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하느님 뜻을 알아가는 과정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이다. 바로 어제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지역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음에 화가 많이 나셨는데, 저주와 욕설에 가까운 꾸지람을 내던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당신 주위에 있는 제자들이 바로 그 기쁨의 원인이었다.
오늘 마태오 복음과 같은 내용을 루카 복음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교리서가 저렇게 두꺼워지고 말도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 건,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많은 의문에 답하다 보니 그리된 거다. 부모가 왜 자신의 부모인지 그의 자녀들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다. 그런 거처럼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아주 자명한 존재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하고 외쳤다고 하는데, 우리들 모두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일 거다. 반면에 예수님은 열두 살이 돼서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본래 신원을 깨달으신 거 같다.(루카 2,49) 그런데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라고 증언하는 걸 보면 예수님은 그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셨다.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완성된 사람은 없다. 우리도 삶을 알아가고, 신앙의 의미를 깨우쳐 간다. 예수님의 성장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알게 됨일 거 같다. 아픈 딸을 고치기 위해 모욕을 감내하며 당신께 청하는 그 이방인 부인(마태 15,21-28)과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에 감동하셨다. 복음이 유다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또 믿어야 하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셨을 거다. 그렇게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다는 걸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희극인 찰리 채플린의 명언은 큰 울림을 준다. 농구 골대 그물로 농구공이 들어가 떨어지는 그림이 있다. 그 옆에 이렇게 적혀있다. ‘떨어짐이 언제나 실패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아버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깨달으셔야 했다. 그 결정과 깨달음 앞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고뇌하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 그걸 완전히 아시게 된 게 아닐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생활의 달인과 명장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들이 깨달은 건 만두 만드는 기술이나 된장, 고추장을 담그는 비법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다. 그들이 많은 시련과 실패를 지나왔음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거의 상식 수준이다. 음식을 완벽하게 만드는 게 인생의 의미일 수는 없지 않을까? 실패조차도 내게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 일부라고 여길 정도가 되면, 그 정도로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에게 하늘나라는 아주 가까이 있을 거다.
예수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패와 고통은 반갑지 않지만, 제가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면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