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1,5-25)
“Do not be afraid, Zechariah, because your prayer has been hear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shall name him John. And you will have joy and gladness, and many will rejoice at his birth,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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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나지르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지르인’이란 ‘하느님께서 성별(聖別)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마태오 복음서 2장 23절에서는 이를 예수님과 결부시킨다(제1독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는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나이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할 때 천사를 통하여 아기의 탄생 소식을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즈카르야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즈카르야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이를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표징도 많을 텐데 왜 하필 그를 벙어리가 되게 하셨을까요? 그리스 철학의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철학자 제논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많이 듣고 적게 말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이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듣는 것에 소홀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듣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들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로마 10,1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뜻과 생각에만 머무른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들어야 합니다. 곧 침묵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의 뜻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벙어리 상태에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진 놀라운 잉태를 지켜봅니다. 그리하여 벙어리가 되기 직전에 ‘불신의 말’을 했던 그가 입이 열리자마자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루카 1,67-79 ‘즈카르야의 노래’ 참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 때가 많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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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져가는 고성(古城)의 아름다움
-양승국신부-
나이 들어가면서 누구나 꾸게 되는 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년기^^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 그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는 여유와 평화로움, 삶의 모든 이치를 달관한데서 온 넉넉함과 너그러움, 다가가는 모든 사람들을 환대하는 황홀하면서도 부드러운 석양 같은 그런 노인...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오히려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점점 고집에 강해집니다. 절대로 양보하거나 물러서지 않습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여유가 없습니다. 삶은 우울한 회색빛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젊은 시절부터의 노년준비입니다. 아름다운 노년기를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평소에 전혀 그렇지 않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여유 있고 아름다운 노인으로 돌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로 잘 바뀌지 않습니다. 젊을 때부터 그 모습 그대로 안고 나이를 들어갑니다.
젊을 때부터 마음 다스리는 연습을 잘 한 사람의 황혼은 찬란합니다. 젊을 때부터 침묵할 줄 알고 기도의 맛을 들인 사람의 노년은 풍랑 속에서도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탄의 조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이 둘은 젊은 시절부터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렁찬 애기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이웃집을 바라볼 때 마다 속이 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 때 마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습니다. 힘겨울 때 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뭔가 다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큰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한 순간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큰 의혹을 품고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습니다. 자신과 엘리사벳의 나이가 너무 늦었기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에 뭘 새롭게 시작해?’ 하고 포기합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면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포기합니다. 아예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웃어버립니다.
어느새 우리나라도 노령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측면의 연구와 배려가 필요한 때입니다. 노인들께서 지니고 계신 풍부한 경험과 그냥 썩히기에는 아까운 지혜를 잘 활용할 방법을 모색할 때입니다.
그러나 노인들 입장에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연세가 드셨어도, ‘이 나이에 무슨?’하는 생각 버리셔야 합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마셔야 합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셔야 합니다. 육체의 소멸과 반비례해서 영적인 영역의 성장이 커져가야 합니다. 내 안에 세상 것은 점점 작아지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커져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늙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입니다. 소멸과 죽음에 대한 의미의 추구입니다. 훌륭하게 나이 드는 일은 고도의 기술입니다. 잘 늙은 방법을 젊은 시절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잘 늙은 방법,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실천여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 나를 힘겹게 하는 그 무언가를 놓아버리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약해짐을 미소로 받아들이기, 불가능해보이지만 나 자신을 넘어서기...
투명한 아침 햇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석양은 더욱 찬란합니다. 휘황찬란한 도시도 멋있습니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는 고성(古城)은 그에 못지않게 멋있습니다. ‘나’란 인간 존재를 아름다운 명품으로 형성시켜나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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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의 다이어리를 정리했습니다. 특별히 연말을 맞이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주소록과 전화번호부를 정리했지요. 이 주소록과 전화번호는 저의 필요에 의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즉, 기억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다이어리에 적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제 한명 한명을 보면서 어떤 분은 기억이 나는 반면에 어떤 분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기억이 나는 사람은 주로 제게 도움과 사랑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에 반해서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있어 존재감이 없어 결국 내년 다이어리의 주소록과 전화번호의 목록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요.
저의 이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저의 이름을 보면서 관심 없다고 또 연락 한 번 한 적 없다면서 주소록에서 이름을 지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원하세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길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하느님께도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주님의 말씀에 의심 없이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생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씀에 의심을 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은 늙은이라서 아이를 갖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사실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대사제였습니다. 즉,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는 하느님의 행동이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의심과 불신으로 하느님을 인간적으로만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모습으로는 하느님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흔들리지 않은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하느님의 기억에 각인될 수 있습니다.
