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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관광정보 >유럽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Republic of Austria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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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 |
면적@8만 3855㎢ | |
인구@816만 9900(2002) | |
인구밀도@97.4명 | ㎢ |
수도@빈 | |
주요언어@독일어 | |
종교@가톨릭교·프로테스탄트교 | |
통화@유로(Euro) | |
환율@1달러=0.9896E(2002.11) | |
국내총생산@2200억 달러 | |
(2001)@1명당 2만 7000달러 | |
무역수지@수출 700억 달러 | |
(2001)@수입 730억 달러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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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Bundesrepublik Österreich). 면적 8만 3855㎢. 인구 816만 9900(2002). 동쪽은 헝가리·슬로바키아, 서쪽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남쪽은 슬로베니아·이탈리아, 북쪽은 독일·체코와 접하고 있다. 수도는 빈. 0국토의 2/3가 동부알프스산맥 지역이며, 동서로 뻗은 화강암류의 중앙알프스와 남쪽과 북쪽으로 나란히 달리는 남·북 석회암 알프스의 3산열(山列)로 이루어진다. 이에 속하는 산들은 해발고도 1500∼3000m이며 최고봉은 그로스글로크너산(3797m)이다. 중앙알프스는 오랜 화강암·편마암·편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엔스·잘차흐계곡까지 뻗어 있으며 남으로는 드라바강에 면해 있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외츠탈과 호에타우레른 산령은 특히 험준하고 빙하의 침식을 받았으며 2700∼2900m 높이에 설선(雪線)이 있다. 북동부를 흐르는 다뉴브강 이북은 보헤미아숲의 연장이며 고기(古期)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만한 구릉과 넓은 평지는 빈분지로부터 노이지들러호(湖) 부근에만 있을 뿐이다. 다뉴브강은 독일의 파사우로부터 오스트리아 북동부를 지나 빈 동쪽에서 헝가리로 들어간다. 멜크로부터 하류 쪽으로는 단구가 있는 넓은 계곡이 있고, 상류는 협곡 사이로 흐른다. 주요 지류는 인·잘차흐·엔스·트라운·무르 등이며, 상류에는 아터호를 비롯한 많은 아름다운 호소(湖沼)가 있다. 산지에는 U자곡·빙퇴석(氷堆石) 등의 빙하지형이 남아 있고, 질브레타산군에는 빙하가 있다. 서유럽의 해양성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기후의 점이지대(隷移地帶)를 이루고 있다. 동부에 있는 빈(해발고도 202m)의 1월평균기온 -1.4℃, 7월평균기온 19.9℃, 연평균기온 9.8℃, 연강수량 660㎜이다. 서쪽으로 가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비가 많아지며 중앙부인 잘츠부르크(430m)는 연평균기온 8.3℃, 연강수량 1359㎜이다. 산악지대는 알프스기후이며, 아를베르크(1220m)에서는 연평균기온 5.4℃, 연강수량 1957㎜이다. 고산지대는 기온이 더 낮고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많으나, 인강 상류 계곡은 강수량 600㎜ 이하이다. 남동부는 스텝성 푄기후로 안다우에서는 연평균기온 9.7℃이나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강수량 576㎜로 적다. 기후와 해발고도에 따라 1000m 미만에서는 너도밤나무를 주로 하는 활엽수림지대를 이루고, 1000m 이상에서는 가문비나무를 주로 하는 침엽수림대로 되어 있다. 그보다 위쪽은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수목한계는 설선보다 약 900m 낮고, 한계 부근에는 눈잣나무가 있다. 동부는 헝가리 초원의 연속으로 스텝황야를 이룬다. 숲은 광범위하게 벌채되었으나 아직도 국토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0서부의 잘츠부르크·티롤·포어아를베르크 3주는 알프스지역 안에 있다. 잘츠부르크주는 암염과 글로크너 카프룬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주도인 잘츠부르크시(인구 약 14만)는 호엔잘츠부르크성(城)과 예술제로 유명하다. 티롤주는 겨울스포츠의 메카이며 가옥과 자연이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주도 인스브르크(인구 약 12만)는 빈과 스위스를 잇는 동서교통로인 동시에 브레너고개를 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십자로에 해당되어 역사적 기념물이 많다. 가장 서쪽에 있는 포어아를베르크주는 관광으로 번영함과 아울러 수원지대(水源地帶)이자 섬유공업이 활발하다. 보덴호에 면한 주도 브레겐츠(인구 약 2만)는 예술제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산맥 끝부분이 그 남쪽에 이르고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는 알프스와 비슷한 지형의 경승지가 많다. 다뉴브강 사이로 북부는 보헤미아숲 남단이 체코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주도 린츠(인구 약 22만)는 다뉴브강의 하항(河港)으로, 이 시를 중심으로 철강업·화학공업이 발달해 있다. 부르겐란트·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니더외스터라이히의 4개 주는 농림업지역이다. 헝가리와의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부르겐란트주에서는 밀·옥수수·야채·과일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작곡가 F.J. 하이든이 활동한 주도 아이젠슈타트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슈타이어마르크주는 임업이 성하고 또 에르츠베르거의 철광석과 마그네사이트를 원료로 하는 제철업, 기계공업, 종이·셀룰로오스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도 그라츠는 인구 약 25만의 오스트리아 제 2 의 도시로 상공업 중심지이다. 