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1:1
지팡이 같은 갈대 - 겔 40:3, 42:20 참조.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을 척량하되 - "성전"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나오스(* )니 지성소(至聖所)
를 의미한다. 그러면 여기 지성소와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영적 성전
곧, 기독 교회를 가리키는 비유이다(Charles, Swete). "척량"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것은, 소유의 회복이나 소유의 확보를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이니(겔 40:2,
43:13), 하나님의 교회의 신약적 건설(新約的建設)을 통하여 택한 백성을 소집하는
일 곧, 복음으로 돌아올것을 비유한다고 한다.)
계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 이것은, 외부적으로 혹은 명목(名目
的)으로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 특별히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 유대인이라는
자세만 하고 복음은 받지 아니한 자들을 새로이 이스라엘 운동(복음 운동)에서 기
각(棄却)함이다(Swete). 외양으로 유대인 된것이 이스라엘 자손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서 주님을 신앙하는 것 만이 이스라엘 자손의 자격이다(롬
9:6, 7).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 이것은, 유태인이 그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뒤
에, 이방인들이 그 땅을 주관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데, 곧,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
대로이다(눅 21:24). 그들이 복음을 배척한 죄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 마흔 두달
동안 - 이것은, 단 - 9:24-27에 있는 말씀을 해석함으로 알 수 있는 기간인 둣하다.
다니엘서를 보면 "마흔 두달"은, 세계 종말의 최후 한 주간의 전반부(前半部)이다.
그 후반부(後半部)는 아주심독한 환난으로 가득할 터인데, 계시록 13장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런데 위에 말한 전반부는 여자적 연수(如子的年數)가 아니고, 상징적 연수
로서 적그리스도가 최후 활동하기 전의 신약 시대 전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것
은, 복음서에 있는 이방인의 때를 가리킨다(눅 21:24).
( 두증인과 일곱번째 나팔심판 )
계 11:3
두증인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서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촬스
(Charles)는, 이것이,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예언의 대표자 엘리야가 이세상 말기에
땅위에 다시 나타날 사실을 가리킨다 하였으나, (2) 다음 귀절에 있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란 말씀이, 슥4:14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아서 여
기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킨다. 스가랴서 3,4장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예수살렘
성전 재건자 스룹바벧을 당시 교회의 대표자들로 취급하였다(느 7:5-7).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의 교회를 표상(表象)하였다. 그처럼 계시록의 이 장절의 "두 증인도"
신약교회의 표상이다. 그러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두 증인"을 가리켜서,
"주님의 증인들"이라고 하였으니(Zij worden in ons vers getuigen van den Heere
genoemd), 이는, 교회의 모든 참된 증인들을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이 해석은, "두
증인"이 교회라는 해석과 다를 것 없다. 그 이유는, 계시록의 이 장절이 말하는 "두
증인"은, 복음을 증거하는 참된 교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증인의 이수(二數)는,
증거상 신실(信實)을 성립시키는데 요구되는 수효이다(신 19:15). 예수님께서 제자
들을 전도하러 보내실때에 두 사람씩 보내신 것도 이뜻이다. 또한 성경에는 두 사
람을 가지고 협력의 의미로도 말한 바 있다(전 4:9, 12)
굵은 베옷을 입고 - 이것은 통회(通悔)의 비애(悲哀)를 상징한다(왕상 21:27: 마
11:21 참조). 이들의 통회의 슬픔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보다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한 것이다. 예언자나 전도자는, 이렇게 남들의 죄에대하여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지고(히 11:17), 그들의 영혼 구원의 문제를 맡은 자들이다(겔 3:16 -21). 일천 이
백 육십일 - 앞에 2절의 42개월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서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신
약 시대에는 이렇게 두 증인으로 상징된 교회가 복음을 증거한다.
계 11:4
두 감람 나무와 두 촛대 - 이말씀은, 위의 3절에서 말한, "두 증인"과 같은 뜻이
다. 스가랴서 4장에 의하면,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촛대에 공급하는 것이므로, 성
령의 역사 있는 기관을 상징하는 것인 만큼, 교회를 가리킨다(호 14:6). 그리고 "두
촛대"는 복음의 빛을 발휘하는 것인 만큼, 역시 교회를 상징한다. 참된 교회는 복음
을 증거하는 증인의 일을 하는 것이니, 이 말씀이 복음 증인들을 의미 한다고 해도,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 11:5,6
이 귀절들의 말씀은, 일종의 상징 표현이니 여자적(如子的)으로 볼것은 아니다.
이것을 글자 대로 본다면,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란 엇구를 해득(解得)하기 어렵다.
이 귀절들은, 모세(출 7:20)와 엘리야(왕상 7:1:왕하 1:9-12)의 행적을 염두(念頭)에
두고 한 말씀이다. 이것은 신약 교회가 모세나 엘리야처럼 영능(靈能)이 있으리라는
의미인 듯하다. 신약 시대 교회의 사역자들이 할 위대한 일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마 21:21: 막 16:17,18: 요 14:12-14).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때에 -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복음 증인은, 그일을 미완성
으로 두고 죽는 법이 없다. 루터(Luther)보다 100년 전에 종교 개혁을 부르짖은 영국
사람, 위클리프(Wycliff)는, 일개의 필부(匹夫)로서 로마의 교권(敎權)과 항쟁(抗爭)
하여 성공하였다. 그가 그렇게 싸우던 때에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그의 명
대로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경륜대로 필경
늙어서 별세하였다. 무저갱으로 부터 올라오는 - 이것은, 그 짐승이 이때에 비로소
"무저갱(無低坑)"에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 소속(所屬)이 어디임을밝히
는 것이다. 곧, 그 짐승은 무저갱에 속하는 것이니 지옥적(地獄的)인 잔인 무도한 자
라는 의미가 이문구에 표시된다. 이 짐승은, 적그리스도 나라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옛날부터 여러번 일어났다가 멸망(무저갱에 들어감)하곤 하였다. 예컨대, 애굽, 바벧
론, 헬라 등이다. 그런데 본절이 말하는 "짐승", 곧, 적 그리스도 나라의 절정적(絶
頂的) 출현 기간(出現期間)은, 7년 기간의 후반부(後半部)이다. 단 9:27 참조. 저희
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 이것은, 13장의 사실을 미리 당겨 일부 나타냄이다
(13:5-7).
계 11:8
저희시체 - "시체"는, 헬라 원어로 프로-마( )이니, 집합체(集合體)를 가
리키는 단수 명사(單數名詞)이다. 이것을 보아도 위의 두 증인은 두 개인이 아니고
한 집합체 곧, 교회의 많은 사역자들의 집합체를 가리킨 듯하다. 말은 단수 명사이지
만 집합 명사(集合名詞)의 내용을 가진다. 큰 성 길에 있으리니 -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순교자들을 멸시하여 그들의 시체들을 거리에 밟아 굴린다.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 "소돔"은, 경건치 아니하고 또 도독이 부패하
였으므로(벧후 2:6,7), 하나님께서 그곳을 벌하셨고, "애굽"은 잔인하여 하나님의 택
한 백성을 몹시 핍박하였다. 불경건과 도덕 부패와 기독교 박해는 이 세상의 속성(屬
性)인데, 적그리스도 나라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저렇게 소돔 같고
애굽 같은 적그리스도 나라에서 수난(受難)하고,또 모욕을 당한다. 저희 주께서 십자
가에 못 박히신 곳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란 말은 영적(靈的)으로 사용
된 것이니, "골고다"라는 장소를 가리킴이 아니고 극악(極惡)한 세상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곳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 어떤 때에는 신자에게도 꽤
좋아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림으로만 그렇게 보이는것 뿐이다. 누구든지 이 세
상을 믿다가는 망한다.
