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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 본 문 :사도행전 9장 1절 - 9절 (신약성경 201쪽)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아멘!
서로 인사 /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당신은 역사의 주역입니다.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연예인이 되고 싶다. 스포츠 선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연예인으로 스카웃 되고 싶어, 방송국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운 좋게 길거리 캐스팅을 받아서,
대박을 일으킨 스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방송국을 기웃거리고 다닙니다.
그런다고 다 스카웃 되어 연예인 되는 것 아닙니다. 감독이 원하는 작품의 주인공과 딱 맞아야 합니다.
스포츠 선수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선수라고 무조건 다 스카웃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팀에,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야 됩니다. 여러 가지 구비조건에 맞아야 스카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맞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라는 찬송시는 존 뉴턴 목사님이,
지으신 찬송시입니다. 목사님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상인입니다.
그런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중생하고 나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고백한 찬송시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는데, 그런 그에게 한 성도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만일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단 하나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뉴턴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시기를 원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다 아시니,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도,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신앙고백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열정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청년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갑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남녀를 막론하고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게 해달라는,
공문서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문서를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놀랍고 두려워서 땅에 엎드러 있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래서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사울은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체험 가운데, 스카웃 되어 바울로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웃 받는 사람이 될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절대로 순종할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십니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들어 쓰임을 받은 사람은 노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심판가운데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엄청난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배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방주를 지었는데, 온갖 조롱을 다 들어가면서 배를 지었습니다.
120년을 걸려 방주라는 배를 완성하였는데,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배를 산위에 건조했고, 홍수는커녕 비가 내릴 징조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홍수 심판은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100%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7장 5절 말씀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그는 조롱받으면서도 순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노아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예배 잘 드리고 기도생활 열심히 하다가, 온갖 조롱과 무시함을 받아도,
노아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말씀에 생명 걸고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당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한번도 ‘왜 접니까? 왜 떠나야 합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라고,
하나님께 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 이 말씀에 100%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왜 접니까? 왜 떠나야 합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묻거나 전혀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나중에 100세에 얻는 너무나 귀한 아들 이삭도, 말씀에 순종하여 바치려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끝까지 순종한 아브라함이기에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들어 쓰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2대 왕으로 이새의 아들 중에서 세우려고,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서 장남 엘리압부터 사무엘 앞에 서게 되었는데, 사무엘이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 라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막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아멘!
그래서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그렇게 아들 일곱 명을 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양을 지키고 있었던 막내 다윗, 아버지 이새조차도 너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다윗을 세웁니다.
사무엘이 자기 앞에 서 있는 다윗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랍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정말로 곱고 아름답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위대한 왕으로 들어 쓰셨을까요?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생명 걸고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한 가정의 사명자였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쟁에 나간, 세 형들의 안부를 살피러 치열한 전쟁터에 나갔다가,
하나님을 능멸하는 골리앗을 보고 나가 싸워 이긴, 생명 걸고 나라를 건져낸 용맹함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100% 순종하는 일에 생명 걸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쓰셨습니다.
여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들어 쓰심을 받는 라합, 룻, 마리아 등등 많이 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의 모압 여인,
룻이 있습니다.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된 믿음의 여인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어떤 희생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따르고 어머니를 따르겠다는 순종이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보십시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평범한 어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불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이 예수님의 부르시는 말씀에 아무런 조건 없이 즉시 순종했습니다.
핑계가 없었습니다. 궁금증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순종하여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정말 훌륭한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일생을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으십시오.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맡은 일에 생명을 걸고,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들어 쓰임을 받아,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되십시오.
둘째로, 하나님은 절대 순종을 넘어 죽기까지 맹종할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아이들의 옷을 벗기는 방법이 각기 다릅니다. 엄마가 맛있는 것을 주거나 좋은 옷을 사다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해서 옷을 벗는 것은 순종입니다. 의사가 진찰하려고 옷을 벗으라 해서 벗는 것은 복종입니다.
