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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기독론 #빌헬무스브라켈
빌헬무스 브라켈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경배하되 그분의 인성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신성이신 성자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당신 자신을 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것이라 하셨고,제자들을 비롯하여 그분께 치유받은 모든 병자들이 그분의 인성을 향해 주님이라 부르고 경배를 드렸으므로,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달할수가 없다는것이 성경적으로 자명하다.반면에 빌헬무스의 주장은 일면 교황주의자들의 성상/천사/성인숭배 사상과 별반 다르지않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배하는것이 우상숭배가 되지않으려면 그분의 인성이 제한적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하신 창조주이셔야만 한다.
원죄는 남자의 씨에만 내재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여자의 씨에도 내재되어있다.오히려 범죄의 순서로는 하와가 아담보다 앞서므로 여자에게 원죄가 더 각인되어있어야 할것이다.따라서 이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의 잉태는 여자의 씨 또는 여자의 인성과도 무관하셔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성육신전에 사람으로 존재하셨어야만 한다.논외로,남자의 씨에 원죄가 있다는 것은 영혼창조설을 반박하고 영혼유전을 증거한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5.#원죄 (2)
It is a corruption of all nature-- an inherited depravity which even infects small infants in their mother's womb, and the root which produces in man every sort of sin.
이는 인간의 모든 본성이 부패한 것입니다. 여자의 태 중에서 임신이 되는 때부터 부패함에 감염되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종류의 죄를 양산하는 근원입니다.
여자의 몸에 임신된 태아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생존과 생육을 위해 어미에게 입덧을 비롯한 여러 고통을 안겨준다. 출산시에는 어미에게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수시간 동안 일으키며 심지어는 어미의 생명을 꺼뜨리기도 한다. 때로는 출산 전에 어미의 뱃속에서, 출산 시에 어미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생명을 잃기도 한다. 영혼창조설에 따른다면, 과연 여자가 잉태하는 어느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혼이 부여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혼은 온전히 선한 상태일텐데, 어느 잉태 단계에서 원죄에 감염되어 태아의 씨와 연합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원죄는 영혼이 아니라 오로지 육체에만 해당된다는 것인가.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못한 버림받은 자들의 영혼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구원받지 못하게 버리시려고 선한 영혼들을 그렇게 많이 창조하셨다는 것인가. 임신한 여자를 가장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은 다름아닌 시어미다. 시어미는 자기도 수십년 전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도리어 자기 며느리에게는 너만 그렇게 임신한 것으로 유세 떠는것 아니고 자기도 그렇고 다른 여자들도 다 겪는 일이라면서 며느리의 임신과 출산의 고충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모순적인 것은, 같은 여자끼리 서로 위해줘도 모자라는 판에, 이러한 시어미의 며느리 구박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시어미에게 구박받는 임신한 며느리도 나중에 시어미가 되면 똑같이 며느리를 구박하게 된다.
어미의 뱃속에서 나온 갓난아기에게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생체욕구에 따라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만족되지 않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면서 끊임없이 어미를 보채며 힘들게 한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어미는 분명 아기의 생육욕구를 채워주는 본성적이고 직접적이며 일차적인 능력과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귀찮아하고 꺼려하며 남편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어미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갓난아기를 벗어난 어린아이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엄마 아빠에게 떼를 쓰고 반항하며 투정부리는 짓이다. 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어서, 자기가 어떻게 악을 쓰고 떼를 쓰며 투정을 부려야 엄마 아빠가 들어주는지를 알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의 어린 새끼들이 울부짖는 것에는 측은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사람의 어린 아이들이 울부짖는 것에는 본성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가지며 짜증을 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들은 애완동물은 몇마리가 됐건 혼자 키워도 기쁨과 즐거움만을 가지는 반면에, 엄마로서 영유아 자녀를 혼자 맡아 양육하게 되면 도박에서나 쓰는 ‘독박’육아란 저주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쓴다. 여자가 둘째 자녀를 낳게 되면 첫째 자녀는 한없이 연약한 갓난아기인 동생을 향해 끝모를 질투를 하고 엄마 아빠가 없을 때에는 몰래 괴롭히기도 하며 이제는 벗어버려야 하는 갓난아기의 행위를 일부러 하기도 하면서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한다.
