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달빛 조각하는 변두리의 저녁
김명이
책 낱장은 비현실이고 지난날 학문으로 지금 요긴한 밥 구실을 할까 싶었다 과년한 딸은 불리한 면접을 뚫고 취직해 서울 변두리 방 한 칸 세 들었다
출근길 얼어있는 계단에 미끄러져 발을 다쳤다는 울먹임, 병가 내며 아프단 말보다 밥줄 끊기고 적금 못 부을까 봐 죄처럼 미안하다고만 했다
말렸지만 끌고 간 책상이 반의반 차지하고 구석에 밀어붙인 중고 전자피아노, 시린 등뼈 녹인 것인지 세상 물정 알라고 밀어낸 말들에 크레셴도 두들기다 멈춘 것인지
“왜 못 버려?” 유아 때 몰래 치운 낡은 핑크이불 기억을 되돌린다
아이에게도 허공에 걸린 눈빛이 있었다
딴엔 요령껏 세간이며 옷가지 배치하고 피하여 제 몸 눕고 세웠을 것, 입구부터 달라붙은 신발 냄새 세탁기만 빠져나온 셔츠 냄새 쪼개서 두 끼 때웠다는 배달음식 냄새들
짜고 단단한 슬픔은 방 한 칸 키워줄 능력 없는 어미 보란 듯 오후 내내 닦고 치우고 정리의 기술 확인한 후 앉을자리를 내주었다
보일러 기능 온돌로 잡아 돌리고 밥 한술 후루룩 뜨는 동안 찜질방처럼 뜨끈해지는 바닥, 한 팔 뻗으니 너의 볼 만질 수 있는 거리다
단칸방에서 구물구물 먹구름 한 장 덮던 날, 굼벵이처럼 말아 잠든 옛날도 다녀간다 이 정도에 질식하지 않을 거다 달빛 줍는 방 몇이나 되겠냐고 가만히 손을 쥐었다
책 하나만 믿게 한 나의 지옥,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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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이 시인의 [흰 달빛 조각하는 변두리의 저녁]을 읽을 때마다 “짜고 단단한 슬픔은 방 한 칸 키워줄 능력 없는 어미”라는 시구에서처럼, 이 세상의 삶의 의지가 꺾이고, 온몸의 맥이 풀린다. 숨어도 숨어도 가난의 옷자락이 보이고, 제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절약을 해도 가난의 함정은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소수의 부자들이 모든 부를 다 독점하고,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해낸다. 소위 흙수저는 금수저를 함부로 넘보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상류 사회로 가는 길은 진입금지의 장벽이 처져 있기 때문이다.
시가 밥이 될 수 있을까? 밥이 될 수 없는 시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줄 수가 있을까? 서울 변두리 월세방에 둥지를 튼 과년한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그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을까? 그토록 어렵고 힘든 취업의 관문을 통과한 것도 기적이지만, 그러나 그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어떻게 생활비를 아껴쓰고 ‘내집 마련’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엄마의 시쓰기는 딸아이의 지옥이 되고, 그 자책감과 안타까운 마음에 “달빛 줍는 방이 몇이나 되겠냐고” 딸아이의 손을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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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전투이고, 가난이란 총과 칼도 없이 맨몸으로 싸우는 것과도 같다. 가난한 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그 가난 속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것은 천만 분의 일의 가능성도 없다.
나를 버리고 끊임없이 ‘사랑의 실천’으로 그가 가진 열정과 경제적 능력을 모조리 다 자기 자신의 이웃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알몸의 승려들처럼, 아니, 기부천사--삭월세방의 김밥집 할머니처럼----!
아니, 보들레르처럼, 랭보처럼----!
아니, 천상병처럼, 소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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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 신체와 마음의 평화라고 할 수가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면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그 어떤 고통과 슬픔도 다 없어진다.
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짧은 한 순간처럼 보일지라도 건강한 신체와 마음의 평화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짧은 생, 5여 년 동안 수천 마리와 시도 때도 없이 교미를 하고, 날이면 날마다 일벌을 낳으며, 그 너덜너덜한 자궁으로 죽어가야 하는 여왕벌처럼----.
여왕벌은 하루에 1,500마리의 일벌을 낳고, 수펄(수벌) 이외에도 한평생 동안 수백만 마리의 일벌들을 낳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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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진짜 추한국민의 추한 도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령은 뇌가 없는 사대주의자이고, 모든 관리는 근친상간으로 허약해져 있다. 상벌제도는 모든 악당들이 다 장악해 있고, 국가의 부는 부정부패에 기초해 있다. 국가의 안전은 저출산--고령화에 기초해 있고, 과거의 역사는 노예민족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공평과 법은 사면복권으로 얼룩져 있고, 평화는 초전박살의 남북분단에 기초해 있다. 교육제도는 독서와 무관한 일제식 암기 위에 기초해 있고, 사색당쟁의 이전투구는 애국심에 기초해 있다. 부정부패 세계 제1위, 표절문학상(표절학술상) 수상 세계 제1위! 이것이 대한민국의 고귀함과 위대함의 진면목인 것이다.
숨어도 숨어도 노예민족의 더럽고 추한 옷자락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