계 11:9
백성, 족속, 방언, 나라 - 5:9의 참조.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 이것은, 적그리스도 나라가 있을동안(후 3년 반 동안) 성도 박해
(聖徒迫害)가 끊이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복음 증인들의 시체가 욕보도
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내세의 더 큰 영광을 입혀 주시려는 까닭이다.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예언
자들이었던 증표이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에게 아첨하며(렘 6:14, 8:11), 사람들의
죄를 바로 말해 주지 아니하며, 치료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는, 사람들
이 듣든지 말든지 죄를 책망한다(겔 2;7 딤후 4:2).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
게서 미움을 받는다. 요 15:18-21 참조
계 11: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 이것은, 적 그리스도의
시대가 지난 후(그리스도 다시 오시므로) 주님을 위하다가죽은 참 신자들이 부활할 것
을 예언한 것인데, 20:5에 말할 것을 미리당기어 말한 듯하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
생을 지으실 때에도 인생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살게 하셨다. "생기"는 호흡(숨)
의 기운을 의미하지 않고, 신혼(身魂)의 결합 생존(結合生存)을 성립시키는 능력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 능력은 주로 그
가 인생을 창조하실 때와 부활시키실 때에 나타내신다. 이 생기를 받은 두 증인의 시
체가 회생(回生), 기립(起立)할 때에, "구경하는 자들이크게 두려워하더라" - 고 했으
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불가항적(不可抗的)으로 나타남을 본 까닭이다.
핍박자들이 성도를 두려워할 때가반드시 한번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필경 그들을
벌하시는 때이다.
계 11:13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며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 여기 10분의 1이란 수와
7,000이란 수는 계시록의 상징수(象徵數)니 인간의 통용수(通用數)로는 얼마인지 알기
어렵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영전(靈戰)의 승리를 주실 때에 그의 원수들
을 벌하시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우리에게 알게한다. 역사를 살펴 보면, 교회를
핍박하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내렀던 것이다. "지진"은 정치적 동란(動
亂)을 상징 할 수도 있다. "십분의 일"은 이 세상의 일부분을 가리키고, "칠천"은 적
그리스도 나라 사람들의 잔재(殘滓)이다. 이들의 멸망은 적그리스도의 죄종적 청산이
데, 19장 끝의 일을 미리 당겨 말함이다. 이때에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
늘의 하나님께 돌리" - 었으니, 이것은, 세상 끝에 있을사람들이 회개할 사실을 가리
킨 듯하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사 구원시기의 최종기(最終期)까지 구원 사업을 쉬
지 않으신다. 이 엇구 대로 보면, 그 때에는 멸망 받는 자들보다 회개하고 구원 받는
자들의 수효가 더 많은 듯하다.
계 11:15-18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것과 성도들을구원하실 것을 내어
다 보고 말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 (15절). 이
때까지는 이 세상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 다스리고 있었다(비록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는 잇었으나). 그러나 이제 부터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것을 다스리신
다. 이것은,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세계를 하나님께로 귀정(歸正)시키
실 때를 현실과같이 내다 보는 예언이다. 17절에 말하기를, "시방도 계신 주"라고 할
뿐 이고 "장차 오실 자"란 말은 없다. 그 이유는, 여기 이 말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
한 그때에 할 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 (18절)란 말씀을 보면, 하
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시는 대주재(大主宰)이시다. 인간은 죽어도 그 행한 대로 갚음
을 받도록 찾아 붙잡힘이 되고야 만다. 죽은자들이 심판을 받는다고 했으니, 이는 그
들이 다시 살아나서 주님의 존전에서 판단 받게 됨을 가리킨다.
계 11:19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
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계약(癸約)의 증표(證標)인데, 그 안에는 언약의 비석들이 들어
있다(히 9:4 출 25:22). 이것이 나타나 보임은,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계약하신
말씀 대로 이제 완전히 실현하시겠다는 암시이다. 그런데 그 실현 방법은, "번개, 음
성, 뇌성, 지진, 큰 우박" - 으로 상징되어 나타났으니, 곧 위엄스런 심판을 상징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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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용 )
계 12:1
큰 이적이 보이니 - "이적"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세마이온(* )이니
"표적"을 의미하는 바, 어떤 사리(事理)를 가리키는 상징이란 말과 유사(類似)하다.
여자 - 이것은 주님의 교화를 상징하는데, 구약 교회에 근거하고 나오는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렇게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에 근거하고 나오는 점에 대하여는 다
음 몇 가지 사실들이 확증한다. (1) "열 두 별의 면류관" - 은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
케 함(창 37:9). (2)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2절)란 말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것으로 보여짐. 유대인의 역사(歷史)는, 메시야의 오심을 목표하고 해산
의 고통을 하는 역사라고 성경은 말한다(미 5:2 사66:7,8). (3) 천사 미가엘이 천계
(天界)에서 사단으로 더불어 싸워 이긴 일은, 역시 유대민족(특히 구약 교회)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임. 미가엘은 유대 민족을 보호하는 천사라고 다니엘서에 말하였다(단
10:10:13, 21). 이렇게 유대 민족중에 있었던 구약 교회를 전신(前身)으로 하고 나오
는 신약 교회가, 우리 본문이 말하는 여자로 상징되었다. "여자"를 교회의 상징으로
생각한귀절은, 계 19:7, 21:9 호 2:1 요 3:29 엡 5:31, 32등이다.
후로스트(Henry W.Frost)는, 여기 "여자"란 말이 마리아를 가리키고, 마리아는 유
대인이면서 기독 신자였으니 만큼, 세상 끝날에 있을 유대인 기독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p.219-220). 그러나 이 학설은
자연스럽지 않다.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
관을 썼더라 - "해를 입"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빛나는 영광이고(계 7:9), "달"을
"발 아래"둠은 승리의 표상이다(창 37:9,10:계 2:10, 4:4, 6:2). "열 두 별의 면류
관". 여기 "열 둘"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케한다. 구약 교회는 열 두 지
파를 기본으로 하였고, 신약 교회는 열 두 사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별"은
진리를 전파하는 신자들을 상징한다(창 15:5 단 12:3 눅 16:8: 살전 5:5). 시 84:12:
사60:20: 말4:2 참조. 그러므로 "열 두별의 면류관"은 교회의 승리를 표상한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단장이, 교회의 천적 유래(天的
由來)와 주님의 은혜와 교제에 참여할 것과 및 온 세계 위의 주권 소유를 상징한다"라
고 하였다(En Zij wordt geknschetst naar hare hemelsche dfkomst, en voorgesteld,
zooals zIj mag deelen in de volle gemeenschap, en gunst, des Heeren,en bezitten
deheerschappij over de geheele wereld. -Openbaring, p. 250).
