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감동으로
(사도행전 21 : 1-6)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가정교육에 매우 엄격합니다. 아들이 곁길로 가면 꾸중하고 무서운 체벌을 가합니다. 그러면 아들은 ‘저 사람이 정말 나의 아버지가 맞을까?’하고 의심한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들아,네가 잘못할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픈 줄 아느냐. 너를 때릴 때마다 아버지는 가슴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다”고 말해준다고 합니다.
보혜사란 말은 이처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의미하는 ‘파라클레이토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보혜사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 맞은 아들을 위로하는 어머니처럼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인생이 광야처럼 삭막하고 힘들 때 아무도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고독한 순간에도 내 영혼을 안아주시는 위로의 보혜사 성령님의 손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여정입니다.
1. 목적지가 확실할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끝까지 완수 왔습니다. 에베소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고스에 가고 로도에 이르고 구브로를 바라보고 두로를 향하여 갔습니다.
밀레도라는 곳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을 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밀레도 남쪽 40마일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섬인 고스(Kos)로 갔습니다. 그 당시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etes)의 고향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고스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로부터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원하는 병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스를 찾았습니다. 고스는 의학의 섬이자 무역의 섬이자 예술의 섬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바울은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도로 갑니다. 이 섬은 지금도 유명한데, 헬리어로는 ‘로도스’입니다. 소아시아 반도 해안의 섬들 중 가장 큰 섬인 로도는 ‘장미의 섬’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태양의 일조량이 많아서 가는 곳마다 화려한 장미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서를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로도스에는 수사학과 웅변으로 유명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구브로는 터키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큰 섬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지중해를 횡단하여 화물을 풀기 위해 베니게의 두로에 정박합니다. 그런데 그 배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동안에, 바울이 ‘구브로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청하게 보고 있던 게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원래 ‘나타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섬들이 앞에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원래는 ‘바나바와 사울’로서 바나바가 리더였는데, 그 섬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라고 되면서 자기가 리더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뜻깊은 곳이 바로 이 구브로입니다. 그러니까 구브로 섬을 보며 경관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바로 저곳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해주셨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 가서 잡힐 것이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며 가고 있는 길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전철 1호선이 인천행이고 소요산행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정부에 올려면 인천행으로 가면 안되고 소요산 행을 타고 와야 합니다.
이말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방향은 어디에 주어야 합니까?
사도바울이 나는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예수님께 방향을 잡고 그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와 함께 거룩함이라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란을 버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내고 병든 자를 고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 5장 15절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마태복음 6장 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2.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7일을 머물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타고 온 배가 두로에서 화물을 내리고 새 화물을 싣고 돌레마이로 갈 때까지 이레 동안 두로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그렇다고 편안하게 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타락의 도시, 두로에 살고 있는 제자들, 즉 크리스천들을 찾아 나섭니다.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이 바로 이 두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곳의 귀신 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두로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쪽 수리아 안디옥으로부터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중간에 있는 두로를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로에서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부귀영화가 넘치지만 타락의 도시인 두로에 살고 있던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줍니다. 또 사도바울께서 이방인들에게 1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갈라디아 지역에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는가를 그들과 나누며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로에 있는 자들은 사도바울이 걱정이 되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사도바울을 생각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이야기하였을 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방해한다고 하여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줍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사람에게 왔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의 은사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3. 사람이 끝이 좋아야 합니다.
여러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습니다. 전송하였다는 것은 잔치를 베풀고 기쁜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습니다.
믿음이 화해하고 용서하니까 다음세대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용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속에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풀려야 합니다.
용서하여야 합니다. 천국과 연결됩니다. 용서해 달라고만 하지말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혹을 이길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눈물로 화해하지만 배에 오르는 사람이 있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에 오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로의 제자들처럼, 특별히 그들이 본을 받아 따랐던 사도 바울처럼,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우리가 본받기 원합니다.
목적지가 같을 때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를 분별합니다.
사람이 끝이 좋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손에 나 자신을 맡기고 내 가족을 맡기고 우리 성도들을 맡기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항상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골로새서 1장 8절에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마가복음 1장 12절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 인생이 매일매일 상황은 각자 다 다르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바로 이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로 나아가 쓰임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전승으로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