케른텐주 서부는 알프스지역으로 산과 호수가 많고 주도 클라겐푸르트(인구 약 8만)에서는 국제재목박람회가 열린다. 납·아연·마그네사이트도 산출된다. 수도 빈(인구 159만, 1996)에는 총 인구의 22%가 모여 있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와 더불어 공업이 활발하다. 빈분지 북부에는 천연가스와 석유자원이 있으며, 다뉴브강과 그 지류로부터의 전력공급도 풍부하다. 0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BC 2세기에는 노리쿰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빈)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인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0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왕조의 카롤루스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왕국을 계승한 작센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였다. 0사촌인 바이에른공과 싸워 이겨 황제가 된 오토 2세(재위 961∼983)는 976년 바이에른으로부터 오스트마르크를 분리시켜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로 삼아 이것을 바벤베르크가에게 하사했다. 바벤베르크의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을 꾀하였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이용해 세습을 관행화하였으며, 슈타우펜가와 벨프가의 분쟁에서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90)로부터 1156년 세습공령으로의 승격을 획득했고, 아울러 영역 내에서의 재판권을 인정받았다. 92년 슈타이어마르크공령도 병합하여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30∼46)가 전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73)를 맞게 되었다. 0주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접 제후들의 무력개입을 초래했으나, 보헤미아(뵈멘)왕 오토카르 2세는 1251년 빈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해 동유럽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56년 독일의 대공위시대(1256∼73)에 때맞추어서 황제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대한 독일 제후들은 73년 알자스와 스위스 등지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는 제국영토의 반환을 거부한 오토카르를 78년에 죽이고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너무 강대해진 합스부르크가에게 계속해서 황제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91년 이래, 특히 14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스위스독립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카를 4세(재위 1347∼78) 밑에서 번영한 룩셈부르크가와도 대립,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에서도 7선제후(七選帝侯)에서 배제되어, 룩셈부르크왕조가 후스전쟁(1419∼36)으로 단절되고 알브레히트 2세가 1438년 즉위한 뒤에야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453년 대공령으로 승격하였다. 0합스부르크가의 아들들에 대한 분할상속 전통은, 결과적으로는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영토분할과 계승권분쟁이 생김으로써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방해가 되었다. 1477년 부르군트공주와 결혼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95년 독일제국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에스파냐 왕녀와, 1515년 그의 손자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정책은 프랑스와의 대립을 장기화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오스만투르크와 대립을 가져와 합스부르크가는 동·서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으나, 필립의 장남 카를 5세(재위 1519∼56)가 프랑스왕과의 전쟁에서 이겨 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세계제국이 출현했다. 0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룩한 세계제국도 21년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6∼64)는 농민전쟁에도 직면했으나 오스만투르크의 북상으로 헝가리왕 라요시 2세(재위 1516∼26)가 26년 모하치에서 죽자,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29년 빈을 포위당해 겨우 격퇴하고 31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를 지배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和議) 뒤 56년 카를 5세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았으나 종교쟁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가의 내분 뒤 페르디난트 2세(신성로마황제, 재위 1619∼37)가 1617년 보헤미아왕이 되어 반종교개혁을 강행하자, 18년 30년전쟁(1618∼48)이 일어났다. 030년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의 태동이기도 하였으며 체크민족주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간섭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반종교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다시 확립하였고, 서방에서는 영국과 결탁해 루이 14세의 침략을 막았으며, 동방에서는 1683년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를 반격하여 헝가리 전토를 확보하였다. 