계 12:2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 여기 "아이"는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켰다고 한
다. 그 이유는, "해산한다"는 동사 테카인(* )이 과거사(過去詞)인 까닭
이다. 헬라어에서 과거사(Aorist)는 단번 행위(鄲番行爲)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
이 문법은, 확실히 단회(單回)의 사건인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 12:3
이적 - 1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붉은용 - 여기 "용"은 사단을 상징하는데
(계 12:9 창 3:1), 그것의 "붉은" 빛은 피의 빛이니 교회를 해하려는 살기(殺氣)의 표
상이다(계 6:4).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 "어린 양"(예수)은 일곱 뿔 일곱 눈
(5:6)인데, "붉은 용"(사단)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다. "어린 양"의 "일곱 뿔 일곱
눈"은, 완전 무결(完全無缺)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및 성령님을 가리키고(5:6), "붉은
용"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이 세상의 일곱 적그리스도 나라와 열 왕을 상징한다
(계 17:9-12). 사단은, 땅 위의 왕권들을 통하여 교회를 해하려고하나, 그리스도께서
는 천계의 권세와 영능(靈綾)으로써 사단의 역사(役事)를 멸하신다. 살후 2:8 참조.
7수는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데, 사단은 이것을 도용(盜用)하여 제가 하나님인 듯
이 오만(傲慢)한 태도를 취한다. 10수는 이 세상의 속수(屬藪)니 하나님께 대한 이
세상 나라들의 극도의 반역을 상징한다고도 할수있다. 13:1, 17:9-12참조. 일곱면류
관 - 사단의 대리자인 짐승은 열 면류관을 썼는데,이것은 일곱을 썼으니 하나님의 영
광에 대한 거짓 모방이며, 자칭 왕(自稱王)이라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저놈의 참
람(僭濫)되 주장을 상징한다.
계 12:4,5
"꼬리" - 는 거짓말을 상징하고(사 9:15), "별" - 은 여기서는 천사들을 상징한다
(욥 38:7). 사단은 본래 천사였으나, 하나님께 범죄하고 마귀가 되었다(벧후 2:4 유
6). 그리고 저놈이 많은 다른 천사들을 유혹(誘惑)하여 타락케 하였다. "땅에 던지"
- 는 것은 타락시킨다는 의미이다.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
더니 - 사단이 "여자"를 해하기보다 먼저 "아이"(예수 그리스도)를 해하려 한 것은,
복음의 역사로 보아서 분명하다. 예수님의 일생은, 그 유아 시에 망명 생활로 시작하
여 모든 박해를 받으시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의미한다. 싸이스(Seiss)는, 이것이 성
도들이 부활하여 공중에 올라감(살전 4:16-17)을 가리킨다고 하나 자연스럽지 않고,
엘리카트(Ellicott)는, 이것이,콘스탄틴 대제의 로마 황제됨을 비유한다고 하나 역시
억해이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
를멸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셨다.
계 12:6
그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 이것은, 신약 교회의 세상 생활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
활에 비하여 말한 것이다. (1)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떠나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
서 믿음의 연단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것
이었다. 그와 같이, 교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다. (2)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곧,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구약 교회 운동의 연속으로 나온 신약 교회 운동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아 이방(광야는 異邦을 상징함)에 가서 장성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로스트(Henry W. Frost)에 의하면, "여자"의 도망한 사건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
다고 한다. 곧, 신약 시대의 말기(末期)에 유대인 기독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아 팔레스틴에서 이방으로 흩어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220).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이 세상은 광야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르시기 위하여 지혜롭게 예비하신 곳이 그곳이다. 일천 이백 육십일 - 이것은,
12:14의 "한때와 두 때와 반때"란 기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주석가 크레다
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가리켜 신약 시대라고 한다(Openbaring, p. 255).
( 하늘에서의 천사들의 전쟁 )
계 12:7-9
하늘에 전쟁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에 따라 마귀는 천계에서아주 떨어지
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눅 10:18). 저놈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였던 것
이다(욥 1:1-11, 2:4, 5).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
활 승천하심으로, 저놈은 천계(天界)에서 아주 떨어져 쫓겨났다(눅 10:18: 요 12:30
참조).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은 하늘
에서 떨어졌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사도 바울은 사단이 신약 시대에도 하늘에서 역
사한다고 하였는가? 엡 6:12에 말하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
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 한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인하여 사단이 성도를 하나님께 참소
하던 자리에서는 쫓겨났으나 아직도 시험하는 자리 (이곳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 곧,
공중임)에는 있다가 신약 시대의 종말에 이르러서 완전히 땅에까지 쫓겨 내려갈 처지
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확실한 일에 대하여 말할때에 그것이 미래에 될
것이지만 벌서 완성된 것처럼 말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런 어투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여기 진술된 "하늘의 전쟁"이 미가엘과 용 사이에 벌어 진 것 으로 말했는
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과 관
련시키는가? 우리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전연 관설한바 없고,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만을 "용"과 싸운 자로관설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을 문제삼을 것 없다.
그 이유는, (1)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계에서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복음 전도와 같은 것이다. 이 복음 전도가 표면에서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되어 가지만, 이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 그처럼 "하늘의 전쟁"도 그 이면에
서는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실행되었으나, 역시 형식상으로는 미가엘과
그사자들을 통하여 실현된다. (2) 우리는 특별히 이 부분에 관설된 "하늘에 전쟁"을,
10-12절에 진술된 하늘의 음성으로 해석해야한다(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Revelation, p. 372). 그 이유는, 하늘의 음성이 이 전쟁 내용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곧, 성도들을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말씀(10절)은, 구약 시대에
마귀가 성도들을 참소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그 참소 행위
가 종식(終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바로 성도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1절에도 말하기를,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전쟁"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다시 살아나심으로
승리하신 전쟁을 말함이다.
미가엘 - 이것은 히브리 원어(* )의 음역(音譯)인데, "누가 하나님과 같으
리요"라는 뜻이다. 이것을 보면, 그 천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자이다. 이 영
전(靈戰)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승천하
심으로 그승리가 결정되었다. 옛 뱀 곧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 - 이 말에 대하여는 본장 설교(마귀를 이기라)를 참조하여라.
10-12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획기적으로 구원 사업이 성
취된 사실을 가리킨다.
( 하늘에서의 전쟁 : 미가엘이 용을 패배시키다)
계 12:10
구원, 능력, 나라, 권세 -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속죄하신 것을
가리킨 듯하고(계 7:10),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오신 성령님의 영력을
의미하고(계 4:11, 5:12), "나라"는 천국이고, 그리스도의 "권세"는 하늘에 오르신 주
님께서 천지의 주재되시는 권세를 말함이다(마 28:18). 이 문구는, 그리스도께서 죽
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사단을 완전히 이기신 결과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 이 점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여기 이 말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1)스웨터(Swete)는이것을 "24장로 중의 하나"라고 하나 이연
(犁然)치 않고, (2)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천사들"이라 하고, (3)로마여
(Lohmeyer)는 "순교자들"이라 하고, 혹은 (4)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도를"이라고 한
다. "참소하던 자"는 사단을 가리키는데, 저놈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을 걸어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였다(욥 1, 2장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
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사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칭의(稱義)하기 때문에, 이제
사단의 참소하는 일은 끝났다.
