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간 vs 뜨레쨔꼬프 ***
러시아는 정말 광활한 곳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러시아는 모스끄바나 상뜨 뻬쩨르부르그가 있고 볼가 강의 흐름이 닿는 곳이겠지만, 까프까즈(Кавказ: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펼쳐지는 자까프까즈(Закавказ) 지역이나 우랄(Ураль) 산맥을 지나 바이깔 호(Озеро Байкал)까지 넘어서서 마침내 바다가 있는 블라디보스똑(Владибосток)과 연해주(沿海州)로 이어지는 곳까지도 러시아입니다. 혹한의 추위와 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왔었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는 천연 자원과 자연환경을 가지고서 어쩌면 미래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될 지도 모르는 곳이기에 소중한 진주와도 같은 곳이죠.
하지만 시베리아의 개척 시대로부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고유의 풍습과 문명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문명’의 혜택은 아무래도 적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러시아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 말하는 독-소 전쟁)이 마쳐지고서 이러한 척박한 토양에서 두 사람의 뛰어난 바이얼리니스트가 태어났으니, 우연의 일치일진 몰라도 같은 해에 탄생한 동갑내기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철의 장막’을 뚫고서 먼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올레그 모이세예비치 까간(Олег Мойсеевич Каган: 1946. 11. 22 - 1990. 7. 25)이었습니다. 그는 모스끄바에서 가장 먼 지역의 하나인 사할린() 출신입니다. 사할린이라면 전후 일본과 가장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커튼이 내려쳐지는 바람에 우리나라 동포들이 50년 세월동안 고향땅을 밟지도 못하는 아픈 역사를 지닌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까간의 아버지는 군병원의 외과의사로서 이곳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까간이 태어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이번에는 완전히 국토의 반대쪽에 위치한 발트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수도 리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 까간은 자유로운 음악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리가 음악원 음악학교에서 요아힘 브라운(Joachim Braun)을 사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곳을 들른 모스끄바 음악원 교수 보리스 꾸즈네쪼프(Борис Кузнецов)가 겨우 13세되던 까간의 연주소리를 듣고서 그를 데리고 모스끄바로 가게 됩니다. 꾸즈네쪼프 교수는 그를 모스끄바 음악원에서 공부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견인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리스 꾸즈네초프는 다소 ‘옛날 사람’이었습니다...19세기식의 도제 수업을 통하여 전통적인 바이얼린 기법을 가르쳤고, 엄격한 옛날식 교육과 통제로 그를 키워나갔습니다. 그 결과 1965년 그가 19세때 헬싱키 국제 콩쿨에서 1등상을 받으며 소련이 아니라 외국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아직은 그에게 가해지고 있던 자유여행의 구속 때문에 핀란드만 자주 왔다갔다 하며 쿠모(Kuhmo) 실내악 축제 같은 곳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에 열린 차이꼽스끼 국제 콩쿨에서 2등상을 받고 1968년에는 라이프치히 바하 콩쿨에서 1등상을 받으면서 그의 성가를 국내외에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꾸즈네쪼프 교수가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그의 지도교수는 저 유명한 다비드 오이스뜨라흐(Давид Ойстрах)로 바뀌게 되었는데, 생애 두 번째로 영향을 많이 받은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오이스뜨라흐 선생님은 제게 엄청난 영향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문하생들에게 당신은 아버지이자 카운슬러이자 한 사람의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오이스뜨라흐는 그에게 자신의 최고 장기인 모차르트를 가르치면서 모차르트의 음악들이 까간의 뼛속까지 침투하도록 가르쳤으며, 그 자신 지휘봉을 들고 반주를 하면서 까간이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지도하고 또한 녹음하게 해주었습니다.
