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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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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자유게시판 스크랩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神衆]이란?
태일(太一) 추천 0 조회 314 15.03.08 07:1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神衆]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불교에는 기독교적 신 개념이 없다.

특히 기독교의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신이요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의(義)의 신이라면

그러한 신 개념은 불교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절대 타력을 강조하는 아미타불의 구원자로서의 의미가

기독교의 신 개념과 가깝다면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도 사법신(司法神)적인 개념은 없다.

더욱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은 자로서의 나 자신이 절대 주체요 절대 창조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이 신이라고 기독교에서는 말할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는 기독교의 위와 같은 신(神) 개념과는 거리가 먼 다수의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신의 무리라고 해서 신중(神衆)이라 부르는데,

그들의 성격은 아미타불과도 다르고 선에서 말하는 절대 주체로서의 '나'와도 다르다.

그 신들의 특징을 들라면 그리스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신적이며 더 나아가 신인동형적(神人同型的)이다.

자연을 위인화한데다가 거기에 인간적인 여러 특징과 모습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인간보다 힘이 세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탐욕을 부리는 데서는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기에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일부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가 인간보다 낳은 것은 분명하다.
이들 대다수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이었다.

그 신들은 코가서스 지방에서 살던 아리안들 중 한 갈래가 인도 대륙으로 이동해

원주민을 정복해 가면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 아리안들은 위대한 자연의 힘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것에 경외로운 마음을 품었으며,

결국 그 자연 현상 하나하나에 신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마치 인간처럼 생명을 지니고 자유 의지대로 행동한다고 믿었다.
그 결과 인간들의 성격이며 그 외모와 유사한 신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니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실제로 그런 신이 살아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 신들은 고대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가면서

그들에게 현세 이익을 부여하는 일상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이러한 신들에 대한 찬양의 노래가 인도의 성서 『리그 베다(Rig -Veda)』에 실려 있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신들의 얘기가 인도 신화로 전개되어

서사시 시대(B.C. 600 - A.D. 200)의 『라마야나(Ramayana)』

나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서 꽃을 피운다.

신들이 불교화하는 모습과 그 역할
신들이 인도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다.

불교도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신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반 민중들은 불교에서 고매한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당장의 현실적인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주고 여러 가지 이익을 부여하는

현세 이익적인 측면에 강하게 요구해왔을 것이고

 불교는 이에 응해서 그들을 불교권 내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화경』「서품(序品)」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려 할 무렵

많는 보살들이 그를 우러르고 있는데, 거기에는 또한 무수한 신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는 장엄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물론 그 신들 대다수는 인도의 토속신들이다.

바로 그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화를 불법을 찬탄하게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인도의 토속신들이 불교화하는 생생한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이 부처님 설법 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가

(靈山會上圖: 인도 마가다국 영축산에서 부처님 설법 모임을 그린 것)

우리나라 사원에 많이 걸려 있는데,

거기에 이들 신들은 영산회상의 수호 신중으로서 빼곡하게 박혀 있다.
『화엄경』「적멸도량품(寂滅道場品)」에서는

33명의 신중이 부처님 정각(正覺)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이 궁극적으로 화엄 신중(華嚴神衆)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화엄경』에서는 이토록 많는 신중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화엄경』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연 그 자내증(自內證)의 경지를 설하고 있다.

화엄, 그것은 진리의 세계가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며 서로 조화롭게 연결되어

중중무진의 연기를 이루면서 이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 경지에서 볼 때 깨닫지 않은 중생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사람, 모든 뭇생명 하나하나가 깨달음 자체이며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마당에 신중 또한 깨달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결국 여기에 이르면 우주의 모든 신이 깨달음을 증거하고 보호하는 호법신으로 다가서기 마련이다.

결국 여기 화엄의 신중에는 인도의 토속신은 물론이고 중국 도교의 칠성신,

한국의 산신이나 조왕신 등의 토속신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최종적으로 104명으로 구성되기에 이른다.
화엄의 그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를 그림을 통해 보여주는 화엄변상도(華嚴變相圖)에도

신중이 등장할 뿐더러 나중에는 신중만의 권한이 강화되어

그들만을 그린 신중 탱화가 법당에 좌측에 걸리는데,

그 화면을 구성하는 인원수에 따라 22위(位), 39위, 44위, 104위 등으로 분류된다.
밀교계 경전에서는 이들의 호법적 기능과 현세이익적 기능,

그리고 수호신적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더욱이 만다라의 도상에서는 이들 신중이 최외변부에 배치되어

불보살의 무리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수호 기능으로서 신중은 불탑의 탑신부에 조각되어 사리를 옹호하고

변상도에 그려져 경전을 보호하며 사찰문에 배치되어 가람을 수호한다.

