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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바울의 동역자 아굴라 부부/ 사도행전 18: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4Bp96-CrR5A&t=23s
여러분에게 좋은 만남의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만남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리고 형제를 만나고 친구들을 만납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배우자를 만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는 죽어서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만남 중에 가장 중요한 만남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 사람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고 또 영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다리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요 14: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닥다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다리가 되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다리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목회자와의 만남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론 목회자에게 성도들과의 만남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만남이 나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마무리 단계에서 고린도에서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였고, 아굴라 부부는 역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일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함께 사역을 했고, 바울과 함께 살았습니다.
바울의 직업이 천막 만드는 일이었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유대 최고의 교사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인데,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교육과 관습을 알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세 가지를 물려줍니다. 지식과 유산 그리고 한 가지 기술입니다. 유다라는 유대인 랍비는 “그의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는 아들을 도둑놈이 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울타리가 잘 쳐진 포도원을 가진 사람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습성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이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아굴라 부부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였고 사도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많은 교회들이 그들에게 감사할 정도로 신앙과 생활에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설교는 초대교회의 모델이 될 만큼 신앙생활을 잘 했던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부부는 늘 함께 해야 합니다.
일본 동경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경기장 확장을 위해 부근에 지은 지 3년밖에 안 되는 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벗기는 도중에 꼬리 쪽에 못이 박혀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집주인에게 그 못을 언제 박았는지 물었더니, 집을 짓던 3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마뱀은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혀 움직이지도 못하였을 텐데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모두가 놀랐습니다. 인부들은 이상해서 공사를 중단하고 숨어서 도마뱀을 지켜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못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마뱀은 움직이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하루에 몇 번씩 먹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렇게 삼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했던 것입니다. 보기 드문 도마뱀의 우정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함께 오래 지내는 사람은 부부입니다. 자녀들은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지만 부부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합니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하나로 짝 지워주셨기 때문에 부부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못한 부부가 많습니다.
성경에 이 부부에 대한 기록이 여섯 번 나옵니다(행18:2, 18, 26,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그런데 그 여섯 번 모두 부부의 이름이 항상 함께 나옵니다. 한 마디로 이 부부는 모든 곳에 함께 있었고, 모든 일도 함께 했습니다. 이 부부는 영적으로도 하나였고, 마음이나 생각도 하나였으며, 생업도 함께 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즐거울 때만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어려운 고통의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살았습니다. 학자들은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 가문의 딸이었다고 봅니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는데 자유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후에 아굴라는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브리스길라와 결혼하였습니다. 아굴라는 천막제조와 가죽수공의 기술이 있었는데, 브리스길라 가문이 가지고 있는 돈과 배경을 연결시켜 상당한 사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렇게 이룬 성공을 바탕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하여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무조건 추방령을 내렸지만, 유대인 여자들은 노예나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로마에 살고 싶으면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나게 되면, 아굴라 부부는 그동안 로마에 모아 놓았던 재산을 잃고, 그 재산이 주었던 안락함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 남자였기 때문에 로마를 반드시 떠나야 했습니다. 반면에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때문에 로마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만 떠나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로마를 떠났습니다. 그들 부부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부부는 바울이 선교를 위해 에베소로 간다하니까 함께 떠났습니다. 그리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 바울이 로마로 가려 할 때, 이들 부부는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이 부부는 부부가 된 이후, 항상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함께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함께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부부상입니다.
늘 함께 하지 않는 부부는 아름다운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함께 하지 않는 부부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고전 7:5입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탄이 언제 부부를 시험합니까? 분방할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가 함께 하지 않을 때 사탄이 시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하려면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축복하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선시대 유교가 국가의 기본이념이 되면서 우리 조상님들은 유교적인 가치관 때문인지 이 부분이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男尊女卑(남존여비), 女必從夫(여필종부)’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존여비를 고상하게 말하면 ‘사회적 지위나 권리에 있어 남자가 여자보다 우대받는 일’입니다. 좀 원색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필종부’의 뜻은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가정의 질서 상 아내가 남편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모든 면에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하는 일이 모두 지혜롭고,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헌데 우리 조상님들은 여자가 내주장을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여 여자는 남자가 하는 일에 간섭도 못하게 했습니다. 부부관계는 평등한 것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의 관계였습니다. 여자의 재혼을 금지시켰고, 여자의 사회진출은 철저히 막았습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남존여비 여필종부’가 이상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어느 기업의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건배를 제의하며 “남존여비”라고 건배사를 하니 여자들 자리에서 야유가 터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사가 말하길, “남존여비란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의 비위(男存女脾)를 맞추기 위해 있다”라고 하니 박수가 터져 나왔답니다. 또 한 남자가 “저도 남존여비입니다”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남자의 존재 이유는 여자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여 여자들의 우레 같은 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요즘 사용하는 ‘여필종부’의 뜻은 ‘여자는 필히 종부세를 내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랍니다. 요즘 유행하는 유머입니다. 요즘은 남자들이 여자 눈치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조시대의 ‘남존여비 여필종부’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요즘 유행하는 ‘남존여비 여필종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일을 통해서 부부 간에는 서로 존중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이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발가락으로 하와를 만드셨다면 하와는 아담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머리카락으로 하와를 만드셨다면 하와는 아담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 존중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를 원하셔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고 봅니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고전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상대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말입니다. 상대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말은 상대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아굴라에게는 아가페 사랑이 실제가 된 것 같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 부부의 이름이 모두 여섯 번 나오는데,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름이 기록된 순서가 똑같지 않습니다. 부부의 이름 가운데 두 번은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네 번은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왜 그렇게 기록된 것일까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거기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행 18:2과 고전 16:19에는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 두 구절은 이 부부의 가정에 대해 말하는 구절입니다. 가정사는 남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18:18, 26 그리고 롬 16:3과 딤후 4:19에는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 네 구절은 이 부부가 감당했던 사역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사역적인 면에서는 아내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해 말씀할 때는 남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지만 사역에 대해 말씀할 때는 아내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존중 바다고 존중하는 부부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부부 사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는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헌신했습니다. 