계 12:11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 여기 이겼다는 말
씀은, 실상 앞절의 사단의 참소의 종식에 따라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
말씀은 앞절과 서로 통한다. 여기 "인하여"란 말은, 헬라 원어로 디아(* )니 "
때문에"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말이 여기서 목적격 명사(目的格名詞)앞세 놓인 고
로, 승리의 도구로서의 방편(方便)을 의미하지 않고, 승리자로 여겨 주도록 한 은공
(恩功)으로서의 원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승리는 그들 자신이 잘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이 그들에게 그것을 은혜로 주었고, 또 그
증거하는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그 승리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뒤에 있는 설
교(마귀를 이기라)를 참조하여라.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계시
록이 말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률적(一律的)으로 순교자들이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 얻을 자격이 순교란 말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서는
기독 신자를, "어린 양"(죽임을 당하셨던 예수)에게서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계 14:1,
17:14, 19:11,14).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순교하지 않은 기독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
는 한(限),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로 인하여 "이긴 자"의 자격을 누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세상과 원수된 자요, 세상에게서 수난한 자요, 세상을 이긴 자로 여겨진
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써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영생을 받았으니만큼, 아무래도 죽
을 육체의 생명(롬 8:10)을 아낄 필요 없다(11 절). 생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원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의탁"(* )하는 것은, 우리의 신
앙 생활의 요점이다. 신자는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포기하였다. 한 손으로는 자기
를 붙잡고 의지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주님을 의지하는 방식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그리스도께 맡겨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져야 한
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을 의지해도 안된다. 베드로를 의지해도 안된다. 베드로
도, 내가 의지한 주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하여금 내 영혼을 간수하게 하여라" 하였다(Let him that
died for my soul, see to the salvstion of it).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신자는 그의
생명을 벌써 그리스도께 맡겨 놓았으므로 자기 생명을 잃을까 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다.
계 12:12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 - 이들은 주님을 믿는 자로서 벌써 별세하여 천국에
간 자들이다. "땅과 바다" - 는 땅 위의 생존자들을 통칭(通稱)한다.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 오실 시기(시기)에, 마귀는 불못에
던지움이 된다. 저놈은 땅으로 쫓겨 내려오면서 그 비운(悲運)을 알고 더욱 발악한
다.
(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여자 )
계 12:13
이 귀절들은 위의 제6절을 다시 해설한 것이다. 거기 있는 해석을 참조하여라.
큰 독수리의 두 날개 -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 여기 "두 날개"는 신앙
과 계명인데, 신자와 교회의 힘은 이 두 가지를 소유함에 있다고 하였다(De sterkte
ven geloovige en gemeente ligt in deze twee). 그러나 이 해석은 추측(推測)에 불
과하다.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시련(詩鍊)의 방식으로
양육하심을 상징한다(신 32:11-12; 시 103:; 사 40:31). "독수리는 그 새끼를 시련하
기 위하여 그것을 그 둥지에서 떨어뜨려서 날기를 가르치다가, 그것이 땅에 떨어질 위
기를 당하면 곧 그 날개로 그것을 업는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이 방식으로
시련시키시는 일이 많다(출 19:4).
광야 - 이것은 이 세상을 비유하나니, (1)광야가 쓸쓸함 같이, 이세상도 쓸쓸함(잠
21:19). (2)광야에서는 의식주(依食住)가 곤난함과 같이, 이 세상도 그러함(시
78:19). (3)그 밖에 이 세상 모든 조건들은 우리에게 고난을 줌. 고난이 우리에게
괴로운 것 같으나, 실상은 우리를 하나님께 바로 나가도록 하여 준다. 어떤 아이가
장난감 배를 가지고 강물에 띄우며 놀았다. 조금 후에 배가 강 복판으로 들어가므로
아이는 배를 잃을까 겁냈다. 그 때에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큰 돌을 배 건너편에 던
졌더니, 그 아이는 배가 부서진 줄 알고 울었다. 그러나 배는 그 던진 돌 때문에 생
긴 물결을 다라 점점 강 가로 밀려 나왔으므로, 그 아이는 배를 붙잡았다. 그와 같
이,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과 더욱 가까와진다.
한때와 두때와 반때 - 이것은 단 9:24에 있는 "칠십 이레" 중 마지막 "한 이레"의
반부(半部)곧 삼년 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삼년 반이란 기간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했을까? 이와 같은 표현법에는 반드시 상징적 의미도 내포한다.
영 박사(E.J. Young)에 의하면, 이것은 핍박자의 활동의 세 가지 단계를 가리키나니,
곧, 그 핍박 행위가 점점 강해지다가 끝나는 것을 보여준다. "한 때"는 하나님의 은
밀한 계획 가운데 끝을 가지고 있는 기간이고, "두 때"는 그 때("한 때")의 계속을 의
미한다(Calvin). 저렇게 핍박자가 한 때 권세를 얻고 그것이 점차 강화된다는 의미에
세 "두 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 때"는 그 핍박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고,
"두 때"는 그 핍박 행위가 절단(絶斷)되고 말 것을 상징한다. 환난에 대한 주님의 말
씀도 이와 같은 해석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끝은 아직 아니니라...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하신 다음에
(마 24:6-8), 많은 재앙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
시리라"라고 하셨다(마 24:22). 마 24:6; 막 13:7; 눅 21:9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
신대로 "날들을 감하시리라"란 것은, 계속되는 환난의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런데, 여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말이 시간적으로 어떤 기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1)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그 기간이 신약 시대인데 상
징적 표현인 "마흔 두달", 혹은 "일천 이백 육십일"(11:3)에 해당되는 기간일 것이다.
(2)세대주의 학자 후로스트(Henry W. Frost)의 해석에 의하면, 이 기간은 신약의 말기
에 일어날 유대인 기독교회가 핍박 받는 "후 삼년 반" 기간이라고 한다(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p. 219-224).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계 12:15
물을 강 같이 토하여 - 강수(江水)는 여기서 무수한 환난의 상징인 듯하다(사
43:2). 그러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이 세상주의 (世上主義 )의 생활인데 곧,염려, 탐심, 기타
여러가지 육체적 생활을 가리킨다(마 13:22)고 하였다(Openbaring, p. 263). 또 혹설
에, 이 토한 물은 침략군(侵略軍)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 이것은, 사단의
모든 악한 계교가 하나님의 섭리적 행사로 인하여 실패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데 사
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열중하던 때에, 블레셋 군이 침입(侵入)하므로 다윗은 도망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계 12:17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
어 싸우려고 - 이것은, 마귀가 신자들을 개인 개인 시혹(試惑)함이다. 사단은 단체인
교회를 없앨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저놈이 이제부터는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유혹하여
서 멸망시키려고 한다. "섰더라" - 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에스타데(* )라
고 하는데, "그가(용이) 섰더라"는 뜻이다. 어떤 사본에는 에스타덴(*
)이라고 하였으니, 곧, "내가 섰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을 채택하는 경
우에 있어서, 17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돌
아갔다. 그리고 나(요한)는 바다 모래 위에 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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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
계 13:1
바다 - 이것은 세계 각국을 총칭(總稱)하는 상징이다.
짐승 - 계 11:7 해석 참조. "짐승"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구구하다.
(1) 촬스(Charles)는 이것을 로마 제국이라고 하였으나, 우리 본문은 그것이 전 인류
에게 주권(主權)을 가질 자로 말한다. (2) 어떤 학자들(Elliott, Barnes, Guinness)
은, 이것이 로마 교회의 상징이라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의견이다. (3) 즈안(Zahn)
은 이것이 이 세상 말기에 나타날 개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단 7 장에 나타난 네
짐승은 개인이 아니고 국가를 가리켰다. (4) 또 다른 학자들(Alford, Benson, Moris,
Auberlen)은, 이것이 역사상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를 박해하는 세속적 세력이라고 하
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여기서 그저 막연하게 일반적으로 세속적 세력을 의미한
것 같지 않고, 특정(特定)의 기독교 박해를 내어다 보면서 말한 것 같다. (5) 가장
이연(犁然)해 보이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다. 여기 묘사된 "짐승"은, 다니엘서
7 장에 기록된 "네 짐승"의 혼합체(混合體)로서 이 세상 말기(末期)에 나타날 적그리
스도 왕국의 결정이다.
