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6
12월21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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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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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PMjxgMKld0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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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옛날 아인카림 엘리사벳 집의 마당에서 벌어진 일은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한 사건이었습니다.
고작 13~14살의 앳된 나자렛 산골소녀,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사촌 마리아가 친척이라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아이를 가져 슬슬 배가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엘리사벳의 상황도 절대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도 마리아보다 6개월 앞서 아기를 가졌는데,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그리고 수군거림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사벳 소식 들었는가? 노인네들이 참 대단하네 그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저 연세에 임신을 하다니!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한 만남, 난감한 만남,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슬픔과 서러움에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 사이에는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기구한 만남이 즉시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한 두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기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종종 체험하는 결코 원치 않는 만남, 부담 백배인 만남, 호의적이지 않은 만남도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면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직면하는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도 성령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견딜만한 현실, 이겨내고 극복할만한 현실로 변화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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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리스도 전해주기>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는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하여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옷을 벗을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고 나서 옷을 벗었을 때, 어떤 수녀 한 사람이 자신에게 더운 물을 가져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녀는 무척 피곤하였고, 방에서 주방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며, 비포장이기에 진흙이 발목까지 차올라오는 길을 가야만 했지만, 얼른 옷을 도로 입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성체가 들어있는 성합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성합을 들어서, 감실로 가져가라.” 처음엔 망설였지만, 성합 가까이 가서 성합에 손을 대자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에게 다가올 때 가지는 그런 사랑으로 수녀들을 대하여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네가 그들을 위해서 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잠시 후에 수녀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당신 아드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자 성령으로 가득 찼고 그 태중의 아이도 기뻐 뛰었습니다.
성모님의 이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했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던 당신의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해 당신도 임신한 몸이지만 먼길을 걸어 방문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임신하였다는 것은 본인에게는 기쁨일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험담거리도 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함께 잉태하게 된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직 요셉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먼저 엘리사벳을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수녀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나서 보게 된 것이 성합입니다. 성합 안엔 그리스도께서 담겨 계시고 사제들만이 감실에서 꺼내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가 미사 중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신자들에게 가서 나누어 주는 행위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에게 가서 성령님을 전해주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그 성령님의 불을 엘리사벳에게 옮겨 붙이십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불은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에게 옮아붙어 그가 기쁨으로 뜁니다. 세례를 받고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그 잉태된 아기는 바로 성령을 통하여 매일 새로워지는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을 포함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하느님을 세상에 오시게 하신 유일한 믿음의 통로이고, 성모님만이 참된 성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없으면 그래서 성체성사도 없고 성령의 은혜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사제들은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과 같이 성합에 든 성체를 옮겨 신자들에게 주며 그들 안에 성령님의 힘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께서 잉태하시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잉태한 모든 신자는 또한 성모님이나 미사 때의 사제가 성체를 통한 성령님을 전달해 주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제는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옮겨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곧 성령님이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성합을 들고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제의 모습과 같고,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성모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하고 온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임무를 완수했으니 성합을 다시 감실로 옮겨놓으라는 환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받는 사람 안에는 그 사랑을 통해 또 다른 그리스도께서 잉태하게 되시니 이웃을 위해 실천한 사랑은 곧 그 새롭게 잉태되시는 그리스도께 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녀들에게 한 행위가 모두 당신께 한 행위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성체를 전해 주는 행위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엘리사벳을 방문한 행위나, 더 완전하게는 성령님께서 성부로부터 아드님께 오시는 행위는 모두 ‘중재’라는 단어로 집약됩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미사 후에 우리 또한 성합을 모시고 이웃들에게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그 안에 든 그리스도를 전해줄 결심을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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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의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허턴의 신자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신부님의 가족들이 기뻐하며 환영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던 아버지 장발 루도비코, 한국의 정치인이었던 큰 아버지 장면 요한 총리, 춘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사촌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님이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어릴 때 사탕을 주셨던 할아버지, 휜 수염이 멋있으셨던 외할아버지, 용돈을 주셨던 외할머니, 그리운 부모님,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큰 누님, 작은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위안을 받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상교회, 정화교회, 천상교회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반가운 분들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 성가대 단장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평화신문에 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부부도 만났습니다.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께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악은 피하고 선을 베풀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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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하였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할 수 없었기에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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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선 두 이야기, 곧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관한 보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엘리사벳(루카 1,41.44 참조)과 마리아의 잉태 사실(1,42 참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두 이야기들을 보충하고 있습니다.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1장 42절과 45절의 ‘복 선언’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절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의 아기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마리아께서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으시는 까닭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28.30 참조).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그 아기를 낳으실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있으며, 복 선언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 대한 순종을 드러냅니다.
