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4일 오전 열 시, 서울 서초구 서초 3동-
“그리 호락호락 당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검찰청 앞 삼거리에 주차된 차 안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나온 장대수를 멀찍이서 관찰하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전화한 곳은 삼영그룹 본사의 기획조정실로, 영은과 김수갑 부회장을 비롯한 최고 수뇌부 여섯 명이 한 자리에 집결해 있었다. 영은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김수갑과 굳이 한 자리에 동석한 데는, 강원카지노를 발빠르게 접수하는 데 있어서 그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때문이었다.
-김 실장, 주주들은 한데 모였나?-
“네, 부회장님. 지금 연결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대주주께서도 당도하셨네. 어서 스크린 연결하게.-
부회장의 말이 끝나자, 강원카지노 계열인 하이눈호텔 내부의 대회의장에서 김진평 실장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백 석 규모인 회의장을 꽉 메우고도 남을 정도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전면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에 김수갑 부회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액 주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 삼영그룹의 금융 분야를 총괄하는 부회장 김수갑입니다. 다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들 중 제법 큰 액수의 주식을 소유한 이들은 삼영으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지만, 회사의 존망이 걸려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올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벙어리 마냥 앉아있기만 했다.
“보안을 유지해야 했던 관계로, 여러분께 자세한 사정을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을 뵙자고 한 연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면에서 김 부회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웬 젊은 여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영은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만, 장대수에게 보다 더 큰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그녀가 총대를 맨 것이었다.
“주주 여러분께서는 오늘 오후 뉴스를 보시고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그냥 남 일처럼 생각되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정치권에 갖다 바치는 무뢰배에 대한 분노를 느끼셨습니까?”
“어디 새파란 계집아가 나서나, 나서길.”
회의장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반발이 일어났다. 보다 못한 그룹 관계자가 주주들을 달랬지만, 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영은이 자신에게 모욕을 가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주주님의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남의 존함은 알아서 뭐 하게? 얼른 부회장 나오라고 그래!”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말싸움의 와중에서, 맨 뒤에 자리 잡고 앉은 대주주 이용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칠십 평생 농사만 짓던 와중에 갑자기 금싸라기가 된 땅을 팔고 그 돈으로 강원카지노의 주식을 사 뒤늦은 부를 일군 사내였다. 그가 손을 한 번 쓱 올리자, 근처에 자리 잡은 경호원이 다가왔다.
“시키실 일이라도?”
“물론 있지. 저 쌍놈 당장 내쫓아 버리게.”
“네?”
“저 놈 내가 잘 알지. 지분이 겨우 이십 주밖에 안 되는 놈이야. 뭐하나? 회의장 물 흐리는 미꾸라지 얼른 쫓아내지 않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경호원에게 멱살 잡힌 남자가 끌려 나가자,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김진평이 조용히 다가왔다.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뭘 감사까지야. 난 그냥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요소를 없앴을 뿐이오. 헌데 저 처잔 대체 누구요?”
“저희 그룹 최대주주이십니다.”
잠시 생각하던 이용현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러면 아까 그 김 뭐라는 사람보다 더 위라는 얘기 아뇨? 그런 사람이 왜..?”
“그만큼 삼영에서 이번 강원카지노를 인수하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
…
…
“…해서, 저는 여러분의 힘을 빌어 강원카지노 임원진 전체를 교체하였으면 합니다.”
“그게 가능할는지? 날 빼고 다른 대주주들은 보이지 않는구만. 그들이 나중에 걸고 넘어지면 어떡하시려고?”
이용현이 물었다. 어느 사이엔가,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영은과 이용현의 일대일 토론장으로 변해 있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최대주주인 장대수는 현재 검찰조사를 받느라 주주자격이 정지된 상태이고, 또 한 명은 유길준이란 남잔데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중범죄자의 모든 재산은 이유를 불문하고 국고에 압수되게끔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즉, 다시 말해 산업은행이 강원카지노의 새로운 대주주라는 뜻이죠. 정부는 전적으로 우리 편입니다.”
임원진 교체 건에 대한 투표가 끝나고, 마흔 한 명의 임원 가운데 자리를 지킨 사람은 겨우 두 명에 불과했다. 취임한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데다가 장대수 라인에 속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금 영은이 화면에 나왔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럼 여러분께 차후 강원카지노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책자를 나눠 드리겠습니다. 2년 동안의 내부공사를 거쳐 강원카지노는 세계적인 귀빈들의 회의 장소로 이용될 컨벤션센터로 새롭게 변모할 것입니다.”
“잠깐, 처자. 그러면 그 동안엔 어떻게 되는 거요?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으라는 얘긴가?”
“그럴 수야 있나요. 보은의 뜻으로 여러분이 소유하고 계신 강원카지노 주식과 맞먹는 삼영전자 주식을 2년간 무상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배당해 드릴 생각입니다. 삼영증권 관계자가 나와 있으니 자세한 설명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없으시면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
…
…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김수갑이 비공식적인 상사의 공을 치하했다. 비서가 갖고 온 생수를 병째로 들이키며 영은이 말했다.
“부회장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확인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죠? 다시는 장대수의 그림자가 강원카지노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2년 뒤에 과연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청사진대로만 된다면, 강릉이란 도시는 한국의 변방이 아닌 스위스 다보스와 비견되는 지명도를 갖게 될 겁니다.”
‘그건 강원도가 우리 표밭이 될 거란 얘기이기도 하지.’
영은이 굳이 ‘2’라는 숫자를 강조한 이유를 김수갑은 무심코 흘려 넘기고 있었다. 그것은 영은이 김 부회장을 부려먹고 팽할 시기가 앞으로 2년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