왜 이 괴이(怪異)한 적그리스도 왕국을 짐승으로 상징하는가? 그 이유는, 이 괴이
한 왕국이, 짐승처럼 무지하게 인류를 착취하며 세계를 황폐(荒廢)하게 만들겠기 때문
이다. 이것은 단 7:3, 8:3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아래
해석을 참조하여라.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 이 짐승과 및 그 열 뿔, 일곱 머
리에 대하여는 17:9-13이 해설했다. 그 말씀 가운데,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요한의 시대)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17:8)라
고 했는데, 여기 전에 있었다 함은, 안티오코 에피파네(Antiochus Epiphanes)란 인물
에게 예표되어 나타났지만, 앞으로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가 멸망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크레다너스는 해석한다. 그리고 거기 또 말하기를, "열 뿔은 열 왕이니"라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요한의 시대) 다른 이는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
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했다(17:9, 10). 그러면, 요한의 시대에 벌써 지나간 다
섯 왕국은, 혹설에 애굽, 앗수르, 바벧론, 메대바사, 헬라 라고 한다. 그리고 시방
(요한의 시대)있는 것은 로마요 장차 와서 잠깐 동안만 있을 왕국은 로마 이후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 일곱이 다지나가고 최종(最終)으
로 나타날 것은 제 8왕국이다. 그것이, 바로 본장 상반부(上半部)에 묘사된 짐승 곧,
대 적그리스도(大敵基督)이다. 혹설에 그 "다섯"은 요한의 시대 이전에 있은 로마의
5대 정체(五大政體)는 이 세상 국가에 대하여 쓰는 만수(滿數)이다. 이 문구는, 이
큰 적그리스도 나라의 권세가 극도에 달할 것을 가리킨다.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참람"한 주장을 가리킨 말이다.
`
계 13:2
표범과 비슷하고 - 이것은 얼룩진 것이니(렘 13:23) 무섭게 보임이고, "곰의 발" -
은 무지하게 덮치는 것이며, "사자의 입" - 은 잔인하게 또는 힘차게 삼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종합(綜合)은, 단 7:3-8에 있는 네 짐승의 종합으로서 최후 적그리스도의
맹수성(猛獸性)을 역설(力說)한다.
계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 이
"상"했던 머리는 어느 나라인지 모르나, 제 7 왕국(17:10)인 듯하다. 그리고 이 "주
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라는 것은, 그 나라가 망할 번하다가 재흥한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최후의 적그리스도 나라는, 제 7 왕국이(17:10) 망했다가 재흥(再興)한 것
곧, 제 8 왕국이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 이것은 그것이 망할 번했
다가 재흥함에 대한 기이감(奇異感)을 이름이다. 그것이 죽어 가다가(아주 죽은 것이
아님) 나아 다시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위대한 사실에
대한 거짓 모방이다. 과연 이 최종의 적그리스도 나라는 사단으로 말마암아 보냄을
받은 자니, 그것은 죄악이 화육(化肉)한 것 같은 극히 가증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도성인신(道成人身)하사,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되신 사실에 대한 정반대적 대조(對照)이다.
계 13:4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 이 말씀을 보면, 적
그리스도는 전쟁에 의하여 권세를 얻는다.
계 13:5
큰 말과 참람된 말 - 단 7:8, 20, 11:36; 살후 2:4 참조. 이것은 자칭 하나님이라
고 하는 참람(僭濫)한 태도를 가리킨다. 마흔 두 달 - 이것은 단 9:27에 있는 후반부
(後半部)를 가리킨다. 단 9:24-27의 뜻을 참조하여라. 거기 았는 대로 천사 가브리
엘이 전한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장래에 대한 것이다. 어떤 해석가들은 그 귀
절들(단 9:24-27)을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설명하였으니 곧, (1) 69주일(7주일과
62주일)은, 고레스왕이 성전 재건이라고 발령(發令)한 해부터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신
때에 이르는 기간이라 하고, 계산은 하루를 한 허의 비유로 알고 푼다. (2) 그리고 7
주일과 62주일 후 곧, 69주일 후에는 유대인의 왕통이 끊어져 이방인의 때가 이른다는
의미에서, 본문에 말하기를,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26절)라고 하였다 하고, 이 아무
도 없다는 시기에 이방 교회의 왕성시대 곧, 신약 시대의 전폭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여기에 신약 시대의 전폭을 삽입(揷入)시키지 않는다. (3) 또
그리고 마지막 1주간은 "왕(적그리스도)"이 이르러서 모든 악행을 하게 되는데, 계시
록 13장은, 그 후반부(3年半)에 적그리스도가 연출할 최악의 사행(事行)을 가리킨다고
한다(단 7:25, 9:27). 그러나 칼빈(Calvin)은, 그 1주간을 가리켜 신약 시대의 전폭
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 1주일은 영적 의미의 시일이다.
계 13:6
하늘에 거하는 자 - 이는 교회를 의미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멸시하며 교회를 핍박한다.
계 13:7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 11:710 해석 참조.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 "어린 양의 생명
책에 녹명 됨"은, (1) 어린 양 예수님께서 그 녹명(錄名)된 자를 피로 사서 소유로 만
드셨다는 의미이고, (2)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 보관하신다는 의미도 된다. 이 녹명이
"창세(創世) 이후"로 되어 있다 함은 무슨 뜻인가? 여기 "창세 이후"란 말은, 헬라 원
어로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라고 하는
데, "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부터"라는 뜻이다. 이것은, 택한 백성의 이름이 그 때부
터 비로서 오르기 시작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영원 전에) 벌써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세상의 기초를 놓는 때부터 변함
없이 그대로 내려온 것을 가리킨다. 벧전 1:20; 엡 1:4 에는 역시 같은 뜻있는 말이,
"창세 전에"(* )라고 씌었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도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Dan wordt gezegd, dat dit boek reeds
geschreven was, toen de wereld geschapen werd, dus reeds van eeuwigheid de namen
van's Heeren gekochten bevat.-Openbaring, p. 274).
최후 적그리스도의 핍박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錄名)된 자만이 이긴다. 생
명책에 녹명된 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가리킨다. 택한 백성은, (1) 하나님이 그
들로 하여금 이기도록 도와주시므로 이기고, (2) 그들이 자신의 택함 받은 줄을 알기
때문에 이길만한 든든한 마음을 가지므로 이긴다. 물론 이 든든한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다. 택함 받은 줄 아는자는, * 신인 관계(神人關係)의 따뜻한 성격을 알게 됨.