통상적으로 미성년자,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성인보다는 때묻지 않고 순수할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는 고의보다는 실수나 불가피한 상황에 의한 것으로 참작하는 경향이 있어서 소위 촉법이란 제도로써 양형기준을 현저히 낮추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법제도의 취지와는 달리, 이를 악용해서 일부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청소년들의 범죄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의 생명 보호를 위해서 학교 주변 도로에서의 차량 사고에 대한 책임을 강화한 민식이 법이 제정되자마자 적지 않은 초등학생들이 일부러 지나가는 차량에 몸을 던져 사고를 유발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 현실이다. 어린이의 인권을 매우 높고 귀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여섯살짜리 아이가 자기 유치원 반 교사에게 육두문자 쌍욕을 하기도 하고, 자기 잘못으로 부모가 매를 들려고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문화가 되어버렸다. 이로 미루어볼때, 선지자 엘리사가 자신을 향해 대머리라고 놀리면서 쫓아온 이스라엘 왕국의 벧엘 마을 아이들을 저주해서 숲에서 나온 암콤 두 마리에 의해 아이들 중 42명이 찢겨죽게 한 것은 엘리사가 잔학한 냉혈한인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 지역은 어린 아이들 조차도 단번에 죽임을 당해도 될만큼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부도 했었다는 것과,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결코 면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들은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해도 남자와는 달리 자기보다 조건이 떨어지는 남자와는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키와 체격에서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우월한 여자운동선수들도 자기보다 작고 왜소한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반면에, 자기보다 키가 크고 듬직한 체격의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야근이나 당직이나 육체노동이나 현장직 같은 힘들고 고된 업무는 으레 남자들이 전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맡으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여읠 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여의게 될 때에는 슬픔보다는 생계에 대한 막막함을 더 크게 느끼곤 한다. 자식을 낳게 되면 딸도 물론 사랑스럽고 좋지만서도 무의식중에 그래도 아들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자들은 10대 초반에 시작된 초경부터 50대 정도에 찾아오는 폐경까지 3,40여년 동안 거의 매달 며칠씩 생리통에 시달리면서도 학업에서나 업무에서나 남자들과 비등하거나 앞지르는 성과를 내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만약 여자들에게 생리의 고통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만큼 하와처럼 남편을 비롯한 남자를 무시하고 하대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혼을 앞둔 여자들끼리의 모임에서 남자에게 프로포즈는 받았는지, 결혼예물은 무엇인지, 신혼 집은 얼마에 몇 평인지, 남자의 직업은 무엇이고 재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고 급을 매긴다는 것은 이미 예능 소재로도 나올만큼 널리 알려졌다. 결혼한 여자들끼리의 모임에서 서로가 입은 옷, 가방, 지갑, 장신구, 구두 등을 가지고 가격이 얼만지 진품인지 아닌지 등등으로 담화를 나누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의 여자 악역 두 명은 아예 대놓고 미인계로써 재벌집 남자와 결혼해서 부유한 마나님으로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어떤 조직이건간에 남자들간의 대립과 갈등보다는 여자들간의 그것이 훨씬 더 교묘하고 악의적이라는 것은 간호사들간의 태움문화만을 봐도 명확하다. 온라인 영상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들이 하나 같이 노출증이 의심될 정도로 나체 수준의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남자 이용자들을 의식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헬스장에서 노출이 심한 운동복을 입고 운동하는 여자들도 이미 예능에서 패러디 된 지 오래다. 여자들은 자기들의 허영을 만족시켜줄만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을 가지기 위해서 스스럼없이 몸을 드러내어 남자들의 음욕을 불러일으킨다.
