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5015년 6월 12일, 본래 의로운 거병을 위한 대의의 날을 불과 3일밖에 남겨놓지 않은 때였다. 극악한 마녀 마우스실버 백작의 권세에 힘없는 허수아비의 어린 황제는 양수절단의 법령을 시행할 것을 공표하였고, 이에 격분한 황태자 안드레스는 6월 15일을 마녀를 비롯한 역적의 도당을 처단하고, 빼앗긴 제국을 다시 되찾기 위한 대의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원래 가혹한 법인가. 정의를 위해 군사를 육성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제국의 황태자 안드레스의 눈앞에서 심히 불길하기 짝이 없는 징조가 일어났던 것이다. 급기야 안드레스는 내정되어 있던 거사의 일정을 연기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안드레스를 주군으로서 섬겨온 슬레인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다.
하필이면 그 때에 암탉들이 갑자기 목청껏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부짖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것은 정녕 제국의 불운을 암시하는 흉조란 말인가. 슬레인의 머리 또한 안드레스 못지 않게 복잡하고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작 이틀이 지났건만 그는 피가 마르는 듯 하였다. 초조한 나머지 온갖 역사 기록을 다 뒤져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금의 역사를 둘러본들 이와같이 거사를 연기하여 대업을 이룬 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단, 거사를 연기하게 되면 그간에 날카롭게 단련시켜 둔 군대가 긴장이 풀려버리고 이는 사기의 저하로 이어진다. 사기가 저하되고 군심이 동요하면 거사는 이미 실패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하게 마련이다.
민심이라는 것은 눈에는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수많은 제왕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 야심한 새벽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략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며 역사책들을 뒤져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한가지 눈에 띄는 기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신성제국 라고스의 제 175대 황제였던 루이느엘 리페 오스트리치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그 내용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당시 황태자였던 루이느엘 황제께서 거사 당일 계획이 누설되었을 염려를 생각하여 거사의 일시를 늦추고자 하였다. 그런데, 황후(당시에는 황태자비)께서 손수 갑옷을 입혀주며 말하기를,
“전하, 속히 출정하시옵소서. 대업의 달성이 목전에 있음입니다. 제국 역대 황제 폐하들과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라며 거사를 단행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용기백배하신 루이느엘 황제께서는 그 길로 기사들을 규합, 거병을 하여 대업을 이루시니 제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생활이 평안해졌다.」
그것은 당시 황태자의 자리에 있었던 175대 황제 루이느엘이 휘하의 기사들을 규합하여 간신배들의 세력을 거세하고, 황권의 강화를 이룩해낸 역사의 기록이었다. 또한 당시 황태자비였던 루이느엘의 황후는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황실의 인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황태자비의 독려에 용기를 얻어 그것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흠... 그러나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미혼이시지 않은가. 그만한 일을 해낼만한 배우자가 없지 않은가.’
그점이 못내 아쉬운 슬레인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실로 충격적이었다. 왜 그 생각을 이제껏 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마저 들 정도였다.
‘반드시 황태자비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 전하께서는 미혼이시지만 전하의 곁에는 누구보다도 믿을만한 누님이 계신다! 신성제국 라고스 공주 중에서 최고 서열에 있는 내훈공주마마께서 계시지 않은가!’
슬레인이 생각해 낸 것은 다름아닌 내훈공주 엘리자베스 리페 오스트리치였다. 비록 배우자는 아닐지라도 그에 못지 않은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제 1황녀이자 황태자의 누님이라는 자리, 어찌보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물론 내훈공주마저 안드레스를 설득하는 일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을 유일한 희망이자 한가닥의 끈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슬레인은 당장에 말을 타고 내훈공주의 집으로 향하였다. 만물이 잠이 든 야심한 새벽의 시간이었으나 그런 것 따위는 그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공주의 집으로 향하는데, 그 거리가 멀지 앟으니 말을 타고 가면 순식간에 도착할 일이었으나 그의 기분은 마치 몇시간이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말을 달려가니 드디어 내훈공주의 저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말에서 내려 저택의 대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소리를 지르듯이 자신의 용건을 전하였다.
