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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차하리아스 베르너의 희곡 <아틸라, 훈족의 왕>
대본 테미스토클레 솔레라(훗날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완성)
초연 1846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배경 453년경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지역(아퀼레이아, 아드리아 해안, 로마 부근)
<2016년 볼로냐 시립극장 / 116분 / 한글자막>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미켈레 마리오티 지휘 / 다니엘레 아바도 연출
아틸라........훈족의 왕.........................................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베이스)
에치오........로마의 장군......................................시모네 피아졸라(바리톤)
오다벨라.....아퀼레이아 영주의 딸.........................마리아 호세 시리(소프라노)
포레스토.....아퀼레이아의 기사. 오다벨라의 연인.....파비오 사르토리(테너)
울디노........브레톤 출신으로 아틸라의 노예............지안루카 플로리스(테너)
레오네........로마의 노인......................................안토니오 디 마테오(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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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베르디 <아틸라>, 2016 볼로냐 코뮤날레 극장 실황
베이스와 바리톤의 무게 있는 전쟁이 펼쳐지다
라 페니체, 마시모, 코문날레 극장이 합작한 베르디 초기작 <아틸라>의 실황물(2016)이다. 유럽을 떨게 했던 훈족의 왕 아틸라, 훈족에게 정복당한 땅의 여전사인 오다벨라, 아틸라를 견제하는 에치오의 이야기이다. 오다벨라는 독살위기에 빠졌던 아틸라를 구하고 동족으로부터 외면 받지만 결국 복수를 하며 막이 내린다. 2막 에치오와 아틸라의 'E gettata la mia sort(영원한 영광의 정상에서)' 등 다르칸젤로(아틸라), 피아졸라(에치오)가 펼치는 저음의 대결이 빛을 발한다.
1100여석의 라 페니체 극장에 맞춘듯한 아바도(연출)는 화려한 무대보다는 성악진과 음악에 집중하게 한다.
해설지(13p/영·독·불어)에는 작품 해설이 수록.
유럽 역사에서 훈족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전성기를 이루었던 아틸라 시대(5세기)에는 로마 제국마저 크게 위협당했다. 아틸라는 두려움이자 전설과도 같았다.
1864년 초연된 <아틸라>는 베르디 초기의 걸작으로 1864년 3월 17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라 페니체 극장, 마시모 극장, 코문날레 극장이 공동합작 프로덕션을 담은 영상물은 2016년 볼로냐 코뮤날레 극장 실황이다. 라 페니체 극장은 <아틸라>의 초연(1864년 3월 17일)된 극장이기도 하다.
오다벨라(마리아 호세 시리)는 훈족의 왕 아틸라(일데브란도 다크안젤로)가 정복한 영지의 영주의 딸이다. 그녀는 여전사로서의 용맹스러움으로 아틸라를 놀라게 하여 사면 받는다. 로마 사절로써 아틸라를 방문한 에치오(시모네 피아졸라)는 로마만은 그냥 두라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오다벨라의 연인 포레스트(파비오 사르토리)는 아틸라를 죽이고자 음모를 꾀한다. 하지만 오다벨라는 연회에서 뜻밖에도 독살위기의 아틸라를 구하고 새 왕비로 간택된다. 로마군들은 오다벨라의 배신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의 관을 벗고, 아틸라를 칼로 찌른다.
이 영상물에서는 베이스바리톤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아틸라)와 바리톤 시노네 피아졸라(에치오)가 두 주역을 맡아 남성 오페라의 진수를 남김없이 발휘한다.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의 몇 안 되는 대표적인 바리톤 아리아인 2막 에치오와 아틸라의 'E gettata la mia sort(영원한 영광의 정상에서)'에서 두 사람의 호흡은 빛을 발한다.
연출은 1100여석의 라 페니체 극장 맞춤형이다. 다니엘레 아바도(연출)는 영웅의 서사에 화려한 무대로 구현하기보다는 성악진과 음악에 집중하게 했다.