이제 대림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생활을 많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림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오늘은 바로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첫날입니다.(아메리칸 뷰티)
고목에 핀 꽃 한 송이
-양승국 신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참으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승을 하직할 고령의 나이였기에, 이젠 하느님 앞에서 지난 삶을 정리해야 할 노년기였기에 자식이 생길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포기했어도 벌써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육신은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노쇠해졌지만, 그들의 영혼과 신앙은 어린이들처럼 맑고 투명했습니다. 언제나 자녀다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갔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인생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열렬히 믿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느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라는 고목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를 피어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젠 인생이 다 끝났다고 여긴 두 노인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새로이 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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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문을 열면,
-김찬선신부-
주님의 성탄을 앞두고 천사는 연일 바쁘고 성령께서도 맹활약하십니다. 천사는 탄생을 예고하고 성령은 예고한 것을 이루십니다.
탄생 예고를 들은 세 사람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 예고를 믿고 오늘 보는 즈카르야는 믿기 어려워합니다.
즈카르야는 왜 못 믿었을까요? 너무 늙어서? 요셉과 마리아는 젊은데 즈카르야는 너무 늙어서?
사실 어린 아이는 잘 믿지요. 모든 존재를 ‘참’으로 믿습니다. 말을 ‘참’으로 믿을 뿐 아니라 존재를 ‘참’으로 믿습니다. 사실 누구의 말을 참말로 믿지 못함은 그 말을 참말로 믿지 못하기 전에 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모든 존재를 선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 많으니 따라가지 말라고 부모가 얘기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따라가 유괴되곤 합니다. 나쁜 사람에 대한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고 경험을 한 것은 늘 잘 해 주는 부모밖에 없기에 다 부모와 같다고 하는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능력을 믿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아버지가 모든 것 다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가 크면서 차츰 모든 믿음이 깨집니다. 살아갈수록 인간이란 얼마나 거짓이 많고 존재의 거짓에서 거짓된 말들이 나오는지 경험합니다. 살아갈수록 인간이란 얼마나 악한지 경험하고 얼마나 악한 사람이 많은지 경험합니다. 살아갈수록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이란 얼마나 유한한지도 경험합니다.
그러니 나이가 많을수록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듯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더욱이 하느님께 대해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짓을 하느님의 거짓으로 투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악함을 하느님의 악함으로 확대하지 않는 , 인간의 한계를 하느님의 한계로 착각하지 않는 한,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하느님을 더 체험하고 하느님을 더 믿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의 거짓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참됨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인간의 악함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선을 갈망하게 되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탁하게 됩니다.
그러니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함은 즈카르야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의 문을 잠그고 성령의 활약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천박한 경험에 자신을 가두고 일천한 앎으로 하느님의 가능성을 일축한 것입니다. 마치 접시 물에 코를 처박고 죽는 꼴입니다.
그러나 신비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보십시오. 하느님의 무한이 무한히 열립니다. 잠수정의 문을 열면 깊은 바다가 펼쳐지고, 인공위성의 문을 열면 광대한 우주가 펼쳐지듯, 하느님의 깊이와 높이가 열리고 하느님의 크심이 무한히 펼쳐집니다.
그리고 신비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면 무한이 안으로 들어오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둥지를 트십니다. 그리고 생명과 사랑이 그 둥지에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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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거짓말
-전삼용신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해 망명시절, 한 동지의 16세 된 아들 생일 축하 자리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에 왜경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도 참석을 극구 반대하며 말렸습니다.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체포되십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애들 생일잔치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 곳에 가서 왜경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 어리석으리만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 행동은 그 분이 평생 지니고 살았던 4대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이 ‘무실(務實)’입니다. 무실은 말 그대로라면 노력해 열매를 맺자는 것이겠지만 實은 ‘진실’이란 뜻도 있습니다. 즉, 무실은 진실이란 뜻이고 그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그 두 번째 정신은 ‘역행(力行)’입니다. 알면 행하라는 뜻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 분은 다만 행한 것뿐입니다.