점차 한 사람의 바이얼리니스트로 기량이 늘게될 즈음인 1969년에 그는 자신처럼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피아니스트 스뱌또슬라프 리히떼르(Святослав Рихтер)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즉시 친구가 되어 20여년을 함께 하면서 많은 곡들을 함께 연주하고 녹음하였습니다. 그리고 리히떼르를 통하여 더 많은 뛰어난 신진정예 음악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피아니스트 옐리자베따 레온스까야(Елизабета Леонская)와 알렉세이 류비모프(АлексейЛюбимов), 그리고 옐리쏘 비르살라제(Elisso Wirssaladze), 첼리스트 나딸리야 구트만(Наталья Гутман), 클라리넷 주자인 에두아르드 브룬네르(Эдуард Бруннер), 비올라 주자인 유리 바쉬메뜨(Юрий Башмет)가 포함됩니다. 이들과 함께 실내악들을 연주하면서 친해진 그는 처음에 레온스까야와 결혼하였으나 헤어지고 뒤에는 구트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1989년 심각한 몸의 이상을 느낀 그는 오히려 더 많은 연주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위로를 받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음악으로 격려를 주었고, 그의 연주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으로 한층 투명하고 맑은 소리로 바뀌어갔다고 합니다. 죽기 불과 10일 전인 7월 15일, 그는 자신이 만든 크로이트(Kreuth) 음악 축제에까지 출연하였고, 그리고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비록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가 죽고 난 후부터 그가 남겼던 상당량의 녹음들이 착착 발굴되고 음반화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의 이목을 끌며 더 많은 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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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그 까간이 이제 추억속의 인물이라면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중인 동갑내기 바이얼리니스트로서 이제야 그의 이름은 겨우 국내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물론, 해외에서는 현역 바이얼리니스트로 제법 많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빅또르 뜨레쨔꼬프(Виктор Третяков:1946. 10. 17 ~ )는 바이깔 호수를 지나 원동 지역으로 가는 길목인 끄라스노야르스끄(Красноярьск)에서 태어났습니다. 까간과 비슷하게 그의 아버지 역시 군인이었으며, 군악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군 주둔지에서 끄라스노야르스끄 시의 중심가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다섯 살인 그를 데리고 음악 학원엘 갔었는데, 마침 피아노 교실은 인원이 가득 차서 어쩔 수 없이 바이얼린을 잡게 하였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자 음악 학원의 바이얼린 선생은 뜨레쨔꼬프의 어머니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모스끄바로 가서 거기서 가르치는 최고의 교수에게 배워야만 합니다. 아마도 오래지 않은 어느날 빅또르는 온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부디 이 아이의 재능을 썩히지 말아 주십시요. 틀림없이 이 아이는 크게 될 겁니다...틀림없이...!”
그리고 그 선생은 모스끄바 음악원의 교수이자 바이얼리니스트였던 유리 얀껠레비치(Юрий Янкелевич)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길로 빅또르의 어머니는 모스끄바로 달려가 얀껠레비치 교수를 만나서 마침내 1954년 뜨레쨔꼬프가 모스끄바 중앙 음악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스끄바 음악원으로 진학하게 되었지요.
유리 얀껠레비치 교수도 뜨레쨔꼬프의 스승이자 후견인이 되어 그를 가르쳤습니다. 어릴적부터 나이에 비해 대단히 조숙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뜨레쨔꼬프는 과묵하리만치 열심히 바이얼린과 음악에 매달렸고, 그 결과 1965년에 있었던 전 소련 콩쿨에서 영예의 대상을 안음으로써 마침내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어 1966년에 있었던 차이꼽스끼 콩쿨에서는 동년배였던 올레그 까간을 누르고 자신이 1등상을 받음으로써 드디어 국제적으로 자신의 성가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뜨레쨔꼬프는 까간보다 먼저 서방으로 나갔습니다. 1968년 베를린 필의 독주자로 초청을 받아 빈에서도 연주를 한 이후 미국의 각 연주단체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아 순회연주를 하였으며, 일본 NHK와도 협연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올레그 까간, 스뱌또슬라프 리히떼르와 보로진 현악 4중주단과 더불어 활발한 실내악 활동을 하면서 비올라의 유리 바쉬메뜨, 첼로의 나달리야 구뜨만, 그리고 피아노의 바씰리 로바노프()와 더불어 피아노 4중주단을 구성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좀 더 큰 음악적 표현을 위하여 그는 1986년부터 창립자 루돌프 바르샤이(Rudolf Barshai)가 망명한 후 지휘자가 공석으로 되어 있던 모스끄바 실내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얼린에 좀 더 전념하라는 얀?苾뭔紂? 선생님의 말을 따라 곧 지휘봉을 놓고 다시 바이얼린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30세가 지나서 음악원 고등과정을 밟고 있던 옐레나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게 되었는데, 각각 피아노와 바이얼린 연주자가 되어 오늘날에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차이꼽스끼 콩쿨 심사위원을 맡아서 우리나라 음악도들에게도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스승이 은퇴한 이후 그 클래스를 그대로 받아서 음악원의 교수로서 재직하게 되었고, 최근까지 독일에서 매년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등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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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동년배에다 비슷하게 좋은 스승을 만나 육성되어지고 같은 콩쿨에서 상을 받기도 하면서 함께 실내악 활동도 해왔던 그들은 닮은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하지만 한 사람은 꽃을 다 피우지 못한 채 떠나갔고, 한 사람은 떠나간 사람 대신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 묘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찍 유명을 달리한 올레그 까간의 연주는 철의 장막 시절부터 작은 전설이 되어져왔는데, 최근 LIVE CLASSICS에서 『OLEG KAGAN EDITION』이라는 상당한 분량의 시리즈물을 내놓았습니다. 아마도 까간의 발표.미발표 러시아측 음원들이 거의 총망라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빅또르 뜨레쨔꼬프 연주 음원 역시 멜로지야 전집물로 발매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예당에서 구소련 붕괴 후 우랄 지방 등에 파묻혀 있던 정부 공문서 기록 보관소 등과 공식 멜로지야 음원 등을 가지고서 그의 연주 음반들을 발매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널리 소개되지는 않은, 저평가되고 있는 연주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차이꼽스끼 바이얼린 협주곡을 들어보면 재미있는 비교가 될 듯합니다.
