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 위한 작은 줄거리)
서애 유성룡 (西厓 柳成龍) (1542년 중종37년~1607년 선조 40년)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태어난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정치가요 선비였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22세(1564)에 생원시에 합격, 24세(1566)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그쳤다..
1591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의주목사 권율,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기용했다. 당 시대의 치열한 당파 싸움 속에서 다른 파들이 낙하산 인사라고 할 만큼 이순신을 관직 7등급을 승진시켜 전라좌수사에까지 등용한 것은 훗날 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역사적인 명장 이순신이라는 크게 될 인재를 알아본 그의 혜안과 나라 위한 충정에서였다. 사심을 버리고 오직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찾기위해 눈여겨 살펴보다 결행한 소신 인사의 결과다
1592년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했고 -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은 병조판서로서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였다.
왜군의 조총에 밀려나는 왕의 피난길을 따라 평양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유성룡은 파직되나 곧, 다시 등용 된다. 환도하여 영의정에 오른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자기가 믿어 온 대로 이순신을 옹호했다.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고 그는 북인들의 반대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600년 관직이 회복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노비 까지 신분의 차이를 타파하고 징집. 징병하여 군사를 충당했고, 전시에 필요하게 세제를 개편하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입안 개발하여 실행함으로서 행정의 효율성 제고와 백성에의 편의제공을 함께 이룩했다.
실천하고 난 후의 일은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소신과 원칙 그리고, 단호함의 리드십이 있었던 명재상 !
이순신이 죽자 그는 낙향하여
징비록 - '나를 징계하여 훗날에 대비하라' - 을 저술했다.
요즘 드라마와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로 그 - 징비록 -이다.
이순신 (1545~1598.11.19)은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서애 유성룡에게 발탁 추천되어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수 수군절도사가 된다.
왜군과의 해전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승리했으며 난중일기를 남겼다.
서애 유성룡 대감과 이순신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역사적 사실이,
약 200년 후 영국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쓰려 여기저기 찾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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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피트 ( Willim Pitt the Younger )
1759.5.28.~1806.1.23.
총리 재직 1783~1801, 1804~1806
1.
윌리암 피터
그는 대프랑스 7년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아버지 대 피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유성룡도 둘째 아들이다)
14세에 캠브리지대학에 입학했으며. 이 신화는 오래 지속되다 지금은 12세(?) 입학자가 있었다고 함.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를 거쳐 22세에 하원의원이 되고, 23세에 재무장관, 24세에 수상이 된다.
1783년 24살의 나이에 총리가 되어 47살까지의 생애 중, 20년을 수상으로 지냈다.
그의 영국 최연소 수상의 기록은 아직 갱신되지 못했다고...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의 13개 주가 독립하려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많은 독일인 용병 부대를 투입하는 등 어마어마한 전쟁 비용에 나라의 재정은 거들 난 상태로 이 전쟁에서 항복한 해인, 1783년 24살의 나이로 수상직에 오른다.
몸이 약한 중에 아내도 없으니 보신을 제대로 못 해선가 병약했고, 수상직에서 물러났던 3년 동안의 실정으로 그는 다시 수상이 되었으나,
1805년 12.2. 아우스트리츠 전투에서 제3차 대불연대(오스트리아. 러시아. 투루크. 영국 동맹)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패하자 피터는 화병이 나서 결국 사망한다.
47세까지 삶에서 20년 간 수상직을 수행했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그가 죽은 후의 재산은 빗만 4만 파운드를 남겼다 한다.
이는 영국을 살리기에 재상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나 개인의 치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백과사전 <William Pitt the Younger >
2.
호레이쇼 넬슨
서애(西厓 ) 유성룡이 이순신을 기용해 왜군을 무찔렀듯이,
피트 시대에는 호레이쇼 넬슨이 아부키르만 트라팔가 해전에서 1805.10.21. 프랑스 해군을 격멸함으로 나폴레옹이 인도의 영국정부를 침략하려는 기세를 꺾었다. 넬슨은 이 전투에서 자신의 군함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유성룡의 생애는, - 200년 후 영국의 윌리암 피트가 닮았고
이순신의 생애는, - 200년 후 영국의 넬슨이 닮은 삶이 우연치고는 똑같다 할 정도로 비교되는 것이다.
3.
미국의 독립전쟁 (1775~1783)
1776년부터 프랑스는 영국에 등을 돌리는 미국의 독립군에게 물자 등, 재정지원을 한다.
1778.6. 미국 내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선전포고를 한다.
1776.4.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 측의 평화제의 협정을 거부한다.
ㅡ 이날을 기려 미국독립기념일은 매년 7월 4일 이다. ㅡ
1781.10.19 영국군은 최종 항복하고,
1783.11. - 미국 13개 주는 독립한다. - 미합중국의 등장.