세 번째 정신은 ‘충의(忠義)’입니다.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는데, 맡은 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동지들이게 이렇게 씁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부터, 우리 집부터 고치는 것을 큰 일로 보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마지막이 ‘용감(勇敢)’입니다. 도산은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째서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분에 대한 짧은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많은 약속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 분은 중학교 학력밖에는 없는 분이셨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확실한 신념을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맙시다. 그리고 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도록 합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 부부에게 아들이 생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도 자녀가 없었다는 말을 하며 잘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즈카리야는 아들이 출생하여 할례를 받을 때까지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만약 즈카리야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신념으로 살았다면 주님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물론 믿기 어려웠을 테지만 ‘나도 거짓말을 안 하는데 하느님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실 수 있을까?’하며 결국 믿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무엇이든 믿어야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믿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 믿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 부릅니다. 이 교만은 아담과 하와를 죄에 빠뜨리기 이전에 이미 사탄의 무리를 죄에 빠뜨리게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교만과 거짓말과 믿지 못하는 것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은 좀처럼 믿기 힘들지만,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남을 믿기는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거짓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믿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킵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부터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이 내 믿음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만큼 우리 자아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내 자신을 죽여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합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좋은 방법은 내 입에서 거짓이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길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도 증가하고 그 안에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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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시기를 놓쳐 문맹인 남편에게 아내가 글을 배우라고 권하자, 남편이 말합니다.
“글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이도 많은데 새삼스럽게 무슨 글을 배워?”
이렇게 글 배우는 것을 주저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간단히 부탁을 하는 것이에요.
“정 그렇다면, 내게 등껍질이 벗겨진 당나귀 한 마리를 데려오세요. 당신께 보여 드릴 게 있어요.”
남편은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등껍질이 벗겨진 당나귀를 몰고 왔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가만히 당나귀 등에 흙을 얹고 풀씨를 심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신기하게도 당나귀 등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입니다. 다시 아내는 남편에게 그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나가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등에 꽃을 피운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가는 그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남편은 당황해서 집에 얼른 들어왔지요. 하지만 아내는 계속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은 매일 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흘째가 되자 아무도 그를 보고 비웃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모습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공부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하지만 며칠 뒤면 당신이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내에게 감동한 남편은 그날로 선생을 찾아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글 익힌 남편은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 들어갔고, 결국은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부끄러움 때문에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부끄러움이야 기껏 해봐야 3일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해야 할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면 어떨까요? 3일 동안 창피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는 커다란 불충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아론의 후예인 엘리사벳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대단한 가문이며, 더군다나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평소의 행실도 다른 이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지요. 그것은 바로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지요.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일에 의심을 품습니다. 즉, 나이가 많아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아기를 낳으며,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아기를 갖게 되면 얼마나 남사스럽겠냐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심과 부끄러움 속에서는 하느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즈카르야는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또 부끄러워한다면 우리 역시 원하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부끄러움은 기껏해야 3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가정에서 좋은 가장인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훌륭한 사회인이다. 참된 인격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것외에도 가정에서도 아내와 자식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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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신 분
-방교원 신부-
“주 하느님 자비로이 천국문을 여시고/ 메시아를 보내소서 우리들의 구세주 임하소서 주여 오소서.” 우리가 대림 때 자주 부르는 성가입니다. 노인이었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이와 비슷한 성가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불렀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예쁜 아이를 청원하기도 했겠지만, 나이든 상태에서는 그들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절로 생기게 하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성가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성가와 더불어 대림절이 되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나무 밑에서 기다리라고 한 이의 말을 믿고, 앙상한 나무 밑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는 떠돌이 두 사람. 그들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이 간절했던 것만큼 그들의 삶 또한 고달팠겠지요. 다른 어떤 때보다 더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어 그 시간들을 견디어냈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뒤엉켜 있는 ‘지금 이곳’에서 다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 삶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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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양승국신부-
<견뎌내기 힘들 때 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는 꽤나 경직된 분위기입니다. 징벌의 하느님,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 그래서 다가서기 힘든 엄한 아버지의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인들에게는 복주시지만 악인들은 엄중하게 벌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늘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죄한 이들의 고통, 의인들이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의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조금의 흠도 없이 살아가던 완벽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참된 ‘의인’인 두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형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머리 위해 얹어진 면류관’이란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들어가실수록 느끼실 것입니다. 잘 장성한 자식들, 제 갈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자식들은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자식 없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어언 60이 넘어 70이 다되어 갑니다. 친구들은 수많은 손자손녀들을 품에 안고 ‘이제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했습니다. 큰 소리로 많은 후손을 번성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어떻습니까? 손자손녀는커녕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상황 앞에 서있다면 하느님 원망 엄청 했을 것입니다. 대놓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건 내리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제직에 충실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성전에 나아가 봉사했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란 손가락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늦었지만 아주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축복의 몇 백배, 몇 천배나 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바로 구약 시대 마지막을 장식할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잉태입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을 견뎌내고 계시는 분들,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신 분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의 일생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 우리의 불행을 못 본 척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에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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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신부-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또 한사람, 즈카르야의 얘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즈카르야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구원의 역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는 객관자입니다. 그런 객관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구원의 역사에 편입이 되고 그 위대한 역사를 뒤늦게 알고 찬미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고 나중에서야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그의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목도하고 즈카르야와 마리아 모두 그 의문을 얘기하는데 어찌해서 마리아는 벌을 받지 않고 즈카르야는 오늘 보듯이 말문이 막히는 벌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는 즈카르야의 물음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마리아의 물음보다 더 불경스럽기 때문일까요?