올레그 까간은 1984년, 그가 죽기 6년 전에 공식적인 녹음을 하였습니다. 조지아(그루지야) 출신의 지휘자 잔수크 카히제(Dzansug Kakhidze)가 지휘하는 소련 국립 방송교향악단의 반주로 이루어졌는데, 그 연주를 들어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존경해마지 않았던 스승인 다비드 오이스뜨라흐의 체취가 물씬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비드 오이스뜨라흐가 전성기때 녹음한 것들을 들어보면 때론 부드럽고 때론 격하게 몰아치면서도 이 곡 자체의 격조를 한껏 높였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데, 까간은 바로 이러한 스승의 카멜레온같은 유려한 변화와 더불어 자신만의 농익은 해석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활은 아주 강렬하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된 음표들 뿐만 아니라 이를 연결하는 부분에까지 섬세하게 감정이 들어차있다고 해야 할까요...지나치게 격렬해지는 부분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억제하면서 이를 섬세하고 분명한 핑거링과 운궁을 통하여 풀어내는데, 그렇다고 절대 답답한 연주가 아닙니다. 차이꼽스끼가 말하고자 하는 서정성, 개인적인 것들과 러시아적인 것들이 이렇게 섬세하고 격조있는 연주 속에서 뚜렷하고 또한 강한 개성으로 표출됩니다.
카히제가 이끄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반주 역시 거칠음보다는 절제되고 서정적인 가운데서 깊고 내면적인 힘을 가지고서 이 뛰어난 독주자를 아주 적절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2악장의 안단테 칸초네타(Canzzonetta)야 원래부터 아름답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1,3악장의 흐름을 ‘강렬하다’ 뿐만 아니라 ‘유려하고 아름답다’는 것까지 더하기란 어려운데, 올레그 까간은 다비드 오이스뜨라흐의 서정성과 격조감과 탄탄한 기본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또다른 카리스마를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빅또르 뜨레쨔꼬프는 두 차례 차이꼽스끼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첫 녹음은 최근 급부상한 젊은 신진 지휘자 파보 예르비(Paavo Jarvi)의 아버지인 네메 예르비(Neeme Jarvi)가 모스끄바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반주한 음반입니다. 아마도 1966년 그가 제 3 회 차이꼽스끼 콩쿨에서 1등상을 받고난 이후 녹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리 얀껠레비치 교수의 직설적이고도 감성이 풍부한 가르침이 완벽한 기교와 맞아떨어져 젊은 바이얼리니스트의 용맹스러운 질주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대체적으로 소련 출신의 젊은 신예 연주자들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기교는 뛰어나지만 기계적으로 일률적인 감정처리’의 대상이 아니라 나름 서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노력이 순간순간 엿보입니다. 즉, 완벽한 기계장치에 숨을 불어넣어 개성감을 표출하려 한다는 것이죠...
그의 활끝은 까간에 비해 매우 예리하고 야샤 하이페츠(Jasah Heifetz)와도 비견이 됩니다. 그래서 이 협주곡이 갖는 러시아적인 까칠까칠한 특성과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이 이 연주의 매력이며, 확실히 올레그 까간의 연주와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그는 올레그 까간보다 한 해 먼저 다시 한 번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블라지미르 페도세예프(Владимир Федосеев)와 그가 이끄는 소련 라디오와 TV 대편성 교향악단 - 일명 모스끄바 방송 교향악단 - 의 반주로 1985년에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도 중년에 접어들 시기 - 블라지미르 페도세예프의 소련 국립 방송 교향악단의 대단히 색채감 뚜렷하고 굴곡있는 반주 위에 빅또르 뜨레쨔꼬프는 앞서의 녹음에 비해 현저히 속도도 느리고 직설적임 보다는 분명한 개성과 서정성을 표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전의 녹음이 대나무를 쪼개듯 날카롭고 뚜렷함이 앞서는데 비해 후자의 녹음은 서정성을 하나가득 안은, 대단히 뚜렷하고 선이 굵고 두꺼운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기교와 질주감이 우선 앞서는 연주와 분명한 선을 제시해주는 감정적인 두께와 질감이 표출되는 연주는 차이가 많이 나며, 이것이 바로 뜨레쨔꼬프의 약 20여년 세월간의 변화가 아닐까...싶고 한 연주자의 표현능력의 성숙함이 바뀌어가는 것을 단적으로 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합니다.
섬세하고 내적인 감정의 표출이 강한 한 연주자와, 그와는 반대로 두툼하고 뚜렷한 선과 질감이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연주자...그들의 삶만큼 우리들에게 선사해주는 그들의 음악적 선물내용도 다른 것 같습니다.
올레그 까간의 연주는 LIVE CLASSICS OLE KAGAN EDITION 27 - LCL105로 CD화되어 있습니다...
빅또르 뜨레쨔꼬프의 연주는 역시 블라지미르 페도세예프 지휘 모스끄바 방송교향악단의 반주로 이루어진 1991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실황녹음이 DVD(ARTHAUS 102127)로 나와 있습니다.
= 2007.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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