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끝에서
최 상 규
어두운 창유리에서 밤이 울고 있었다. 불규칙한 빗소리로 삼면이 둘러싸인 방. 장방형의 침묵의 공간. 전압이 모자라 흐릿한, 막대기꼴 형광등 아래, 여섯 개의 탁자가 청닛빛으로 번뜩이고……. 벽엔, 맥주 회사에서 낸 캘린더 위에 젊은 여배우의 만년(萬年)의 미소가 식어 굳어 있고…….
카운터 뒤에 그녀는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는 오뚝이를 앞에 놓고. 그녀의 눈은 둥글었다. 눈썹보다 깊었다. 조용히 졸고 있었다. 탄탄해보이는 두 뺨 사이의, 조금도 거추장스러워 보이지 않는 입술은 겨우 닫혀 있었다.
날쌔게 빗물을 튀기며 질주하는 화물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벽을 뒤흔들어놓고 사라져갔다. 덩달아 파리 한 마리가 덩 빈 공간에 건방진 곡선을 그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곤 또다시 빗소리.
어디선가 라디오의 시보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이 반사적으로 손목의 시계를 향했다. 일분 전.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이 시계의 용두로 향해 움직이다가 멎었다. 그 손끝에 하얀 손거울의 표면이 닿았다. 그녀의 한쪽 콧방울이 쭝깃 움직였다. 손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척.
“요건 하루에 이십사분 늦는 재미로 가는 시계야.”
방긋 웃었다. 거울 속에 가득한 입이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거울의 방향을 약간 바꾸고, 이번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콧등에 생기는 주름살이 얄밉도록 선명하였다. 거울의 방향을 다시 먼저대로 고치고, 이번에는 빨간 혓바닥을 찌익 내밀었다. 쏟아져나오는 속도 나야, 나. 그래봐야 별수없어. 얌전히 웃고 보니 또 하나의 얼굴. 이왕이면 예쁘게 태어나질 못하고. 뒤이어 생겨나는 불만의 얼굴을 카운터 위에 덮어 버리고 그 위에 두 손을 포갰다.
맞은편 창 밖의 빗줄기가 하얗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살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서너 번 눈을 깜박이다가 손등 위에 얼굴을 눕혔다. 내 참……. 뭘 하고 있는 거야. 다 틀렸어. 문을 닫아 걸고 잠이나 잘까? 오늘 밤엔 모처럼 간섭할 사람도 없는데.
끄으윽! 문 앞에서 차가 멎었다. 그녀는 눕혀진 얼굴을 그냥 두고 시선만 창 밖을 향했다. 폭 좁은 부채꼴의 빛다발이 꺼졌다. 수런거리는 듯한 소리가 나고,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승용차였다. 그녀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룩하게 나온 새파란 가슴이 팽팽해지도록 옷자락을 잡아내려 펴면서, 헐렁한 머릿결올 고개를 흔들어 어깨 너머로 날려 넘겼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섰다. 두 사람. 젊은 남자들이었다. 앞선 것은 번들거리는 레인코트 뒤에 들어선 사나이는 좀 큰 키. 노타이셔츠에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산.
“어서오세요.
얼른 튀어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러나 정성들여 말했다. 그들은 대꾸없이 우뚝 선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엷은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는 카운터를 돌아 그들에게로 한발 내디디었다.
“허스키!”
“쓸쓸하군!”
그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하고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가서 덜컥덜컥 마주 앉았다. 그 밝은 목소리에 그녀가 느꼈던 위협이 걷혔다. 그녀는 성냥과 재떨이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키큰 쪽은 우산을 벽에 기대 세우고 있었고, 레인코트는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훔쳐내고 있었다.
“비가 몹시 오죠?”
저절로 차분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키큰 쪽이 시선을 들며 소리는 내지 않는 채 입만 약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탁자 위에 가지고 온 것을 소리 안 나게 놓았다.
“어둡군.”
레인코트였다.
“네. 좀…….”
“전구를 좀더 달걸…….”
“밝아봐야 마찬가진걸요 뭐.”
“뭐가?”
“네?”
“뭐가 마찬가지냐구?”
그녀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뭘 좀 드릴까요?”
“아.” 키큰 쪽이었다. “콜라.”
“네.”
시원하게 휜 그 얼굴에 호감이 갔다. 상긋 웃어보여주었다. 그 얼굴의 눈이 약간 가늘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놓았다. 슬리퍼꿈치에서 짤딱 소리가 난 순간부터 그녀는 걸음에 조심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참, 콜라가 몇 병이나 남았던가. 얼음도 다 녹아버렸는데. 괜찮겠지. 비오는 덕에 선선하니까. 오히려 따끈한 걸 찾을 법도 했었는데…….
삼십 촉 백열 전구가 혼자 주방을 지키고 있었다. 글라스를 두 개. 그리고 닫혀 있으나마나인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병 세 개가 미지근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뭘 하는 사람들일까? 젊어. 삼십 안쪽. 이 비오는 밤에 차를 몰고. 운전수와 손님 같지는 않아. 자가용찰거야. 고단한 직업에 종사는 사람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호강하며 놀러다니는 사람 같지도 않고, 아무튼…….
남자들은 웃고 있었다. 말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두 얼굴은 밝았다. 레인코트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재미있다 생각하며 그녀는 그들 앞에 글라스와 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쟁반을 옆의 탁자에 놓고, 두 손우로 병을 들어 키큰 쪽의 앞에 놓인 글라스에다 기울였다. 휜 얼굴이 그녀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별로 곱지는 않지만 뼈마디는 보이지 않는 손. 레인코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귀로 보였다.
“뭐가 마찬가지라고 했죠?”
웅덩이에 돌을 던지듯. 장난꾸러기의 말씨.
“심심하시군요.”
“누가?”
“손님께서요.”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레인코트는 눈을 크게 뜨며, 키 큰 쪽을 건너다보았다.
“당신은?”
어마! 키큰 쪽이었다. 당신이라고?
그녀는 적이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조용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뜻 없는 웃음으로 당황을 얼버무리고 말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시선은 끈질겼다.
“역시 심심한 거지?”
그때 레인코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는 얼른 성냥통을 집어 성냥개비를 꺼냈다.
“콜라 한 병 더 하고.” 키큰 쪽이 말을 계속했다. “잔도 하나 더 하고.”
“잔은 무얼 하시게요?”
그녀는 불붙은 성냥개비를 레인코트에게 내밀었다.
“세 사람밖에 없는데…… 같이 마십시다.”
“저도요?”
키큰 쪽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쉽게 대답했다. 하마터면…… 나머지 한 병이 없었더라면, 우산을 받고 가게집으로 사러가야 될 뻔했지 뭐야. 그런데 남자들이란, 크건 작건 묘해. 여자를 보고는 가만 놓아둘 수가 없는 모양이지? 어쨌든…… 뭐…….
그러나 주방에 가서 병을 가지고 나오며, 그녀는 잠깐 긴장했다. 곁에 앉혀놓겠다는 거야. 묻겠지. 성이 뭐냐, 언제부터 여기 있느나, 어째 혼자냐, 심심하고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 오래 앉았을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가만 놓아두지는 않을 거야. 풋나기 방범대원이나 자동차 조수 따위들이나 지분거리는 ‘아가씨’ 를 놓고 말이야. 호호 그러나 멸시는 당하지 않을걸.
그녀가 갖다놓은 병을 키큰 쪽이 집어 들었다. 거품 이는 갈색 액체가 글라스에 따라지고 있었다. 미지근한 온정도 못 될…… 지나가는 풍속 정도의……. 그녀는 자칫하면 소름이 돋아날 것 같은 긴 팔을 뻗치어 잔을 쥐고 있었다.
“이렇게 한산해서야……. 늘 이렇지는 않겠지?”
그녀가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레인코트가 말했다. 그녀는 튀어오르는 잔 거품을 코끝에 느끼며 대답했다.
“별스럽진 않지만 비 때문에 더 이렇죠.”
“오히려 심심하겠군.”
“주인이오?” 키큰 쪽이었다.
“아녜요.”
“그럼 편하겠군.”
레인코트는 빈 글라스를 탁자 위에 딱 소리가 나게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네모난 병이었다. 노오란 액체가 흘러나왔다. 잔에 따라지자 엷은 갈색이 돌아났다. 반홉 가량 차오르자 그는 병을 세워 탁자 위에 놓았다.
“생각있으시 면…… 마음대로.‘
“뭐예요?”
“위스키. 아마 무섭지도 않고 잠도 잘 올 거요.”
레인코트는 저 혼자 잔을 들어 꿀꺽 한 모금을 삼켰다. 빈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드시겠어요? 따라드릴까요?”
“아니.”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따라 마시지.”
이상한 사람들. 음흉스런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서울서 오는 사람들일 톈데……. 뭘까? 이런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속마음을 실토시키는 재주라도 가졌으면……. 깨끗한 손. 때가 빠진 얼굴. 무엇하러 일부러 차를 세워 예까지 기어들어왔을까? (아니, 그냥) 들어왔을까? 오래 차를 몰고 왔으니까, 트럭 운전수들이 그러듯이 흔들리지 않는 의자에 궁둥이를 붙여보고 싶어서인가? 아무러면, 아무러면 어때? 손님이야. 그저 손님. 좀 색다르다뿐이냐. 얼마 안 있다 가버릴 사람들이야.