‘왜?’라는 물음이 말은 같지만 두 가지 ‘왜?’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알려고 들지도 않고 이미 한 행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모르기에 알기 위해 그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떻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가 행위의 원인적인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행위의 과정적인 의문이고, 왜가 행위의 의도가 무엇이냐의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그런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냐의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능함을 불신하는 ‘어떻게?’와 그것이 가능한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어떻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이치를 알고 싶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던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응답을 보면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믿게 될 때까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불신의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나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싹둑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아예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 불신이 유포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하느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처럼 “I can do it!"이라는 말이 유행인 세상에 “God can do any thing!" "Impossible is nothing to God"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기 위해서 “어찌 그런 일이?”라는, 불신의 말을 토해 내는 말문은 막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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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속에서 태어나 ···
- 김영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느님의 방법대로 하신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이 대목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사악의 잉태를 알리는 대목과 비슷하다. 우리는 과학 문명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생식 기능이 떨어지는 노인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기적과 다름 없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안다는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허블 망원경을 동원해서라도 밤하늘의 별을 모두 셀 수 있을까? 지구만 해도 이 커다란 땅덩어리가 자전을 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며 살지 않는가? 지구상에는 무생물과 생물이 존재한다. 생물에는 생명이 존재한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자도 미미한 생명체, 곧 세포 단위의 생명체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모른다.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물며 생명체의 가장 높은 영장류인 인간의 경우에도 그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부모님에게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결과만 알 뿐이지 왜 내가 태어나는지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분은 내가 그분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육신의 옷을 벗으면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태어났으며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신앙이 우리를 굳건히 받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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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르인
-장재봉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손의 어머니와 세례자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났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삼손과 세례자요한의 어머니는 모두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하룻밤 꿈만 잘 꿔도
복권을 살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천사가 나타나서
임신할 수 없는 몸임에도 잉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더욱이 그 아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엄청난 예언까지 들려 주었으니
그들의 벅찬 감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지를 알고 있었던 그들이기에
하느님의 전능을 마음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삼손의 삶과
세례자 요한의 삶을 비교하면 너무나 판이합니다.
괜스레 애매하고 아리송하기도 한 것은
판관의 자리에 올라
민족의 원수를 갚았던 삼손,
결혼도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택했던 남자,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팔레스티아인들의 코를
가는 곳마다
납작해 주었던 장사,
온 천지를
풍운아처럼, 쾌걸처럼 떠돌아 다니면서
삶을 즐기듯 살았던 삼손의 처지를
훨씬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삼손이 바친 절절한 마지막기도는
철저하게 응답받는
행운까지 있었으니까요(판관 16, 30 참조).
솔직히
세상의 어느 부모님이
자기 자식이
바람도 피할 수 없는 들에서 생고생하는 것을 원할 것이며,
메뚜기로 허기를 때우고
꿀통을 만나야 배를 채우는 꼴을 보면서
'이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은총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요?
이리 저리 생각을 굴려보면
굳이 굳이
세례자 요한의 부모님을 연로한 노인으로 택하신
하느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는 듯싶습니다.
늙어서 자녀를 얻은 연로한 부모님이셨던 만큼
세례자 요한이 고생하는 꼴을
보지 않고
삶을 마감하셨을 법하다는 뜻입니다.