*결과 ; 영국은 전쟁수행으로 재정이 파탄 났으며 대영제국의 위신에 큰 상처를 입고 전쟁이 끝나는 1783년
24세의 피터가 수상이 된다
; 프랑스도 독립군을 지원하느라 재정은 바닥나고 식량은 부족하며 정치는 혼란에, 민심은 동요하여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4.
프랑스혁명
(1783년 24에 피터가 영국 수상에 오를 때는 프랑스혁명이 시작되기 몇 년 전이었다.)
1789년 혁명운동이 첫 절정에 이른다. 7.14. 바스티유감옥 점령.
1792.9. ~ 1793.4. 혁명군이 승리한다.
1793.1.21. 무능한 루이 16세는 처형당한다.
1795.10.5. 나폴레옹이 왕당파를 격멸시킨다.
1799년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한다.
* 결과 ; 자유. 박애. 평등 사상이 퍼진다.
;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주변국을 침략하고 영국의 상선이 유럽대륙에 접근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대영 적대정책을 편다.

5.
나플레옹
프랑스의 군인․황제(1769~1821, 재위 1804~1815). 본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로
지중해 코르시카 섬 출생이다. 파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다가
프랑스 혁명에 참가 후 두각을 나타내어 1799년 제일 집정(第一執政)에 취임하였다.
1804년 인민 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일제정(第一帝政)을 수립하고 유럽 대륙을 정복하였으나
대영(對英) 대륙 봉쇄 및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여 1814년 퇴위하였다.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815년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백일천하)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음역어는 ‘나옹(奈翁)’ 또는 ‘나파륜(拿破崙)’이다.
6.
피터 & 나폴레옹
출생은 피트 수상이 10살 위다.
피트는 병약했다.
수상이 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다수당의 수상이 된다.
수상에 취임후 당시의 금본위 화폐를 지폐로 통용하게 만들고, 스코트랜드를 강제로 영국에 합병하며, 당시 카도릭교인이 다수 국민인 스코트랜드에 대한 종교 관계로 국왕과 의견이 맞지 않아 수상에서 물러난다.
그는 세제를 개혁하였고, 노예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결실을 맺고 입법되었다
피트는 열 살 아래의 프랑스 나폴레옹과 맞서 싸운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지만 정신만은 대단히 강했던 모양이다.
피트는 대프랑스연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야욕에 맞섰다.
영국의 피터 수상은 넬슨을 해군 제독으로 기용하여 프랑스 해군을 격멸하여(트라팔가 해전) 나폴레옹의 기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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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키는 작으나 군인으로 건강했다.
나폴레옹은 1805년 제3차 대불연대(오스트리아. 러시아. 투루크. 영국 동맹)를 아우스트리츠 전투에서 격파 승리하고, 영국과 대불동맹이 전쟁에서 지자 피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47세로 생을 마감한다.
두 사람의 악연이고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역사의 주역들이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아미앵 협정((1802.3.25. 프랑스북부도시 Amieng에서 체결 : Treaty of Amieng )을 체결함으로서 자신의 힘과 명성을 유럽 전역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새로운 수상 피트는 프랑스와의 협정을 지키지 않으려 하고 나폴레옹을 제거하려고 암살자를 파견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나폴레옹은 암살 사건의 배후 세력인 왕당파의 앙기엥 공작을 처형시키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대불동맹(제3차)을 맺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때부터 자신의 성인 보나파르트 대신 자신의 이름인 나폴레옹으로만 서명한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교황을 참석시킨 가운데 자신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했음을 온 유럽에 알린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랑스를 기습하기 위해 전투준비를 하게 되고 이에 나폴레옹은 머나먼 원정길에 오른다. 프랑스군은 승승장구하며 계속 진격하게 되고 드디어 나폴레옹의 운명이 걸린 아우스테리츠 전투가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전략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테리츠에서 퇴각한다.
ㅡ 얼마 전에 소개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처음 발표할 때 그 제목이 <1805년> 이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이해 할 수 있다 >
7.
아우스트리츠 전투와 나폴레옹
1805년 2월 2일 나폴레옹은 아우스트리츠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 시대의 최고의 번영기를 자랑했다.
이때 그는 이 전쟁에서 죽은 모든 병사의 자녀를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그래서 황실 가족이 되게 해서 황실의 부양과 교육과 특권을 누리게 했다.
그리고 이름도 나폴레옹을 사용하게 하였다.
전사자의 유족은 아버지가 피 흘리고 죽은 생명 대신에 얻은 그 자비에 감격했다. 그것도 놀라워 나폴레옹을 찬양하고 충성했다.
첫댓글 공부 잘 했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했네
요래조래 비교까지 해가면서
정말 고맙네
여기까지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역사 중,
이 시대는 흥미가 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