키큰쪽이 삼분의 일쯤 술이 담긴 글라스를 뱅뱅 돌리다가 두 모금에 마셔버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가지!”
순간 그녀는 뜻밖에도 무엇이 깨어진 것 같은 아쉬움을 가볍게 느꼈다. 그래 저도 모르게 재빨리 말했다.
“벌써요?”
레인코트가 말없이 나머지 술을 마시고 난 후, 지폐 한 장을 내놓았다. 빳빳하고 싱싱한……. 돈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끝에 느껴졌다.
“거스름돈은 그만두시오.”
“네?”
레인코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큰 쪽이 벽에 기대놓았던 우산을 집어 들었다.
“어디로 가세요?”
“이 다음 도시까지. 왜, 궁금해요?”
“그보다도…….”
키큰 쪽의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유없이 얼굴이 붉어지려 함을 느꼈다. 겨우.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겨우, 십분. 아이들이 가고 나면, 또…… 한 시간에 일분씩을 꼭 늑장부려야만 하는 시계하고 둘이서…… 지겨운…….
그녀는 술병의 마개를 집어 병을 막았다. 그리고 레인코트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당연했다. 그들이 가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서 거스름돈 이나…….
“한 잔 따라놓고 갈까?”
레인코트였다. 그녀는 단념했다. 카운터 위의 오뚝이가 나무랄지도 몰라.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보다도―.”
키큰 쪽에서 진한 목소리가 울려 나오자 그녀는 선뜻 고개를 들었다. 그보다도…… 무슨……? 그녀는 자신의 시선이 혼들림을 느꼈다.
“부탁을 하나 할까요?”
그녀는 실망했다. 누가 오거든 이렇게 이렇게……. 그런 거겠지. 자신과는 아무 관계 없는…… 차라리 그냥 가는 것만도 못한…….
“네, 말씀하세요.”
어쩌면 저렇게도 강한 눈길로…… 어서 말이나 하지 않고.
“우리하고 같이 갑시다.”
그녀의 두 눈이 똥그란해졌다. 무슨…… 턱없는 …… 얼토당토 않은……. 웃기는 거야. 그러나 웃을 수는 없었다. 남자의 어조는 진지했다. 그 얼굴은 근엄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더욱 우스워야 했다.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빳빳해지고 별안간 마음속은 어수선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단념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오뚝이를 시켜 웃었다. 별…… 실없이……. 그런데.
“싫어요?”
그의 목소리는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거짓에 가담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딜 가자고 하시는 건지 전…….”
“물론.” 키큰 쪽이 금방 대답했다. “어리둥절하겠지. 하지만 간단해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서 내려온 게 아니야. 심심한 거야. 지독하게 심심한 거야. 그런데 우연히 여기 들어와서 보니, 당신도 굉장히 심심해 보이는군. 그러니 절대로 안 될 이유만 없다면, 우리 심심한 사람들끼리 함께 가서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내자는 거요. 오늘 밤만.”
그녀는 정색을 않을 수 없었다, 깔보고 하는 말 같지는 않지만, 멸시당한 사람의 반발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계제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장난감처럼 데리고 가시고 싶다는 전가요?”
“천만에.”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부인했다. “장난감이야 가기만 하면 우글우글한걸.”
“그럼 뭘 원하시는 거죠?”
“편이야. 우리 편. 심심한 우리 편. 심심해할 줄도 모르는 머저리들과 맞설 우리 편에 넣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왜 하필 저를…….”
“찾아온 게 아니야. 우연히 만난 거지.”
“그렇지만 아무리 제가 심심하기로, 낮선 손님을 따라 이 밤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갈 것 같아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는 한쪽 어깨를 약간 움직여 보이며 대답했다.
“못 알아들으시는군.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우리가 가는 곳도 사람의 동네고, 여기서도 처음 만나서 같이 앉았었던 사람들이니 거기서라고 같이 못 있을 것도 없을 테니까 한 부탁이었는데……. 싫다든지 안 될 이유가 있다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싫다는 말 대신 또 물었다.
“제가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인 것 같아요?”
“자유야 만드는 저지. 혼자서 안 되면 협력해서 말이오.”
협력해서? 이상한…… 엉터리, 그녀는…… 창밖의 아스팔트 대로 위로 또 육중한 트럭 한 대가 질주해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지금 날고 싶은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나타나 마력처럼 감겨드는 힘에 모른 척 내맡기고 술렁 떠올라보고 싶은 것이었다. 아아, 그러나 이 눈앞의 사내들이 없이도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이 아니고서도 스스로 날아오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 사내들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도 사양하지 않고 싶은걸……. 콜라 한 잔을 받아 마시듯이 가벼운 기분으로 말이야.
“결정해요. 어차피 여기 혼자 남아 있어 봐야 별로 재미있는 일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오늘 밤뿐이야. 우리도 내일 아침까지는 서울에 돌아가 있어야 할 사람들이고……. 그러니 내일 아침 일찍 이 다시 여기에 돌아올 수 있어요. 단, 겁을 낼 필요는 없어. 우리는 무엇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아니야. 다만 심심할 뿐이야. 그리고 우리가 같이 있는 동안,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약속하지, 그건.”
약속? 그 혼한 것? 약속을 지키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위대하다는 말을 나도 읽었는데 당신들은 못 읽었나요?
“꼭 어린애 같으시군요. 모르는 사람끼리도 약속을 하나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키큰 쪽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레인코트도 후후후 웃었다. 그녀는 선뜻 나서고 싶어졌다. 어떨라구? 어떡헐라구? 알몸뚱이 하나야. 그것밖엔 없어. 설마 죽일라구. 기껏해야 함께 자는 것. 지긋지긋하게 싫은 사람한테도 몸을 맡겼는데. 그저 아프게만 하지 않는다면…… 때리고 꼬집고 발길로 차지만 않는다면…… 그 밖에 피할 게 뭐지?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가요!”
“음?”
남자들이 오히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정말 가도 좋다면요.‘
“물론이지.”
“그대신 미워지거나 귀찮아지거든 언제든지 혼자가 되게 놓아 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그리고?”
“때리지는 마세요.”
사내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건 정말 어린애 같은 소리로군. 우리 펀인데, 심심한 우리 편인데 때리다니 원!”
“자, 그럼 준비해요. 빨리!”
재촉하는 레인코트의 얼굴이 희미했다. 가슴속이 얼떨떨했다. 키큰 쪽의 모습이 부우연 빛덩어리로 보였다. 자신이 무얼 생각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후들거리려는 손을 애써 진정 시키며 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구명 속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뚱이는 너무나 크고 의젓했다.
레인코트가 밖으로 나갔다. 빗소리가 바닷소리처럼 몰려들어오다가 다시 문으로 막혔다.
반짝 정신이 맑아졌다. 비. 밤. 잘생긴 두 남자. 자동차. 낯선 도시. 그런데 초라한, 초라한 자신의 모양은? 그러나 저이들은 말했다. 편. ‘우리 편’. 정말 그래주기만 한다면. 몰라. 몰라, 이젠 몰라.
그녀의 마음이 둥실 떴다. 밀물에 처음으로 떠오른 배처럼. 이제부터는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카운터 위의 오뚝이를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꿈이었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믿어지질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왜? 기분이 트이지 않아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시작이라는 게 대개 다 그런 거지. 그런데 참, 우리는 여태 성도 모르고 있었군. 나는 신. 저 사람은 곽.”
키큰 쪽이 앞의 운전석에 앉은 레인코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 민예 .”―
주주주주죽……. 빗속을 뚫고 차는 질주하고 있었다. 두 개의 와이퍼가 부지런히 두 개의 창유리틀 흘러내리는 빗물을 헤쳐놓고 있었다. 생겼다간 일그려지고 생졌다간 일그러지고 하는 그 부채꼴의 유리 밖으로, 새하얗게 뻗쳐 나가는 빛다발 속으로 말려드는 빗줄기가 보였다.
쿠션은 적절히 몸을 받아주었다. 사나이는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엷은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앞자리의 곽이 카 라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뉴스 해설. 톡하고 버튼을 누르자 높은 여자의 목소리. 눈물도 말라버―
톡! 삐리리리. 톡, 톡. 곽은 라디오를 꺼버렸다. 동시에 쿠션이 등을 밀며 고개가 뒤로 잡아끌렸다. 스피드 미터의 청회색 바늘이 서서히 오른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렬하게 눈을 쏘는 불빛이 전면에서 육박해오고 있었다. 저쪽에서 두어 번 불빛이 깜박거렸지만 곽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차채가 기우뚱하며 마주 오던 빛 아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앗! 빗물과 함께 굉음을 휘때리머 거대한 트럭이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쳐버렸다.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쪽 곧은 길을 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무서워요.”
“죽기 전이 무서운 게지. 죽어보진 않았지만.”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요.”
“그럽시다. 미스터 곽! 알아들었어?”
“네, 네, 과장님.”