권력집중을 도모하고 영토통합을 꾀하였으며, 산업육성·농민보호에 힘썼으나 에스파냐계승전쟁에서는 해외 진출을 단념하고 에스파냐왕위를 포기하였으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영토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40∼48)에서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으나 영토분할을 막기 위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 인정되어,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80)에게 상속시켰다.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전쟁(1756∼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러시아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90) 치하인 81년 <농노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0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직면한 합스부르크가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대관하기에 앞서서 1804년 오스트리아황제라고 칭했고, 슬라프코프에서 참패한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K.W.N.L. 메테르니히는 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추진하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교묘히 해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빈회의(1814∼15)를 주최하고,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반동체제를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3메테르니히체제 아래에서도 산업발전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졌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빈 등지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망명했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산업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고, 51년 이후로는 신절대주의 A. 바흐 체제가 되었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을 정착시키면서 산업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토의 기반을 동·중유럽에 두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켰다. 헝가리 토지귀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군대의 원조로 1849년 진압되었으나, 체크의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슬라브 여러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크림전쟁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고립화 속에서 이탈리아의 운동은 59년 독립전쟁으로까지 고조되었고, 그 패전으로 바흐체제는 붕괴되었다. 0위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의 요구를 참작, 1860년 연방주의적인 10월 칙서(Oktoberdiplom)를, 61년에 2원제의회를 인정하는 2월헌법(Februar-Patent)을 반포하여 부르주아적 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완패하자 헝가리 토지귀족과 제휴, 그 왕국을 인정해 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을 성립시켰다. 이 노선은 반발하는 슬라브 여러 민족의 요구를 억압하고 73년 공황을 거쳐 79년 독일-오스트리아동맹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의 고조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였다. 이 해에 <모든 민족과 정당을 대표하는 황제내각>이 성립되자, 이로 인한 독일인과 체크인의 민족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보헤미아에서는 <언어령(Sprachenverordnung)>이 되풀이되었지만 대립은 일상생활로까지 번져 격화를 거듭하였다. 1888년 결성된 사회민주당은 1907년 보통선거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민족별로 분열되자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혼란에 말려들었다. 발칸으로의 진출은 범슬라브주의와 대립되었고, 14년 사라예보사건을 계기로 제 1 차세계대전에 돌입했다. 0제 1 차세계대전으로 제국은 해체되고 1918년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이 성립되어, 국민의회 결의에도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한 구성요소>라고 명기되었으나 이 합병은 전승국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특히, 산업이 앞선 보헤미아의 상실, 전후 경제혼란과 29년 대공황에 따라 그리스도교사회당이 대두하였다. 32년 C.E. 돌푸스내각은 사회공산당과 더불어 합병을 주장하는 나치스를 탄압했다. 독일민족주의자들은 나치스에 가담해 38년 독일-오스트리아합방을 단행하고, 39년 제 2 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치스 독일이 패배하는 가운데, 45년 3월 빈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 점령 아래 마셜플랜을 받아들였으며, 4개국회의를 거쳐 55년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자유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0입헌제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연방공화국으로서 3권분립을 견지하고 있으며 헌법은 1920년 제정되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국가를 대표하며,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의 제청으로 국무위원을 임명하며, 국민의회의 소집·해산권을 가진다. 3선 이상은 금지되어 있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을 받으면 국민투표에 의해 파면될 수도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서 국민의회(하원)와 연방의회(상원)로 구성된다. 