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월남전에 참전하셨을 때, 동료의 충고 한 마디로 목숨을 건지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 후로, 사람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야한다고 말씀하시며 가훈을 ‘한그루의 나무가 되기보다는 숲을 이루는 사람이 되자’는 것으로 정하셨습니다. 가훈을 따라 살아서 인지 중학교 때 저의 별명은 ‘정의로운 영인’ 이였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늘 존재하는 소외당하는 친구를 그냥 놔 둘 수 없는 저의 성격 때문입니다. 혼자 밥 먹는 친구들과 같이 밥 먹어주는 일이 저의 습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 시켜주어 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누구와도 잘 친해지고 소외된 사람을 챙기는 장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관계에 너무 집중하여 제가 해야 할 일을 놓칠 때도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영어스터디를 통해 알게 된 한 친구를 통해 프랭클린 계획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년, 한 달, 하루의 단위로 계획을 짜서 매일 내가 세운 계획을 얼만 큼 성취했는지를 반성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이였습니다. 프랭클린 다이어리를 이용해 매일의 계획을 짜면서 해야 하는 일을 제 날짜에 끝내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은 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학교생활 및 사회경험
대입시험을 마친 후, 대학생활을 꿈꾸며 세웠던 작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5:5작전’, ‘5곳 이상의 아르바이트 경험과 5개국 이상의 방문으로, ’나’ 라는 작은 우물을 벗어나보자.‘ 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수능이 끝난 이후부터 아르바이트를 거의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덕분에 6곳에서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공동체에선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9개월간 영국을 가려고 했을 때에, 돈이 부족하여 출국이 연기 되었었습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할인매장에서 선물세트를 파는 일을 하여, 어렵게 출국할 수 있었습니다. 출국은 쉽지 않았지만, 출국 후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 살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많은 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비를 벌며 공부하는 치열한 삶을 사는 그들을 만났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그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 부러웠고, 그때부터 하루를 살아도 목적을 가지고 열정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 제 삶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관심분야 및 희망직무기술
대학생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유전자조작 실험 이였습니다. 2학점 짜리 수업에서 학점을 받기 위해 한 주에 4~5시간 실험을 했지만,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수업 이였으며,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이였습니다.
항생제를 생산해 내는 유전자를 세포에서 빼내어 restrict enzyme으로 잘라내어 trans-vector에 삽입하여 다시 세포에 넣어주는 과정까지 약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저에겐 흥미진진한 시간 이였습니다. 실험을 하는 것도 제겐 즐거웠지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실험에 실패하였을 때, 어떤 부분에서 잘 못 되었는지를 고민해보는 시간이 이었습니다.
transformation된 유전자를 세포에 삽입한 후, 항생제 활성이 나타나지 않아서 원인을 고민해 보는 중, restrict enzyme의 농도에 문제가 있어서 원하는 유전자가 잘려져 나가는 것이 원인 이였다는 것을 추론하여 2번째 실험을 성공시켰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CTA 업무를 전문적으로 해 본적은 없지만, 분석업무는 제가 가장 잘 배울 수 있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