거울 속에 곽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옆을 돌아보았다. 신의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과장님이시군요.” 혼잣말처럼 말해보았다. 그러자 신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가 국장이라고 저놈이 농담을 하는 거야.”
국장의 아들, 그럼 곽은?
“국장 위는 뭔지 알아요, 미스 민?”
곽이 앞을 향한 채 큰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얼른 대답을 못 했다. 그러자 신이 그녀와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꾹 지르며 말했다.
“장관.”
그 위는 그녀도 알았다.
“내 이름이 장관이라구. 그려니까 난 저놈의 할아버지지.”
곽장관, 곽장관. 깔깔깔 웃어주었으면. 그녀 안에서 생기가 서서히 술기운처럼 펴지기 서작했다.
“운전수 각하! 잔소리 말구 조심해서 운전이나 해.”
급한 고빗길이었다.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판대기에 그려 세운 교통 순경이 꼽추등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수고하십니다, 나리.”
곽이 거수 경례를 했지만, 그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검은 옷이 공단처렴 번들거리고 있었다. 곽은 또 라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시가 되었습니다. 시보. 그녀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또 일분. 얼른 시선을 들었지만, 신은 놓치질 않았다.
“시계가 늦군요.”
“네, 한 시간에 일분씩이나.”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시계를 비웃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웃는 심정이었다.
“그럼 하루에는…….‘
“이십사분이죠.”
“실제 늦는 시간은 그것만어 아니지.”
“그럼요?”
신은 잠깐 후에 입을 열었다.
“삼백 분이로군.”
“어째서죠?”
“한 시간에 일분씩이랬으니까 우선 일분하고, 두 시간 후에는 이분이니까 먼저 일분 늦은 것하고 합해서 삼분, 세 시간 후에는 삼분이 또 늦으니까 다시 합해보면 육분……. 이런 식으로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오져. 열 시간 후에는 오십오분. 이십 시간 후에는 이백십분. 이십 시간 후에는 이백십분하고 팔십분하고 십분을 합하니까 삼백분. 그러니까 시간으로 환산하면 다섯 시간. 당신의 시계는 하루에 다섯 시간씩 늑장을 부리고 있는 거야.”
“하지만 시계로는 그렇지 않을걸요.”
“그럼, 나머지 시간은 어디다 까먹는 거로군.”
“누가요?”
“시계가. 그러니까 그 시계는 제대로 늦지도 못하고 하루에 네 시간 삼십육분이나 빠른 거로군.”
“무슨 이야기예요?”
“엉터리란 이야기야, 그 시계가.”
“취하나봐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내가 괜한 잔소리를 한 거야. 심심해서, 심심 해서 그래본 거야. 하여튼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할 일이 생겨났군.”
그녀가 그게 뭐냐고 물으려 하는데 곽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왜? 왜 그래?”
“음. 아까부터 찾던 걸 드디어 발견했어.”
곽은 바쁘게 차에서 내렸다. 쏴아 빗소리가 좁은 차 안이 터지도록 몰려들어왔다. 곽은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아스팔트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빗발을 밟으며 곽은 길가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집어들고는 다시 뛰어왔다.
“뭐야?”
“보면 알지.”
곽은 자리에 앉으며 절컥 문을 닫았다. 곽의 젖은 손엔 주발만한 돌이 들려 있었다. 불그레한 차돌이었다.
“뭘 하려고?”
곽은 대답없이 돌을 추켜들었다. 룸 라이트의 불빛이 번드르르 차돌의 표면을 훑었다.
딱!
곽이 라디오를 내리친 것이었다. 다이얼의 유리가 깨어져나가며, 들려나오고 있었던 무슨 소린가가 뚝 숨을 죽였다. 곽은 또 한 번 쳤다. 검은 플라스틱 조각이 튀고 차돌은 금속판을 찌그려뜨렸다. 계속해서 또 한 번, 또 한 번……. 깨어지고 우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매끈하던 차의 일부가 순식간에 꼴사납게 부서져버리고 어둡고 울퉁불퉁한 공간이 생겼다. 곽은 마지막 일격으로 차돌덩이를 그 구멍 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녀가 똥그랗게 뜬 눈으로 신을 돌아보았으나 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쿠션에 기댄 채,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는 것이었다.
“왜, 왜 그러시죠 ? 무섭게…….”
그녀는 곽을 보고 또 말했지만 곽은 돌아보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손을 문질렀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풀고 천천히 불을 당겼다. 그녀가 다시 험악하게 처박힌 차돌덩이를 쳐다보는데 곽이 씨부렸다.
“얼마든지 있는 건데 뭘……. 맨주먹으로 거울도 치는데.”
그리고 나서 곽은 태연하게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안해?”
불안했다.
“괜찮아요.”
신의 손에 그녀의 손이 잡히었다. 신의 손바닥은 따뜻했다. 그것은 가만히 그녀의 왼손 다섯 개의 손가락을 조여주었다.
“누구든 뭔가를 깨뜨려버리고 싶은 때가 있지. 그런데 그걸 깨뜨리는 사람이 있고 깨뜨리지 않는 사람이 있지. 또 깨뜨려서는 안 될 때가 있고 깨뜨려도 좋을 때가 있지. 그러나 그런 것 상관없이 깨뜨리고 싶은 때 깨뜨리고 싶은 것을 깨뜨리고 나면…… 시원하지. 그걸 한 거야, 저 친구는. 당신이 가게 문을 걸고 나와버린 것도 그런 것 아닐까?”
무슨…… 당치도 않은……. 내가 무엇을 깨뜨렸기에……. 아아, 그러나 멋있어. 곰처럼 미련하게…… 일부러 비를 맞으며 돌을 주워다가 짓이겨대는 모양이라니……. 장난. 이이들은 장난을 하고 있는 거야. 귀한 라디오를 성냥곽을 바수듯이……. 곰 곰. 그러나 그 손길에 찌그러지는 반들반들함. 깨어지는 팽팽함. 우그러지는 틀. 그래. 부술 수만 있다면, 부술 수만 있다면 귀한 것일수록 재미있을 거야. 귀한 것일수록. 그러나 그게 하나밖에 없는 것일 경우에는……
그녀는 머릿속얘 찡 울림을 느꼈다. 몸을 일으키었다. 앞자리의 의자 위에 몸을 기댔다. 눈앞에 곽의 귀가 있었다. 그리로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좋았어요.”
“음.”
곽은 깜짝 놀래는 얼굴이었다.
“라디오는 아프지 않았겠죠?”
“아프긴.”
“아파하는데도 그랬다면 잘못예요. 그렇죠?”
“그렇겠지.”
“저 술 한 모금 더 마실래요.”
곽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주었다. 그녀는 그걸 받아 들고 몸을 다시 신의 옆으로 가져갔다.
“또?”
“네.”
“잔도 없이?”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달라붙는 힘을 느꼈다. 부드럽게 폭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때 곽이 소리쳤다.
“새디스트의 희생잔가봐. 실컷 아껴줘라.”
“네?”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신은 고재를 저었지만 집요한 서선은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녀는 금방 곽이 무슨 말을 한 것을 엊어버렸다. 대신 살아나는 건 그 아픔의 기억. 동시에 그녀의 벼리 뒤쪽에더오르는 그 무서운 얼굴. 참았다. 죽어라 하고 참었다. 때리구 꼬집고 짓밟는 그 아픔을. 그러지 않고서는 그 끝에 올 좋은 것을 영 얻지 못할까봐서. 그러나, 허사였다. 아무리 참고 견디어도 그것뿐이었다. 꼬리를 무는, 몸서리쳐지는 공포와 고독뿐. 도망쳤다. 살아야 했다. 그러고서야 그 사나이는 죽었다. 남아 있는 건 가끔 자신의 머리 속에 되살아나는 그 무서운 얼굴과 아픔의 기억뿐. 그것마저도 죽어야 했다. 그런 스스로가 죽어야 했다. 그녀는 술병을 쳐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신이 술병을 든 그녀와 손을 잡었다.
“끝났어요.”
그녀는 교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끈덕진 시선. 못 믿을 게 사람이야. 믿을 수 없어. 그러나 믿는다면…… 믿는다면 믿을 건 또…… 사람밖에 없지. 안 그래?“
“눈이 빛나는군. 술기운 때문인가?”
좋아하고 싶은 얼굴. 그게 가까이 있었다. 대면 닿을 수 있는……. 그러나 남이었다. 새까만 남. 또 새로운 무서움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마시겠어요.”
그러나 신은 맞설 수 없는 힘으로 병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의 머리 뒤쪽으로 오른손을 뻗쳤다. 그녀는 몸을 세웠다. 그의 손이 그녀의 오른편 어깨에 닿았다. 비어 있는, 그의 팔과 가슴 사이의 공간. 오른편 어깨에 가벼운 압력이 가해져왔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그의 팔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께에 기대어지자 그는 술병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마개를 비틀어 뽑았다. 그는 병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병 안에서 막힌 음향이 출렁이며, 그의 입 안으로는 술이 흘러들어갔다. 가득히. 술병을 떼었다. 닫혀 있는 입술.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로. 그녀의 눈앞에서 그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가 이마. 관자놀이, 귓바퀴. 그녀가 눈을 감음과 동시에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그녀의 일부가 바르르 떨었다. 반항하듯이 두 손이 올라갔으나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그의 턱과 뺨에 가 닿았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독하고 진한 것이 흘려내려왔다. 간신히. 그녀는 두 손과 입술에 힘을 주었다. 드디어 빨려돌어오기 시작했다. 독하고 독한 나자의 입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감과 함께 그녀의 욕구는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녀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끝났다. 남자에게 고여 있던 것이 모조리 그녀에게로 러흘들어와버렸다. 입술이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보!