삼손의 부모님처럼
졸라대는 자식을 말리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랑에 휩쓸려서
끌려
쫒아다니며 속을 썩는 일이 없도록(판관 14 참조)
조처하신 것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면서도
우리는 곧잘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겁을 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의심하고
‘어찌 그렇게 까지?’라며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 의심과
이 모자란 믿음이
하느님의 일꾼이라면서도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이라면서도
세상과 손을 잡은 악의 협력자로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오늘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만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갈 때 생길지 모르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악하고
나쁜 일에도 방법이 생기고
길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악을 도와주는 누군가가 꼭 있기 마련이기에 참으로 그렇습니다.
+++
대림은
삶 속의 죄가 되는,
누룩을 제거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이
나를 위해 오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랑의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택하신 나지르인은
그분께서 이끄시는 나지르인의 삶을 살아갈 때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장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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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욱신부-
즈카르야는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천사가 들려주는 아내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출산능력을 잃은 지 오래된 노인이요. 무슨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거요? 지나가는 개도 웃을 것이오...”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신앙과 세상 사이에 늘 상존하는 유혹적인 생각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신뢰하고 믿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을 때, 세상과 인간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왕자에게 말한 내용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만 진실되게 볼 수 있단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눈에 보이는 것만이 모두가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처음에는 세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만을 고집한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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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신부님! 누구 찍으실꺼에요?”
“왜요?”
“신부님 찍는 사람, 저도 찍으려고요.”
“맘에 드시는 분 찍으시면 되잖아요.”
“뭐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아서 기왕이면 신부님 찍는 사람을 저도 찍으려고요.”
미사 후, 어떤 할머니와의 대화 내용을 적어 보았습니다. 즉, 오늘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분을 찍을 것인지를 알려 달라는 것이지요. 만약 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지시지 않겠지요. 바로 저를 믿어주시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주심에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그 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군요.
어쩌면 주님도 이렇지 않을까요? 바로 당신께 대한 우리들의 굳은 믿음에 큰 기쁨을 얻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주님께 과연 무엇을 드렸을까요? 기쁨일까요? 슬픔일까요?
어제 역시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서 지구 내의 어느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깊이 성찰을 하신 어떤 자매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분의 삶이 너무나도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성을 다해서 훈화를 하면서 자매님께 조금이라도 힘을 불어 넣어 드리려고 했지요. 자매님께서는 제 말을 알아들으시는지 중간 중간에 “네~ 네.”라고 답변도 하십니다. 긴 훈화를 마치고서 사죄경을 드리려는 순간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신부님, 뭔 말 하셨어요? 귀가 어두워서 하나도 못 들었어요.”
힘이 쫙 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훈화를 했건만, 그래서 힘이 되었으면 했는데, 하나도 못 들으셨다니 말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맥을 쫙 빠지게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어주시고 우리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굳은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할 때 주님께서는 얼마나 힘이 빠지실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믿음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굳은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믿지 못해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기도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타이완의 산퀴시 추기경님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추기경님은 폐암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이 암을 ‘작은 천사’라고 부르면서 주님께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기적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
믿음이란 기적이 일어난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한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하길 이 시간 주님께 청해봅니다.
빠다킹신부
믿음
-조명연 신부-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엄청난 부자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못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이러한 부러움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취함으로써 이 세상과의 연을 끊어버리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관점에서 좋아 보이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이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려고 하고, 그러한 것들만을 믿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즈카르야는 자기와 아내가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하면서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며 하느님의 일을 의심합니다. 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세속적인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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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안에서
-김명희-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모든 계명과 규정을 지키며 흠 없이 사는 즈카르야 부부이지만 나이가 많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나 봅니다.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고 요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아마 즈카르야는 속으로 ‘아니, 나도 나이가 많고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은데 이제 무슨 수로 우리 부부가 아이를 갖는다는 말이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천사의 입을 빌려 즈카르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고 가능하게 하시고 가능하게 하실 하느님을 그저 인간의 고정관념으로 판단하고 믿지 못한 불쌍한 즈카르야는 그래서 요한이 탄생하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씀대로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하고,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탄생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백성을 예비하도록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훌륭히 수행해 내셨다는 것을 복음이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얄팍한 우리의 지식과 고정관념 안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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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까지만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할머니들께서 저희 아이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성탄을 앞두고 찾아오시는 천사들이십니다.
