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507. 묵상글 ( 부활 제5주일. - 길이 있으니 걷다. 등 )
----------------------------------------------------
230507. 부활 제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이 있으니 걷다
지금여기
길을 걷는 이
길에게 끝을
묻지 않으니
끝이 있으니
걷지 아니하고
길이 있으니
걷기 때문입니다
지금여기
길을 걷는 이
끝 모를 길마저
걷고 걸으니
그 길이 어떠하든
탓하지 않고
그리 걸음으로써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
230507. 부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30507. 부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길 그리고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유목민이었던 고대 셈족의 생활에서 길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도덕적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1-5). 그때부터 끝없는 모험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길을 알아내어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듯이, 하느님의 길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있지만 결국 목적지로 이끌어 줍니다.
구약성서는 사람이 선택해서 따르는 두가지 길, 좋은 길과 나쁜 길을 언급합니다(시편 1,6; 잠언 4,18-19; 12,28). 덕행의 길, 즉 곧고 완전한 길은 정의의 실천과 진리에 대한 충실함, 평화의 추구에 있습니다. 나쁜 길, 즉 굽은 길이란 어리석은 자들, 죄인들,, 악인들이 걷는 길입니다. 이 길은 멸망과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두가지 길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유인이지만 각자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될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은 반면,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넓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마태 7,13-14).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이 좁고도 험한 길, 사랑의 길을 따라서 걸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성서의 개념은 종교적인 경험, 즉 ‘하느님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어원에서 진리는 ‘신뢰해도 되는 것’, ‘확인 되어진 것’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당신 백성 때문에 당신 자신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행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가르쳐 주신 율법 자체까지도 의미합니다.
진리는 지혜와 성령과도 관련됩니다. 진리란 결국 우리가 지성의 힘으로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실제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고 성령에 의해서 밝혀진 아버지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리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진리는 성서에 그르침 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러한 진리는 또한 계시의 중개자이시요, 계시의 충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모든 생명의 기원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에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제시해 주신 생명의 길은 야훼의 법과 계명입니다. 야훼의 법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법과 계명으로부터 생명을 발견해 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을 양식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마태 6,25).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이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생명을 완전하게 갖고 계시며 아버지께서 주님께 맡기신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십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가면 그 과정은 힘든 고난의 여정이지만 마침내 우리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충만한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체험은 우리가 온전히 내맡기고 확신을 갖고 의탁할 수 있는 주님과의 온전한 만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투마코(Tumaco) 에서 바다를 평정한 성체
남아메리카 -1906년
투마코(Tumaco)는 태평양의 작은 콜롬비아 섬에 위치하고 있다. 1906년 1월 31일 이 지방은 성찬식의 기적에 의하여 위협적으로 밀어닥치는 파도와 파괴의 수난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수백 명의 해안가 주민들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의 사제인 게라르트 라론도(Gerard Larrondo) 신부와 률리안 모레노(Julian Moreno) 신부가 바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강력한 지진으로 인하여 투마코 주민들이 놀란 것은 대략 오전 10시경이었다. 그 지진은 매우 높은 강도로 계속되었기 때문에 많은 집들이 허물어졌고, 성당의 모든 성상(聖像)이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나 놀란 주민들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집을 떠나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즉시 청원의 행렬식을 갖도록 선교사제에게 부탁하고는 서둘러 성구실(聖具室)에서 커다란 십자가와 깃발, 그리고 성화(聖畵)를 가져왔다.
라론도 신부는 먼저 성당 앞의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갑자기 썰물 때도 아닌데 파도가 해안으로부터 빠지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는 이전까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바닷물이 빠지는 바람에 약 1. 5km 정도의 넓은 지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곧 그 지대 밖의 먼 바다 쪽에서는 거대한 벽처럼 큰 파도가 크게 일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이 해안으로 밀어닥친다면, 투마코를 모두 흔적도 없이 삼켜 없애버릴 정도였다.
이 무시무시한 위험에 대해 사려하면서 사제는 아무말 없이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는 성체를 모신 감실에서 성합을 꺼내서 그 안에 있는 성체를 단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먹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오른손에는 이 마지막 성체를, 왼손에는 성합을 들고 해안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에 탑처럼 높은 거대한 파도가 치솟았다가는 넓게 부서지고 있었으며 그 파도는 수미터 높이로 해안가로 밀려와 철썩이고 있었다. 부인들과 남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고향을 이 위험에서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199)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
230507. 부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인생행로’ 혹은 ‘인생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로’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이 ‘나그네 길’임을 말해줍니다.