강도가 들어와 ‘옷을 안 벗으면 죽인다.’ 고 하니까, 그 말의 위협에 못 이겨 벗는 것은 맹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아 쓰시는가 하면, 단순한 순종이나 복종을 넘어 맹종하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배입니다. 그러므로 바다나 강 주변에서 만들어야 쉽게 물에 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배를 하나님 명령대로 산꼭대에, 그것도 120년 동안 그렇게 건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맹종입니다. 순종과 복종을 뛰어넘는 맹종입니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맹종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시행하였기에 맹종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맹종했기에, 홍수의 멸망에서 구원받는 일에 스카웃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렀을 때 ‘왜?’ 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 하나님이 오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변명을 하거나,
왜 불렀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맹종하여 하란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사흘 길을 갔다가,
다시 사흘 길을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과 산으로 떠날 때 아내 사라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아브라함은 맹종했습니다.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것에 대해 이유를 달지 않고,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맹종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이방여인 룻의 삶을 봅시다. 그가 며느리의 사명을 생명 걸고 감당했습니다만,
거기에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절대 순종, 아니 맹종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몰래가서 저녁에 보아스가 자는 잠자리에 들어가서 발치에 누으라고 시켰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룻기 3:5).
그리고 6절에 보면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행하니라.” 고 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을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룻은 시어머님의 말씀에 맹종했습니다.
바로 이런 맹종이 있었기에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가도록 쓰임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맹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랬더니 20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지체 없이 따랐습니다. 지체 없이 따라나선 것은 맹종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2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즉시 따랐습니다.
어거스틴의 전집에 보면, 어거스틴의 제자가 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찾아온 사람,
다 제자로 삼을 수 없어서, 그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순종을 넘어 맹종하는 사람을 뽑기로 했습니다.
배추를 모종을 나눠주면서 배추가 잘 살도록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위대한 스승을 따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라, 배추를 거꾸로가 아니라 바로 심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배추 모종을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배추 모종을 거꾸로 심어도,
잘 살겠냐고 했더니, 나는 명령대로 할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그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과 복종보다 맹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다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맹종해야 합니다. 이유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시대를 탓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항상,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맹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맹종하도록,
양육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런 영광스런 하나님의 스카웃을 받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셋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명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포기한 것이 많았습니다. 고향, 고국을 포기했습니다.
친척, 친구, 이웃들, 다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자기 권리도 다 포기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도,
조카 롯과 같이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양 떼가 너무 많아져서,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으로서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까지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자기포기가 안되면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것을 포기할 줄 알 때 하나님은 큰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바라보는 동서남북 모든 땅은 물론, 아들 대신 양을 주시는 여호와이레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웃 당한 것도, 결국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화려한 애굽의 궁중에서 사는 왕자의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25). - 다 포기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룻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역시 자기를 낳아 길러주셨던 친정 부모를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우리나라같이 시어른들에 대한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을 포기하고 미래도 없는 이방 땅에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룻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런데 룻은 친정을 포기했습니다. 고향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도 포기했습니다. 며느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좋은 것을 다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자를 쓰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스카웃 된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의 모든 지식과, 힘의 상징이었던 로마시민권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물징의 부요함을, 오직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로 여기고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결혼까지도 포기해버렸습니다. 오직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깨달은 후에는,
그동안 좋아하고 추구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편안함도 포기하고 오직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편안함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달콤한 잠을 포기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지원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출병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차출되어야 합니다.
두 젊은이가 도박장으로 가는 길에, 어느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길 가에 서 있는 그 교회 게시판에는 '죄의 값은 사망' 이라는 주일설교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는 그 설교제목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교회로 가고 싶어, 옆의 친구를 끌어당겼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완강히 거절하며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감옥에서 한 죄수가 신문을 펼쳐든 채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그날 신문에는 대통령 취임 기사로 꽉 차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엉엉 울고 있는 죄수는 30년 전,
도박장으로 간 젊은이였고, 신문에 기사화 된 새로운 취임 대통령은 교회로 들어간 젊은이였습니다.
미국 22, 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여러분! 믿음도 선택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신앙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고 싶을 때, 헌신할 마음이 생길 때, 그때가 곧 선택받는 기회이며 자신이 선택할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웃 되어 쓰임 받는 사명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스카웃 받을 수 있도록, 맡은 사명 생명 걸고 감당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고, 복종하고, 맹종하시고,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과 누릴 것을 포기할 줄 알도록 나를 만드는, 신앙의 훈련을 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후손들이 주님께 쓰임 받는 복된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