* 용기와 안전 의식(意識)을 가짐. *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며 자기의 교만을
버린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헬라 원어 대로 자역(字譯)하면, "그를(짐승을) 경배하리
라"고 한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여기 "그(* )"라는 말이 목적격 대
명사(目的格代名詞)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경배 행위는 단순한 외형으로만의 배례
(拜禮)가 아니고, 그 대상을 신(神)으로 여기는 종교적 경배(敬拜)를 의미한다고 하였
다(Vele handschriften hebben den datief maar de accusatief zal hier wel
oorspronkeijk zijn, en aangeven, dat niet enkel een lichamelijk neerknielen *
den antlchrist gemeend wordt, maar een vereeren van hem met Goddelijke
aanbidding.-Openbaring, p. 273). 사람이 우상을 신(神)으로 알지 않고 절해도 그것
은 잘못된 행동이다.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일반적 배례(종교적이 아닌 배례) 관계로
절한다는 동사(動詞)를 받는 대명사(혹은 명사)는 여격(與格=Dative)을 가진다.
계 13:9
2:11 해석 참조.
계 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성도가 적그리
스도로 더불어 폭력전(暴力戰)의 승리를 바라지 못하여도 염려할 것은 없고, 하나님을
신앙할 뿐이다. 그 이유는, 사로잡는 자(적그리스도) 자신이 마침내 그리스도에게 사
로잡히울 것이기 때문이다. 계 19:20, 21; 마 26:52 참조.
11-17 - 이 귀절들은, 적그리스도 앞에서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의 종교 운동에 대
하여 말한다.
계 13:11
땅에서 올라오니 - "땅"은, 여기서 하늘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죄악 세계를 상징하
나니, 이 짐승은, 거기서 나서 사람을 그리로 유인하는 거짓 선지자의 상징이다. 새
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 이것은 어린 양 예수를 간교히 모방하여서 사람을 속이려
는 것을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는 법이다(마 7:15). 용처럼 말하더
라 - "용"은 사단을 상징한다.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말은 언제나 사단의 말이다.
계 13:12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땅에 오신 것처럼,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
의 파견을 받아 그 권세를 대신 행한다. 이것은, 사단, 첫째 짐승, 둘째 짐승의 일체
적(一體的) 행동에 속한 것으로서 또 다시 하나님의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마귀
의 거짓 모방이다. 마귀는 언제나 모방 전술을 쓴다. 마귀는, 사람들 앞에 사이비
(似而非)한 것을 내어 놓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데만 전심하지 못하
도록 만든다.
계 13:13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 여기 "사람들 앞에"서란 엇
구로써 거짓 선지자의 이적의 성격을 알 수 있으니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의 눈
에 보기에만 이적 같게 나타내는, 거짓 이적이다(살후 2:9).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옴"은 글자 대로의 의미로 보아도 가하지만, 상징적으로 모든 기괴(奇怪)하고 사
이비한 큰 능력들을 기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엘리야를 모방함이다(왕
상 18:38; 왕하 1:10). 살후 2:9-12 참조.
계 13:14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 - 1절 해석 참조.
( 세마리의 짐승과 666 )
계 13:15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 이것도 진정한 이
적이 아니고, 사단의 사술(邪術)로 나오는 거짓 이적을 이름이다. 위의 13절 해석 참
조. 혹설에, 여기 "우상에게 생기를" 준다는 말은 곧, 생존(生存)한 우상(인간을 우
상화함)을 세움에 대하여 가리킨다고 한다. 세상의 종말에는 인간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과학 만능주의(科學萬能主義)는, 곧, 인간의 두뇌(頭腦)를 우
상화(偶像化)한 그릇된 사상이다. 옛날 근동 지방에 잡종교들이 요술법에 의하여 우
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Charles). 장래에도 이와 유사한 속
이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계 13:16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 "오른 손"은 일하는 손이고 또 교제하는 손
이니, 거기 "표(증명서)"가 필요하게 된 것은, 그 국가가 사람의 모든 활동을 적그리
스도의 주의(主義) 아래 통제(統制)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무슨 사업
이나 활동이든지 이 통제의 허가 증표(許可證標)를 가지고서야 하게 된다. "이마"는
사람의 신분(身分)을 상징한다. 그 때에는 적그리스도의 통제법에 부합하는 인격이
아닌 자는, 생존권과 인권을 상실한다.
계 13:17
그 이름의 수라 - 이것은 그 때 적그리스도의 성명 문자(姓名文字)들을 숫자로 푼
수치(數値)란 의미이다. 고대 히브리 풍속과 헬라 풍속에는 그 방언(邦言)의 문자(文
字)로 수치를 표시하는 일이 있었다.
계 13:18
그 수는 사람의 수 - 이것은, 천계(天)의 계숫법(計數法) 대로 계산한 것이 아니
고, 인간의 계산법(計算法) 대로 센 것이라는 의미이다. 육백 육십 육 - 이 숫자를
문자로 환원(還元)시켜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아 보려는 학설은 다음과 같다. (1)
흑이 말하기를, 이것이 헬라어 음 대로의 라타이노스(* - =30, =1,
=300, =5, =10, = 50, = 70, =200)이니 만큼, 적그리스도는 로마라 하고,
(2) 흑이 또 말하기를, 이것은, 네로 황제란 말을 히브리 어로 전서(轉書)한 것 곧,
네론 카살(* =666)이라 하고, (3)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여기
"육"이란 수를 가리켜 제 7일(안식일) 전(창 2:3)의 피조물 곧,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
심을 받기 전의 세계(世界) 곧,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666 곧, 6
수의 삼중복(三重複)은, 이 세상 국가 발전(國家發展)의 극단(極端)이라고 하였다
(Daarom stelt 666, met zijn drie zessen, de volheid der gansche wereld, in hare
hoogste ontwikkeling, volledige samenwerking, uiterste krachtnspanning,
voor.-Openbaring, p. 285). 이것은 한 재미로운 해석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짐
승"을 로마 교회로 보았고, 바빙크(Bavinck)는 이것을 죄악의 세력으로 보았다
(Gereformeerde Dogmatiek, vol. IV.p. 446). 우리는 성경 본문에 의지하여, 이것이
세상의 종말기에 접근하여 일어날 적그리스도 나라를 가리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즈안(Zahn)과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이것을 어떤 개인이라고 생각했으니 일
고(一考)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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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4:1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대신 피흘려 죽으셨던 속죄의 제물이라는 것이다. 5:6참조. "시온
산"(* )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는 산 이름인데(시 50:2,
2:6) 그 부동성(不動性), 견고성(堅固性)(시 125:1)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 지상의
시온산을 의미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성(天城)을 가리킨다.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는 이것이 땅이 아니고 하늘 세계인 사실을 지적하기 위하여 길게 말
하였다. 그의 이론 가운데 한 가지는, 여기 묘사된(3-5) 성도들의 자격이 땅 위의 투
쟁을 다 경과하고 환성된 것을 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The Revelation of St.
John, pp. 1154, 128).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 여기 "그와 함께"란 말은,
성도들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들은 어린 양과 연합한 까닭에 구원
을 얻는다(17:14). "십사만 사천"은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을 상징한다. 7:4 해석
참조. 이 계시는 땅 위에서 환난을 통과하고 천계에 구원되어 들어간 참된 교회를 미
리 보여준다. 땅 위의 많은 환난이 교회를 멸망 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
이들은 짐승(적그리스도)을 따르는 무리와 다르게, 예수님의 이름과 및 하나님의 이름
을 "그 이마"에 표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요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
는다는 상징이다.