해설지(13p/영·독·불어)에는 작품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 작품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아틸라
주세페 베르디(1813~1901)
1850년대 베르디의 인기 레퍼토리 중 하나로 작곡가의 초기 작품 중 드물게 베이스와 바리톤이 리드하는 남성 저음 배역이 중요한 오페라이다.
전설이 된 훈족의 왕
로마제국을 침략했던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 훈족의 우두머리인 아틸라의 명성은 유럽에서 전설의 인물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는 바로 그 전설 속 인물의 수많은 전장 중, 로마제국과의 전투와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베르디의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아퀼레이아 광장에서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를 점령한 훈족과 그들의 왕 아틸라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아틸라의 명령을 듣지 않고 아퀼레이아 처녀들을 포로로 잡은 부하 울디노에게 아틸라는 화를 낸다. 그러자 울디노는 이 여인들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여전사임을 전한다. 그러자 아틸라는 조국을 위해 칼을 든 여인의 훌륭한 기개를 칭찬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오다벨라는 아틸라에게 칼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아틸라가 자신의 칼을 대신 주자 오다벨라는 언젠가 이 칼로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갚겠다고 결심한다.
아틸라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로마에서 더 이상 전쟁을 하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아틸라는 이에 겁이 났지만 이를 극복하고 로마를 정복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틸라는 병사들을 불러 로마로 쳐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이 때 멀리서 흰 옷을 입은 노인 레오네를 앞세운 한 무리가 신을 찬양하면서 등장한다. 레오네의 모습이 아틸라의 꿈에 나타난 노인과 같은 모습임을 본 아틸라는 겁에 질린다. 한편 로마 진영에 있던 에치오는 전투를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로마 황제의 칙서를 읽고, 전투도 임하기 전에 철수하는 것에 대해 군인으로서의 수치심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이 때, 아틸라는 에치오에게 자신의 진영으로 그를 초대한다는 내용을 담아 노예를 보낸다. 아틸라가 보낸 노예가 떠나자 포레스토는 에치오와 아틸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아틸라의 진영에서 축하연이 열리고 에치오가 등장한다. 아틸라가 잔을 높이 들고 술을 마시려고 할 때, 오다벨라가 잔에는 독이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목숨을 살린 대가로 아틸라는 오다벨라를 왕비로 맞이하겠다고 한다. 결혼식 아침 오다벨라의 배신에 분노한 포레스토는 다시 아틸라를 죽일 계획을 짠다. 오다벨라는 신부 차림을 하고 왕관을 쓴 채 천막에서 나와 포레스토에게 자신이 배신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아틸라가 나타나 신부를 찾는데, 오다벨라가 이탈리아인들과 있음을 보고 화를 낸다. 그때 로마 군대의 함성이 들리며 아틸라의 캠프를 습격하는데, 이에 포레스토가 칼을 빼어 아틸라를 공격하지만, 오다벨라가 숨겨둔 단도가 먼저 아틸라의 심장을 찌른다.
이탈리아 애국심을 고취시키다
1850년대 베르디의 〈아틸라〉는 그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이 오페라는 베르디가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의뢰받은 두 번째 오페라로 당시 독일의 차하리아스 베르너가 발표한 〈아틸라, 훈족의 왕〉이라는 대형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작품의 인기 비결은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훈족의 왕 아틸라와 로마제국을 구하기 위해 나선 장군 에치오의 2중창의 매력과 무엇보다도 줄거리에 담겨 있는 이탈리아 애국심이 그 비결이었다. 훈족의 거센 진격에도 로마제국은 끝까지 저항하여 이탈리아를 지켜냈다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애국심을 고취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아틸라와 에치오의 2중창에서 에치오가 부르는 가사 “세계는 너에게 줄 터이니, 대신 이탈리아만은 나에게 맡겨 달라”는 이탈리아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짚일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또한 무대의 배경이 되는 아드리안 해안에서 전쟁에 패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그 장소가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점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자긍심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아틸라〉의 초연은 1846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이루어졌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베르디의 상술을 의심해볼만하다.