국민의회는 임기 4년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비례대표제에 의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정원 183명이며 86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제 1 당의 자리를 유지하였고 K.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7년 1월 사민당·인민당의 연립내각이 이루어졌다. 인민당은 제 2 차세계대전 전의 가톨릭적 보수당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사민당은 사회민주노동자당의 후신으로 각기 1945년 결성된 이래 의회의 주요 세력으로 국정을 안정·발전시켜 왔다. 인민당의 토마스 클레스틸이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1998년 4월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독일주의를 제창하는 자유당 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나 대다수 국민은 중도노선을 취하여 왔다. 1999년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급부상, 2000년 2월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의 연립정부가 국내외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식 출범하였다. 새 내각 총리로 W.쉬셀 인민당 당수가 취임했다. 최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녹색당의 활동이 눈에 띄고 있다. 99년 선거결과 사회민주당 65석, 인민당 52석, 자유당 52석, 녹색당 14석을 차지했다. 연방의회 의원은 빈과 8개 주에서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지방의회가 간접선거로 선출하며, 정원 64명이다. 국민의회와 연방의회 모두 법안제출권이 있고, 법안은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하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국민의회에 우선권이 있다. 선전포고 등 중대안건의 결정에는 양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연방회의가 소집된다.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에 의한다. 내각은 총리·부총리 외에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 국민에게는 기본권과 자유의 권리가 있다. 그 기초는 1867년 <국가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1948년 제 2 공화국시대에 입법화되었다. 성(性)·출생·인종·언어·신분·계급·신앙 등의 차별은 인정되지 않으며 언론·집회·결사는 법률 내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각주와 빈은 역사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주민이 선출한 주의회가 있고 의회가 선출한 주의 장관이 행정을 집행한다. 사법권은 연방에 속해 있고, 4단계로 나뉜 보통재판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 헌법재판소와 행정재판소가 있어 위헌심사와 행정권 감독을 담당하고 있다. 외교의 기본방침은 모든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영세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1955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된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주권·독립을 회복하면서, 독일과의 합방과 나치즘 및 군국주의를 금지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였다. 국민의회는 55년 10월 26일 <영세중립에 관한 법률>을 채택, <스스로의 의지로 영세중립을 지키고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또한 영내에 외국군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의거하여 정부 및 국민은 동·서의 인접국과 우호를 증진하고, 국제연합(UN)의 임무에 협력하고 있다. UN사무총장으로 발트하임이 취임하기도 하여 사무국에 요원을 보내거나 UN군에 감시단이나 구호반을 파견하는 등 분쟁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빈은 동·서 수뇌회담이나 각종 국제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 등의 본부가 있어서 79년 국제센터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같은 선린외교를 추진하고는 있으나 남티롤지방은 이탈리아와의 분쟁지역이다. 제 1 차세계대전 뒤인 1919년 이 지역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으나,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탄압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제 2 차세계대전 뒤에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되고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아직 이탈리아령으로 남아 있어, 분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0국가의 방위와 안전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연방군이 조직되어 있다. 