어떻게 그 부부의 헌신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바울이 그들을 동역자로 인정했습니다. 롬 16:3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분명히 그들을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에 헌신했으면 바울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이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인 중에 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마다 그날 새로 등록한 초신자 스무 명의 명단을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모든 시험을 이기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스펄전 목사님은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역자는 ‘어떤 일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습니다. 그 전에 사역했던 곳은 아덴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논쟁을 했지만 열매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 일로 바울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그 당시 바울은 매우 두렵고 심히 떨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으면 밤중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를 하셨을까요? 행 18:9-10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이 두렵고 떨릴 때에 주님은 바울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브리스릴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난 것은 바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서만 바울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였고 끝까지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의 1년 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을 도왔습니다. 이후 바울이 사역을 위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이 부부도 고린도의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복음을 위해 바울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만나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먼저 가서 바울의 로마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주 헌신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 증거가 롬 16:4입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매를 맞아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한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바울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바울에게는 귀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주님께 헌신된 부부라는 증거는 그들의 직업관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바울사도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책임지고 도왔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인색했기 때문에 아무도 바울의 사역을 돕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사역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바울을 책임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손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보충했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바울사도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바울과 같은 장막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바울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막을 만들어 돈을 벌어서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책임졌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 때문에 재정 걱정하지 않고 복음만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보통 전문직을 가지고 돈을 벌어가면서 자비량 선교사역을 하는 선교사를 ‘텐트 메이커(tent maker)’라고 하는데 바로 그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요즘은 무엇을 해도 먹고 살 수는 있는 시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직업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일하십니까? 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일하십니까? 일찍 돈을 벌어서 노후를 편하게 살려고 열심히 일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돈을 벌 수 있을 때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물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빠지고 나면 노를 저으려고 해도 저을 수 없습니다. 돈은 벌 수 있을 때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천막 만드는 직업으로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사자인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도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있어서 직업은 둘째였고, 첫째는 바울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세요, 그리고 번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복되고 보람된 삶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기 집을 하나님께 바쳐서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고전 16:19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이 부부는 바울에게는 훌륭한 동역자들이였고 주님이 보실 때는 충성된 일군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에 어떤 농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흔치 않는 일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여 그 중의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드릴까요?”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나중에 크면 결정하십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금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요!” 아내가 “아니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정해놓지 않았잖아요!”라고 반문하자 남편은 “아니요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 놈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 놈이 죽었단 말이요!” 사람의 본능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은 범사를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헌신된 부부였습니다.
3. 우리는 복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믿고 복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거룩한 삶이 가능합니다. 제가 3년 전에 “다니엘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거룩과 기준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룩’이란 히브리어로 ‘카도쉬’라는 말입니다. ‘분리’나 ‘구별’이라는 개념입니다. 거룩하다를 다른 말로하면 ‘구별되다’ 혹은 ‘분리되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불신자들과 분리된 삶,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이 말은 불신자와 구별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신자와 담을 쌓고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신자는 세상에서 불신자와 함께 살지만 불신자와 다른 기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이 왕을 섬기기 위해서 특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행동을 했습니다. 거룩한 행동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가 우상의 제단에 올라갔다왔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입맛이 기준이 되어 왕의 진미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써 구약의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왕의 진미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거룩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율법이 기준이 되어 거룩한 생활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성경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5:17을 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복음이라는 안경으로 봐야 합니다. 복음으로 볼 때 해도 되는 것이 있고 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슨 일을 볼 때 성경적이냐 아니냐로 나누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음적이냐 아니냐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을 율법의 기준으로 봤습니다. 율법으로 보니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를 거절했습니다. 이게 구약시대 유대인인 다니엘에게는 거룩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율법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합니까? 복음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것은 하고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안 하는 것,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제가 정확한 자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사다. 누가 제게 길이를 속이려고 합니다. 이때 제가 가진 자로 길이를 재면 저는 속지 않습니다. 제가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누가 무게를 속이려고 때, 제가 가진 저울로 무게를 재면 저는 절대 속지 않습니다. 정확한 자와 정확한 저울처럼 우리는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복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뒷부분을 보면 에베소에 아볼로라는 훌륭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 회당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볼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들의 말을 이겼습니다. 그만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복음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를 위하여 헌신된 삶을 삽니다. 아굴라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 폭군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룰과 기준을 아내에게 적어주고 아내가 그렇게 살라고 강요했습니다. 아내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남편의 룰대로 살려고 애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이 미워졌습니다.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몇 년 후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둘째 남편은 아주 인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기쁨으로 남편을 섬기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전 남편이 적어주었던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 적힌 쪽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쪽지에 적힌 대로 자신이 둘째 남편에게 그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남편이 그런 요구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둘째 남편을 사랑하니까 자발적으로 기쁘게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으로 충만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사랑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 부부는 늘 함께 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