심장의 박동과 함께 벌렁거리는 폐포 구석구석까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긴 입김을 내뿜으며 그녀는 간청했다.
귀여워해주세요. 천덕스럽다 밀치지 말고 제발 귀여워해주세요. 오늘 밤뿐아라고 그랬죠? 내일은 일찍 돌아가신다고. 네, 그걸로 족해요, 전. 더 길게 바라지는 않아요. 제알 오늘 밤만은, 오늘 밤만은 거짓으로라도 좋으니 귀여워해줘요. 진실처럼, 잊지 않을게요. 두고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도 좋을 만큼, 아주, 굉장히,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원예요. 아껴주세요. 네? 네? 무서웠어요. 고단했어요. 지루했어요. 쓸쓸하고 외로웠어요. 어떤 때는 죽어버리고도 싶었어요. 그러나 그냥 별스럽지도 않은 내 얼굴하고만 살아왔어요. 가렵 지도 않은 데를 긁어가면서, 멋없이 찡그리며, 혀를 내밀며……오뚝이를 세워놓은 채 밀치지 않으면서. 아아, 당신은 저를 위해, 저를 구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거죠? 그렇죠? 당신은 분명히 착하고 훌륭한 분이시죠? 네 ? 그리고 전…….
“어디로 모실까요, 과장님 ?”
익살맞게 소리치는 곽의 목소리에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도시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를 안고 있던 신이 즐거운 얼굴로 소리쳤다.
“가장 번화한 시내 한복판으로!”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시계점에서 그녀는 감격했다.
사양하려 했다. 진정으로 사양하려 했다. 그러나 신은 기어코 그녀의 손목에 새 시계를 채워주고 말았다. 신이 돈을 치르고 있는 동안, 그녀는 훔쳐보듯이 자기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눈부신 금빛이 가해쳐 고귀하게 변모되어 있었다. 여태껏 자신의 손목이 그렇게 사랑스러워본 적이 없었다. 어루만지고 싶었다. 뺨에 비비고 싶었다. 입맞추고 싶었다.
“자 갑시다.”
눈부신 가게의 조명을 둥지고 밖으로 나서면서 그녀는 그의 팔을 끼었다.
“정말…… 정말…….”
“뭘, 얼굴이 너무 붉어.”
“전 어쩌면 좋아요?”
“어쩌긴. 그저 있으면 되는 거야. 좋아해주니 나야말로 기쁘군.”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곽이 손을 뻗쳐 뒤쪽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여주인처럼 차에 올랐다. 뒤이어 들어오는 신의 저편으로, 가게문까지 나와 있는 시계점 주인의 대머리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지?”
곽이 물었다.
“글세.”
그녀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가시지 않고 내부에서 바글거리는 흥분의 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따라가면 되었다. 신의 말대로 그저 있으면 되었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값비싼 시계에 은밀한 의미가 있건 없건 개의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무조건 좋았다. 그 알찬 무게. 이이는 혹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아니, 아니. 무슨, 당치도 않게. 하지만, 하여튼, 이이는 나를 위해주고 있다. 해치기는커녕 나를 기쁘게 해주고 있다. 이런 기쁨을 내가 갚을 수 있을까? 없어, 도저히. 그저 따라주는 것뿐이다. 거슬리지 않는 게 고작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상점의 문들이 닫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은 불빛들은 즐거웠다. 좀 뜸해진 빗발들은 공중을 구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높고 낮은 클랙슨 소리. 밀 리는 차들. 앞차의 혜드라이트가 진홍색 광채를 발견했다. 차가 멎었다. 포도 위를 지나가는 우산 속의 남녀들. 건널목을 건너는 순백의 드레스. 긴 목걸이. 빛나는 이빨. 창백한 수은등. 기관차의 굉음. 줄지어 늘어선 차들의 난잡한 광택.
그녀의 옆에는 신이 있었고, 앞쪽에는 또 곽이 있었고.
“무얼 좀 먹을까?”
“네?”
“배고프지 않아?”
“아녜요. 조금도.”
“넌?”
“미쳤니?”
“할 일이 없군.”
앞차가 움직이지 않었다. 그 앞차도, 또 그 앞차도 그 앞쪽에서 차들이 좌우로 달리고 있었다.
“바보같이! 내릴까?”
“그럴까?”
“차는 어떡허구요?”
그녀가 황급히 물었다.
“없어지기야 할라구. 내리자!”
곽이 뒤를 돌아보았다.
신의 입이 열리기 전에 앞의 차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신같어.”
곽이 씨부리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신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일초도 늦지 않는다는 세 시계가 얼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뭘 했으면 좋겠어?”
“네? 져요?”
그녀는 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음. 말해봐요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을.”
“없어요. 아니, 뭐든지 좋아요. 두 분이 하시는 거라면…….”
하마터면 벼려질 뻔했던 차는 목적없이 달리고 있었다. 앞차는 여전히 아까의 그 차였다.
“저 차를 따라가볼까? 끝까지. 가는 데가 있겠지. 도대체 저 속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는가를 보기 위해서 말이야.”
색유리에다 은박을 뿌린 뒷창 속은 보이지 않았다. 하얀 번호판 속의 숫자의 합계가 스물일곱이었다. 오른편 구석에서 노란 불이 껌벅거리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곽도 그 뒤를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한산한 거리. 앞의 차가 속도를 더했다. 곽도 속도를 더했다. 저만큼 앞쪽에 꽃집의 간판이 보였다. 불빛에 밝혀진 꽃과 푸른 잎들이 보였다. 앞차의 오른쪽 방향등이 또 껌벅거렸다.
“썅! 겨우 꽃집이야?”
곽이 독한 목소리를 토해냄과 동시에 차체가 콱 앞으로 튀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앞차에게 육박하며 차체가 왼편으로 기우뚱하머, 앞차의 측면이, 오른편 창문 가득히 달려들었다. 앗 !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소리가 났는지 안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차체와 차체가 급격히 마찰하는 날카로운 진동이 픽 스쳐지나가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려 하였다. 그러나 신의 팔아 그녀의 머리를 막았다.
“돌아보지 말아!”
앞을 보았다. 라이트를 끈 채로 차는 달려나가다가 오른편으로 다시 꾸부러졌다.
“어떻게 됐을까요.”
그녀가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물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이 썰렁해져 있겠지.”
곽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기예요? 겁나요˛ 무서워요.”
“겨우 꽃집 앞에 차를 새우는 벌아야.”
라이트가 다시 켜졌다.
“다시 가볼까?”
“싫어오 싫어요. 그런 장난은 싫어요.”
신이 껄껄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자!”
“어디로.”
“벽 속으로. 벽 밖에서는 할 일이 없잖아? 치사하게 빨강불 파랑불의 눈치나 보며 이렇게 쏘다니어야 하나?”
“아직 밤이 남았는데…….”
“그렇지만 쓸모없는 밤은 뭘 하는가 말이야. 할 일이 없잖아, 할 일이?”
“산더미만한 불도저나 있었으면…….”
“그건 없는 거고. 머지않아 밤은 닫힌다. 노출된 대지 위의 공간이 닫히는 거지. 그까짓 건 일찌감치 버리자. 그리고 미리 닫혀지는 안쪽으로 파고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막히지 않는 공간에서 새로 밤을 여는 거야. 청승맞게 비쭉거리며 두리번거리지 말고, 치사한 결 벗어던지자 말이야. 그러니까 아무 생각 말고 곧장 가자!”
“좋다!”
그것으로 말이 끊겼다. 어 딘가로 가고 있었다. 어디라도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말뜻이 궁금했다.
“어디예요?”
“음?”
“가는 데…….”
신이 팔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자러 가는 거지. 밤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안 자러 가는 거야. 심심한데 잠이나 잔다는 말은 멍텅구리가 시작한 말이야.”
자러 간다. 그녀의 마음은 약간 우울해졌다. 결국은 그거……. 달리 할 일이 없긴 하지만……. 아아, 남자와 여자가 잠자는 건…… 너무나 뻔해. 너무도 빤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너무도 빤해. 결국 끝장에 가서는 그거.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끝가는 데는 그거. 이이들이 심심하다는 것도, 그렇게 답답해 하고 몸부림 치듯이 꿈틀대던 것도…… 이럴 수밖에 없나? 이렇게 심심할 수밖에 없을까? 새로이 생겨난 손목의 사랑스러움이 주던 기쁨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끝장 아니야?
“무얼 생각하지?”
“네?”
“왜? 기분이 안 좋아?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아녜요.”