“나는 황태자 전하를 곁에서 모시는 마법사 슬레인 디 하이거다! 제국의 안위가 달린 급박한 일이 있기에 야심한 시각에 무례를 무릅쓰고 이와같이 달려왔느니라! 어서 공주마마께 전하라!”
경비병은 처음에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으나, 다시금 이어지는 슬레인의 호통에 허둥지둥 저택으로 들어갔다. 경비병이 시녀에게 슬레인이 왔음을 알렸고, 다시 시녀가 엘리자베스에게 알렸다.
엘리자베스 또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느냐. 왜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더냐.”
공주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문앞에 서있을 시녀에게 물었다. 때마침 전갈을 받고 달려온 시녀의 목소리가 방안으로 들려왔다.
“공주마마. 슬레인 경께서 제국의 안위가 달린 시급한 일이라며 마마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어찌 하오리까?”
슬레인이 이 야심한 새벽에 그것도 기별도 없이 급박하게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시급한 변고가 있음을 의미하기에, 공주는 갑자기 잠이 확 깨는 듯 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제발 나쁜 소식만은 아니기를 마음속으로 바랄뿐이었다.
“객실로 뫼시어라. 내 서둘러 갈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십사 전하고.”
“예, 공주마마.”
내훈공주는 서둘러 예복을 갖춰 입고 의관을 정제한 후에 급히 객실로 향했다. 객실에는 예상대로 슬레인이 초조한 듯한 몸짓을 하며 서 있었다. 공주가 모습을 나타내자 그는 신소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으며 예를 취하였다.
“공주마마, 신 슬레인 디 하이거 제국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마마께 고하고자 한걸음에 달려왔나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라니.. 말부터가 거창한 것이 어쩐지 예감이 좋질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상세하게 말해보세요.”
“예, 마마. 황태자 전하께서 거사의 일종을 번복하시고자 합니다. 거사의 날이 이제 겨우 3일, 아니 이미 자정을 넘겼으니 이제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나이다. 이같은 시기에 전하께서 거사를 번복하심은 군심에 동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간곡히 전하께 청원하였으나 전하의 심중이 변하지 않나이다. 이에 마지막으로 공주마마께 이같은 대임을 부탁드리고자 야심한 시각에 무례임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마마!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공주로서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러신다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거사 일정을 번복하신다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예, 마마. 그것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슈타인 경과 함께 검술을 연마하시던 중 입에 올리기 민망한 흉조가 있었나이다.”
슬레인은 안드레스가 검술 연습을 하던 중, 갑자기 일제히 암탉들이 큰 소리로 울었던 일과 이성을 잃고 분노한 안드레스가 암탉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기사들을 소집하여 거사의 일정을 연기한다는 발표를 한 일, 그리고 슬레인 자신이 슈타인, 리안 등에게 일단 거사 번복의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조치한 일 등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흠.. 그건 참 잘하신 것입니다. 내 비록 아녀자의 몸이라하나 제국을 위한 일인데 어찌 가만히 앉아 두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내 당장 전하를 뵙고 반드시 전하를 설득할 것입니다. 헌데, 하필이면 암탉이 울다니. 이는 아녀자가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에 나선다는 뜻일진데.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나 또한 아녀자의 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전하께 마마가 어찌 아녀자이겠습니까. 마마께서는 신성제국 라고스의 제일황녀이시자, 또한 황태자 전하의 친누님이 되십니다. 그러한 점이라면 일절 심려치 마시옵소서.”
사실이 그러하였다. 어찌 누님을 일개 아녀자로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현재 제국에서 내훈공주의 위치는 황실의 어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태후는 황도에 유폐된 것이나 다름 없는 형국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적어도 이곳 페르니아에서는 황실의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는 일전에 별안간 내훈공주가 황태자 안드레스를 향해 하대를 하였으나 황태자 자신이 차후로 그 일을 논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슬레인으로서는 가히 마지막으로 한번 승부수를 던질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고금의 전례를 통해 비추어 볼 때 거사를 번복하고 대업을 이룬 선례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나도 아는 바입니다. 또한 상서롭지 못한 징조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만한 일 때문에 대업을 늦출 수는 없지요. 그것은 제왕의 풍모를 손상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내 지금 당장 전하를 뵙고 설득하여 예정대로 거사를 하시게끔 바꿔놓겠습니다.”
