돌에서 빠져나갔다고 설명합니다. 석판은 부서졌지만 글자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인상적인 표현은 유대 문헌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탈무드는 로마의 토라 학습 탄압 당시 랍비 하니나 벤 테라디온의 순교에 대해 묘사합니다. 토라 학습을 금지하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개적으로 가르침을 계속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를 토라 두루마리에 감싸 불태웠고, 그의 고통을 연장하기 위해 젖은 양모로 그를 둘러쌌습니다.
스승이 눈앞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며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엇을 보십니까?” 언뜻 보면 이상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볼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묻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토라의 적들이 그것을 불태우려 할 때 토라는 어떻게 되는가? 파괴된 후 유대 민족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는가?
하니나 랍비는 그 후 유대인의 역사 전반에 걸쳐 메아리쳐 온 말로 대답했습니다. “양피지는 타지만 글자는 하늘로 솟아오른다.”
토라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양피지가 있고 글자가 있습니다. 물리적 형태가 있고 그 안에 담긴 영원한 영이 있습니다. 양피지는 타버릴 수 있고 돌은 산산조각 날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글자, 즉 사상과 가치, 믿음, 그리고 언약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물질 너머
아마도 이것이 샤부오트 명절이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토라를 받았다는 것은 결코 단지 돌판이나 양피지 두루마리를 손에 넣은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토라는 돌이나 양피지, 종이, 혹은 화면에 기록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그것을 담고 있는 물질 너머에 존재합니다. 물리적 형태는 변하거나 심지어 훼손될 수도 있지만, 토라 그 자체는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유대인들의 대대를 통해 계속해서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제국들은 유대민족을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성전을 파괴하고, 학당을 불태우며, 공동체를 추방하고, 여러 세대를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자들은 계속해서 솟아올랐습니다.
아마도 하니나 랍비 자신도, 석판은 산산조각 날지라도 글자는 살아남을 것임을 이해했던 모쉐에게서 힘을 얻었을지 모릅니다. 토라의 본질은 결코 돌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현인들은 모든 인간을 토라 두루마리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둘 모두를 위해 일어서고, 둘 모두를 위해 애도합니다. 둘 다 그 물리적 형태를 초월한 거룩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 또한 양피지와 글자, 즉 육체와 영혼을 품고 있습니다. 육체는 썩어 없어질지라도, 글자는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한 글자
히브리어로 “날아오르다(soar)”는 말은 꽃피고 자라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글자들은 단순히 파괴를 견뎌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 나아가고,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합니다.
이는 토라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유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gk나넬 게즈는 아내에 대해 “나는 천사와 결혼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치료, 트라우마 상담, 불안 치료, 정서적 지원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놀라운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녀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비극을 이겨내는 법을 그녀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는 츠엘라의 육신을 앗아갔지만, 그녀의 글은 여전히 하늘 높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녀의 친절, 신앙, 용기, 목소리, 그리고 타인에게 미친 영향력은 묻히지 않았습니다.
라비드 하임의 가슴 아픈 장례식에서, 그의 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의 꺾이지 않는 정신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샤부오트에 우리는 토라가 한 번 주어졌음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기념합니다. 토라를 배우고, 토라를 실천하며, 토라를 가르치고, 토라를 전하는 모든 유대인은 그 영원한 글자들의 일부가 됩니다.
지난 몇 년간은 전쟁과 상실, 그리고 고조되는 반유대주의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유대 민족이라는 두루마리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와 집, 심지어 공동체까지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글자들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그 글자들은 군인들과 애도하는 이들을 통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실의 순간에 ‘하말라흐 하고엘(הַמַּלְאָךְ הַגֹּאֵל)’을 부르는 부모들을 통해 계속해서 솟아오릅니다. 여전히 믿고, 여전히 배우고, 여전히 건설하며, 여전히 노래하는 모든 유대인을 통해 그 글자들은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토라의 약속이며, 그것이 바로 유대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By Rabbi Efrem Gold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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