눈에 들어오는 건…… 신의 입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술잔 대신 술을 마시게 해주던 그 입술의 감촉이 생각나자 그녀의 가슴은 별안간 저려왔다. 날카로운 가슴의 아픔이 몸을 태울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왈칵 몸을 기울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경망한…… 주제넘게. 이 아까운 밤에, 이 소중한 밤에…… 내가 심심해? 내가 심심해? 제까짓 게? 이이가 곁에서 나를 아껴 주는 내가 심심해?
“파암 하우스라! 어때?”
차가 멎었다. 불빛 밝은 높은 빌딩. 입구의 높은 유리문. 소리없이 움직이는 내부의 사람들.
“좋지. 집이 새거니 안심되겠지.”
그들은 내렸다. 영접하는 사람. 영접받는 그들.
“어서 오십시오.”
“자!”
신이 그녀의 팔을 가만히 잡아 끌며 웃어주었다.
“차를 넣게주게.”
“네, 네. 짐은 없으십니까?”
“없어.”
“알겠습니다. 이 쪽으로…….”
두꺼운 유리문. 미끄러질 듯이 반들반들한 바닥. 피부에 스며드는 건조한 냉기. 수런수런하는 낮은 목소리와 아늑한 조명. 거울, 거울, 거울…….
깨끗한 얼굴들. 매끈한 옷차림. 아, 그녀는 자신의 핸드백을 팔굽 뒤에 감추었다.
“예약이 있으십니까?”
“물론, 없지요.”
“하하, 그험·…·.”
신이 그녀의 팔을 끌어 넋빠진 상태에서 건져주었다.
“저 친구한테 맡기고 저기 가서 앉지.”
종려나무가 무서운 잎을 드리우고 군데군데 서 있는 널찍한 로비. 새빨간 쿠션. 그녀의 몸을 받아주는 밀도 높은 허공.
마음을 턱 놓아. 우리를 받들어줄 사람들뿐이야.“
그렇게 상냥하고, 고분고분하고, 매끄럽고, 우아하고……. 저 유리문 한 겹의 안과 밖이……. 저 여자는, 저 서양 사람을 닯은 보라색 드레스의 여자는……. 여자의 다리가 저렇게 질고 매끈한 것인던가? 그 눈매. 아무것도 보지 않는, 그러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저 자유로운 맵시. 저렇게 자연스럽게 물결치는 히프…….
곽이 손짓 했다.
“가지.”
인형처렴 예쁜 소녀가 기다리고 있눈 작은 방. 엘리베이터.
“구충!”
검은 나비넥타이의 안내하는 청년이 낮고 짧게 말했다, 소녀의 손이 벽으로 가자, 스르르 문이 닫히고, 술렁하는 충격과 함께 이국의 냄새가 머릿속으로 거슬러올라오는 느낍이 오고…… 아니. 그러나 그냥 신의 어께에 머리를 기대자 2…… 3…… 4…… 차례로 옳아가며 불이 밝혀지는 단추가 눈에 들어오고…….
가슴을 펴고, 가슴을 펴고…… 의젓하개. 나야 괜찮아, 나야. 이이들아 창피하면, 창피하다 못해, 나를 멸시하게 되면…… 아아, 그러면 나는 죄를 짓는 기야.
“처음이지. 이런데?”
어머나! 신외 소곤거림이 엘리베이터 안을 쩌릉 울릴 것처럼 크게 들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포기했다. 내버려두었다. 뜨거운 얼굴로 신을 울려다보았다. 그리고 송투리째 맡져버리는 심정으로 웃어버렸다.
“좋아, 그 웃음이!”
9번의 단추에 불이 켜지고, 술렁 바닥이 멎었다.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양편으로 문이 갈라졌다. 맨 먼저 그녀가 걸어나왔다. 소녀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인형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복도는 고요했다. 나고 있는 소리가 없었다. 그들의 발 밑에서 날 소리를 녹색의 융단이 흡수했다.
“여깁니다.”
웨이터가 말하고 열쇠 구명에 열쇠를 꽂았다.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스위치를 올리자 홱 밝아지는 제왕색 공간. 그녀가 있는 다과점의 홀보다도 넒은 방이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박사를 늘인 커다란 침대. 눈처럼 흰 홑이불. 나란히 기대어 있는 거창한 두 개의 베개. 탁자를 사이에 둔 호화로운 암체어와 소파. 넓은 거울이 똑바로 서 있는 윤기나는 화장대와 문 전체가 체경으로 되어 있는 옷장. 그리고 넓은 빈 바닥에 깔려 있는 깨끗한 초록색 펫.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은 수없는 유리 조각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는 샹들리에였다 그리고 그 안에 차 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아늑한 정적이었다. 아아 그녀의 가슴은 뛰고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단 하룻밤 동안이라도, 여기는 여기는…… 나는 촌닭이 아니야.
“여기가 욕실입니다. 이쪽이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구요. 들어가 보시지요.”
“아냐, 됐어.”
“낮에 같으면 조망이 꽤 좋습니다만.”
두껍고 얇은 두 겹의 커튼이 확 갈라졌다. 불빛이 점철해 있는 검은 공간. 그것은 딴 세계였다. 까마득한 아래쪽에서 비에 젖으며 움직이는 불빛들은 아무 소리도 내질 못하고 있었다.
“냉방 장치와 환기 시설이 완전히 되어 있으니까 창은 여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게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방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됐어. 말솜씨가 방보다 월등하게 좋군.”
“고맙습니다. 그럼 전 나가서 곧 당번 웨이터를 보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유창한 대사. 곽이 내주는 지폐를 웨이터는 선뜻 받아들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웨이터가 나갔다. 아아, 하고 뻐근한 호흡을 토해내며 곽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신에게 이끌리어 침대께로 갔다. 얌전히 바닥에 놓여 있는 분홍색과 파랑색의 슬리퍼 두 켤레가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신이 반투명의 커튼을 제꼈다. 은행색 담요 위에 오똑하게 앉아 있는 털복숭이 검정 강아지 한 마리. 그녀는 방끗 미소지으며 핸드백올 놓고, 그것을 안아 들었다.
“꼭 산 놈 같군.”
신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놓았다. 조용히 눌리며 그녀를 받아들이는 스폰지의 부드러운 탄력. 그리고 마지막에 느껴지는, 함몰을 막아주는 믿음직한 경력.
“어때? 괜찮지?”
“좋아요. 참 좋아요.”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곽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잘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 처음으로 곽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음을 느꼈다. 침대 위에서. 이인용. 그녀와 신. 그러면 곽은? 그들은 둘인데 곽은 혼자서 무얼? 옆방. 통해져 있는 또 하나의 방, 혹시 이들은……? 하지만 설마. 그처럼 점잖고 세련된 신사들인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니 부끄러울 필요가 없게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설마.
노크 소리.
“들어 와요.”
반소매 와이셔츠. 보우 타이. 상큼한 얼굴. 예쁠 만큼: 깨끗한…….
“늦어서 죄송합니다. 당번 웨이텁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방이 맘에 드셨는지요.”
“좋군.”
곽이 답배를 물자, 웨이터는 얼ᅟᅳᆫㄹ 탁자 위의 성냥을 집어 들었다.
“손님들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음. 우선.” 곽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말을 이었다. “목이 마르군. 맥주를 좀.”
곽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보였다.
“네 네. 맥주 두 병. 곧 가져오겠습니다.”
“두 병이 아냐!”
“네?”
“스물.”
웨이터와 함께 그녀도 놀랐다.
“그리고 좀 시장하기도 한데, 샐러드를 각각 다른 걸로 오인분 가져오고, 병아리가 싱싱한 게 있거든 정성껏 튀겨오도록. 그것도 오인분. 그리고 담배 다섯 곽. 알겠어?”
“네 네. 알겠습니다. 웨이터는 허둥대는 시선을 바로잡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그 밖엔 뭐 시키실 게.”
“그건 또 시킬 테니까 우선 그것만 가져오도록.”
“네, 네.”
뻗친 곽의 손끝에서 내밀어지는 빳빳한 고액권 두 장. 손에서 손으로 옮아가는 화폐.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든 것이 불편하지 않게. 알겠지?”
“네 네. 알겠습니다.”
웨이터의 생기는 순전히 정신적인 것에 좌우되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재빨리 불러지는 뱃속.
“그리고 참!”
나가려던 웨이터가 재빨리 돌아섰다.
“음악이 있는 데는?”
“네. 보시다시피 방엔 라디오밖에 없과 스카이라운지와 나이트클럽이 있습니다만…….”
“스카이라운지에는 생음악이 없겠지?”
“네?”
“무식하군. 나이트클럽은 몇 층이지?”
“십이층입니다.”
“몇 시까진가?”
“원칙은 열한시까집니다만 열두시까지는 즐기실 수 있습니다.”
“알았어. 그럼 우리는 거기 올라가 있을 테니까, 준비되면 그리로 연락을 해주도록.”
“네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곽은 손짓으로 웨이터를 내보내고 나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꼈다.
“생각해보니 나도 사람을 하나 구해야겠어. 윤간이 관심아 가기는 하지만 미스 민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될수록 쉽게 해야지.”
“있을까?”
