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에 대한 모든 기독교파들의 해설이나 주석은 초월신관에 바탕이 되어 있으며, 최후의 심판이 그러한 초월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화적인 생각들이다. 그러나 기원 70년에 임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분석만 정확히 하더라도 그것은 초월자의 심판이 아니라, 국제 정세에 따르는 변화였다. 즉 그러한 재난이 인간의 관계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변화이지 절대자의 개입으로 상벌로써 보응과 보상을 심판하는 형식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누가 복음은 예루살렘 멸망이 일어나고 나서 15년여 후에 마가 복음을 베껴 쓴 것이나 다름 없다. 마가복음 역시 예루살렘 멸망 직후인 기원 71년 경에 씌여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이 예수에 의한 예언이 아니라, 어떤 재난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예측을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사건에 적용시킨 것이다. 물론 사도들과 제자들은 최후의 심판이 초월자에게서 온다는 신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최후의 심판에 적용시켜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깨어 자신을 살피고 자신에게 주의하라는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다. 진리는 어떤 시대나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나 시간에 관계 없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삶, 자신을 성찰하는 삶은 자신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 유익을 주는 선이기 때문이다.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자기의 보존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쾌락과 방종에 빠져, 자기에게 닥칠 재난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조차도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그런 길로 유혹하는 것이며, 곳곳에 덫을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반성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반성이란 꼭 회개를 의미하는 것 만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또는 자신을 적정 이상으로 과대 평가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과음과 과식으로 자신의 정신이 흩트려져 있지나 않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정세를 살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개인이 세계 정세를 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세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자신을 적정 이상으로 높이는 교만에 속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워치타워 법인은 '마지막 때'라는 답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춘 해석을 내릴 뿐이다. 진정한 소경인 것이다. 그런 엉터리 추측 해석을 통하여 사람을 모아 돈을 벌어보자는 럿셀의 사업에서 출발된 것일 뿐이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지 시한부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