엘리사벳의 두 번째 복 선언은 마리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음을 전제합니다(1,38; 8,21 참조). 마리아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매우 대조됩니다.
1장 45절의 두 번째 복 선언은 2인칭(‘당신’)으로 사용된 첫 번째 복 선언과는 달리 3인칭(‘믿으신 분’) 주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서 저자는 축복의 대상이 마리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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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신앙은 시작이고 사랑은 마침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를 듣고 몹시 당황하였지만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산골 마을을 찾아간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성모님이 방문한 유다 산골의 이 작은 마을을 성경학자들은 "아인카림"이라는 마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들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이 마을에서 유명한 어머니가 될 두 여인이 운명적으로 만나고 있지요.
지금 그 곳에는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집이라고 추측이 되는 동굴이 보존되어 있고 성모 마리아 방문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으며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을 기념한 대형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곳에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엘리사벳의 찬송과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확인하며 감격에 넘쳐 '마니피캇'을 노래하였습니다.
그 마니피캇이 성당 담에 41개국의 언어로 쓰여져 붙어있지요. 물론 우리나라 말의 마니피캇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1,39-40)
복음에서는 마치 옆 동네를 방문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성모님이 계시던 나자렛에서 이 아인카림까지는 130Km가 넘는 대단히 먼 거리였습니다.
서둘러 걸어가도 3~4일이 걸리는 곳이었으며 더군다나 산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지요. 성모님 같이 어린 여인이 가기에는 무척 험하고 먼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모 마리아는 이 험한 길을 서둘러 걸어가서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열 서너 살의 나이에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사건에 접한 마리아에게 어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런 일이 정말 자신에게 일어날 것인지, 천사의 예고는 사실인지, 장차 일어날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인간적인 갈등과 두려움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런 인간적인 갈등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는 구체적인 표징을 들어 설명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6-37)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대답하지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가 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표징을 확인하고 싶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끼리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아직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자마자 이렇게 큰 소리로 찬미하지요.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된 이라고 확신에 차서 외치는 엘리사벳의 반응을 접한 마리아는 감격에 겨워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바칩니다. 그들의 애타는 기다림이 성취된 것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지요. 마리아는 이곳에서 삼 개월 가량을 머무르다가 나자렛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우리 삶에서 다음 두 가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주님의 탄생이 예고된 다음 바로 유다 산골에 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문안 인사를 드리는데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심은 서로 간에 상승 작용을 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공동체가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눔으로써 믿음이 깊어지고 성장하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동체를 벗어나 세속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그 순간 다 무너져 버립니다. 관심이 다른 사람과의 어울림은 신심을 흩어지게 하고 세속에 물들게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고, 신심 있는 사람들은 신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신자 중에서도 복음적인 사람들끼리 모이는가 하면, 반대로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를 좋아하고 비판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이것이 우리 부족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남에 대한 험담은 삼가십시오. 험담은 자신의 신심을 갉아먹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부, 대모의 만남도 참 중요하지요.
대부, 대모를 잘못 만나서 냉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모가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남에 대해서 험담만을 일삼으면 그 신앙의 자녀 또한 같이 닮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모범은 대부모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간에 신앙이 성장하고 깊어지며 하느님 안에서 기쁨으로 상통하는 관계가 되도록 각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오늘 복음에서 묵상할 것은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태도입니다. 늙어서 아이를 갖지 못한 나이였던 엘리사벳은 기껏 열 서너 살이었던 마리아를 만나서 이렇게 겸손되이 외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1,43-44)
인간적인 혈육 관계나 나이를 떠나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 대한 공경과 칭송이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셨을 때는 이와 반대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으셨지요.