“있겠지. 하여튼 가보자.”
“좋아.”
그들의 말뜻을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부지중에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남자와의 잠자리라는 것이 갑자기 뚜렷하게 실감되었다. 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춤출 줄 알아요?”
그녀는 부끄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네. 전혀 몰라요?”
그녀는 죄를 짓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신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나도 전혀 어정거리고 싶은 생각이 지금 없으니까. 무얼 좀 마시며 구경이나 하는 거지. 저 친구는 지금 여자가 필요하다는 거야. 당신을 내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도록 말이야 알겠지? 그러니까 우리도 곁에 있어주어야지.”
그녀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 또 그 소녀. 잡혀 있는 모습. 잡혀가고 있는 것 같은 자신. 아, 호젓한 곳에서 저 앨 끌어안고 한번 울어봤으면…….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고 백 원짜리 하나를 꺼내 손 안에 집어쥐었다. 문이 열리자 일부러 뒤처져 나오다가 소녀의 손에 재빨리 그걸 쥐어주었다.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명청해지며 두 눈만 겁에 질린 빛으로, 괴물을 바라보듯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얀 환영. 누우런 겸손. 두꺼운 암록색 문 안으로 그들은 빨리듯이 걸어 들어갔다.
홀 안은 차 있었다. 소리로. 활짝 개방된 악기의 소리들이 흥겹게 물결치는 검은 공간을 눈부신 오색의 불빛이 번득이며 찢어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부셨다. 바닥은 어두웠다. 사람들의 모습은 검었다. 그런게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를 이끄는 신의 팔이 자꾸 딱딱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서도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곽이 연상 굽신거리는 보우 타이에게 무어라고 이르고 있었고, 신의 시선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 안은 굉장히 넓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탁자마다 빨간 램프가 놓여져 있었다. 술병과 이빨들. 탁한 공기가 수런거리고 야릇한 냄새가 웃고 있었다. 여자. 남자. 여자. 남자…… 기타를 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송장같이 보였고 피아노 앞의 여자의 빈약한 머리통이 손보다 격렬하게 운동하고 있었다.
“오늘 밤 마지막 플로어 쇼라는군.”
신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 맨바닥에서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환히 비쳐보이는 천을 휘둘렀다 휘감았다 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거기 집중되고 있었다. 그녀의 얼떨떨한 정신마저 그리로 말려들어갔다. 멎어 있는 것만 보았던 것. 숱한 그림이나 사진 등 광고물 위에서만 보았던, 그런 종류의 자태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었다. 살아 있는 여자들이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체구의 육신들의 조작된 동작들이었다. 얼굴은…… 모두가 하나 같았다. 똑같은 머리 모양. 똑같은 화장. 똑같은 천조각들이 나풀대는 똑같은 동작. 돌연히 그것이 멎었다. 그리고 그들이 꽃잎모양 펼쳐져 쓰러진 중심에 느닷없이 여태껏 없었던 하나의 자태가 우뚝 서 있었다. 커다랗고 시커먼 두 눈. 진주색으로 번질 거리는 입술. 노오랗게 염색된 머리가 가슴과 등으로 갈라져 흘러내려 있었다.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입고 있었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몸에 꼭 달라붙는 살색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것이 발을 고정시킨 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불투명한 살색의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목에서부터 어깨, 두 팔, 가슴…… 잔잔한 음향에 맞추어 꿈틀거리는 몸짓과 더불어 껍질이 벗겨지며 그 속에서 연한 갈색의 피부가 점점 드러났다. 그것은 윤기가 있었다. 그래 그것은 흐려진 조명을 받고 뱀의 몸처럼 번들거렸다. ……허리, 배…… 다리. 껍질이 벗겨지기 전과 꼭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색깔이 다르고, 그 괴이한 번득거림만이 다를 뿐. 두 개의 젖꼭지에서는 반짝이는 금빛 별이 나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는, 역시 금모래처럼 빛나는, 최소한으로 가늘어진 팬티 같은 것 하나. 온몸에 흉터 하나 없었다. 아랫배는 아주 싱싱하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오른편 아랫배를 생각했다. 맹장염 수술을 한 깊은 흉터가 삼 센티쯤이나 패어 있는 곳. 저 여자는…… 오늘 밤에라도 수술을 하게 되면 내일부터는……. 그러나 누구나 다 배를 째야 되는 건 아니지. 복. 그것도 복. 이이는, 저렇게 성한 아랫배를 보다가, 이따 내 배의 흉터를 보게 되면…… 알게 되면…… 저 여자의 배를 또 생각하게 될까? 그것밖엔…… 그것밖엔 저만 못할 게 없어. 허리도 다리도 저보다는 줌 날씬하지만 그 대신 실해. 가슴도, 저렇게 부어오른 것처럼 크지는 않지만 조금도 늘어지지 않고 팽팽하고 탐스러워.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옴폭한 그 흉터만이…….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고 여자들이 사라졌다.
“자, 마셔요.”
신이 건드리어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차디찬 거품이 튀어오르는 맑은 술. 곽의 앞에는 사십대의 남자가 어두운 색깔의 더블을 단정히 입고 서 있었다.
“저기 저 검은 드레스의 여자 말예요.”
“아.” 사나이는 곽의 시선을 쫓다가, 알았다는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말했다. “저 여자는 호스테스가 아닙니다.”
“그럼? 손님은 아닌 모양인데.”
“이겁니다, 선생님.”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어보였다.
“사장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객석에 앉아 있기도 하니까, 우리 자리로 잠깐 올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글쎄요. 좀처럼 이런 일이 없는데, ……저 손님은 원체 특별한 손님이라서 …….”
“특별한? 높은 양반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서도…….”
“바깥양반쯤이나 되나요? 하여튼 그런 건 내가 알 것도 없고…… 어쨌든 내 뜻이나 전해주시죠. 여자 같은 건 저 여자 하나밖에 눈에 안 뜨이니까……. 안 된다면 그만두는 거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장보다도 지배인이 더 강력한 수도 있는 거니까, 자.”
지배인의 포켓 속으로 또 몇 장의 지폐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지배인의 얼굴은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되도록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자가 와야죠. 우리 특별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서로 좀 도와 가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지배인은 허리를 굽혀보이고 돌아섰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곽은 픽 웃었다.
“특별한 손님이라니? 저 돼지 같은 게? 메시꺼운 속을 좀 달래보자구, 자!” 곽이 잔을 들었다. 신도. 그들의 시선은 종용을 받고 그녀도 잔을 들었다.
“이따위 샴페인을 마시느니 소다수를 마시는 게 낫겠군 그래.”
곽은 빈 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쳐버렸다. 달려온 웨이터가 새 잔을 가지러 달려갔다. 저만큼에서 지배인과 검은 드레스의 여자와 회색 싱글의 신사가 무언극을 벌이고 있었다. 폴로어에서는 몇 쌍의 남녀가 정말로 심심하게 어정거리고 있었다. 지배인과 여자가 사라졌다. 회색 싱글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술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심심 했다. 옆에 신이 있으나마나였다. 잔을 들면서 차라리 아까 그 위스키가 나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정말 사이다만도 못한걸……. 맥주만도 못하고…….
“실례합니다.”
깐작깐작하는 진한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돌렸다. 검은 드레스였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삼십을 넘어선 듯한……. 빛을 흡수하는 검은 천 위로 진주 목걸이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곽이 말없이 일어서서 의자를 끌어 대어주었다. 똑바로 앉는 곧은 상체. 고고한 빛을 발하는 전아한 이마. 오만해보이는 눈매. 그러나 말소리는 맑았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부르셨다는데 무어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우선 동행을 소개하죠. 이 친구는 신. 이쪽은 미스 민. 전 곽입니다.”
“안녕하셔요? 저, 고영미예요.”
곽이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잔을 가져오랬다.
“저, 술은 사양하겠어요. 곧 또 가봐야 되니까. 담배 한 대 피우겠어요.”
곽이 담배를 내밀고 불을 붙여주었다. 신은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찬탄의 시선으로, 한 번도 자기를 주지하지 않는 검은 드레스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맵시 있게 기른 손톱이 반득거리는 걀죽한 손가락 사이에 긴 담배가 희었고, 양귀가 분명한 단정한 입술 사이에서 조용히 뿜어나오는 연기가 또 희였다.
“제게 하실 말씀은……? 말씀하세요.”
“지배인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던가요? 그게 아니었는데……. 마담 고…… 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지요? 대단히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그저 같이 앉아 있고 싶었던 겁니다.”
“호오!” 묘한 억양의 웃음소리였다. “감사합니다만, 전 여기서 일하는 고용인이 아녜요. 지배인이 이야기 안 하던가요?”
“압니다.”
“그런데…….”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분을 따질 것이 없이, 접대부와 객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남자와 여자로서…… 더구나 당신은 객석에 나와 저 돼지 같은 신사하고 같이 앉아 있기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례하시군요.”
“그런가요?”
“저분에 관한 이야기는 빼주시지요.”
“특별한 손님이라서 그렇습니까?”
“네?”
“아까 지배인이 그러더군요.”
여자의 이맛살이 잠깐 찌푸려졌다.