하얀 봉투 하나를 제게 내미셔서 뭐냐고 여쭸더니 "일년 내내 용돈을 아끼고 아껴 십시일반으로 모든 돈인데, 애들 노트라도 사주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런 나머지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도로 가져가셔서 손자손녀들 용돈주시라"고 해도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막무가내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할머니들과 차 한 잔 하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희는 젊으니 어떻게든 먹고삽니다. 할머니들 앞으로는 모은 돈 제게 가져오지 마시고 같이 놀러도 다니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세요."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사실 우리들 젊은 시절, 건강할 때는 몸으로 때우는 봉사도 어지간히도 많이 했었는데, 이제 나이 들면서 기력도 떨어지고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네요. 좀 덜 쓰고 좀 덜 먹고, 좀 덜 다니고 그래서 모은 돈, 작지만 좋게 쓰여지면 정말 좋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들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니 욕심을 비우고 영적으로 사셔서 그런지 다들 편안한 얼굴, 천진한 얼굴, 따뜻한 얼굴들이었습니다.
"너무 오래 살면 서로가 괴로우니 100살까지만 살자"고 약속하면서 수도원 언덕길을 내려가시는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진정 "곱게 늙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곱게 늙는다는 것은 얼굴이나 몸매관리를 잘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고운 마음을 먹는 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부단히 욕심을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곱게 늙는다는 말은 하느님 안에 산다는 말,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산다는 말,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영적인 인간으로 변화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진정 곱게 늙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젊은 시절 자식을 얻지 못했던 관계로 언제나 불안정했던 한 평생을 보냈습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노후에 대한 걱정이 컸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두 노인의 하느님께 대한 한평생에 걸친 충실은 결국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라는 기적 같은 결실을 거두는 계기가 됩니다.
끝까지 인내한 즈가리야는 마침내 기쁨과 감개무량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주셔서 나도 이제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구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나니
양승국신부-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남편 즈카르야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한 평생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무수히 많은 율법 계명과 규정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지요.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나가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정녕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그 모든 율법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한 점 흠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성전에서 봉사하며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었지만, 끝까지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둘 다 이젠 자식을 희망할 수 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많은 후손’처럼 큰 축복은 없었습니다. 자식 많은 것은 축복 중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축복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년에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기쁨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평생의 결실, 뿌듯함과 흐뭇함의 대상이 아들이요, 손자손녀이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외로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집집마다 찾아온 아들들, 며느리들, 손자손녀들로 복잡한 이웃집이 부러웠습니다. 밤늦도록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오직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집만이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원망도 많았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 못 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이제민, 제3의 영성, 바오로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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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
-민경철 신부-
살다보면 말 한마디가 서운하게 들릴 때도 있고,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지 화살처럼 가슴에 팍하고 꽂힐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듣고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표정이 밝지 못하고, 쌀쌀맞게 대한다거나 차가운 말을 던지기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심리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이 많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마도 무의식중에 자리 잡은 열등의식이 틀림없으리라고 봅니다. 오늘 평생토록 약점과 열등의식에 아파해온 부부를 만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하느님 안에서 아무런 흠 없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왔건만 이 부부에겐 아이가 없다는 설움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식이 없대’ 하는 소리를 듣고 평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오랜 바람을 잊지 않으시고, 치욕을 씻어주십니다. 주님은 가슴 시린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드러낼 가장 적절한 시점을 찾고 계셨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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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시는 하느님
-오영숙 수녀-
하느님께서는 그분 앞에서 의롭게 살아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 뜻하지 않은 성령의 은총을 주십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이제는 나이가 많아 출산은 꿈도 꾸지 못할 때 말입니다. 이 노부부에게뿐 아니라 많은 이에게 기쁨이 될 아기는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고,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사명을 띠고 태어날 아기였습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닦게 될 아기의 부모로 선택된 이 부부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요셉처럼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흠 없는 사람·믿음의 사람’인 즈카르야도 상식을 뛰어넘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천사의 답은 단호합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어쩌면 우리의 삶은 ‘때’를 기다리는 삶인지도 모릅니다. 믿음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그‘때’를 말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닌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하느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며 원망스러울 때조차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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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의탁하는 이에게 허락되는 선물
-홍성만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출생에 대하여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즈카르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는 나이가 많습니다."
성실하고 신심이 돈독한 노부부, 자녀가 없어 한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던 시기도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자식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지만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에 뽑혀 성소에서 분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자식에 대해 이미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나이이기에, 그래서 더 이상 간구할 수도 없었던 노부부이기에, 그 놀라움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아기! 그것도 보통아기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아기를 주신 다니......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미리 즈카르야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이렇게 묵상하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은 즈카르야 노부부의 의롭고도 돈독한 신심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연만한 이 부부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계획하셨을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한없이 의탁하는, 돈독한 신심의 경건한 노부부를 인정하고 복을 주시는 주님!
