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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교 개요
自자歸귀依의法법歸귀依의自자燈등明명法법燈등明명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
- 대반열반경에 실린 석가여래의 마지막 설법(상세내용)[4] [5]
불교(佛 敎, Buddhism, बौद्ध धर्म)는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고,불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이다.
=> 【성경으로 답변함】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갈래 길 중에 한 길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유일한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를 너희에게 가르쳐주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내가 진리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된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목 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담대히 선언하십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세상의 역사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예수님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십니다. 이 분이 종교 사기꾼도 아니고, 거짓말장이도 아니라면, 우리는 이 분이 선언하시고 선포하신 말씀들을 진정으로 비중 있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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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 핵심 교리
2.1. 불교의 교리 _ 무아(無我)
'아트만'이 없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an-atman 의 번역어로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이다.[10] 불교의 가르침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4장에도 언급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 숫타니파타 4장의 15.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 sutta) |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는 내 몸을 항상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재산, 사회 등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대로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언젠가 상황이 변해, 보내 주어야 할 때가 오면, 붙잡지 않고 보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 【성경으로 답변함】
이 세상에 속한 모든 피조세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람의 영혼, 진리(하나님의 말씀)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요한계시록 10장 6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브리서 7장 24절, 13장 8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5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장 43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기 1장 21절)
사람의 영혼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실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묘사합니다. 그릇이 낡고 쇠하면 깨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실체는 영원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존재이기에 소멸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이 땅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2가지 갈림길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1~10절, 12장 2,3절, 계시록 20장 10~15절 cf.창세기 2장 7절, 욥기 19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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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교의 교리 _ 탐진치(貪瞋癡)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될 3가지 악덕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 역시 가장 오래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숫타니파타에서 그 원형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ο 동굴에서 떠나라.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한 것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
동굴'에 비유하였다. 동굴 속 '익숙함'과 '편안함'에 취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 상황은 변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때까지의 익숙했던 상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황이 다시 좋게 바뀌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괴로움은 심해지나, 이때까지 했던 것들이 생각나서 동굴을 떠나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변해버려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 인생을 살든지' 하라는 것이다. 건강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재산,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사랑, 사회생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걱정도 동굴에 해당된다.[11][12][13]
내가 옳다고 남을 비난하지 마라. 내가 옳다고 여겨서 '나는 이렇게 한다'고 뽐내면서 가르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14]
ο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면, 남에게 반드시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싸움이 일어난다.[15]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옳다고 여겨,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일'이나 '실패 후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스스로와 싸우는 셈)
ο 결점 없는 완벽한 순수를 찾지 마라. 보고 듣고 느껴지는 그 어떠한 진리나 가르침에도, 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점 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어서, 그 깨달음을 묻고 다니며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해서, 종교적 가르침이나 삶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따르거나 하진 말아야 한다. 설사 완벽하고 순수한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완벽한 순수를 구현해내기란 불가능하고, 삶을 더 괴롭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완벽한 순수를 찾았는데, 완벽을 추구하여 도리어 괴로워진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은 애초부터 괴로움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16] 왜 괴로움이 없는 삶(진리)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17][18]
ο 최고를 생각하곤 비교하지 마라.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면, 최고가 아닌 다른 것을 볼 때는 '수준이 낮다'며 비교하게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어떠한 것에도 "최고"를 두지 말라는 것. '좋아하는 것'을 두게 되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지고, 여기에 매달리게 되어 집착이 되므로 괴로워진다. 이렇게 비교는 집착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19]
차례대로, '가진 것'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결점(완벽)'에 대한 집착, '더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다.[20] 여기서 앞의 3가지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 【성경으로 답변함】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장 12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 10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장 23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편 5절)
죄의 삯(값)은 사망이요(로마서 6장 23절)
성경은 애매모호하게, 추상적으로 돌려 얘기하지 않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언합니다.