군대의 최고지휘권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실제적인 지휘는 국방장관이 한다. 국민개병제도로서 17세 이상 61세 미만의 남자는 병역의무가 있어 7개월간의 복무 뒤에는 60일간의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양심상 이유에 의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비군사적 근무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병역대체복무법>이 제정되어 있다. 총병력은 3만 4600명(2001)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19억 1300만 달러(GDP의 1.2%)에서 2000년 16억 900만 달러(GDP의 0.8%)로 낮아졌다. 0제2차세계대전으로 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한 분할점령과, 특히 소련의 생산시설 반출, 동·서진영의 대립 등으로 부흥이 늦어졌다. 1949년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부흥기금을 받아, 55년 완전독립을 이룩한 뒤에는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어 50년대에는 연평균 6%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이루었고 경제구조의 고도화로 국내총생산 2030억 달러, 1인당국내총생산 2만 5000달러(2000)이다. 그 원동력은 옛 독일제국 자산의 반환에 따른 공업의 국유화와 기술혁신, 수출증대 등이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의 자원과 에너지의 공급, 안정된 정치, 사회조건 등이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취하는 한편, 기간산업은 국유화되고 있다. 국영기업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조선 및 전기, 석유·화학, 석탄의 6분야로 되어 있고, 오스트리아산업관리주식회사(ÖIAG)가 관리한다. 국영공업종사자는 11만 5000명, 매출액 1200억 실링이며 32%가 수출된다(1978).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의 비율은 전체 산업에서 29.1%를 나타내며, 상업 15.4%, 공영기업 12.9%, 건설업 9.3%, 교통·통신업 5.4%이며 나머지는 연금수령자와 기타가 차지하고 있다(1978). 산업별 인구 구성에서는 1951년 제 1 차산업 22%, 제 2 차산업 36%, 제 3 차산업 24%, 기타 18%로서 농림업종사자가 비교적 많고 상공업이 적었다. 94년 제 1 차산업 7.2%, 제 2 차산업 31.5%, 제 3 차산업 61.3%로 농업부문이 격감하고 상업·서비스업이 증가했다. 전국의 고용자 합계는 276만 9900명(1980)으로, 그 가운데 외국인노동자가 17만 5300명이었다. 외국인노동자는 독일·스위스·프랑스에 비해 적은데 최근에는 더욱 감소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이 가장 많고(12만 1100명), 다음이 터키인(2만 6200명)이며, 이탈리아인은 2000명에 지나지 않는다. 스위스·독일 등지로 많은 이탈리아인 노동자들이 유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업률은 1970∼80년에 걸쳐 2%선을 유지하다가, 82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으나 선진자본주의국가 가운데서는 낮은 편이다. 실질경제성장률 94년 2.9%, 95년 1.8%, 96년 0.7%이며 실업률 97년 4.4%이고 소비자물가상승률 96년 1.8%이다. 국민총생산은 빈(27%)을 비롯한 동쪽에 있는 주에 집결되어 있다. 0국토의 18%는 경작지로, 24%는 목장 및 초지로 이용되고 있다(1994). 약 366만ha의 농지를 약 13만 호의 농가가 경작하여 곡물·가축 등을 생산, 국민의 식량수요의 약 91%를 공급하고 있다. 농가의 46%가 5ha 미만의 소규모 영농으로 전체농지의 10% 미만이며, 포도·야채 등을 재배하는 한편 농외소득으로 가계를 보충하고 있다. 소규모 영농은 균분상속(均分相續)의 관습으로 인하여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이에 비해 100ha 이상의 대규모 영농은 전체 농지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생산물은 사탕무·감자·옥수수·보리·밀 등이다. 야채로는 양배추 등이 있으며 과일로는 포도·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포도는 주로 동부의 구릉경사면에서 재배되어 백포도주로 양조된다. 가축으로는 소·돼지·닭이 많다. 서부산지에서는 한때 알름(Alm;여름철의 고원목장)에서 소를 이목(移牧)하여 사육하고, 일부는 여기에서 채유하여 직접 치즈를 생산하기도 했다.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품이 많이 드는 산에서의 치즈생산은 줄어들었고 산기슭 공장으로 우유가 운반되어 가공되고 있다. 사료작물의 생산성도 향상되어 방목(放牧)이 쇠퇴하였고 산간마을에서는 관광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국토의 39%에 해당되는 328만㏊가 임야이며, 임업은 높은생산액을 올리는 중요한 산업이다. 보안림을 제외한 317만㏊가 벌채·제재의 대상이 되어, 각주에서 임업이 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슈타이어마르크주(45%)·케른텐주·포어아를베르크주는 삼림면적 비율이 매우 높다. 삼림면적의 약 1/2이 농가 소유이고, 약 1/3이 대지주 소유, 나머지가 국·공유림이다. 삼림의 84%가 침엽수림으로 가문비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낙엽송·젓나무·북가시나무 등이다. 임산물은 땔감으로도 쓰이나 펄프와 제지공업의 원료로 중요하다. 0에너지자원의 2/3는 수입하고, 1/3은 자체생산하고 있다. 주요 수입에너지원은 석탄과 석유인데, 석유 14%와 천연가스 44%를 자급한다. 그리고 총에너지의 12%를 차지하는 수력자원으로 증가하는 에너지수요와 석유가격 상승을 완화시키고 있다. 유전과 천연가스 산출지는 모두 빈분지에 있으며, 개발되지 않은 자원도 확인되고 있다. 주요 발전소는 다뉴브·엔스·일·드라우·인 등 여러 하천에 건설되어 있다. 주로 산출되는 금속자원은 철광석 및 각종 자철광상을 비롯하여 납·아연·안티몬 등이고 비금속으로는 석고·활석·고령토·암염 등이다. 철강업원료로 약 360만t의 철광석이 매년 수입되고, 크롬광석·납광석·보크사이트 등도 수입하고 있다. 에르츠베르거 등지에서 채굴되는 철광석은 철분함유량 26%, 매장량 약 26억t이다. 0제조업 종사자 수는 전 산업 종사자의 31.5%이며, 제조업은 제철·기계·화학 등의 중공업과 요업·섬유·식품가공 등의 경공업이 활발하다. 