인생이 ‘나그네살이’라는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길을 걷는 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곧 ‘참된 길을 걷고 있느냐?’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참된 길인가? 또한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 입니다.
간혹 길을 걸어가다 보면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길)를 아십니까?” “참된 길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 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며,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신 <고별사>의 시작부분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이 귀중한 예수님의 유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고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고 하십니다. 장차 당신이 제자들 곁을 떠난다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 어떠한 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거은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로 이 세상이 ‘나그네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요한 14,2-3)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미련해(정해진) 둔’, ‘예비 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거의 매일 ‘시노달리따스’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알려주시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도’입니다. ‘도’는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길’이 ‘참된 길’ 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런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론이나 이념, 혹은 진리에 대한 개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교리나 이념을 초원하는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곧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 스스로를 두고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만족과 허영심을 채워주지만,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습니다. 곧 예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 인격으로 살아계시는 진리이신 생명을 믿고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오늘, 여러분이 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실행하는 일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주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아버지를 믿게 하소서,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믿고 의탁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30507. 부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어 주시고 당신이 살아있는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차지하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가 34번‘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마음을 다하여 부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말씀으로 안내되고, 진리는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품위를 지켜 살아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이 하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경로, 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구원의 길잡이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헌신과 사랑,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17,17),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요한1,14)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이론이나 이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있고 길이 아닌 진리는 이념에 더 가깝고 이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토마시 할리크).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옳고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가 구원이요, 사랑임을 경험하게 되고 비로소 진리 안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이 만났습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느님의 말씀, 약속, 하느님의 충실함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커감으로써 이런저런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과부들의 배급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때 사도들은“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하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 일곱을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말씀과 기도’를 부여잡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을 펴십시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삶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영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선언하셨고, 미사 안에서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영적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됨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모든 것에 앞세우는 현실입니다.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형제간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이웃 간의 관계도 냉랭해집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가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이웃 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낳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잃어버린 생명과 평화와 화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삶을 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실천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 형제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세상이 맑아집니다. 어렵고 힘에 겨울수록 진리의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길을 걷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됩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푯말 밑에 낙서가 적혀졌습니다. 뭐라고 쓰였을까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것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 여정은 모두 공사 중입니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아버지 집이고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가는 길에서 방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순례의 길을 걸어 마침내 그 공사가 마무리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서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 은총이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요한 14,12). 모쪼록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라는 글로 마감합니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평탄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
230507. 부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사람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열정적인 선교로 공동체가 성장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교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눔’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과부, 어린이들이 나눔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에 불평과 불만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망이 깊고, 바른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 나눔을 맡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 준수에 대한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모르기도 했고, 자신들의 전통과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 규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의를 교회는 ‘공의회’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저녁 미사가 있는데 오전에 요양원 미사를 부탁 받았습니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마음으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제게 즐거움을 주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했을 겁니다.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요양원 미사를 하는 것이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욕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입니다. 욕심 때문에 창고를 가득 채웠던 부자는 하느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별 지구가 병들어 가는 것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의 교만함에서 왔습니다. 교만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쓰러지곤 합니다. 작은 나무들은 큰 바람에도 쓰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유혹이라는 바람이 불 때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것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과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진리요, 생명입니다.
----------------------------------------------------
230507. 부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예능 프로가 있습니다. 잘 보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 보면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능 촬영지에서 직접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현장감까지 더해져서 큰 재미를 얻을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과 실제 촬영을 비교하면 방송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목사, 교무, 신부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입니다. 출연 제의를 받고 이 방송을 다시 보기로 보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 재미를 기대하며 방송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촬영을 모두 마친 뒤에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1시간 방송 분량을 위해 자그마치 6시간 넘게 촬영하는 것입니다(그 뒤 촬영 제안이 오면 늘 촬영 시각을 묻게 됩니다). 막바지에는 지쳐서 가만히 있자, 담당 PD가 스케치북에 글을 적어서 번적 들었습니다. 그 글은 이러했습니다.
“신부님, 웃으세요. 그리고 말 좀 하세요.”
너무 힘들어서 표정이 굳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 몇 번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하긴 방송은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당연히 재미있게 편집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너무 힘들더군요. 이 촬영 후 방송 출연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입담뿐 아니라 체력이 좋아야 방송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보여주기 위한 것과 실제의 간격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을 보고 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진실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영적인 진실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또 함께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보려 합니다.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청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하시는 주님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 큰 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인생은 피아노와 같다. 당신이 어떻게 연주하는 것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진다(톰 리어)
---------------------
----------------------------------------------------
230507. 부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 순례 여정중인
-이상적 천상 교회 가정 공동체-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ㄴ)
오늘은 제13회 생명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성모성월, 생명 충만한 신록의 계절 5월 첫 주일을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죽음의 문화’를 일소하고 ‘생명의 문화’, '돌봄의 문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생명 주일을 제정했습니다. 곳곳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위축되고 위협을 받고 있는지요!