두 명의 대본가
원래 이 작품의 대본은 피아베가 담당하였다. 베르디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의 의뢰로 고심하던 중 대본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와 여러 대본을 검토하던 중, 독일의 차하리아스 베르너가 발표한 희곡 《아틸라, 훈족의 왕》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본가가 피아베에서 솔레라로 바뀌게 되었지만, 솔레라 역시 오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이민을 간다. 이렇게 〈아틸라〉는 다시 피아베의 손으로 넘어오게 된다. 오페라의 마지막 부분을 피아베가 맡아 손질하게 되었지만, 갑작스런 대본가의 변경으로 베르디와 두 대본가의 이견이 조율되지 못한 채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초반에 잘 짜인 구성에 비해 2명의 대본가가 번갈아가면서 대본을 수정하여 결말이 전체 작품에 비해 초라하고 산만하여,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프롤로그 1장, 에치오와 아틸라의 2중창 ‘동방의 지도자여(Tardo per gli anni)’
바리톤과 베이스의 어우러짐이 매력인 2중창이다. 아틸라는 로마의 적장 에치오를 부른다. 에치오는 아틸라에게 “세계는 너에게 줄 터이니, 대신 이탈리아만은 나에게 맡겨 달라”며 흥정한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 제의를 거절하고, 두 사람은 이어 서로가 적임을 확인하며 후반부인 카발레타 ‘자만심에 넘치는 당신(Vanitos!)’을 부른다. 이 2중창의 에치오의 흥정은 〈나부코〉,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의 합창의 성공여부와 같이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한 유명한 가사이다.
1막 1장, 오다벨라의 로만차 ‘오! 날아가는 구름 속에서(Oh! Nel fuggente nuvolo)’
오다벨라는 아틸라의 진영에서 그를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구슬픈 현의 솔로에 맞춰 오다벨라가 등장한다. 그녀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녀의 살해당한 아버지와 연인 포레스토를 떠 올리며 안단티노에 맞춰 ‘오! 날아가는 구름 속에서’를 부른다. 아버지에 대한 애도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아름답지만 슬픈 로만차이다. 곧 음악이 급박하게 바뀌며 포레스토가 등장하면서 오다벨라와 포레스토의 2중창으로 이어진다.
2막 1장, 에치오의 카바티나 ‘영원한 영광의 정상에서(Dagli immortali vertici)’
로마 황제의 전투를 포기하고 로마로 철수하라는 칙서를 읽은 에치오는 전쟁도 해 보지 못한 채 후퇴해야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 에치오는 군인의 당당한 기개를 노래하는 ‘영원한 영광의 정상에서’를 부르며 이러한 수치심을 삭힌다. 음악은 안단테로 로마의 후퇴에 대해 노래한다. 곧 포레스토가 등장하면서 아틸라를 암살할 계획을 말한다. 이어 자신만만한 에치오의 야망을 보여주는 카발레타 ‘내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È gettata la mia sorte)’를 부르며 미래에 올 영광의 순간을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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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
오페라 366
아틸라 Attila
사전지식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는 아틸라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위대한 용사이며 정의의 실현자로, 어떤 나라에서는 흉포한 전사로 묘사되고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은 「니벨룽겐의 노래(Niebelungenlied)」에 소개된 것이다. 아틸라는 독일어로 에첼(Etzel)이라고 한다. 여주인공 오다벨라는 조국을 적군의 말발굽에서 구하기 위해 용맹하게 싸운 구국 영웅이다.
에피소드
베르디 당시의 이탈리아 정세로 보아 오페라 <아틸라>는 정치와 연관된 부분이 있다. 특히 에치오 장군의 「그대는 우주를 가지라, 나는 이탈리아를 가지겠노라(Avrai tu l’universo, resta Italia a me)」는 이탈리아의 자유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 메아리쳤을 것이다.