중공업은 철광석·전력 등의 자원에 기초를 두고 석유·천연가스 등 원료의 일부를 수입, 제 2 차세계대전 뒤 국영화되어 발달했다. 국영공업은 1946년 7월 26일 연방법에 의해 발족, 70년 ÖIAG에 이양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철강·석유·화학·전기·기계 등이 포함된다. 빈·린츠 등 동쪽의 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국영대기업을 주로 하는 중화학공업에 비해 중·소규모의 경공업이 각지에서 발달하고 있어 국민생활과 관광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제분·제당·양조를 비롯하여 제빵·제과 등 식료품제조업은 빈 등 도시의 주변이나 교통요지에 입지하고 있다. 섬유공업은 대소비지인 빈 교외 노이슈타트에 면방공장이 입지해 있고, 서부 산기슭지대에는 여성 노동력에 의한 마방·직물·자수 등의 공장이 있다. 또, 의류공업은 빈·린츠·인스브루크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0최근 제 3 차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특히 상업 및 서비스업은 전체 산업의 61.3%(1995)를 차지한다. 도·소매업은 도시에 모여 있고 대개는 영세한 규모이나, 1000명 이상의 종업원이 있는 기업도 있다. 무역총액은 수출 700억 달러, 수입 730억 달러(2001)이다. 수입품목은 자동차·섬유제품 등이며, 수출품목은 자동차·전기제품·기계·철강 등이다. 세목별로 볼 때 수입이 많은 것은 과일·야채·커피·차·코코아 등의 식료품, 연사(撚絲)나 광석 등의 공업원료, 자동차, 의류 등이며, 섬유·의류·전기기계·철강부문은 수출이 많다. 무역상대국은 독일이 수출입 모두에서 가장 많고 이어 이탈리아·스위스·영국의 순이다. 0음악과 역사의 도시 빈을 비롯하여 산악·호수의 경승지가 많고 세계적인 스키장이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관광객은 1717만 명이며, 관광수입은 146억 달러(1995)이다. 주별로는 티롤이 전체의 약 33%를 차지하고 잘츠부르크·케른텐이 이를 뒤따른다. 여름이 겨울의 약 2배가 되는데 최근 겨울철 관광객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여름철 숙박인의 70%, 겨울철 숙박인의 50%가 외국인인데, 독일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유럽 각국 및 미국인이며 소수의 동유럽인들도 찾아온다. 케른텐주 호반이나 잘츠카머구트지방 등지에는 별장이 늘어나고 있고 전국 별장의 15%는 외국인 소유이다. 겨울철 관광객의 증가로 많은 외화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포어아를베르크주에서는 총 숙박의 45%가 겨울의 스키철에 이루어진다. 키츠뷔엘, 장크트안톤 등은 스키장으로 유명하다. 0평균 인구밀도는 1㎢에 96명이지만, 인구분포는 지역차가 크다. 빈분지에서는 인구밀도가 1㎢에 200명에까지 이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부 산악지대는 주택이 드문드문 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임업지·관광지이다. 출생률은 1971년 14.6%에서 96년 1.08%로 떨어졌고 사망률은 13%에서 0.99%로 내려갔다. 그 결과 96년 자연증가율이 -0.09%로 감소했다. 고령층의 비중이 크고 중간 연령층의 비중이 눈에 띄게 작은 방추형 연령구성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상흔을 엿볼 수 있다. 독일문화와 로마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위에 1920년에 이루어진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세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그것은 서유럽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색과 거의 같지만 사회복지·사회보장 등에서는 진보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같은 제도는 19세기 후반 제정시대에 시작되어 제 1 차세계대전 뒤의 변혁으로 진보하였다가 제 2 차세계대전 뒤에 마무리되었다. 노동관계에서는 노동기본법이 제정되어, 주 40 시간 노동을 법제화한 데 따르는 임금, 유급휴가, 소년·여성의 노동 등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은 또 건강·재해·실업·연금의 각 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신체장애자와 전쟁희생자에 대한 배려, 아동양육을 위한 가족수당 지급,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연금생활자 숙소, 긴급아동보호소 설치, 보건위생센터, 병원, 온천요양소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국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72년 연방보건환경보호부가 설치되었다. 교육제도는 6∼15살까지 총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 뒤에는 중학교나 공과과정(工科過程)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그 위에 2∼4년의 직업학교·중급교원양성소가 있다. 또, 기초학교 4년에 이어 일반교육을 실시하는 중·고등학교 9년제가 설치되어 있다. 종합대학·단과대학은 이들 위에 있으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직업선택과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은 복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포츠는 겨울철의 스키와 회원 20만이 넘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으며, 스키·스케이트·등산은 국민스포츠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주민의 98%가 독일계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는 부르겐란트주에서, 슬로베니아어는 케른텐주 남부에서, 마자르어는 부르겐란트 및 빈에서, 체크어는 빈에서 각각 조금씩 사용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빈이 유럽의 정치·문화의 중심도시였기 때문에 현재 독일 게르만민족들과는 다른 국제성과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가톨릭교는 연중행사·풍속·습관에 뿌리박고 있다. 