내훈공주의 결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슬레인은 감복하여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훈공주라면 반드시 주군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마! 마마께서 내리신 용단이 제국과 백성들을 구할 것입니다! 하오나, 마마. 지금은 시각이 너무 늦었고 전하께서도 침수에 드셨을 터, 밝은날 일찍 등청하시어 아뢰옵소서. 그리하여도 크게 늦지 않나이다. 마마께오서는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시옵고 전열을 가다듬어 날이 밝은 후에 담판을 지으시옵소서. 그것이 가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어차피 내훈공주마저 실패한다면 그걸로 만사휴이였다. 그러한 만큼 지금 당장에 달려가는 것보다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할지를 조금더 생각해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에 정식으로 주청을 올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헌데, 도대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도록 사자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사자왕 또한 전하를 설득하는 일에 가담하였겠지요?”
내훈공주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자신의 또다른 동생인 사자왕 프라우스였다. 주군이자 자신의 형인 안드레스를 보필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을 사태가 이렇게 되었다면 자신에게 알려주었어야 할 터인데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었던 것이 서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슬레인의 말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흠...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 아이에게는 알리지 마시오. 내가 반드시 전하의 의중을 바꾸어놓고 말 것이니 사자왕에게는 기별할 필요 없습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슬레인 경께서 노고가 크십니다. 이젠 집에 돌아가 마음을 편히 갖고 주무세요.”
“망극하옵니다, 마마. 신 슬레인 디 하이거 오직 공주마마 한분만을 믿고 이만 물러가나이다.”
사실 내훈공주는 자신이 비록 공주의 신분이기는 하나 아녀자의 몸으로 정무를 논하는 페르니아 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그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는 생각에 자중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사자왕이 부르투스의 영주로 부임하게 된 인사이동을 알 턱이 없었던 것이었다. 내일은 오랜만에 성에 가는 날이며 또한 담판을 지어야 할 중요한 날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잠자리에 드는 그녀였다.
제국력 5015년 6월 13일, 아침을 알리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훈공주 엘리자베스는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예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시금 가다듬었다.
시녀들은 당혹스러웠다. 공주의 눈빛이 어쩐지 모르게 날카로웠고, 표정이 심각한 듯 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녀들이 보아왔던 온화한 미소를 띤 공주의 얼굴이 아닌 듯 했다. 자연히 시녀들은 조금 움츠려들 수 밖에 없었다.
“마차를 대기시켜라. 지금 즉시 입궁할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속히 시행하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녀들은 공주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차를 대기시키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내훈공주는 다시금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보면서 마차에 올랐다. 지금은 동이 튼 아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법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은 아침조회마저 시행되지 않은, 즉 안드레스 또한 등청하기 이전이었던 것이다. 공주로서는 지금이 비록 이른 시간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서둘러 담판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이처럼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훈공주의 마차는 페르나스 성의 정문에 당도하였다. 이토록 이른 시각에 갑자기 마차가 당도하자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본능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마차를 수행하던 시녀가 이들의 저지를 뚫고 지나가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내훈공주마마십니다. 지금 급히 황태자 전하를 뵙고자 하시니 속히 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경비병들은 공주마마라는 말에 놀란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처럼 이른 아침에 공주가 찾아올 것이라는 건 예상외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경비병이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아뢰었다.
“공주마마, 속히 황태자 전하께 마마께서 오셨다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때 마차안에서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훈공주의 목소리였다.
“그럴 필요 없다. 그대들은 평소대로 성문의 경비 임무에 만전을 기하라. 기다릴 여유가 내게 없으니 내 지금 당장 전하께 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신속히 다시금 마차를 몰게 하여 성안으로 진입하였다.
안드레스는 이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수를 하고 입고 있던 잠옷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터였다. 물론 아직 아침식사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이미 내훈공주 엘리자베스는 마차에서 내려 시녀들을 동행하고 페르니아 성의 복도를 걸어 안드레스의 방문 앞까지 당도하였다. 안드레스의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급작스러운 공주의 등장에 당혹해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