남자는 태어나서부터 죽을때까지 한순간도 음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음욕덩어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 가장 먼저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데다가, 아담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보다 그리스도께서 짝지어주신 하와를 더욱 사랑하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여자를 향한 음욕을 원죄의 징벌로서 받게 되었고, 아담의 후예들인 남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태생적으로 음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정신지체를 앓고 있으나 천재성을 가진 변호사 이야기를 다룬 어떤 드라마로 인해서 한 때 온라인에서는 중증 정신지체자와 그 가족들의 고충과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퍼지게 되었다. 정신지체자가 남자인 경우에는, 사고수준은 영유아기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점점 자라게 되어 2차 성징이 오게 되면 성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발생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심지어 엄마나 누나나 여동생도 알아보지 못하고 성행위를 하려고 달려든다고 한다. 지성적으로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엄마나 누나나 여동생이 여자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오로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 했다는 것에서 유일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중증 정신지체 남성의 무분별한 성충동이야말로 원죄로 인한 타락과 부패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정신지체 남성을 화학적 거세하는 것이 최선이다. 엄마 젖을 떼는 시기가 된 어린 남자아이들이 여전히 엄마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심리의 깊은 내면에는 엄마를 통해서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데에 있다. 이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 아담처럼 부끄러워하고 행여나 자기들의 엄마가 신체를 노출하게 되면 얼른 가리라고 말한다. 남자의 음욕은 정신과 의식이 깨어있을 때 뿐만 아니라 잠자는 동안 무의식의 상태에서 꿈으로도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몽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율법에서 남자의 몽정도 죄로 규정하시고 그에 따른 정결례도 명령하셨는데, 이는 무의식 중에 품은 음욕이 원죄에 기반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기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어떻게든 여자의 허영을 채워주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신사적이라고 하는, 여자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며 헌신하는 남자들의 심리 기저에는 음욕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하필이면 성기의 귀두를 덮고 있는 피부를 잘라내는 할례를 명령하신 것은, 주님께서 음욕이 상징하는 백성들의 원죄를 끊어버리셨다는 것과, 주님의 백성 중 남자성도들은 특별히 원죄를 상징하는 음욕에 빠져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확장한 것으로서 비록 할례와 같은 육체의 극심한 고통은 없다 하더라도 영으로는 죄악의 피부를 잘라냄으로써 마치 할례와 같은 극심한 내적 고통을 수반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여자에 의해 자행되는 원죄의 영향으로는 목사안수를 받는 것,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 남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목사에게 성경의 궁금한 내용을 물어보는 것, 남편을 뒤로하고 자기가 가정예배를 주관하는 것, 목사의 아내가 목사인 남편의 설교를 판단하고 지적하는 것,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것 등이 있다. 남자에 의해 자행되는 원죄의 영향으로는 여자 교인을 상대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 여자 교인과의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지는 것 등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자들보다 나서지 말 것과 남자들은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할 것을 가르쳤었던 것이다.
#20220131
#요한계시록 #Revelation 1:1
요한啓示錄
Revelation Apocalypsis ΑΠΟΚΑΛΥΨΙΣ
第 一 章
標題와 人事
1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速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天使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from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Apocalypsis Jesu Christi, quam dedit illi Deus palam facere servis suis, quæ oportet fieri cito : et significavit, mittens per angelum suum servo suo Joanni,
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ἣν ἔδωκεν αὐτῷ ὁ Θεός, δεῖξαι τοῖς δούλοις αὐτοῦ ἃ δεῖ γενέσθαι ἐν τάχει, καὶ ἐσήμανεν ἀποστείλας διὰ τοῦ ἀγγέλου αὐτοῦ, τῷ δούλῳ αὐτοῦ Ἰωάνῃ,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므로 계시 또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보다 권위와 권세와 권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도 당신의 모든 능력과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 하셨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의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영원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창조와 섭리 사역을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영원 전부터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셔서만 진행하시므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공유하시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성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지 않은 그 어떤 계시나 가르침이나 교회와 성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만 하나님의 속히 이루실 일들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시기 전에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을 통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시려고 계시해오셨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성취되어 왔으므로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10131
#민수기 #Numbers 33:1-49
애굽에서 모압까지
1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는 사역과 인생의 마무리를 앞두고 지난 40년 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의 노고를 과장하고 실책은 축소하며 어느 정도의 자기 자랑을 하겠지만, 모세는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치하도 남기지 않고 어찌 보면 아주 건조하다싶을 정도로 이동 경로만 간단히 기록한다. 이는 지난 40년 간의 광야 생활과 백성의 인도는 비록 여호와의 강권하심과 명령으로 한 것이지만서도 모세 자신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지어 야곱보다도 더 험악하고 험난한 세월이었으며 백성들에게서는 그 어떤 순종이나 선행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독한 말과 원망과 불평과 비방과 거역과 불순종만 있었던 부끄러운 시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세는 성령에 감동되어서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이 그저 허구적인 신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적인 역사임을 가르쳐준다. 족보나 지역이나 숫자 등이 나열된 성경의 기록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3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던 달을 기념하여 정월로 삼으셨다. 정월 14일에는 백성들로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그 날에 애굽의 모든 사람과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제물처럼 찢어죽이셨다. 여호와께서 열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신들을 벌하셨다는 것은 애굽의 신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섬기는 애굽의 허망한 종교심을 무너뜨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어린 양을 잡아 허겁지겁 구워먹은 후 무교병 반죽 덩어리를 둘러메고 급하게 다음 날 15일에 애굽을 빠져 나왔다.