인류 첫 조상의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들인 우리 모두가 죄를 유전받은 후손으로 태어나서 죽음이 온 인류에게 임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이로 보건데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죄에서 자유로운 의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장 9~10절)
구스인(흑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23)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야 64장 6절)
성경은 온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익하며, 어리석은 행동임으로 알려줍니다.
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살아가면서 죄를 끊임없이 짓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역사를 통해서 보든, 수많은 뉴스 매체를 통해서 보든, 우리 주변의 가까운 곳, 심지어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보더라도, 성경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진 것'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결점(완벽)'에 대한 집착, '더 좋은 것'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철학일지는 모르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종교와 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책, 성경은 이것이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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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교의 교리 _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
우파니샤드에서 전래된 오래된 가르침[27]이 상좌부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 근본 불교에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므로써 나온 개념이 안-아트만[28]. 즉, '무아'이다. 무아를 강조한 근본 불교에는 '아트만'의 개념이 잠시 사라졌다가, 근본 불교의 뜻이 희석되자 상좌부 불교에서 다시 '오온'과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여기서 아트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아트만)의 특징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카르마)'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윤회, 업보, 신의 유무, 지옥과 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29])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30][31]
atman | an없다.-atman아트만 |
영혼, 나, 아트만 | 무아 (안아트만) |
상좌부 불교에서의 '나[32]'는 어떻게 정의되고 응용되는지 살펴보면,
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蘊)"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33]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와 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 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34] [35]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나 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오해이고 사실 단견[36]과 상견[37]을 부정하며 연기의 원리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 윤회가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는 한, 이러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정의와 논리학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38]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
=> 【성경으로 답변함】
사람의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적 죽음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며, 육체적인 죽음과 동시에 우리의 실체이며 영원한 존재인 영혼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결이 있기 전까지 마치 구치소와 같은 개념인 낙원(천국에 갈 영들의 대기 장소)과 음부(지옥에 갈 영혼 들의 대기 장소)에 거하다, 훗날 영혼은 부활한 몸과 합쳐져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영원히 거하게 될 2가지 갈림길중 한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요한계시록 20장 11~15절)
*cf)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한 번 죽는 첫 번째 죽음(사망)으로, 하나님의 심판후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두 번째 죽음(사망)으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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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불교의 교리 _ 결단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는 마음의 평온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건 생각(또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번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고, 하고 싶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그 대상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거듭 떠올리는 데서 집착이 만들어지므로, 이러한 '생각의 반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결단'인 셈.
따라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반복된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는 '틀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 '삶의 관점을 항상 새롭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53] [54] [55]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며 '결단'을 촉구했으며, 선종에서는 돈오(頓悟)가 '결단'에 해당되어 이 이론으로 선종이 교종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6]
=> 【성경으로 답변함】
종교는 사람편에서 낙원(절대적인 평안) 또는 신에게 이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걸어서 물위를 걸어갈 수 없으며, 걸어서 하늘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님편에서 사람으로 찾아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긴급하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로 초대하시지만,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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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지도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 ★★
자기의 죽은 자를 살려 달라는 호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기독교)와 석가모니(불교)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 석가모니의 답변
불교 석가모니의 가르침중
석가모니가 사위성에 있을때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찾아와 자신의 슬픔을 눈물로 하소연 하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호소 했습니다. 그때 석가모니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은 이제 곧 나가서 온 마을을 다니며 사람이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을 찾아 각각 쌀을 한 움큼씩 얻어 오시오. 그러면 당신이 슬픔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겠소!"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바로 뛰어나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이 한 번도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힘이 빠진 채로 다시 석가모니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석가모니가 다시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자신도 죽을 존재일뿐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도 죽음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의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의 가르침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26)
[죽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 성경 누가복음 7장에서 발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성경 누가복음 8장에서 발췌】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 또한 참고로 세계4대 성인들 중 석가모니의 무덤은 있지만, 예수의 무덤은 없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홀로 친히 감당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감당하셨고,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으신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 아버지 나라로 영접하시기위해 , 다시 오실 것이라는 가르침이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참고 성경 구절, 고린도전서 15장]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가 마지막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