“모르긴 하지만 제가 바로 저 신사 대신 특별한 손님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러세요? 하지만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계신데…… 전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았었던 건 아네요.”
“접대가 아니라 간청을 거절하기 위해섭니까? 아까보니 저 신사는 몹시 마담 코를 탐내는 얼굴로 무슨 사정을 하고 있던데요.”
검은 드레스의 얼굴이 샐쭉해지며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털어놓고 말하자면 나도 그 부탁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 고장은 객집니다. 내일 아침엔 떠납니다. 그래 오늘 밤을 재미있게 지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담 고가 꼭 필요합니다. 뭐, 나하고 같이 자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저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같이 있어주시기만 해도 좋습니다.”
“아아니.” 여자의 어성이 사나워졌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함부로 써도 괜찮을 줄 아세요?”
“모욕이라니요? 원 당치도 않은……. 남자가 여자를 원한다는 내용의 말인데 모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도, 내 부탁을 들어 주시면, 나도 응분의 사례를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아랫방에 마실 것을 좀 준비해놓았습니다. 처음이자 끝인 그 자리에 마담 고를 초청하겠습니다. 와주시겠습니까?”
“기막힌 말씀을 유창하게도 하시는군요. 도련님, 정신을 차리세요. 나는 도련님 같은 분하고 무엇을 같이 즐길 나이도 지났어요. 아시겠지요? 정히 원하신다면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아이를 하나 소개해드릴 수는 있어요.”
“하하, 천한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하여튼 아적 제 부탁을 거절은 안 하셨죠? 지금 그러니까 제일 문제되는 것이 저 특별한 손님인데, 내가 가서 퇴치를 하고 오죠. 무어 적절히 하고 올 테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내 다녀오죠.”
곽이 벌떡 일어서자 여자가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신의 얼굴을 흘낏 보며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비쓱 내밀었다. 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못된 놈은 아닙니다.”
“그래요?”
“철부지도 아니구요.”
“동행이시니까.”
“밉지는 않지 않습니까?”
“밉고, 예쁘고가 있어요? 별별손님이 다 있으니까요.”
“해석 나름입니다만 저 친구의 말은 진실입니다.”
세 사람의 시선은 줄창 곽을 향하고 있었다. 곽은 무언극을 시작했다. 신사의 표정은 곽에게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곽이 이편 쪽을 손가락질했다. 신사의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곽은 슬쩍 허리를 굽히고 돌아서서 걸어왔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때려부수고 났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됐습니다.”
“되긴 뭐가 돼요?”
마담 고가 말려드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이 내 형수라고 했죠. 아까 나보고 도련님이라고 하셨으니, 잘 맞아들어간 거죠? 그래 긴한 이야기가 있어 일부러 내려온 건데, 내가 좀 부탁을 한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려고 하다가 피차 명함이나 한 장씩 교환하자고 했더니 그만두고 물러나시겠다고…… 저거 보세요. 일어나지 않습니까? 인사나 해주시죠.”
“대단하시군요.”
“사업상 손해를 끼쳐드린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당신이 저 돼지를 몹시 귀찮아하시는 눈치는 분명히 알아차렸습니다.”
“똑똑한 게 지나치면.”
“아, 미안합니다. 그럼.”
“전 가서 저분을 배웅해야 되겠어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없군요.”
“나도 인젠 여기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군요.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구백 십삼 호실입니다.”
“마음대로군요.”
“오시고 안 오시고는 자윱니다.”
“재미있군요. 기다리세요. 그러나 도련님의 코묻은 돈은 휘두르지 마세요. 그것만은 조금도 재미있는 일이 못 되니까요.”
신은 맥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한 두 눈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미스 민은 한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불쾌해져 있었다. 두루미처럼 도도한 마담 고가 높아보이고 거기 비례해서 미움이 치받혔다. 촌닭. 이 이는 그런데…… 무얼 생각하는 걸까? 자기가 잊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장 비참한, 곁에 있어도 잊혀진 여자. 이게 뭐지? 또 심심해. 이이도 또 심심해. ‘한편’. ˙우리 편’. 우울해. 확실히. 이이는 틀림없이 심경이 달라졌어. 인제 나는 필요없는 건가? 이야기나 좀 했으면……. 단둘이서 이야기를 좀 터놓아봤으면…….
그들은 방으로 돌아왔다.
“전혀 정이라곤 들지 않은 낯선 방. 그러나 그 정적 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집에라도 돌아온 듯한 안정감을 느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기분을 고쳐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욕을 좀 할까? 먼저 하지.”
신이 말해서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입은 채로 첨벙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욕조 머리 쪽에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었다. 틀어놓으려다 그만두었다. 소리가 두려웠다.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으로 왔다. 잠글 수가 없었다. 손잡이조차 없었다. 손으로 건드리자 벙싯 움직 였다. 잠깐 주저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하고 옷을 벗어버렸다. 체경 속에 비친 자기의 알몸. 아까 껍질을 벗던 여자의 자태를 거기 겹쳐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빨간 혀를 최대한으로 찌익 내밀었다.
닭은 주라통 같은 호스 끝에 달린 샤워용 물주둥이 꼭지를 틀자 쏴아 하고 빗줄기가 뻗쳐나왔다. 그녀는 온몸에 찬비를 맞았다.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시원했다. 새로 포장을 뜯어놓은 분홍색 비누. 온몸에 고루고루 비누칠을 하고 오래오래 정성들여 닦았다. 얌전히 접혀 걸려 있는 타월 두 장. 그녀는 그 중 노란 것을 떼어 몸의 풀기를 닦았다. 거울 곁에 타월지로 된 가운이 두 개 걸려 있었다. 작은 것을 떼어 입어보았다. 짧았다. 무릎 위로 한 뼘 정도. 벗어놓은 속옷들이 보기 싫었다. 거울을 보며 옷깃을 여미고 띠를 매었다. 남이 되어버린 자신이 거울 속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하체가 온통 허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지만 그너는 온몸에 퍼지는 생기를 느꼈다. 별안간 붉어지는 얼굴을 흔들어 지우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소파 위에 신이 혼자 앉아 있다가 그녀를 맞았다.
“오래 걸렸죠? 어디 가셨어요?”
“저쪽 방에, 그쪽에도 욕실이 있으니까”
뻗친 그의 손에 손을 맡겼다. 끌려갔다. 또 끌렸다. 그의 무릎 위에 가로 앉았다. 그의 시선이 눈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왈칵 기뻐졌다. 그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잃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팔이 그녀에게 감겨왔다. 그녀는 달아오르는 온몸으로 그를 파고들었다. 두 다리를 허공에 뻗친 채로.
그가 욕실로 들어간 후로도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서, 어서. 그녀는 방 안을 거닐었다. 강중강중 뛰어보았다. 짧은 가운과 자락이 폴락폴락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눈곱만큼도 거슬림이 없는 율동. 그녀는 일부러 더욱 몸을 추석이다가 몸을 굴렸다. 아아…… 부지중에 탄성이 나왔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안고 몸을 뒤채었다.
똑 똑 똑!
그녀는 팔딱 일어나 앉았다.
또 한번 노크 소리가 났다.
“네에,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웨이터였다. 시렁이 달린 금속제 손수레. 맥주와 요리. 그녀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웨이터의 뒤에 검은 드레스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옷이 바뀌어져 있었다. 연한 갈색. 목까지 막혀 있는 가슴. 배꼽께까지 늘어진 목세공의 목걸이. 눈썹이 좀더 짙어진 듯했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움직이지 않는 시선으로 대답해주고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냥 놓아두고 가요.”
“네 네.”
웨이터가 두 여자에게 허리를 굽혀보이고 나갔다. 그녀는 서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앉으세요.”
“어디들 가셨죠?”
“목욕을 하세요.”
여자의 콧살이 쭝깃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여자가 앉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강한 눈길을 보내며 의자등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쌀쌀한 시선이었다. 겨드랑은 보얗고 털이 나 있지 않았다.
“좀 물어봐도 괜찮아요?”
냉담한 목소리가 위압적이었다.
“네, 무슨…….”
“아신 지가 얼마나 되죠?”
“오래…… 안 됐어요. 아까…….”
그녀는 금방 뉘우쳤다. 그런데 여자는 금방 또 물었다.
“얼마 받았지요?”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서 일하죠?”
발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것하고 함께 솟구치는 새로운 분노를 시선에 담아 쏘아보냈다.
“미안해요.” 깐깐한 목소리가 여전히 진했다. “고단한 아가씨군. 기분나빴는지는 모르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걱정 말아요!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려 하는 순간에 욕실 문이 열렸다.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신은 두 여자를 번갈아 살피고 난 후에,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군요. 몸이 끈끈해서 좀 씻느라고…… 미안합니다.”
“그분은요?”
“저쪽 방에 있습니다. 불러오죠.”
“아니 그냥 두세요.”
그러나 그때 두 방의 사잇문에서 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이 지금 나갑니다.”
그리고 곽은 나왔다.
순간. 그녀는 숨이 콱 막혀버릴 만큼 놀랐다. 곽은 알몸뚱이었다. 손에는 타월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후딱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앞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스냅 사진처럼 굳어버린 얼굴이었다. 신의 얼굴은 살필 겨를이 없었다.
