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의 첫 번째 기억, 죽는게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던 4~5살 무렵의 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죽음이 두려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려워했다. 환생을 하든 천국에 가서 편안하게 살아가든 여러 종교의 말들로는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무지함은 나를 공포에 머물게 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것 대한 무지는 나를 미치게 했다.
그렇다면 미지에 대한 공포는 인간 자체의 습성일까, 아님 개개인의 차이일까. 종종 생각하던 논쟁거리가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불빛이 하나도 없는 골목을 걸어간다면, 그 어린아이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까?’ 공포라는 이 감정은 살아오면서 학습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인간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근원적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렇다면 공포라는 감정은 과연 후천적인가 선천적인가?
최근 충격적인 묻지마 칼부림 사건 이후 연달아 비슷한 무동기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 지하철에선 멀리서 들린 비명소리에 대피하다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지하철 중앙으로 이동하며 밀치며 이동하기 시작해서 묻지마 범죄로 오인해서 20여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도 생겼다. 공포는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배우는 경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더 원초적인 공포는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봤을 때 온몸이 곤두서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온몸에 흐르는 몸의 반응은 후천적으로 배우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 사슴벌레 라던지 장수풍뎅이, 수많은 벌레들을 손으로 만지며 살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벌레류들을 만지는 데에 있어서 겁이 많아졌다. 하지만 키우던 사슴벌레의 집게에 손가락을 물리고 나서 그 후부터 벌레를 피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공포는 인간의 경험과 학습에 의한 결과 값인가?
하지만 생물체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면, 공포라는 감정이 후천적이라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는 죽음은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럼 과연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행복하게 죽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의 초월은 천국이나 환생이라는 불확실한 결과 값에 대한 확실한 믿음뿐인가.
첫댓글 죽음은 철학에서도 주요한 주제가 된답니다. 실존철학은 이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고요,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없겠지만, 반대로 현실의 가치를 외면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가 인간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 실존철학의 주제입니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보았을 때 공포나 혐오를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생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포나 혐오는 생물학적인 감정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려면 천국이나 환생을 믿는 것이 초보적인 단계이고요,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도달하기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고급 단계라고 할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