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의 끝에는 비가 내렸고
허순행
삼월이 길잃은 구두처럼 왔네 갈팡질팡 왔네 쑤세미처럼 구겨져서 왔네 잠자는 서방 옆에 두고 서방질하는 계집처럼 왔네
마루 끝에 앉아 누렇게 뜬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자 몸에서 붉은 먼지들이 쏟아져 내렸네 늙은이들은 안경을 벗어들고 안경알을 닦았네 안경알 속으로 햇살이 모여들었고 구름이 모여들었고 길바닥이 모여들었네 어둠을 살펴 어둠 속으로만 길을 내던 풍문들도 슬쩍 귀를 얹어보는 것이네
죽은이와 산자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람은 마른 가지 끝에 누워 제 몸의 무게를 가늠해 보네 고비사막을 넘어온 황색 바람이 대청마루로 오르다가 신발 속으로 제 몸을 감추네
하루가 천 년처럼 깊어져서 백 년 전에 죽은 동생이 타박타박 물속을 걸어나왔네 그대도 걸어나왔네
생일상을 받은 삼월 열이레날에
나는 미친년처럼 길을 떠나고 싶었네
★ 아라크네
허순행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여행이 필요해
시간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평강역에 이르고 다 낡아 지워진 이야기 속에서 아이 하나 걸어 나오는데 징징거리는 서방산 골짜기를 타박타박 걸어나오는데 아빠 바람은 왜 불어요 비는 왜 내려 봄이 되면 겨울은 어디로 가는거야 해는 왜 늘 서방산 골짜기로 넘어가요 물었다지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면 울기 시작해서 서방산 골짜기를 넘어가던 해가 빨갛게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지요 그렇게 주야장창 울어대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낼 거야 아버지가 던진 말은 씨앗이 되고 나무가 되고 중천금이 되고 약속이 돼서 아이는 온달을 찾으러 대문 밖을 나서기도 했다지요 징징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면서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숯장수 아들을 떠올리면서 그래, 저 애라면 내 울음을 받아줄지도 몰라 그러나 상대는 열네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을을 떠났고 엄마는 물비늘이 반짝이는 개울가에 앉아서 서방산 골짜기로 넘어가는 해를 오래오래 지켜 보았다지요 어찌어찌 아빠를 만나 나를 낳고 얼마간 울며 지내다가 또 나를 낳고 달리 울음 울 새도 없이 또 나를 낳고 울음 속에는 천 년 전에 벗어놓고 온 평강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남아 엄마의 일생을 울음으로 채웠는지도 모를 일
넌 엄마처럼은 안 살았으면 해
그녀가 그녀의 전생을 부인하는 동안에도
서방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내 발등을 적셨는데
허공으로 집을 짓던 거미 한 마리는
제 몸속으로 길을 내며 여전하게 제 몸을 만드는 중이다
★아라크네 : 운명을 짜는 여인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