즈카르야 노부부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우리는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주님께 끝없이 의탁해야 하는 성실과 경건함에 대해 다시 한번 자극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게 끝까지 의탁하는, 성실하고도 경건한 생활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축복과 선물이 있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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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들의 시작
-박상대신부-
루가복음 1-2장도 마태오복음 1-2장과 같이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예수 이야기를 엮어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마태 1,1-17)로서 복음서를 시작하였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는 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 이유는 지난 17일(수)과 18일(목)의 복음묵상을 통하여 보았듯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를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명백히 해 두려는데 있었다. 마태오복음이 기존의 유다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루가는 복음서 시작부분에 서문을 덧붙이긴 했지만(1,1-4)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1,5-25)로서 복음서를 시작한다. 이어서 루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예고(1,26-38),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1,39-45), 마리아의 노래(1,46-56),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할례(1,57-66), 즈가리야의 노래(1,67-8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주변 목동들의 방문(2,1-20), 아기의 할례와 마리아의 정결례(2,21-38), 예수가족의 나자렛 정착(1,39-40), 그리고 12살 예수와 부모의 성전에서의 일화(2,41-52)를 차례로 기록하여 전사(前史)를 꾸몄다.
루가복음의 전사(前史)가 담고 있는 특징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의 사건을 한층 부각시키고,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 등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대체로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요셉에 대하여는 비교적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오가 기존의 유대인과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완성자요 성취자인 동시에 신약의 설정자로 소개하면서 자신의 복음공동체를 교육시킬 생각으로 복음서를 썼다면, 루가는 유대교에 대하여 사전 지식이 없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하나 하나 가르치는 입장에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루가는 하느님을 자비와 사랑 충만한 아버지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구원자요 치유자이며, 보편적인 메시아로 소개하면서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모든 것이 참되고 확실한 것임을 서문에 강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에 관한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서의 서두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루가가 말하는 "틀림없는 사실들"(1,4)로서 "우리들 사이에 일어난 그 일들"(1,1)이 오늘 복음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루가는 이 일들이 시작된 시간과 장소를 밝혀두고 있다. 시간은 헤로데(BC. 70-4)가 유대왕(BC. 40-4)으로 있을 때이다. 헤로데는 원래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에돔) 출신으로서 로마제국의 신임을 받아 총독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티파텔의 권위를 이어받아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전역에 이르는 당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유대인들은 로마제국과 헤로데가문에게 이중적으로 조국의 통치권을 빼앗긴 셈이다.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당시 제관들은 24조로 나뉘어 제사임무를 맡았는데, 즈가리야가 속한 아비야 조는 8조에 해당한다.(1역대 24,1-19) 각 조에 속한 제관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을 정했던 모양이다. 제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임무는 분향하는 것이었는데 즈가리야가 이에 당첨되었다. 즈가리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엘리사벳과 함께 주님 앞에 의롭게 사는 사람이었다.(5-9절)
루가는 이러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다음으로 어떤 사건이 시작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 사건은 제관 즈가리야에게서 시작된 것으로서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선구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말라 3,1.23-24) 이 사건이 즈가리야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로 들이닥친다. 즈가리야는 불신(不信)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20절) 말없이 기다리면 될 일이다. 문제는 온 세상이 기뻐할 일이 예고되었다는 것이다.(14절) 이로써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보다 먼저 오게 될 선구자의 이름은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으로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진 자로 묘사된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극기와 희생으로 사는 사람이 될 것이고, 말보다는 표양으로 일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 것에는 마음이 없고 오직 하느님으로 가득 차 성령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한은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열정으로 아비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여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것이다.(17절)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 또한 요한과 같은 자세로 남은 날들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루가1, 5-25)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를 묵상하겠다. 첫째는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되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큰 인물"에 대해서다.
누가 큰 인물인가?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고 또한 자식들이 큰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생각하는 큰 인물이란 어떤 사람일까? 어디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인가? 출세하는 사람? 돈을 많이 버는 회장님? 유명한 연예인?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 의사? 검사? 판사? 우리는 일반적으로 직업이나 재산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가 쉽다. 아니 큰인물이라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런 인물이 나의 바람이고 꿈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배우고 노력하고 투쟁한다.