신심이 없는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봉사자들을 인간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볼 줄 압니다. 그리하여 본인의 신심도 함께 상승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수녀에 대해 말이 많은 안타까운 신자들의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본인들의 신심이 자라지 못하고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혀 고민하고 방황하는 모습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의 신심이 자라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명하는 겸손한 마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사건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늙은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밸 수 있었겠습니까? 또 동정녀가 어떻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드러나는 사건이지요. 우리 또한 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고 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놀라운 기적을 불러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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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동병상련>
차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서로 똑같은 아픔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의 위로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프랑스 본당에서 학생신부로 머무르던 시절, 밥 을 차려먹기가 귀찮으면 본당 앞 광장에 나가 무료급식을 타 먹었습니다.
여지껏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보람을 느껴 보긴 했지만, 줄을 서서 누군가로부터 얻어 먹는다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한번은 배식을 받아서 어느 거지 옆에 앉아서 먹고 있는데, 그 거지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만 한다는 말이, ‘너 거지 아니지’였습니다.
허름하고 초라한 그 모습이 비슷해도 한눈에 알아보는 모양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둘 다 아기를 가졌다는 점도 공통점이겠지만, 한 사람은 처녀로서 아기를 가진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돌계집 소리를 들으며 주눅들다가 아기를 가진 것이기에 그 어려움에서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둘 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 뜻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한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서로의 만남 안에서 설레는 기쁨에 뛰었을 것이고, 뱃속에 든 아기까지도 뛰놀았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이들과 한마음이 될 때 예수님을 향한 기다림이 더욱 설레고 절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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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늦둥이를 잉태한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얼마나 따스한 위로입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공통된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일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런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기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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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엄마와 뱃속 아기>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엄마와 뱃속 아기>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험한 산길을 나섭니다
엄마가 나섰으니
뱃속 아기는
따를 수밖에 없었겠죠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 때문에
엄마가 길을 나섰으니까요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낯선 거친 길을 나섭니다
엄마도 뱃속 아기도
얼마나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까요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와 함께 엄마는
기쁨 나누러 나섰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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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합동판공성사의 일정이 끝났지만 여전히 고해소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맑고 밝은 영혼들을 만나게 되면 피로를 잊게 됩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도구 역할을 하면서 신부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에 주님의 자비를 전달할 수 있음이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런 기쁨은 언제라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길을 떠납니다. 서둘러 떠났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었으면 지체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루카1,36).는 천사의 말 한마디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경청의 결과입니다. 손과 발을 서둘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서둘러 떠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마리아가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는 행복합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12,2)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고, 제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믿는 만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유혹하며 손짓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며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품고 사셨던 성모마리아와 함께 주님만이 내 행복의 전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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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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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가의 연인처럼>
오늘 독서는 아가이고 연인을 만나는 설렘을 묘사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주님의 오심을 코앞에 둔 지금,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복음을 듣는 오늘 이 아가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전례는 왜 아가를 오늘 독서로 배치했을까요?
짐작컨대 그것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다림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러해야 하지 않은지 일깨우기 위함이고, 우리의 기다림과 만남의 실제는 어떤지 성찰케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주님을 사랑하는 기다림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연인의 기다림만큼 설레입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열등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사랑하기에 만나고 싶고 기다리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거나 저의 사랑이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보고 하느님 사랑하지 않냐고 물으면 단언컨대 지체함 없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모든 것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같고,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서 저는 마르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열등감은 마리아에 대한 마르타의 열등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감히 얘기한다면 저의 열등감은 보통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고 성령을 모시지 못한 자의 열등감입니다.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느님의 일도 열정적으로 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일이 별개가 아니고, 하느님 사랑에서 하느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인들, 성모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충만한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아가의 연인처럼 맞이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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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우정>
- 주님과 나, 나와 너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시편1과 3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론입니다. 따로와 함께의 여정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생각납니다. 반가운 이들의 방문을 대할 때 드렸던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방문 축일입니다’라는 덕담이 생각납니다.
