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행진 계란 값의 비밀
유통업자들 '팔수록 손해' 비명
'거래 끊길라' 높은 산지 가격 감수
재고 쌓여 '20원씩' 손실 보고 넘겨
계란 부족 아닌 가격 결정구조 문제
지난 28일 경기도 화성의 한 계란 유통업체.
창고 문이 열리자 천정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계란판이 시야를 메웠다.
25년차 계란유통업자 김동원(60)씨는 창고를 둘러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김씨는 창고를 비우기 위해 계란 한 알당 20원씩 손해를 감수하고 물량을 처분해야 했다.
자그마치 계란 3만판, 90만개의 알이 쌓여 있던 창고를 한 차례 비웠다.
그런데도 재고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계란 더미 사이로 제게차가 분주히 오갈 때마다 창고는 조금씩 더 빼곡해졌다.
여유 공간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이날도 오전 11시와 오후 1시 두 차례 추가 물량이 들어와야 했다.
재고를 밀어내면 새로운 재고가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계란이 쌓여 힘든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어제 겨우 일주일 치 물량을 정리했는데
오늘 또 차 3대 물량이 들어온다.
이렇게는 버틸 수 가 없다'고 말했다.
최근 계란값이 크게 오르면서 소비자들은 '계란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간 유통 현장에선 계란이 남아돈다.
공급과잉인데 가격이 안 잡히는 상황이다.
국민일보가 방문한 현장에는 산란일이 일주일이나 지난 계란도 발견됐다.
계란은 생물이어서 오래 쌓아둘수록 상품성이 떨어진다.
여름철에는 신선도가 유지가 어려워 유통업체들은 통상 5일 안에는 물량을 소진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고가 일주일 가까이 쌓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계란이 이렇게 남아도는데 가격은 왜 안 떨어졌을까.
김씨는 '내리고 싶어도 못 내린다.
우리가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다'며 거래명세서를 펼쳐 보았다.
지난 24일 작성된 한 납품서에는 '왕란 242원, 특란 236원, 대란 231원 등 높은 산지가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날도 유통업체는 특란 한 판을 236원 기준으로 사들여야 했다.
산지에서 구매한 가격보다 비싸게 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공급량이 많기 때문이다.
마진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도 산지에서 236원에 사 온 특란 한판은 7030원이어야 한다.
중간 유통상인 김씨가 슈퍼마켓 등 소매 유통업체에 이 가격에 냐놓으면 거래가 안 된다.
그러니 손해를 보면서라도 판매한다.
밑지는 장사를 왜 하느냐고 물었다.
그에게도 이유는 있다.
김씨는 '안 팔면 창고가 꽉 찬다.
창고에 쌓아두ㅡ면 폐기해야 한다.
폐기나 손해냐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산지로부터 계란을 사지 않을 수도 없다.
생산자와 거래를 끊는 일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기 김포의 또 다른 계란 유통업체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전날 산란알이 오래 된 계란 약 1만판을 가공용(액란)으로 급히 처분했다.
한때 창고에 쌓인 재고는 2만8000판까지 불어났다.
평소 하루 5000판 정도 나가던 물량이 최근에는 3000만 판 수준으로 줄었다.
'계란 생산 농가가 갑...손해 보더라도 계속 거래 불가피
유통업자들 '팔수록 손해' 비명
업체를 운영하는 최창열(59)씨는 '7~8월은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 우너래 국내 계란 소비가 줄긴 하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후러씬 심각하다'며 '계란이 넘쳐나는 탓에 유통업체만 중간에서 손실을 떠안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산지가격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가에서 높은 가격에 사들인 계란은 마트에서 제값을 받기 어렵고, 유통업체는 이윤을 포기하거나 손해를 감수하며
물량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계란이 남아돈다면 중간 유통업체가 일정 기간 계란 공급을 받지 않으면 되는 문제 아닐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비지 않다.
유통업체들이 당장 물량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농가와 고나계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 인하 요구도 마찬가지 이유로 선뜻 하지 못한다.
최씨는 '가격을 내려 다랄고 계속 이야기하지만 농가에서는 '안 사면 다른 유통상에게 주겠다'며
'거래가 끊기면 추석이나 명절처럼 계란이 부족할 때 다시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매점과의 거래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소매점은 수십 곳의 유통업체와 동시에 거래하는 만큼 공급과잉 상호아에서 가격 결정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계란 소비가 평소보다 다소 줄어든 데다 수입란까지 시중에 풀리면서 비싼 국내산 계란을 충분히 소화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결국 농가와 소매점 사이에 낀 중간 유통업체가 이윤을 포기하거나 손해를 떠안고, 동시에 소비자는 비싼 값에 계란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통인들끼리 사정을 봐주기도 한다.
김씨가 보여준 거래 내역 중에는 다른 유통업체로부터 계란 1044판을 한 판당 6330원에 넘겨받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김씨는 '이건 다른 유통업체가 물량이 너무 많아 감당을 못해서 우리에게 넘긴 것'이라며 '일종의 품앗이인데,
오늘 내가 받아줘도 내일은 내가 부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품앗이가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다른 창고로 옮겨졌을 뿐 결국 팔리지 않으면 다시 누군가는 손실을 봐야 한다.
김씨는 '당장은 서로 손해를 줄이기 위해한 교육직책'이라고 말했다.
여름철 폭염도 악재다.
국민일보가 이날 방문한 유통업체 창고에서는 대형냉방기가 20도를 유지한 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계란은 기온이 높을수록 품질 관리 부담이 커진다.
김씨는 '겨울에는 며칠 더 버틸 수 있지만 여름에는 창고에 오래 둘수록 마음이 급해진다'고 말했다.
유통업체들은 일상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최씨는 '지금은 계란이 남지만 다시 공급이 부족해지면 결국 농가가 우위에 선다'며 '한 번 거래가 끊기면 다시 물량을 받기 어려워
손해를 보더라도 계속 거래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유통업체 끼리 며찰만 물량을 안 받으면 가격이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먼저 거래를 끊었다가 자기만 손해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집단행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손실이 누적되면서 버티지 못하는 업체도 나오고 있다.
김씨는 '주변에서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하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간 곳이 있다'며
'다음은 네 차례가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화성.김포=글 이누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