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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국내성 새벽시장에서
지난 밤 집안의 입성 때 겪은 끔찍한 공포, 아내에게 말을 했다가는 다시는 나 홀로 여행은 허용이 안 될 터라 지금도 이 말은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무리수에 따른 여진이다. 국내성 이란 간판 입구에서 쪼그리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가만 앉아 있어도 병든 닭처럼 졸음이 밀려온다.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꼭두새벽 재가 왜 그러나 싶어 나만 바라보는 것만 같다. 이래서는 안 될 성 싶다. 얼마나 와보고 싶었던 땅인가. 예맥족의 후예들의 본거지. 국내성 앞에서 첫 대면부터 이 꾀죄죄함이라니. 담대한 그들이 누구던가.
선진시기에 요하(중국 동북지방의 남쪽의 강) 동쪽의 주민은 예로 불렀고 맥은 중국 북방민족을 부르던 명칭이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두각을 나타내자 북방의 대표 의미로 맥족 하면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이 된 것으로 돌궐은 고구려를 맥구려라 불렀고 일본은 고마라고 불렀다. 지금도 고구려인이 망명해 이주해 살던 동네의 기차역 이름이 고마역이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이 북방민족이라 하여 불렀던 맥의 개념에 선두주자가 고구려로 보면 맞을 것이다. 고구려는 본래 구려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려는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이나 성곽을 뜻하는 홀,구루와 같은 용어이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선조는 신석기시대 이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예맥족들로 예맥족 가운데 랴오둥에서 북한 서북부의 주민집단이 가장 빨리 성장해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했다. 그 뒤를 이어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주민 집단이 부여를 건국했다.
고구려 선조인 압록강 중류의 주민집단은 예맥족의 일부로 살아가다가, 기원전 3~2세기경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농경을 발전시키고 적석묘라는 독특한 무덤을 만들며 독자 문화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주변의 예맥족에서 분화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구려(句麗)'로 불리다가 이것이 고구려라는 국가 명으로 정착되자 '맥(貊)'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선조는 고조선이나 부여의 선조처럼 예맥족에서 분화했다. 이들은 중국 화하족과 명확히 구별될 뿐 아니라, 동만주의 수렵민인 읍루족(만주족의 일부 조상)이나 만주 서부의 유목
민인 동호족( 선비, 거란의 조상)과도 계통을 달리한다.
더욱이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며, 예맥족의 여러 주민집단을 하나로 통합했다. 여기에 남쪽의 한족 일부도 흡수했다. 물론 고구려는 말갈족(읍루의 후예)이나 거란족(선비의 갈래) 등 여러 종족도 거느렸지만, 어디까지나 고구려인의 주류는 예맥족이었다. 이들은 삼국통일을 계기로 한족(韓族) 계통의 백제인 신라인과 어우러져 한민족을 형성했다. 한민족의 형성은 발해 멸망 이후 고구려 후예들이 대거 고려로 흡수되면서 일단락됐다. 고구려는 예맥족을 통합해 한민족 형성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순간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만주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구려 문화를 온전히 계승한 민족을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역사 체는 한민족뿐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고구려인은 한민족의 조상이고, 고구려 사는 한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여(扶餘)·고구려옥저·동예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들이 그러니까 모두 예맥에 포괄되며, 우리가 잘아는 부여의 한 갈래로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커진 백제 역시 예맥족의 나라이다. 무덤은 그들의 조상을 말하며 신성시한 제례관습으로 그 습성을 쉽게 바꿀 수는 없기에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가늠이 가능하다.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집안과 한성백제의 무덤은 시신 또는 석곽 위에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 무덤으로 그 원류가 바로 예맥임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의 적석목곽층 형식의 무덤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는 가공하지 않은 돌을 쌓았으나, 뒤에 가면 돌을 사각기둥(벽돌)의 형태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대표적인 무덤이 바로 이곳 집안에 장군총이다.