참 좋은 도반들의 방문은 빈손으로와도 구원의 방문처럼 반갑고 흡사 도반들의 방문 축일처럼 즐겁고 기쁩니다. 어제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그랬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은 강론 주제로 사용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짧기도 하지만 때로 길게 여겨지는 삶의 외롭고 쓸쓸한 여정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 도반이요 도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도반의 예를 들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영적 도반인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영적 도반이 주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 도반과는 달리 인생 여정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는 동반자同伴者이자 반려자伴侶者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영적 우정이 참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우정의 도반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는 애인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감미로운 에로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간의 열렬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간의 사랑으로,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견주어 해석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대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신비가들은 주님과 우리의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영원한 연인처럼 마치 에로스적 사랑의 감미로 체험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부 베네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마리말49)
참으로 잘 성숙한 사랑의 수도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면 정결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아가서중 창가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황홀해 보이는 지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 본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요,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세상에 이런 이성간 연정戀情의 사랑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쓰다보면 오늘 제 1독서뿐 아니라 아가서 전체를 써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우리 영혼들이 오매불망 그리워 찾아 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 주님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우리 영혼이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 오시는 대림시기 우리 주님,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도반이자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영적 우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영적 도반인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사랑의 만남은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두분간의 영적우정에 앞서 전제되는 주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마리아가 곤궁중에 찾아 나선 영적 도반 엘리사벳입니다. 여러분도 마음 답답할 때 언제나 위로와 격려를 찾아 나설 도반은 있는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동시에 영원한 영적 도반인 태중의 세례자 요한과 태중의 예수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감격에 벅차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기쁨의 환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의 십년 체증이 활 풀렸을 것입니다.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기쁨에 넘처 덩실덩실 춤추던 다윗이 생각납니다. 마리아야 말로 주님을 모신 계약궤와 같습니다. 바로 이 앞에서 다윗처럼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요한이 기쁨에 겨워 뛰놀았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인 주님 안에서 이렇게 만남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큰 위로와 격려의 구원을 받았을 것이며, 둘간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졌을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영적 우정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간의 영적 우정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 그분을 ‘성인’으로, ‘위대한 영성생활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분을 자주 방문하여 만날 때 마다 나는 그분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덕성이 함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분은 좋은 유머 감각을 지닌 분이고 맑고 밝은 분이며 아주 살아 있는 분이다. 그분은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대화도 잘 따라 잡으신다. 나는 그분의 명석明晳함에 감동한다. 그분은 ‘큰 분(a great man)이시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영적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대림2부, 다섯 번째 12월21일 M후렴 “오! 샛별이여(O oriens)”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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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1,39)
'엘리사벳의 기쁨!'
오늘 복음(루카1,39-45)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소식, 곧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루카1,36)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유다 산악 지방의 한 고을로 갑니다. 그 고을이 바로 나자렛에서 100키로 정도, 예루살렘에서는 8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아인 카렘(Ein Karem)'이라는 곳입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2-44)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이 만납니다.
아이를 못낳는 석녀(石女)에서 해방된 엘리사벳, 주님의 어머니를 만난 엘리사벳의 기쁨을 묵상해 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그의 태 안에 있는 아기도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만날 때마다 엘리사벳처럼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신자들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큽니다. 집집마다 성모님 상을 가지고 있고, 성당 곳곳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군단인 레지오 마리애 회원도 참 많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묵상하는 기도인 묵주기도도 많이 바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신앙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기뻐 즐거워하면서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시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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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KDN6WNZW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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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2.21.수."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하느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탄생소식으로
오고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이 대림시기가
서로를 아름답게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하느님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행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믿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믿음도 함께 나누어야
더욱 풍요롭습니다.
참된 만남은
반드시 하느님을
동반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진실한 만남을 통해
드러납니다.
진실한 만남은
믿음을 향합니다.
서로의 믿음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믿음이라는 공통분모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나눔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찬미임을 믿습니다.
오시는 그분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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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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