계 14:2,3
많은 물소리...큰 뇌성...거문고 타는것...새 노래 - 이것들은 저 십 사만 사천의
노래 소리니, 그 소리가 "물소리"나 "뇌성"같다 함은 그것의 성량(聲量)이 클 뿐 아니
라 승리자의 성격이 있음을 가리키고, "거문고"소리 같다 함은 그것이 무조화(無調和)
한 음성이 아니고 각종의 음색(音色)과 곡조를 가지고서 통일된 평화 만만(滿滿)한 성
가(聖歌)임을 가리킨다. "새노래"는 위에 말한 성가의 가사(歌詞)인데, 5:9, 10의 같
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이 밖에는 능히 이 노
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 "이 노래"는 구원을 체험한 영혼의 희락(희락) 그것이니, 구
원 받지 못한 자에게는 그런 희락이 없을 것이다. 구원의 즐거움은 인력(人力)으로
얻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원 그것이 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 14:4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 여기 이른 바 "여자"(*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직역(直譯)하면 "여자들"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주의(主義)
의 강한 유혹을 상징한다(민 25:1, 31:16; 신 17:17). 이 문구는, 결혼 생활을 악시
(惡視)하는 독신주의(獨身主義)의 교훈을 포함하지 않는다. 모팟트(Moffatt)는 이 문
구를 글자대로 해석하고, 이것이 독신주의를 성별 생활(聖別生活)의 요소로 가르친다
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계시록의 상징주의(象徵主義)를 인정치 않으려는 불공정
한 의견이다. 신자가 혼인하는 것은 불가한 것 아니다. 마 8:14; 고전 9:5 참조.
정절이 있는 자라 - 여기 "정절"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팔데노이(*
) 라고 하는데 "처녀들"이란 말이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처녀처럼
정결히 수절(守節)하여 세상과 죄악을 섬기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킨다. 고후 11:2
참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따라 가는 자며 - 여기 "어디로 인도하든지" 라
는 엇구는, 헬라 원어로 호푸 안 휘파게(* ) 라고 하는데, 그
지도 방향(指導方向)이 피지도자(被指導者)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것
이다. 이렇게 방향이 불확실해 보이는 지도에도, 그들은 순종한다. 그것은 신앙의
행동이다. 그것은, 갈대아 지방을 떠난 아브라함(창 12:1-4; 히 11:8)의 자손의 특색
인 것이다.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 - "처음 익은 열매"(* )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것은 (1) 제 1세기의 초대 신자들을 상징한다는 학설이 있고, (2) 전 인류
에 대하여 교회를 구별되이 일컫는 이름이라는 학설도 있으나, (3) 그 보다도 신자들
만은 하나님께 헌납(獻納)되었고 또 하나님의 것이되었다는 의미이다(출 22:29).
계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 "거짓말"은, 요한의 사상으로 보아서 그
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생활을 의미한다. 요일 2:22, 1:6,8 참조. 그러므로 "거
짓말이 없"는 생활은, 곧, (1)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2) 진리를 믿는 신앙과
일치하는 사랑을 가지고, (3) 죄를 고하고 숨기지 않는 것이다(요일 1:9). "흠이 없
는 자"는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무죄한 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
음을 받아서 칭의(稱義)된 결과, 하나님 앞에 무흠자(無欠者)로 간주된 자를 가리킨
다.
6-13 - 세 천사의 전하는 소식.
클레포드(Kliefoth)는, 이 세 천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계시를, 위에 벌써 나온 일곱
인, 또는 일곱 나팔과 관련된 계시와 딴 종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6절 초두의
다른 천사란 말이 위에 있는 말과 연락을 끊는다고 할 것은 없다. 위(1-5)에 천사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우뢰소리 같은 찬송(2 절)이 천사들의 찬송도 포함한
것이다(Kuyper). 그러므로 6절에 있는, "다른 천사"란 말은 돌연한 것이 아니다.
계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 여기 천사의 전도는 어떤 것을 의미
하는가? (1) 교회사 학파(敎會史學派)의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말한 바 천사 전도
(天使傳道)는, 교회 사상(敎會史上)에 있는 모든 진정한 전도 운동들을 상징한다"라고
한다. (2) 혹자는, 심지어 여기 "천사"의 전도가 종교 개혁 운동을 상징한다고 하였
다. 그러나 (3) 이것은 세상의 종말기에 있을 전도 운동이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
이 여기서 종말기의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기 때문이다(8 절). 그러면 이 전도
운동은, 천사가 이 땅에 와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 전도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하필 그
렇게 생각될 것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밀한 일들이 천사로 말미암아 집행되는
사실에 대하여 언제든지 말하고 있다(행 7:35; 히 2:2; 갈 3:19). 카이퍼(Kuyper)는
말하기를, "천사는 언제나 중간 역활을 하여 온다. 곧,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섭리와
우리의 생활 사이에 연락을 지어 준다. ...세계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단의 공세(攻
勢)는 더 강하여 지는 고로 거룩한 천사들이 더욱 맹렬히 활동할 것은 확실하다"라고
하였다(Angels have always been the middleliks, if we may say so, which establish
the coherence between our life on earth and the over-ruling providence of God.
This being sol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more the Consummation draws
near, and with it the final conflict between God and Satan, the more these
demoniac attacks increase in malignant intensity. Naturally therefore in Rev.
14, with the transition of the trumpet to the vials, both the action of evil
angels and the counteraction of good angels are in greater evidence. It would
have been unnatural if, in that hour of greatest danger, the holy angels had not
done their utmost to avert the power of Evil.-The Revelation of St. John, p.
115-116). 여기 천사의 전도는, 천사가 땅 위에 직접 나타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복음 전도 경륜을 실행 하는데 천사가 사역함을 이름이
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그 사역을 통하여 복음 전도자들에게 연락할 것이
다. 따라서 전도는 인간들이 하게 될 것이다.
왜 복음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1) 복음은 진리 이므로 세상
의 종말에도 원래(原來)의 것 그대로 전파되는 까닭이고, (2) 이 복음은 이처럼 하나
님께서 세상의 종말까지 쉬지 않고 전하시는 까닭인 듯하다. 여러 나라의 족속과 방
언과 백성 - 이것은, 전 세계를 가리키는 계시록의 엇법(語法)이다. 5:9의 같은 말 해
석 참조.
계 14: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 이 말씀은, 인생의 본분(本分)을 지
적하는 전도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생으로 하여금 그를 경외하
게 하며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경외의 구체적 방식은 말하지 않았
으나,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혹설에, 여기 천사가 취급하는 복음
전도는, 택한 백성에게만 구원 소식이 되는(기쁜 소식이 되는). 심판 선포를 의미한다
고 하나 이연(理然)치 않다.
( 바벨론의 멸망 )
계 14:8
여기서부터 끝절까지는, 16-19 장 에 있는 세상 심판을 서론적으로 미리 당겨 보인
것이다. 바벧론 - 이것은, 17 장에 기록된대로 "큰 음녀"로도 상징되었으니, 11:8의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큰 성"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을 가리
킨다. 이것은 성도와 반대되는 것이며, 모든 나라 사람들로 이 세상 정신에 취하게
만든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바벧론이란 이름은 세상 권세의 중심
점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시대를 따라서 여러가지 국가로 나타나는 바 하나님과 그리
스도와 교회를 거스리는 것이다"(시 2편) 라고 하였다(Daardoor werd deze naam
aanduiding van de wereldmacht, met haar centrum, die zich in den loop der eeuwen
in verschillende wereldrijken belichaamt, en tegen God, en zijne Christus, en
zijne gemeente, stelt, PS. 2.-Openbaring, p.290). 17:1의 "큰 음녀"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무너졌도다 - 이것이 과거 동사(過去動詞)로 사용됐으나, 아직 무너진
것은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확실히 내다 보고 말하는 예언이다.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 바벧론은 곧 이
세상이니, 그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큰 음녀(섬겨야 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
른 신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강제적으로 혹은
미혹적으로 사람들(나라들)을 유인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한다. 이리하여 모든
나라들은 이 바벧론의 음행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그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니, 이는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신 것 같음)를
마시게 되었다. 이같은 바벧론은 저만 범죄할 뿐 아니라 남들로 범죄케 하는 괴악한
자이다.
