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살아?" 2년 만에 만난 친구, 승우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우리도 이제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을 쓸 때가 된 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승우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어 요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던 승우의 질문은 그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라서 나는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을 했다. "나 용돈 받거든. 그걸로 이것저것 사는 재미에 살아. 이 신발도 용돈 두 달 모아서 산 거고." 말을 하고 나니 아마 승우가 예상했던 답은 아니겠다 싶었다. 아이 키우는 재미나 부동산 재테크 같은 소재를 기대했을지 모르는데 사는 게 사는 재미라고 하다니. 술이라도 한잔하며 불콰한 얼굴로 물어봐야 자연스러운 질문을 이렇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이에 두고 얘기하니 요즘 난 무슨 낙으로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왜 사는 게 재미있다고 답한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쇼핑이 사는 낙'이라는 중년 남성이 의아하게 보이겠지만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얼마 전 신문에도 중국 저가 온라인커머스의 1등 고객이 40대 남성이라는 기사가 나지 않았나. 나는 한국에 사는 가장 보통의 아저씨임이 틀림없다.
● 거센 물욕의 불길
나의 쇼핑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기억나는 범위에서 사는 재미를 처음 느낀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독수리 오형제>에 나온 비행기 장난감을 샀을 때다. 내 가 산 물건은 아니고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라 얻은 것이지만 그때 구매로 인한 즐거움을 어렴풋하지만 확실하게 느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전까지는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었는지 뭔가를 사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물욕은 무조건 참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갖고 싶은 욕구와 착한 아이로 보이기 위한 노력은 늘 충돌했고, 대부분 후자가 이겼다. 그렇기에 엄마는 그때 내가 장난감 사게 천 원만 달라고 한 말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대체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것일까. 내 안의 거대한 물욕이 처음으로 굴레를 벗어났던 것일까. 반들반들한 비행기 장난감을 손에 쥐었을 때의 희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군 복무 시절에 석 달 치 월급을 모아 농구화를 샀을 때도 똑같은 기쁨이 찾아 왔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신었던 신발을 오랜 고민 끝에 샀는데, 지금도 가장 잘 산 물건 중에 하나로 꼽는다. 그 신발을 보면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후 본격적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시작하며 쇼핑의 빈도와 강도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공교롭게도 나의 첫 직장은 백화점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정도가 아니라 기름을 뿌리는 수준이었다. 항상 허영과 이성이 충돌했다. 약해빠진 이성은 승률이 높지 않아서 어쩌다 한 번이라도 이기면 한 번은 반드시 졌다. 지인들이 말리는 소비들이 종종 일어났다. 언제일지도 모를 나의 결혼식에서 신겠다며 미리 명품 구두를 샀을 때는 모두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핑계가 좋았다. 그때는 사기 위해 벌었고 그것이 내 노동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착각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은 가진 돈이 적기 때문이다"라는 우스갯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구매한 행복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집에 물건이 쌓일수록, 통장 잔고는 외면하고 싶은 숫자에 가까워졌고 자연히 사는 재미는 반감되었다. 그러다 거센 물욕의 불길이 완전히 잡힌 것은 결혼 덕분이었다. 쇼핑을 절제할 자신이 없던 나는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하기로 결심했다. 그제야 사는 재미는 물건 가격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속에 묵직하게 다가왔다. ● 딸의 마음을 사는 법
요즘 나의 사는 재미는 딸을 향한다. 아이의 미소가 주는 압도적 행복감을 알게 된 후 나는 딸이 좋아하는 걸 매일 사다 바친다. 처음에는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 장난감부터 아내가 주지 말라는 젤리까지, 그걸 받아들고 환히 웃는 딸의 모습이 좋아 퇴근길마다 주머니에 선물을 한 웅큼 담아갔다. 딸은 처음 선물을 받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워하더니 반복되는 선물 공세에 점점 심드렁해졌다. 역시 처음부터 너무 잘해주는 게 아니었나. 마치 짝사랑하는 중학생의 타들어 가는 마음과 비슷했다. 아내가 딸에게 시킨 것이겠지만 "아빠, 이제 선물 그만 사 와요"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는 실연당한 슬픔보다 당장 앞으로 어떻게 딸의 환심을 사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다 아내가 외출해 온종일 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생겼다. 아침부터 둘이 붙어 있다 보니 저녁쯤에는 한껏 친해졌다. 나를 피해 다니던 딸은 어느새 내 품에 쏙 안겨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날 잠자리에 누운 딸이 내게 속삭였다. "아빠, 오늘 정말 즐거웠어. 같이 있으니 재밌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 딸의 미소를 보려면 장난감이나 간식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함을…. 요즘 딸도 매주 천 원씩 용돈을 받고 있다. 지폐에 쓰인 숫자의 가치는 아직 이해 못 하지만 한 장 두 장 종이를 모으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어느 날엔가 장난감 돈과 지폐를 섞어 한 무더기를 내 앞에 늘어놓더니 똘똘이 인형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중 진짜 돈은 고작 삼천 원뿐이었다. "나은아, 이걸로는 똘똘이 인형 못 사. 돈이 더 있어야 해." 실망한 기색도 없이 딸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아빠가 마법으로 돈을 많이 많이 만들어서 사 주면 되겠다!" 아빠는 딸을 당해낼 수 없다. 드디어 네 살 인생에도 사는 재미가 생겼다. 큰일이다.
한재동 백화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쇼핑의 희로애락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여러 매체에서 사고 싶은 물건과 브랜드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결제하는 순간에 느낀 감정을 긁어모아 에세이집 《결제의 희열》로 묶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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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쇼핑하는 재미로 사는 것
별로 칭찬하고 싶지는 않네요.
삶은 재미로 사는게 아니고
견디며 사는 거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되고
정나누는 재미가 있다면 살아
볼 만 하지요!
반갑습니다
소산 님 !
공감가는 고견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록의 푸르름이
날로 더해 가는
새로운 한 주,,
행복하게 보내시고
건승을 기원합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여유와 웃음있는
행복한 하루보내세요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새로이 시작하는 한 주의 출발 입니다..
즐거운 나날들 보내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공감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록의 푸르름이
날로 더해 가는
새로운 한 주,,
행복하게 보내시고
건승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