나는 새벽시장을 향해 걸었다. 국내성 성벽으로 담장을 한 바로 밑으로 큰 광장이 있는데 그곳이 새벽장터다. 몇 번의 중국여행 경험으로 내가 나름 터득한 게 있다. 시내에서 어디를 가야할지 모른다면 인민이란 말이 들어간 곳을 찾으면 된다. 인민은 그들이 제일 숭배하는 말로 그곳은 중심가 내지 행정타운이나 큰 광장을 끼고 번창하다. 그런 광장은 공중 위생시설이 꼭 있기 마련인데 인민을 위해서 그곳만큼은 잘 정비해놓았다. 먹을 게 마땅치 않으면 계란 볶음밥을 시키면 그만이다. 이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그들이 퍼져 있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있으며 우리 입맛에 꼭 들어맞는다. 시회주의 적 경제체제라 할 중국이나 홍콩 싱가포르는 공통점이 또 있다. 인민을 위한 음식은 무척 저렴하고 교통비는 제법 싸다. 등 따뜻하고 배 안 고프면 국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숫한 정권이반에서 일찍이 터득한 그들만의 철칙내지 사회주의 국가의 얕은 술책이다 싶다.
역시 생각대로 공중화장실이 깨끗하고 문도 일찍 열어 두었다. 이곳을 맨 처음 찾는 것은 아침이니 세수도 하려 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휴대폰 배터리 충전이 급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이곳까지 왔는데 인증을 못한다면 그 한을 어찌 달랠 것인가. 청소아줌마가 순순히 전기충전을 허락해주었다. 나는 마치 청소당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예 출입구 의자에 버티고 앉았다. 또 다시 졸음이 밀려온다. 깜빡 졸았는데 배터리 충전이 80%를 넘었으니 깜빡이 아니라 아마 오십분은 족히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훨씬 몸이 쾌청하였다. 이제는 나서야 할 때다. 장뇌삼부터 온갖 푸성귀가 즐비한 장터를 두 바퀴 째 뱅뱅 돌았다. 그래도 내가 찾는 게 없다. 심양에서도 연길에서도 용정에서도 쉽게 만났던 떡이 이 동네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이곳은 그리 많지 않다는 선입견으로 못내 아쉽다. 떡을 우리네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특히 인절미나 시루떡은 우리 고유 브랜드다. 벌써 시간이 6시 가까이 되었다. 나는 택시들이 줄 선 곳으로 향했다.
새벽녘 굳이 돈 내고 문을 열지 않아도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가만 보니 대기 중인 택시 중에 세 번째 기사가 아줌마다. 지난밤 악몽 때문인지 왠지 여자 기사가 끌린다. 두 택시가 사라지기까지는 거의 30분이 지났다. 나는 아줌마에게 손 글씨로 압록강이란 한자를 써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바로 차를 몰았다. 10위안쯤 냈나. 강은 바로 지척이었는데 꾸무럭한 날씨로 시계가 흐려 저 너머 북한이 잘 안 보인다. 만포라는 묵연한 동네가 저 만치 먼나라 땅으로만 느껴진다. 북한 신의주 맞은편 국경도시 단둥(丹東)에서 출발해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수려한 경치로 유명하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TV에서 본 강변을 따라 굽이를 돌고 작은 언덕을 넘으면서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풍광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렇듯 중국 쪽은 썬글라스 끼고 차 드라이브 즐기듯 나날이 발전하는데 강 건너는 나날이 황폐화 되어 거반 볼 것도 없다. 들과 산은 야위고 지쳐 맨몸으로 올 여름을 또 버텨서야만 할 것이다.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는 살풍경한 구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못살아도 좋다란 말이 생략된 것 같은 알량한 자존심에 기가 차고 가슴만 더 답답해지고 만다. 언제까지 뻗대고 저러고 살려는가 말이다. 눈 아리고 속 쓰린 이 심정, 압록강은 이 안타까움을 아는 것인지, 오늘도 어제처럼 무수히 많은 전설을 담고 무심한 척 압록강(鴨綠江)은 유유히 흐른다. 과연 도도한 물결이다. 천지(天池)의 맑은 물은 백두의 골을 흘러흘러 임강(臨江)을 지나, 집안(集安)을 거쳐, 그렇게 단동(丹東)으로 해서 황해와 만난다. 압록강 하면 누가 뭐라 해도 백두산이고 고구려다.
