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7,26)
히브리서 7장을 마무리하는 26~28절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는 다른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르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우리 인간들의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실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프레펜'(eprepen)의 원형 '프레포'(prepo)는
'적당하다', '어울리다'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들 중에 '데이'(dei)는 필연성, '오페일로'(opheillo)는 의무를
표현하는 반면에, '프레포'(prepo)는 적당한 것, 알맞는 것을 표현한다.
이 단어에는 외부적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자세의 직무를 수행하신 것은 외부의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쁘신 뜻에 따른 결단이란 사실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대사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신 이유가 본절에서 다섯 가지로 나온다.
이러한 특징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시켜 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런 열거를 통해 한층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먼저 그분은 거룩하시다.
여기서 '거룩하시고'로 번역된 '호시오스'(hosios)는 원래 '신의 법이나
자연법에 의해 재가된 혹은 허용된'이란 뜻이다.
신약에서 '호시오스'(hosios)는 하느님께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티토1,8), 기도하기
위해 드는 손(1티토2,18) 등과 관련하여 쓰였으며, 이때에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호시오스'는 신적인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분이 가지신 거룩함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으로서의 거룩함이라는 것이다
(사도2,27; 16,35).
그분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시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이사9,6; 요한1,1~3.14; 3,16; 10,30; 14,9; 20,28).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경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함을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천사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모세와 여호수아, 아론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독점적으로 지니고 계신 분이다.
둘째, 그분은 순수하시다.
여기서 '순수하시고'로 번역된 '아카코스'(akak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악'을 의미하는 '카코스'(kakos)의 합성어로서 '죄없는', '악의가 없는', '교활함이 없는'
등의 뜻을 가진다.
여기에는 제3의 세력으로부터 받는 영향 및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고려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이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는, 순수한 분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악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외이다. 그분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에게 전혀 악한 일을 행하시지 않으시며, 결코 그들을 악으로
이끌고 가지고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점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악' 즉 '카코스'(kakos)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그릇되게 행하였던 것(레위10,1~7; 1사무2,12~17)과 대조를
이룬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시 악의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라면 절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셋째로,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순결하시다.
여기서 '순결하시고'로 번역된 '아미안토스'(amian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더럽히다', '흠을 내다'등을 뜻하는 '미아이노'(mi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종교적으로든지 도덕적으로든지 '순결한'(pure)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흠이라든지 더러움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하늘에서 받게 될 성도의 약속의 상태(2베드1,4), 혼인 관계에서
요구되는 성적인 순결(히브13,4), 실천적인 종교의 순결성(야고1,27)등에 대해서도
쓰였다.
레위 계통 사제들은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의 접근이 불가능한
흠이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점의 흠도 없는 순결한 분이시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지상에서 비록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친교하셨지만(루카15,1.2)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셨다.
여기에서 '떨어져 계시며'로 번역된 '케코리스메노스'(kechorismenos)는 '코리조'
(chorizo)의 수동태 완료 동사로 분리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 이 '코리조'동사가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였다는 사실은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약에서 '코리조'는 공간적인 분리(사도1,4; 18,1.2)라든지 감정적인 분리(로마8,35),
이혼(마태19,3)등을 나타내어 쓰였는데, 본절에서 저자가 이해시키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양면적 분리성이다.
즉 하나는 그분이 무죄하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악한 세상에서 떠나
계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심에도 죄는 없으셨으며(히브4,15),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요한17,14).
또한 지금은 완전히 거룩한 하늘 옥좌에 계신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최고의 지위에 오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으며(사도1,9~11), 하느님 아버지 옥좌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16,19).
스테파노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이에 대해
증거하였다(사도7,36).
'~보다 더 높으신'으로 번역된 '휩셀로테로스'(hyselloteros)는 '높은'을 뜻하는
'휩셀로스'(hysellos)의 비교급으로 '더 높은'(higher)이란 뜻이다.
하늘은 지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보다도
더 높아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천사들과 레위 계통 사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심을 잘 알게 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옥좌 오른편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이며, 그분의
사제직이 아래에서 난 레위 계통 사제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얼마나
우월하신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