즉 자기가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전력투구 한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큰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큰 인물의 평가도 다를 수 있다. 우리가 정말 큰 인물이라는 기준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인물의 기준은 "주님 앞에서"이다. 따라서 세상 관점에서 말하는 큰 인물도 주님 앞에서는 아주 작은 인물이 될 수 있고 작은 인물이 큰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또 내가 생각하는 관점에서 큰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아주 작은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큰 인물의 기준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1. 많은 사람을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 오게 하는 사람. 2.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큰 인물과 주님이 보시기에 큰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바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생각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 곧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요, 부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나에게 있어서 말씀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말씀으로 생각을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나날이 말씀을 통하여 나의 잘못을 바꾸어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나의 생활은 나날이 발전할 것이고 새로워질 것이고 일반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통하여 나의 의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앉고 매일 그 생각이 그 생각이라면 즉 나의 생각에서 한발작도 진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신앙생활이다.
어제 모 일간지에 큰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하였다.
- 올 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교실살인 사건'으로 외아들 영민군을 잃은 김호진씨가 아들을 죽인 아이의 선처를 위해 발벗고 나서 세밑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아직도 아들의 맑은 웃음이 눈에 밟혀 가슴이 찢어진다"는 김씨는 "하지만 평생 악몽에 사로 잡혀 살 그 아이도 한없이 가엾다."고 했다. "다 용서했습니다. 이젠 그 아이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라나 아들 몫까지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입니다."
서울 금천구의 중학교에서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 것은 4월 15일. 3학년 진성이가 오후 수업중인 같은 학년 영민이반 교실문을 열고 들어와 흉기로 영민이를 수 차례 찔러 살해했다. 진성이는 점심 시간에 영민이를 포함한 몇몇이 자신의 친구를 때리는 것을 보고 격분, 집으로 달려가 흉기를 갖고 와서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 사고 소식에 '덜랭대던 아이가 어쩌다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김씨는 병원에서 너무나 참혹한 모습으로 숨져있는 아들을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몇 날 며칠 치가 떨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이렇게 만든 놈을 잡아다 똑같이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김씨는 6월 14일 법정에서 진성이를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악마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 아이가 우리 아들처럼 앳되고 선해 보였어요. 놀라고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들은 저 아이가 아니라 사회가 죽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또래 아이들과 마주치기만 해도 슬픔이 북받쳤고 초인종 소리에 맨발로 뛰쳐나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을 구치소에 보낸 진성이 부모님 마음도 오죽할까?'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씩 가슴 속 얼음을 녹여냈다. 17일 김씨는 진성이가 2심에서 2년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낸 탄원서 때문인지 몰라도 1 심 선고량의 반으로 줄었지만 김씨는 여전히 편치 않았다. "이미 용서한 이상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더 찾아 볼 생각입니다." -
두 번째 묵상은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벙어리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벌을 주신 것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말을 하는 데에는 인간의 말이 있고 하느님의 말이 따로 있다. 슬픈 소식을 전하는 말이 있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말이 따로 있다. 슬픈 말은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는 말이고 기쁜 말은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알아들었을 때 기쁜 말이 나오는 법이다. 인간의 말을 잘 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벙어리가 있다. 남을 흉보고 욕하는 말은 잘하면서도 남을 칭찬하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을 보아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을 보아도 긍정적인 말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 늘 슬픈 소식만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기쁜 소식만 전하는 사람이 있다.
요한이 태어나서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으면 좋겠느냐? 라고 즈카리야에게 물었을 때 서판을 위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을 때 "그 때에 즈가리야가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가 1,64)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놀라운 말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여 그런 놀라우신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 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하고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찬미를 드리지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다. 즉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다"라는 것은 놀라운 일을 전하였는데도 놀라운 일을 하실 하느님의 역사를 듣고도 하느님을 찬미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찬미드리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즈가리야가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제가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말하는 차원에서 천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성숙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즈가리야는 절대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도 놀라운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볼 때 매 순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해야한다. 그런 것을 듣고 보면서도 찬미드리지 못한다면 벙어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벙어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찬미하도록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는 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나의 불신앙이 나를 벙어리로 만든 것이다.
언제 내가 입이 풀려 말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입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을 때이다. 그 때까지는 말을 하지만 벙어리이다. 무엇에 대한 벙어리인가? 하느님을 찬미드리지 못하는 벙어리이다.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사는 것인가? 언제 나는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복음을 통해서 매순간 하느님이 펼쳐 보여주시는 새 하늘 새 땅을 볼 수 있을 때이다. 놀라운 신비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될 때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루가 1,64) 소리 이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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