압록강 중류의 바로 옆, 집안 땅에 고구려의 혼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집안현을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을 정도다. 기원전 37년 혼강(渾江) 유역에서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는 서기 3년 홀본성(紇本城, 지금의 환인)에서 압록강변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국내성(國內城)과 위나암성(尉那岩城, 지금의 환도산성으로 추정)을 축성하고'강한 왕국' 고구려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로 수백 년(425년)을 버텨 섰었다. 원시 시대부터 인간이 정착해 농경문화를 만들었던 강가의 비옥한 땅에는 성곽이 남아 있고, 궁궐의 흔적이 있고, 수많은 고분 속에 고구려인의 숨결이 숨 쉬고 있다.
압록강 공원을 잠시 서성이다 나는 다시 택시를 탔다. 그 여자기사가 대기 중이었었다. 하기는 그 시각 아무도 없는데 나라도 태우고 돌아가는 게 낫지 어쩔 텐가. 나는 박물관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돌아 차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나는 그쯤 집안의 좁은 동네 지리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9시 20분이란 글자를 써 보이며 내린 위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였다. 그녀는 제대로 알아듣는 듯 했다. 박물관위치와 개장시간을 파악하고 나는 다시 국내성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걸어서도 불과 15분도 안 되는 거리다. 마침 아침 식사한다는 식당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옥수수죽과 만두를 먹고 기지개를 폈다. 이제부터 제대로 느끼고 볼 것이다 하였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왕이 처음 도읍한 곳은 졸본(卒本)이다. 졸본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요령성 환인시(桓仁市) 일대로 보는데 거의 이견이 없다. <광개토왕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에 있는 산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여기서 서쪽 산위의 성이 지금 환인시 오녀산 성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많이 있어, 첫 도읍지였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후 고구려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은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이다. 집안에 가보면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을 비롯하여 7000여 기의 고구려시대 고분이 온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가장 오랫동안 도읍지였던 역사의 내력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면 언제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기원 45)에 천도했다는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희생물로 쓸 돼지가 도망치자, 담당 관리가 이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잡았다. 그가 돌아와 유리왕에게 보고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이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이 납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유리왕이 직접 국내 지역을 시찰했고, 이듬해에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 이야기는 국내 천도가 하늘의 계시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기 꾸민 것 같은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도읍을 옮기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렇게 무언가 그럴싸한 천도의 이유를 밝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럼 위나암성은 어디일까? 지금 집안시 일대에서 찾는다면 산성인 산성자산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다음 기록과 그리 맞지 않는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에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쳐들어 오자 대무신왕은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 일 동안 굳게 지켰으나, 점차 적의 포위에 군사들이 지쳐갔다. 이때 신하 을두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들이 우리 성안에 샘이 없다고 생각해 우리를 포위하고 궁핍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술과 함께 보내는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어 금방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 이야기 정황을 보면 성안에 샘이 있는데, 이를 한나라 군이 잘 알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그런데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은 성밖에서 성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구조라서, 위 이야기가 성립할 수 없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이 198년에 환도성을 쌓고, 209년에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 환도성이 바로 산성자산성이 된다. 즉 위나암성과 환도성이 같은 곳이 되어 서로 모순이 생긴다. 오히려 위 이야기의 정황과 잘 맞는 곳은 바로 졸본의 오녀산성이다. 그렇다면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모호해진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서 집안시 국내성을 발굴 조사해보니 3세기 초 이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유리왕대 천도는 부정된 셈이다.