5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치고
6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치고
7 에담을 떠나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을 치고
8 하히롯 앞을 떠나 광야를 바라보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마라에 진을 치고
9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
백성들은 마라에서의 먹지 못할 쓴 물 때문에 모세와 여호와를 원망했고, 모세는 여호와의 지시대로 나무가지 하나를 던져 물의 쓴 것을 없앴다. 백성들은 조금만 더 갈증을 참았더라면 엘림의 풍부한 샘물과 시원한 종려 그늘을 만끽할 수 있었으나 불만이 물의 끓음 같아서 참된 기쁨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다.
10 엘림을 떠나 홍해 가에 진을 치고
11 홍해 가를 떠나 신 광야에 진을 치고
신 광야에 도착한 때는 애굽을 나온지 한 달 째인 2월 15일이었다. 여기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다며 차라리 애굽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한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겠다고 하시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신다.
12 신 광야를 떠나
13 돕가에 진을 치고 돕가를 떠나 알루스에 진을 치고
14 알루스를 떠나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더라
르비딤에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위협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호렙 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다. 백성들이 여호와와 다투고 감히 여호와를 시험하였기 때문에 그 지역은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렸다.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쳐 물을 낸 호렙 산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르비딤에서 아말렉이 공격을 해왔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동안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서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양 손을 들어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였다. 아말렉을 물리친 후에 모세는 제단을 쌓고 여호와닛시라 칭하였다.
15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진을 치고
3개월이 지난 4월에 백성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흑운과 나팔 소리로 나타나셔서 백성들을 사망의 두려움에 떨게하셨다.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자기들 대신 여호와를 뵐 것을 간청하였고 모세는 자기도 심히 두려웠으나 호로 담대히 여호와를 뵈러 시내 산에 올라갔다. 여호와께서는 장장 40일 동안 모세와 독대하시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과 규례들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새 모세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는 핑계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게 해서 우상숭배를 저지르고, 이에 모세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돌판을 부수고 금송아지를 갈아 백성들로 마시게 하고 레위 인들을 시켜서 범죄한 백성 3천 명을 죽이게 하였다.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 올라 40일 동안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받아가지고 내려왔다. 백성들은 모세의 지시대로 성막을 짓고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들을 세웠으며 지파별로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수를 세었다. 그들은 시내 광야에서 두번째 유월절을 지킬 때까지 머무르고 2년 2월 20일에 구름의 인도를 받아 진영을 갖춰 떠났다.
16 시내 광야를 떠나 기브롯핫다아와에 진을 치고
백성들은 다베라에서 악한 말로 모세와 여호와를 원망하다가 여호와의 불로 징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다시 먹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신세 한탄 하다가 30일 동안 메추라기만 먹는 징벌을 받았다.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신나게 메추라기를 쳐먹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장사지낸 바 됨으로써 그 지역 이름을 기브롯핫다아와라 칭하였다.
17 기브롯핫다아와를 떠나 하세롯에 진을 치고
아마도 하세롯에서 미리암이 아론을 끌어들여 모세가 구스 여인과 재혼한 것을 비방하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전신 나병으로 징벌을 받아 진영 밖에서 7일 간 머무는 수치를 당하였다.