줄거리
[프롤로그] 452년 훈족의 장군이며 왕인 아틸라가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Aquileia)를 침공한다. 아퀼레이아의 여전사들까지도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잡혀온 여전사 중에는 아퀼레이아 총독의 딸 오다벨라(Odabella)도 있다. 오다벨라는 조국을 파괴하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한 아틸라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아틸라는 서로마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보낸 사신 에치오(Ezio) 장군을 만난다. 그는 아틸라에게 속히 이탈리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지만, 아틸라는 살기 좋고 풍요로운 이탈리아를 모두 점령하겠다고 하면서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퀼레이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호숫가 피난처로 모여든다. 사람들은 아퀼레이아의 기사 포레스토(Forresto)에게 전보다 더 강하고 견고한 도시를 건설해달라고 부탁한다. 오다벨라와 결혼을 약속한 포레스토에게 사람들은 오다벨라가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만 잊으라고 말한다.
[제1막] 오다벨라가 아틸라의 진중에 억류되어 있는 것을 안 포레스토는 훈족 병사로 가장해 아틸라의 진중에 잠입한다. 포레스토는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며 슬퍼하는 오다벨라를 만난다. 둘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데 감격하며 서로를 품에 안는다. 오다벨라는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지키기 위해 이곳 진중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은 아틸라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아틸라는 측근 울디노에게 꿈 얘기를 해준다. 로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했으나 로마 성문에서 만난 어떤 노인이 퇴각하라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아틸라가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리고 출전하려는 순간 어린아이들과 함께 교황 레오 1세가 등장한다. 교황을 본 아틸라는 꿈에서 본 노인이라고 생각해 자기도 모르게 급히 말에서 내려선다. 이 모습을 본 기독교도들이 신의 권능을 찬양한다.
[제2막] 에치오 장군은 훈족과 휴전을 했으니 속히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전갈을 받는다. 그는 유약한 황제가 훈족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몹시 분개해 혼자라도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마침 아틸라가 강화조약을 기념해 에치오 장군을 성루로 초청한다. 에치오 장군과 포레스토는 이 기회에 힘을 합쳐 아틸라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로 약속한다. 아틸라의 측근 울디노가 아틸라를 독살할 계획임을 안 포레스토는 이를 오다벨라에게 얘기해준다. 오다벨라는 자기가 죽여야 할 아틸라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해, 포도주를 조심하라고 아틸라에게 미리 일러둔다. 성루에서 포레스토가 아틸라에게 포도주를 권하자 아틸라는 노예에게 포도주를 먹여 독이 든 것을 확인한다. 포레스토는 즉시 도망친다. 아틸라는 오다벨라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왕비로 삼겠다고 선언한다.
[제3막] 아틸라 캠프 근처의 숲이다. 포레스토와 에치오가 아틸라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포레스토는 오다벨라가 자기를 배반했다고 믿어 질투심에 불탄다. 그러나 오다벨라는 아틸라의 캠프에서 도망쳐 나와 포레스토에게 자신의 무죄와 변치 않는 진심을 믿어달라고 간청한다.
한편 아틸라는 오다벨라를 찾아 나섰다가 매복해 있던 병사들의 공격을 받는다. 포레스토가 아틸라를 쫓아가 죽이려고 하자, 오다벨라가 먼저 아틸라를 칼로 찌른다. 그리하여 오다벨라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디트(Judith)처럼 백성을 아틸라에게서 해방시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틸라 [Attila] (OPERA 366, 2011. 6. 27.,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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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정보 === <다음 백과>
아틸라
(출생 미상 ~ 453년 사망)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 매년 황금을 약탈했고,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아틸라의 그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파타비움(파도바)·베로나·브릭시아(브레시아)·베르고뭄(베르가모)·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453년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으나 아틸라는 급사했고,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개요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로마사, 이민족 침입)
동로마 제국 침입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는 지금까지 훈족에 지불해왔던 보조금을 2배로 늘리고 이후 매년 300kg의 황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자기 영토의 북부 또는 동부 야만족에 대한 정복사업을 했던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은 마르구스 조약에서 약정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그결과 동로마군이 서부와 동부 국경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441년 아틸라는 도나우 강 유역 변경에 대해 강력한 습격을 감행했다.