몸짓이나 예의범절, 인간관계에도 가톨릭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지방풍속에는 보수성이 짙다. 로마가톨릭 신자가 전인구의 90%를 차지하며 프로테스탄트나 유대교 신자가 약간 있다. 음악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독일음악을 기초로 슬라브와 헝가리의 민속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밝은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음악가로는 C.W. 글루크·하이든·W.A. 모차르트를 비롯해 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G. 말러·A. 쇤베르크·A. 베베른 등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 들 수 있다. 특히 빈왈츠를 완성시킨 J.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빈국립오페라극장은 오페라 역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무대를 탄생시켰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궁정과 귀족의 후원과 시민들의 참여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 초연)》은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19세기 후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창조적 연주를 보인 것은 말러·R. 슈트라우스 등이었다.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파괴된 오페라극장은 2억 6500만 실링을 들여 재건하여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상연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연주는 K. 뵘·H. 카라얀·힐베르트 등으로 계승되었다. 빈에는 수많은 음악학교가 있고 그 정점에 음악·연극아카데미가 있다. 여러 음악제·예술제 가운데서도 1920년 시작된 잘츠부르크예술제와 헤르부른축제가 유명하다. 새로 시작된 것으로는 브레겐츠예술제가 있는데, 호수 위에 무대를 꾸며 오페라나 발레를 상연하고 있다. 국토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지에 로마시대의 유적이나 교회·수도원·왕궁·성채 등 역사적 기념물이 많아 박물관으로 이용되거나 순례지나 관광지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이 있다.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거물은 빈에 있는 성(聖) 슈테판대성당으로 1304년 건축되었는데, 제 2 차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보수되었다.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빈 교외에 있는 쇤브룬궁전과 다뉴브강변 단구 위에 있는 멜크수도원이다. 잘츠부르크 구릉에 우뚝 솟아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1세기에 착공된 성채이다. 이러한 건축물과 함께 회화·조각·가구·조원(造園) 등의 예술·기예(技藝)가 발달하였고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근대미술 및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G. 클림트·E. 실레·O. 코코슈카 등의 현대화가들은 독특한 화면을 이루어내었다. 빈의 서민적 희극을 토대로 극작을 한 F. 그릴파르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등을 슈트라우스와 합작한 H. 호프만슈탈을 비롯해 A. 슈니츨러·F. 카프카 등은 세기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학술 수준도 높아서, 평화상을 받은 2명은 별도로 치더라도 생리학·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에 걸쳐 1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유전학 G.J. 멘델, 심리학 S. 프로이트, 인류학 W. 슈미트, 지질학 E. 쥐스, 경제학 A. 멩거 등은 큰 공헌을 한 학자들이다. 빈대학을 비롯해 12개 종합·단과대학이 있으며, 6개 예술대학이 있다. 박사과정 수료자의 연구기관으로는 빈고등학술연구소(사회과학), 빈외교아카데미가 있다. 학술의 최고결집체는 1847년 창립된 오스트리아학사원과 1960년 창립된 루트비히볼츠만협회가 대표적이다. 또, 동·서 13개국이 국제기관으로 설립한 국제응용시스템연구기관 등 수많은 연구·정보센터가 있다. 0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3년 5월, 북한과는 74년 12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과는 무역협정(1971)·사증면제협정(1979)·항공협정(1979)·2중과세방지협정(1985)·투자보장협정(1991)·과학기술협력협정(1995) 등을 체결하였으며, 2001년 대한수출 2억 8496만 달러, 대한수입 2억 2356만 달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교민 327명, 체류자 1282명(2001)이다. 북한과는 민간무역협정(1960), 무역협정(1969),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1978), 항공운수협정(1979) 등을 체결하였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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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삼현님..큰 고마움으로 공부 많이 하겠습니다.
유럽 강대국의 대열에서 번영을 누렸던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족들이 지배한 제국입니다. 비인은 음악의 도시로 유명하지요...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등등... 20세기에 들어 1,2차 세계대전의 물결에 휘말려 패전국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뿌리깊은 문화를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