“꼭 오실 줄 알았죠. 술도 가져왔고.” 곽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우린 이제 이 방에 같이 있을 필요가 없지. 두 방 사이의 문간에 술과 안주는 끌어다놓지. 자, 갑시다.”
여자가 발딱 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짜여져 나왔다.
“야만인!”
뒤이어 문 쪽으로 홱 돌이키는 여자의 어깨를 곽이 꽉 붙잡았다.
“어딜! 그 예쁜 옷 속에 들어 있는 건 뭔데? 코묻은 돈 따위는 휘두르지 말라면서 찾아온, 본래 목적은 어떡허고 가려는 거지?”
잇달아 휘두른 여자의 손이 곽의 뺨에 닿기 전에 곽은 왈칵 그녀의 몸을 움켜잡아 번쩍 어깨에 둘러메었다. 미처 무슨 소리가 날 사이도 없었다. 신은 말이 없었다. 그녀도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채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거운 눈까풀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곁에 누워 있는 신은 잠이 들어 있는 건지,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거의 완벽한 정적과 암흑을 그녀는 잠들지 않고 견디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무궁한 세월이 그 동안에 흐른 것 같았다. 불을 켜고 거울에 비쳐본다면 자신의 모습이 처참하게 변해 있을 것만 같았다. 빛이 두려웠다. 아침이 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올 것이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리운 창 밖에는 벌써 그것이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녀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눈곱만큼만 움직여도, 그것으로 해서 지금은 멎어 있는 것 같은 시간이, 별안간 흐르기 시작하여 감내할 길 없이 무서운 새 날을 몰아다 붙일 것 같아서였다.
왜 잠을 이룰 수 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눈까풀이 땃땃하도록 피곤하건만 잠이 오지 않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괴물 때문인가? 남자라는 괴물, 신이라는 엊저녁에 처음 만난 남자, 그게 여전히 먼 거리를 가지고 곁에 누워 있는 때문인가?
목석. 풀어 흐트러진 목석. 안개 속처럼 알 수 없는 인간의 형체. 도대체 신이란 남자는 무언가? 어떻게 되어 이 신이란 남자와 함께 이 엄청난 밤을 견디어야 하게 됐던가? 까마득한 옛날 일 같았다.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할 뿐, 무슨 생각을 차곡차곡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빨간 부끄러움. 풀어 흐트러진 목석 같은 신의 귀에 전해졌을 그 괴로운 신음. 싸늘한 신의 몸똥이에 척척 늘어붙어 있을 안간힘과 몸부림. 그리고 그 손. 그 손. 차라리 잘라서 집어넣고 버리고 싶기까지 했던 젖어 있는 그 손.
두 장의 홑이불 사이에 끼어 있는 그녀의 알몸뚱이 전체가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딱딱한 눈알을 눈까풀로 덮다가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 변화도 남기지 않고 그녀의 신음 소리는 사라져버린 후였다. 마음이 놓였다. 두려움이 경감되었다. 무슨 소리를 내도 괜찮은 것을 그녀는 비로소 알았다. 그녀는 가만히 소곤거렸다.
“주무세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대답이 없었다. 잠이 인간을 죽여 놓았다. 신은 죽었다. 그녀 혼자 괴롭게 살고 있다. 그녀는 가만가만 몸을 움직이었다. 홀이불 사이에서 조심조심 빠져나왔다.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깔깔하면서도 두툼한 감촉이 그녀의 발바닥을 받아 주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어둠 속을 더듬어나갔다. 침대 발치를 돌아 창 있는 쪽으로 갔다. 뻗친 손끝에 커튼이 닿았다. 한 걸음 더 다가서서 커튼 자락을 잡았다. 가만히 제꼈다. 틈이 갈라졌다. 희읍스름한 박명. 매끄러운 얇은 천을 또 한 손으로 잡았다. 똑, 머리 위에서 가벼운 금속의 소리가 들렸다. 더욱 조심하여 얇은 커튼을 제꼈다. 좀더 맑아지는 어스름. 펼쳐진 지상엔 점점이 불빚이 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보였다. 커다란 새벽별이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세상. 아직도 밤이었다. 그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살아 있는 건 단 하나. 그녀 자신이었다.
문득 그녀는 등 뒤에 놓아두었던 죽음을 돌아보았다. 휜 베개 위에 검은 머리. 희미한 얼굴. 그 좁은 틈으로 기어든 박명이 주검을 비춰내고 있었다. 그녀는 좀더 커튼을 넓게 벌렸다. 그의 얼굴이 좀더 분명히 보였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는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깨신 거예요?”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커튼을 놓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또다시 닫혀버린 어둠 속에서 그를 더듬어 찾았다. 벌려진 그의 팔 안으로 몸을 묻었다. 그는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둘이었다. 그녀의 머리 속이 유리알처럼 맑아졌다.
“좀 잤어요?”
그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자지 못했노라 대답하기는 싫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다 대고 물었다.
“당신은요?”
두꺼운 근육과 늑골 밑에서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등을 훑어내려갔다.
“미안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온몸으로 그를 잡았다.
“안 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
“무서워요.”
“무서운 건 나야.”
“왜 그렇죠?”
“피곤한 탓이야.”
“아녜요. 저이기 때문에.”
“아냐. 그렇지 않아. 당신은 좋았고, 또 훌륭해.”
“거짓말예요.”
“정말이야.”
“그런데 왜, 그렇죠?”
“피곤한 탓이라니까.”
“무엇이 그렇게도 피곤하죠? 술 때문인가?”
“아냐. 낮 때문이야.”
“무슨 말이죠?”
낮이 밤까지도 빼앗아간 때문이야. 술에 취했을 때는 덜 해. 그때 같았으면 되었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젠 술에 취할 기력도 없어.“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어요.”
“생명이 버려지는 거야. 낮은 독기가 몸과 마음을 절여놓아버린 때문이야. 그 독기에 항거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올 이 서투른 짓을 해 보는 거야. 그러나 소용없어. 헛일이야. 그리곤 다시 무서운 낮이 돌아오는 거야.”
“정말, 정말……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시죠? 엉터리, 엉터리. 설마 자주 이러시는 건 아니겠죠?”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뺨을 끌어다 자신의 뺨에 대었다. 그리고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용서해요. 당신은 참 좋은 여자야. 당신을 끌어낼 때도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어.”
“아녜요. 당신이 좋은 분이에요. 착한 분예요. 괴로움 없이 잘 사셔야 할 분예요.”
“고마워요. 그럼, 나를 욕하고 기분나빠하지는 않겠지?”
그녀는 고개를 젓고 다른 쪽 뺨을 돌려 대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다만 당신이…….”
“나도 괜찮아. 벌써 오래 전부터 그래 왔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또 전하고는 달라. 기분이 좋아. 후련해. 당신이 훌륭한 때문이야. 그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을 잃지 않아줌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온몸과 마음속에 베어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흐드득 흐느꼈다.
“왜?”
“아녜요. 좋아요. 그저 한없이 좋아요. 언제까지나, 지금 이대로 이렇게 있고 싶어요.”
“나도 그래. 이 어둠 속에서 이대로. 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듯한 기분이군. 그러나 낮이 다가오고 있어. 우리는 인제 일어나서 옷을 입어야 해. 입기 싫은 옷을 입어야 할 때가 인간이 가장 불행한 때 가운데 하나지.”
“참. 저쪽 방에서는들 어떻게.”
“생각할 것 없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 남의 일인걸.”
“그래요. 우리 일만 생각해요. 우리 일만. 그렇지만…… 끝이죠? 그것도 끝난 것죠?”
“끝이야. 끝내야지. 일어나야 해.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낮은 다가오고 있어. 낮은 절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질 않아.”
“떼어놓는 거죠?”
“그렇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을 열 조각 스무 조각으로 갈라놓고 말지. 그게 낮의 독기야. 그게 사람을 망쳐놓는 거야.”
“그만, 그만 하세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어떡하죠? 어떡하죠? 무서워요. 당신 속으로 파묻혀버리고 싶어요.”
“무섭긴. 나가보면 어제하고 똑같은 편리한 세상인걸. 비가 개었으니 더욱 화려하겠지. 우리는 죽을 수는 없으니까 또 거기 순종하는 거지.”
그녀는 최후의 단념을 했다. 지쳐버렸다. 신은 여전히 풀어 흐트러진 목석이었다. 괴물. 괴물. 그 속이 깜깜하여 도저히 알 길 없는 괴물. 그녀는 최후의 그의 제취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밝은 아침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포도 위를 걸었다.
“기차를 타고 가겠어.”
“정말 혼자 가시는 거예요?”
“그럼.”
역전 광장. 동쪽 하늘이 무섭도록 붉었다.
“여기서 헤어지지.”
그녀는 웃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가 말없이 오른손을 반쯤 쳐들었다. 약하디약한 손짓.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자꾸만 멀어져갔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우리는 밤새껏 무얼 한 거죠?”
그녀는 소리내서 중얼거렸다.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젖은 포도 위로 떨어졌다.
-끝-
2016년 11월 10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