그는 싱기두눔(베모그라드)을 포함한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간신히 1년의 휴전을 맺고 서부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443년 아틸라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도나우 강변의 도시들부터 휩쓸기 시작하여 나이수스(니시)와 세르디카(소피아)를 향해 제국의 내부로 밀고들어가 두 도시를 파괴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서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고,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남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훈족 사수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을 뚫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갈리폴리 반도로 퇴각해 있던 동로마의 나머지 군대를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곧이은 평화조약에서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황금 2,570㎏에 달하는 연체된 공납금을 지불하도록 했고, 연간 공납금을 3배로 늘려 그후부터 매년 황금 900kg을 강탈했다.
443년 가을에 체결된 평화조약 이후 아틸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전쟁은 441~443년 때보다 더 큰 규모로 계획되었고, 주공격 방향은 전의 공격지보다 좀더 동쪽인 남동부 유럽의 로어스키티아와 모에시아 지방이었다. 그는 우투스(비드) 강에서 동로마 제국 군대를 맞아 격파했으나, 그 자신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아틸라는 발칸 지방을 황폐화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달아 그리스에 이르렀다. 그리스에 들어온 그는 테르모필레에서 저지당했다. 이후 3년간의 침략 기간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세 2세의 외교사절과 아틸라 간의 복잡한 협상과정으로 점철되었다. 이때의 외교적 접촉에 관한 많은 세부 내용은 449년 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왈라키아에 있던 아틸라의 사령부를 방문한 파니움의 프리스쿠스가 쓴 〈역사 History〉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전쟁을 끝맺는 협정 내용은 443년보다 더 가혹했다.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의 광대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고,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동로마의 공납은 계속되었다.
갈리아 지방 침입
아틸라의 그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때까지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로마의 아이티우스 장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지방의 침략 동기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서 자신의 목적은 톨로사(툴루즈)를 본거지로 한 서(西)고트족(동·서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던 게르만족)의 왕국이며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450년 봄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가 그녀의 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면서 예정된 결혼에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해왔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선언하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요구했다. 아틸라가 갈리아 지방으로 돌아오자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협상을 맺어 훈족에 대항할 연합군을 편성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남아 있지만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틸라 군대가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대부분 점령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군대가 훈족을 몰아내려고 했을 때는 훈족이 이미 이 도시 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교전은 카탈루냐 평원에서 있었는데, 일부 학자는 마우리카였다고도 한다(두 곳 모두 확인되지 않음). 서고트족 왕이 전사하는 등 격렬한 전투 끝에 아틸라는 후퇴했고, 곧이어 갈리아 지방에서 물러났다.
이 싸움은 아틸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카탈루냐 평원 전투).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파타비움(파도바)·베로나·브릭시아(브레시아)·베르고뭄(베르가모)·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해에 이탈리아를 휩쓴 기근과 역병 때문에 훈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당시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전임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약속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결혼식 날 밤 급사했다. 그와 그의 보물을 묻은 자들을 살해하여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도록 했다.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448년 아틸라의 막사를 방문하여 그를 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작고 땅딸막한 키에 큰 머리, 깊은 눈, 낮은 코, 가는 수염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틸라는 성마르고 고함을 잘 치며 사나운 성미였지만 매우 끈질긴 협상자였으며 무자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아틸라가 나무 접시에 담은 고기만 먹고 있는 반면, 그의 부하장수들은 은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갈리아 침입 이전까지 아틸라가 거둔 성공을 보면 그가 탁월한 전략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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