18 하세롯을 떠나 릿마에 진을 치고
하세롯을 떠난 백성은 중간에 바란 광야에 머무르며 여호와의 명을 따라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으나 열 두 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악평을 듣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를 거부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도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
19 릿마를 떠나 림몬베레스에 진을 치고
20 림몬베레스를 떠나 립나에 진을 치고
21 립나를 떠나 릿사에 진을 치고
22 릿사를 떠나 그헬라다에 진을 치고
23 그헬라다를 떠나 세벨 산에 진을 치고
24 세벨 산을 떠나 하라다에 진을 치고
25 하라다를 떠나 막헬롯에 진을 치고
26 막헬롯을 떠나 다핫에 진을 치고
27 다핫을 떠나 데라에 진을 치고
28 데라를 떠나 밋가에 진을 치고
29 밋가를 떠나 하스모나에 진을 치고
30 하스모나를 떠나 모세롯에 진을 치고
31 모세롯을 떠나 브네야아간에 진을 치고
32 브네야아간을 떠나 홀하깃갓에 진을 치고
33 홀하깃갓을 떠나 욧바다에 진을 치고
34 욧바다를 떠나 아브로나에 진을 치고
35 아브로나를 떠나 에시온게벨에 진을 치고
36 에시온게벨을 떠나 신 광야 곧 가데스에 진을 치고
애굽을 나온지 40년 1월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어 장사되었다. 백성들은 40년이 지나 세대 교체가 되었어도 자기들의 부모의 패역함을 그대로 가지고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겁박하였다. 모세도 화를 참지 못하고 반석에 명령을 내라는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 치는 불순종을 저지름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벌을 받게 된다. 40년 전 르비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백성들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므리바라고 칭하였다.
37 가데스를 떠나 에돔 땅 변경의 호르 산에 진을 쳤더라
38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39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 세였더라
아론은 40년 동안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마치고 아들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물려주고 호르 산에서 123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에돔이 왕도로 지나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40 가나안 땅 남방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더라
아랏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몇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가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진멸되었고 그 지역은 호르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41 그들이 호르 산을 떠나 살모나에 진을 치고
42 살모나를 떠나 부논에 진을 치고
아마도 백성들이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척박하고 험난한 경로 때문에 악담하다가 불뱀으로 징벌을 당한 곳이 부논이었던 것 같다.
43 부논을 떠나 오봇에 진을 치고
44 오봇을 떠나 모압 변경 이예아바림에 진을 치고
45 이임을 떠나 디본갓에 진을 치고
46 디본갓을 떠나 알몬디블라다임에 진을 치고
47 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48 아바림 산을 떠나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49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의 진영이 벧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싯딤에 이르렀더라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무찌르고 요단 강 동쪽을 점령하였다. 모압 왕 발락이 술사 발람을 사주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발람의 흉계대로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수령들을 음행에 빠뜨리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결국에는 이스라엘에게 처녀 3만 2천 명을 제외하고 진멸을 당하게 된다.