 뿐이랴. 이러한 신중의 가람 수호 기능은 가람을 신성화하는 역할까지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산지 가람이 형성되면서

그 입구에서부터 중심 공간인 법당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四天王門), 해탈문(解脫門) 등을 쭉 세웠는데,

거기서 이들 신중(仁王이나 四天王)은 금강문이나 사천왕문에 당당히 서서

삿된 무리들의 출입을 가로막아 도량을 신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중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내우 외환으로부터 국가의 안녕을 비는 역할을 한다.

즉 진호 국가(鎭護國家)적 측면에서 신중 도량을 개설하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고 국익을 도모코자 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 또한 반야로서 국토를 수호하는 인왕(仁王)으로 섬겨질 정도였다.
고려 시대는 문두루 도량(文豆婁道場), 마리지천 도량(摩利支天道場),

제석 도량(帝釋道場), 인왕 도량(仁王道場) 등 여러 가지 신중 도량이

국가적 차원에서 많이 열렸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에는 각 신들의 여러 가지 현세 이익적 역할과 더불어 호국적 역할이 설해져 있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이라든가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등

여러 가지 신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전을 강했다.

 조선 시대로 내려오면서 신중은 개인의 차원에서 재난이나 위험을 막아주고 복을 내리거나,

불법과 사원을 보호하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화장실에는 측신(厠神), 부엌에는 조왕신, 우물에는 정신(井神)이 들어 앉아서,

그리고 칠성각이나 산신각에는 칠성이나 산신이 단독으로 모셔져

삿된 무리들의 발호를 막고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이익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불교는 이들 신들을 불법 그 자체를, 혹은 불법을 신앙하는 중생들을

여러 가지 환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호법신(護法神)으로서 수용한다.

이는 불 보살 및 명왕(明王) 등이 중생을 피안 내지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과 비교해서 커다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들은 깨달음과 그다지 계가 없으며 단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 집단일 뿐이지만,

불보살보다 가까이서 사람들과 부딪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의 고통, 원망 등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나 조선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이들 신중께 직접 기도를 올리며 복을 구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중은 재난을 제거하는 식재(息災), 행복과 장수와 사업 번창을 비는 증익(增益),

악마와 원적을 진압하는 항복(降伏)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가 사람들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경애(敬愛) 또한 이들의 몫이었다 한다.

신중의 모습
신중의 모습을 표현한 여러 존상(尊像)들은

개개 성격의 복잡함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일정치 않다.

 얼굴에도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험악스러운 분노상이 있으며,

 입은 옷도 여러 가지 여서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나형(裸形),

불보살들의 옷과 같은 천의형(天衣刑), 무장들이 입고 있는 갑옷형 등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인도의 신과 귀신들의 본래적인 특징에다가

중앙아시아나 중국적 변용을 거치게 된 결과다.

예를 들어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등은

중국 관리의 복장이나 귀부인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으며,

사천왕이나 십이신장(十二神將)이 입은 옷은

거친 중앙아시아를 거쳐오면서 형성된 중국풍 갑옷이다.
구체적인 신체 모습도 인간의 형상을 한 것에서부터

새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조두인신형(鳥頭人身刑),

코끼리 머리에 인간의 모습을 한 상두인신형(像頭人神刑),

 뱀머리의 사두인신형(蛇頭人身形), 말머리의 마두인신형(馬頭人身形),

심지어 몸 전체가 새나 짐승 모양을 하고 있는 조수신(鳥獸神)도 적지 않다.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아수라를 비롯해 이러한 반인반수(半人半獸)적 모습은

인도적 색채를 농후하게 남기고 있다.
이들 신중의 모습은 이렇게 다양하며 괴기성마저 띠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불상의 범례인 32상 80종호의 위궤도 필요없고

오직 자유스러운 감정의 표현만이 있을 뿐이다.
신중을 형성하는 신들의 무리 하나하나는 복수 개념으로서,

그 무리의 개념을 한문으로 부(部)라 번역했다.

쉽게 말해서 팔부중(八部衆)하면 같은 종으로 이루어진 여덟 무리의 집단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신부(神部)하면 신들의 무리, 용부(龍部)하면 용들의 무리를 말한다.

이렇게 무리를 이룬 각각의 신들이 수없이 많은데,

대체로 천부상(天部像), 무장상(武將像), 용왕상(龍王像)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천부상으로 제석천, 대범천, 사천왕 등을 들 수 있고,

 무장상으로 사천왕, 금강역사〔인왕〕, 십이신장을 들 수 있으며,

용왕상에는 용, 야차, 건달바, 가루라, 긴나라 등 팔부(八部) 용왕을 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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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3.08 08:58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15.03.08 09:55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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