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2 가해 연중29주일
출애 33:12-23 / 1데살 1:1-10 / 마태 22:15-22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기
‘딜레마(dilemma)’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난처한 상황에 직면할 때, 흔히들 ‘딜레마에 빠졌다’라고 합니다. 비슷한 뜻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딜레마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두 가지라는 di와 사안, 명제, 제안이라는 lemma의 합성어로 ‘두 가지 제안’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딜레마에 빠졌다’라는 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둘 다 선택하거나 둘 다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예컨대,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딜레마에 빠졌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고, 계속 다니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 같은 갈등속에 고민함을 뜻합니다. 그러한 곤란한 상황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상황을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는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서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아주 지혜로운 길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대체로 어느 정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선에서 고민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아니 어떤 경우에는 나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고약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하게 되고 그러한 올무에서 쉽게 빠져나오기가 무척 힘들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15절부터 46절까지 4개의 논쟁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들은 복음은 그 첫번째인 세금 논쟁입니다. 세금논쟁은 당시 이 지역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는 로마제국의 통치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무척 예민한 현실 문제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사제들한테 십일조와 성전세를 바치고, 세리들한테는 로마에 바치는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 둘을 합산하면 대략 수입의 1/3에 해당됩니다. 이런 이유로 기원 후 6년경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로마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다가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군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잡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은 정치적으로 그들의 반대파인 헤로데 당원들과 손잡고 예수께 접근합니다. 여기서 로마의 꼭두각시 헤로데 왕을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은 식민지 백성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제일 중요하게 여긴 반면, 평소 로마의 지배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들의 강력한 군대와 행정력이 있어야 사회 안전이 유지될 수 있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일종의 적대적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눈에 불편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양측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다가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마태 22:16)”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속셈은 당신이 그렇게 진실한 자이니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으름장인 동시에 식민지 최고 지배자인 황제와 결부된 세금문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빗장을 단단히 채우기 위함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예수께 두 가지 제안, 즉 딜레마를 제시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납부를 옹호하면 군중으로부터 외면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로마의 협력자로 오인되어 열혈당원의 표적이 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세금납부를 반대하면 로마제국 통치에 항거하는 인사로 낙인 찍혀 체포될 위험이 높아집니다. 여기서 열혈당원(Zealots)이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 열심인 자’라는 뜻으로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급진파들로서 로마에 바치는 세금과 로마의 종교를 거부하고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금납부에 대하여 공적으로 천명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험이 컸던 것입니다.
그들의 간교한 술수를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금으로 낼 주화를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있는 초상과 글자를 물어보시자, 그들은 황제라고 대답합니다. 당시에 통용되는 로마주화에는 로마황제의 흉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돈이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에서 통용된다는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에 예수께서는 그럼 그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시 말해,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는 대신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은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딜레마를 피하면서도 균형 잡힌 명답을 제시하십니다. 이에 예수님을 공격했던 자들도 탄복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반대자들마저 경탄하게 만든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정치와 종교영역을 분리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화폐에 있는 황제의 모습과 그것이 통용되는 인간권력의 영역에 비해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하느님이 다스리기에, 그 영역은 더 근원적이고 크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권력은 유한하지만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통치는 무궁하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된 민주 공화국이라는 정치시스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였고, 한 때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가체제는 변해도 민족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민족보다도 더 넓은 인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통치는 그 어떠한 이념, 정치와 경제 시스템보다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라서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의 시야와 관점은 역사를 관통하고 지역을 뛰어 넘게 됩니다. 심지어 유한한 세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까지 맛보게 됩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한한 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러한 영역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제1독서 출애굽기는 모세가 야훼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은 없다(출애 33:20)”고 하시며 모세에게 손을 가리라고 하고, 모세 곁을 지나갈 때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그 뒷모습만은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무리 모세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이상, 이 보다 더 근원적이고 고차원적인 영적이고 신적인 영역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린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이라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계시된 신(Deus Revelatus)’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혜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기쁜 소식, 복음(福音)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1데살 1:5)”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알게 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닥치는 여러가지 딜레마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