#20200131
#창세기 #Genesis 27장.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34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5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37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41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사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음식에 야곱에게 넘겨버린 망령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아버지 이삭의 하늘의 축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적어도 그의 잘못은 없다. 그는 아버지의 축복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이삭의 지시를 따라 들에 나가서 짐승을 사냥해 와서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바치고 축복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고 그대로 이행했다. 도리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은 리브가였고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의 속임수를 따라 형 에서의 받을 축복을 가로채었다. 따라서 이 일에 대해서는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그 축복이 속임수에 따른 잘못된 것이니 취소하고 자기에게 다시 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마치 에서에게 축복을 주지 못하게 하려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삭이 에서에게 지시한 것을 마침 리브가가 우연히 엿듣게 되어 야곱과 함께 속임수를 계획 실행하였고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나가자 마자 곧 에서가 사냥감을 들고 장막에 들어온다. 사냥감이 조금만 더 일찍 잡혔더라면 야곱이 축복 받는 도중이라도 저지할 수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사냥감은 그 시간에 에서에게 잡힌 것이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의 말을 듣고 그 모든 자초지종을 파악하였어도 자기 축복을 거두지도 취소하지도 않았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바로 이 부분을 이삭의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는데, 아더 핑크 선생은 이삭이 비록 에서를 더 사랑하였어도 이 일의 경과를 통해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떠올리며 믿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삭으로서도 감히 아내와 아들이 자기를 속인 것이 한없이 괘씸했겠지만서도 속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에서에 대한 특별한 애정보다도 하나님의 계시를 더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이 그들이 나기 전부터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 전 선택과 불변의 섭리에 있다 하더라도 에서가 축복을 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패역한 인간들이 자기들 지성으로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은 선택하셔서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가로채도록 섭리하신 것인데 왜 그 책임을 에서에게 지우냐는 것이다. 우리 중에 아직 이 신비를 접하지 못한 어린 신자들도 적잖이 혼동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우둔한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만의 신비이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이 허락하는 정도로만 이해하도록 해야 하며 그 이상의 것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믿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시지만 야곱이 구원 받은 것은 야곱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덕분이고 에서가 버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에서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는 이 축복에 대해서는 자기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이는 40년 동안의 인생 동안 장자의 명분과 같이 지속적으로 망령된 짓을 이어 온 결과 또는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에서가 한 그릇 음식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망령된 짓과 이삭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것을 한가지로 연관지어 가르치는 것이다.
장자의 명분에 이어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에서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광분하여 살기 등등하게 길길이 날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에서는 마치 의로운 아벨을 돌로 쳐죽인 형 가인과 같이 어떻게든 야곱을 죽이려는 생각에만 몰두하게 되어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준 아버지 이삭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패륜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야곱의 아들 중 레위와 시므이는 자기 여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분노에 휩싸여 한 족속을 몰살시켰다. 사사 입다는 자기의 경솔한 서원으로 외동딸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후에 에브라임 족속의 도발에 그 분노가 격발되어 4만 2천 명이라는 쉽볼렛 학살을 저지르고 최단 기간 사사로 다스리다 삶을 마감했다. 삼손은 고작 수수께끼 하나에 분노해서 결국 자기 아내 될 여자와 장인 될 어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이 이복 형 암논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계략을 써서 그를 쳐죽이고 만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이유없는 분노를 쏟은 유대인들은 결국 70여 년 후에 로마군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멸망 당하였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분노는 결국 자기를 점점 더 죄와 파멸의 늪으로 빠져들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힌 자들에게 쏟으신 분노는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절제하여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본받는다고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교회를 위한 거룩한 분노라 하여도 우리는 그 분노를 아무렇게나 표출해서는 안되며 교회 질서와 격식을 따라 경건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자 리브가는 그제서야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자기 말마따나 한 날에 두 아들 모두를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야곱을 자기 오라비 라반에게 며칠 동안만 피신시키려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20년 동안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하게 되었다. 불의한 방식으로 선한 결과를 내었다 한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한 것을 막판 뒤집기 하시듯이 선하게 만드신 것이고 당사자는 그 불의한 방식에 대한 댓가를 어떻게든 치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댓가는 마지막 최후 심판 때가 아니라 차라리 이 땅에서 받고 끝내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어떤 불의한 것이 떠오른다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회개함과 더불어 그 불의의 댓가로서의 책임은 될 수 있는대로 이 땅에서 최대한 지는 것이 유익하다.
이삭이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다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리브가는 자기가 저지른 속임수의 여파를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서 이방 헷 족속 며느리 핑계를 댄다. 물론 헷 족속 며느리들이 자기 보기에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서 그들을 끌어다 핑계대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차라리 리브가로서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가족 회의를 열어 이삭과 에서 앞에서 이 모든 것은 자기 소행이라 밝히고 용서를 구하며 이삭의 처분을 기다렸어야 하지 않나 생각 된다. 사실 남자에 비해서 여자가 직접적으로 잘못을 시인하지 못하는 성향은 첫 조상 하와에게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의 타고난 본성 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여자로서는 그것을 빌미로 자기 합리화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리어 그런 성향을 거슬러서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할수록 더욱 긍휼함을 입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