한마디로 얼마나 약하고 위태한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중에 살아가는 불쌍한 생명들이,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님 부활상 앞을 새벽 산책시 지날 때 마다 병고중인 형제자매들을 떠올리며 기도도 바치고 매일 미사때 마다 간절한 소망들을 담아 생미사, 연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가톨릭 교회 공동체는 비단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온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가톨릭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어제 미사중 떠올라 즉흥적으로 인용했던 세말마디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온 세상을 치유하시니”
어제 본기도 앞부분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어제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세상을 기쁘게 하셨으니,”
부활 삼종기도 기도문중 감미로운 한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온 세상이 교회의 선교 대상이자 섬김의 대상임을, 참으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가톨릭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노령화와 1인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사회적 이슈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 “돌봄”이며, 또 하나가 “생활동반자법”입니다. 생명주일을 맞이하여 교회가 깊이 참작하여할 내용들입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역대 최초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취지를 밝힙니다.
“노인 가족, 친구 가족, 비혼, 사실혼까지, 이 모두가 우리 이웃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다. 이제는 친밀함과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이뤄지는 모든 가족을 국가가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돌봄과 관련된 생활동반자법입니다. 노령화와 더불어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가난과 병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이들에게 이젠 국가가 섬김과 돌봄의 큰 가정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국가가 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가톨릭 교회는 참 좋은 공동체의 삶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상 순례 여정중인 우리 가톨릭 교회가 살아야 할 이상적 천상 가정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바로 이런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는 아버지를 향한 순례 도상에 있는 진리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평생 공동체의 살아 있는 중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평생 배워가야할 진리와 생명이요 돌봄과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14,1-3)
초월과 내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닮아 길의 사람, 진리의 사람, 생명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어제 읽은 중세의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데레사 고백 기도시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것 외에는 몸이 없으시며,
당신의 것 외에는 땅에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눈은 그분이 이 세상을 긍휼히 바라보는 눈이요,
당신의 발은 그분이 선을 행하기 위해 걷는 발이요,
당신의 손은 그분이 온 세상을 축복하는 손입니다.
당신의 손, 당신의 발, 당신의 눈, 바로 당신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것 외에는 몸이 없으시며
당신의 것 외에는 땅에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눈은 그분이 이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지상에 당신의 몸 외에는 몸이 없습니다.”
참 심오하고 신비로운 고백기도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여 닮아갈 때 우리 각자 또 하나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될 것입니다.
둘째, 사제적 예배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세례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제로서의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부께 기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 1서는 사제적 백성으로서 우리 신자들의 신원을 분명히 하며 용기와 힘을 줍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얼마나 고무적인지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2,4-5)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여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2,9)
아, 이것이 우리의 독특하고 복되고 자랑스런 사제적 백성으로서의 신원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 사제적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 본분을 새롭게 자각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1-2)
신망애(信望愛)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날마다 형제자매들에게 섬김의 의무를 다하는 것 또한 바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의 삶인 것이며, 바로 산 제물로 바치는 우리의 삶이 참 좋은 예배공동체를 이뤄줍니다.
셋째,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차별로 인한 분열 위기에 처한 교회 공동체에 열두 사도의 신속한 개입으로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분별력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분명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다욱 자라나고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니 교회공동체가 조화와 균형으로 평화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지상 순례 여정중, 이상적인 천상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사제적 백성의 교회 공동체,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온 세상을 위한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교회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230507. 부활 제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강이나 바다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려면 주님을 보고 그분의 말들을 들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면서도 또 우리가 어려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다시금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을 본 것이고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를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았으면서,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이미 보았으면서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을 우리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꼭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100%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왜 주님의 기도를 꼭 이루어질까요? 그 답은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나도 아버지 안에 있다.’라는 말씀이 그 답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안에서 기도하기 때문에 하느님과 다른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 기도, 그 기도는 반듯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우리 기도가 하나 될 때 우리 기도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불안함
가끔 우리를 찾아와 괴롭히는 놈이다.
때로 불안함은
솜사탕 위에 떨어지는
몇몇 물방울처럼
행복한 내 마음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는다.
때로 불안함은
제습제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빨아드려
내 마음을 짓누른다.
두려워하지 말자.
불안함은 불안함일 뿐이다.
그저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바람일 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