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철학과 2021101249 임가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조선 시대 (1392-1910)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정치 체제와 윤리, 이념, 사회 질서에 대한 다양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조선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훈구파는 조선 시대 말기부터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는 장기간 동안 독재적인 통치를 한 조선 왕조의 권력 유지를 지지하는 그룹으로, 보수적인 윤리와 제도를 중시했습니다. 이 그룹은 사대부(四大閥)라고도 불리며, 홍영식, 황창수, 신영복, 신재희 등이 주요한 인물로 포함됩니다.
훈구파는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중앙집권화 정부 체제를 지키려고 했으며, 개혁을 저지하고 기존의 유교적인 관습과 제도를 지키려 했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립하는 진보적인 그룹으로,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며 조선의 제도, 사회, 경제, 군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개선을 추구했습니다. 이 그룹은 조선의 민주주의 및 현대적인 시스템을 조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림파는 서인, 노론, 영남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중 김구, 이승만, 안중근 등이 주목받는 인물 중 일부였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구도가 심화된 것은 성종이 사림파인 김종직을 심사(언론직)으로 관직을 등용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했던 사건을 사화라고하는데, 이 시기에는 4번이나 발생했을 정도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초기에 점차 격화되었으며 정치적 분쟁과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조선의 근대화와 현대화 과정에 큰 영향을 및고,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중심으로 나뉘었습니다. 두 학파는 각각의 중심인물들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의 주축이 되면서 정치적, 지역적으로 가까운 학자들이 가세했습니다. 조선 성리학 대표학자는 각 학파의 중심인물인 이황과 이이입니다. 이황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해주며 “동방의 주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합니다. 이이의 경우 주자 성리학의 입장과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주자 성리학을 보다 심화시켰는데, 주자가 미처 자세히 언급하지 못한 부분을 주자의 논리에 따라서 명확히 했습니다. 이황과 이이는 리를 더 강조하느냐, 기를 더 강조하느냐의 입장차이일 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첫댓글 "사대부(四大閥)"는 네이버 지식인 검색에서 잘못 표기된 것이랍니다. 본래 음은 사대벌이라고 해야 하고, 네 가지 큰 파벌이라는 이야기로 사색당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라고 할 때는 사대부(士大夫)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훈구파가 사색당파를 형성하게 된 것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의회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분쟁과 갈등"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와 현대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빚"었다고 하는 것도 일제 강점기의 식민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이러한 점도 차근히 찾아 공부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