9-12 - 짐승(적그리스도 나라)과 구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처벌(處罰)함에 대
한 천사의 선고.
계 14:9
짐승 - 13:1-10 참조. 그의 우상 - 13:14-17 참조.
계 14:10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 8절 해석 참조.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 이것은 물 같은 것을 타지 아니한 강주(强酒)니, 하나님의 강한 진노를 상징
한다. 짐승에 속한 자들도 회개할 소망이 없는 극악한 자들이니 만큼, 하나님의 진노
그대로 받는다. 그러므로 그 무리가 받는 벌은, "대접"(계 16:2)에 담아 붓는 것으로
상징된다. "대접"으로 재앙을 내려 붓는 것은, 그것을 남김 없이 쏟는 것을 상징한다.
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 이것은, (1) 불로 소금치듯 하는 지옥
(地獄) 화형(火刑)의 영구한 계속을 가리키는 동시에(막 9:47-49), (2) 그 처벌 받은
자들의 당하는 영원한 황폐(荒廢)를 상징한다. 사 34:9,10 참조.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 이것은 성도들을 주의시키는 문구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지옥의 형벌이 무서우니 만큼, 성도들은 모든 고난을 끝가지 참아 견디어
신앙을 놓지 않아야 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 - "예수 믿음"이
라는 말이, 구역(舊譯)에는 "예수의 도리"라고 잘못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예
수를 믿음으로만 지키게 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극력
(極力) 지키도록 힘쓴다. 그 이유는, 그가 성령님의 감화(感化)를 받기 때문이다.
계 14:13
본절은 윗절에 있는, 성도의 인내에 대한 하나님의 보수(報酬)에 대하여 말한다.
기록하라 - 하나님께서 성도의 고난을 갚아 주시는 원리는 영원 불변의 진리이므로 천
래의 음성은, 사도더러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한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수난(受
難)하나, 내세에 그것에 대한 갚음을 받는다는 이법(理法)은, "기록된"진리 곧, 불변
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그들은 난관을 당할 때에 더욱 용기와 인내로써
전진한다. 자금 이후 - 끝날 심판이 접근했으니 만큼,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구원
완성을 보게 될 시기는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래의 음성은 말하기를,
성도들의 내세적 축복이 이제부터 임한다고 한다. 일설에, "자금 이후"의 시대는 일
반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하고, 이 귀절이 신약시대에 예수 믿고 별세한 자가 받는 천
당 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주안에서 죽는자들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일생
을 마친 자들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헬라 원어로 호이 네크로이 호
이 엔 퀴리오-아포드네이스콘데스(*
)인데, 우리 개역(改譯)은 직역이다. 구역에, "주를 높이다가 죽
은자"라고 한 것은, 글자 대로의 역술(譯述)이 아니고 의역(意譯)이다. 이 엇구는, 그
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로 더불어 연합하여 교제하는 생활에 거하다
가 별세하는 자를 의미한다. 살전 4:14참조. 성령이 가라사대 - 이것은, 성도의 사
후 유복(死後有福)에 대한 제3확보이다. 제1확보는 예언자 자신이 하였고(12), 제 2
확보는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고 한 것이다(13절). 성도의 내세의
유복은 이렇게 견고히 삼중(三重)으로 확보되었으니,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슨 고난을
받든지 기쁘게 참아 나아갈만한 소망의 근거를 가졌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
이것은, 그들이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것을 가리킨다. 이는 - 헬라
원어로 가르(* )라고 하는데 안식의 이유를 보이는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이
다.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그들이 "행한 일"은 그들의 자력(自力)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주신 의로운 행실들이다(19:8). 이런 의로운 행
실 때문에 그들은 하늘 상급을 받는다.
14-20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두 가지 추수(秋收)로 나타난다.
계 14:14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 "흰구름"은 그리스
도의 순결과 및 그 장엄(莊嚴)한 영광의 표상이고, "사람의 아들과 같은이"는 예수 그
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귀절은,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구름 타고 오실 주님을 염
두에 두고 한 말이다.
계 14:15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
여기 "천사가 성전"에서 나온다고하였으니 만큼, 그는 독자적(獨自的) 권위(權威)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고,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
달하는 것 뿐인 것이 명백하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 욜3:12,13참조. 이 곡물(穀物)추수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
스도께서 친히 그 거두시는 일을 하신다. 그 이유는, 그수확의 대상이 그의 것 곧,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 추수는, 그가 성도들을 영광의 나라로
데려 가심에 대한 상징이다(살전4:17).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 이것은 성도들의
수효가 찼다는 뜻이다.
계 14:18
포도송이 - 이것은 여기서 불경건(不敬虔)한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추수는
주님께서 친히 하시지 않고 천사를 시켜서 하실 것으로 표현된다(17,18). 그 이유는,
그 수확이 주님께 가까운 관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어버림이 된 까닭인 듯하다(마
13:41,42). 포도가 익었느니라 - 이것은 죄악이 관영한 것을 비유한다.
계 14:19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 이것은, 저 악도(惡徒)들이 천벌(天罰)을 받아서
살륙 당하는 것이, 마치 포도가 그 즙 짜는 압착기(壓搾機)에 짜임 같이 되리라는 비
유이다.
계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 사 63:1-6참조. "성"은 천성을 이름이다. 그들은 들
어가지 못하고 그처럼 천벌을 받은 것이다(마8:12참조). 말 굴레까지 닿았고 - 이것
은, 전쟁으로 인하여 흘린 피가 그렇게 많을 것을 비유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말은
전쟁의 상징인 까닭이다 흑설에 이것은 16:16에 있는 "아마겟돈"전쟁의 결과를 미리
당기어 보이는 상징 이라고 한다. 일천 육백 스다디온 - 이 숫자는 역시 상징적 의미
를 가진 듯하다. 1,600이란 수는 40을 제곱한 것이데, 40은 형벌을 상징하는 수량이
라는 학자들이 있다. "하스다디온"은, 606피-드 9인치(英尺)라고 한다.
클리에포드(Kliefoth)는 말하기를, "1,600이란 수효는, 4수를 제곱하여 다시 100으
로 곱한 것이다. 4를 제곱하는 것은, 온 천하를 가리키고, 100수는 10을 제곱한 것이
니 그것은 영원을 가리키는 바 성도의 원수가 받을 영벌(永罰)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한 피가 "1,600스다디온에 퍼졌"다함은,끝날에 하나님의 벌이 온 천하적으로 성도
의 원수들에게 임하여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벌은, 영원히 풀릴
소망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이 사방의 모든 원수들에게 있을 것이다(a distress and an
eternal future misery which is in every direction and for all times would
consummate in doom.-A. Kuyper, The Revelation of St. John, p.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