그럼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을까? 여기서부터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태조대왕 때라는 견해가 있다. 모본왕과 태조왕 사이에 왕계가 단절되는 면이 있는 등 태조왕이 시조적 모습을 갖고 있으니 이때 국내성이 졸본을 대신하여 도읍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여러 정황으로는 가장 그럴 듯하지만, 앞서 고고학적 조사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209년에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바로 국내성 천도를 가르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더욱이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는 산상왕이 "새로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산상왕 때 천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근사하게 맞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 때, 그 다음 고국천왕 때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명확하다. 이미 졸본이 도읍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산상왕 이전에 국내성으로 천도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대왕 때 국내로 천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렇게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는지조차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정도이다. 국내와 위나암성은 유리왕이 천도한 것이 맞는지. 거기에 위나암성을 환도산성이라 볼 것인지 등등 고대국가의 역사의 진실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수수께끼다. 그러기에 더욱 흥미롭고 가설과 상상이 뒤따른다. 그러면서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선다 싶다. 역사는 그런 변개를 걷어내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가보면 알지만 국내성은 압록강을 배수진으로 삼고 산으로 뺑 둘러진 분지다. 고구려성 들은 거의 대부분 이렇듯 강을 끼거나 절벽을 두어 적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한 필사적 흔적이 많다. 중국 안산 근처에 백암성도 경기도 임진강가의 호루고루성도 서울의 아차산성도 다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격과 수비를 꼭 같이 염두에 두고 장소를 정했다. 졸본성이라는 오녀삼성도 보면 혼강을 두고 졸본성을 지었고 지금은 그곳이 환인 댐이 세워져 누군가는 졸본성은 바로 저 땜에 수장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와서 보니 과연 국내성은 백두산 남부 산악지대와 압록강이 나란히 좁다란 회랑을 이루며 달려가다가 잠시 쉼터에 들러 쉬어가는 듯한 분지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강원도 춘천평야의 절반에 불과한 좁은 평지형 도읍지 국내성은 땅이 척박하고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엔 무더운 곳이다. 앞서 말했지만 근처 도시 백산은 중국에서 제일 춥다는 곳이고 우리도 잘 아는 중강진이 지척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이런 심난한 곳을 택했을까. 나는 단적으로 산이 있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추위에는 이골이 난 하등에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산이라 한다면 눈 감고도 휘몰아쳐 산에 단번에 오른다. 쏜살같이 오르고 쏜살같이 활을 당기는 고구려인, 그들 벽화에도 그려져 있듯 그들은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단지 사냥으로서 뿐 아니라 연마훈련용으로 이용했다. 너무도 잘 알지 않는가. 무용총이란 그림을. 거기에 작은 말로 산 지형을 좁은 골목 누비듯 숨어드는 기질은 그들의 특질과도 같다. 만주지역을 가보면 알지만 백두산 근처의 수많은 산들 사이로 논 경작을 일군사람들은 우리 조선인들로 그들이 맨 처음이다. 그들처럼 산을 잘 알고 산에 기대선 사람들은 이 지구상에 없다. 이는 삶이란 본능적 DNA에 속한다 싶다. 우리처럼 산나물을 알고 약초를 알고 산나물을 즐기는 지구상 사람들이 어디 있던가.
그러니까 그들은 산 지형을 잘 알고 잘 이용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은 국내성에서 수백 년을 지탱해왔다. 중국 어느 시대 어느 나라가 4백년이상 버텨선 나라가 있었던가. 그것도 한 곳에서. 한때 동천왕 때 위 나라의 관구검에게 분탕질을 당했고 고국원왕때는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겼고 왕비가 납치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는 곳임에도 그들은 또 다시 그곳에서 재건하였고 기필코 또 대국을 이룩했다. 산을 떠나서는 살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는 국내성은 평상시 삶을 말하고 환도산성은 위급시 비상사태구조의 방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환도산성 뒤로는 산이 겹겹이 둘러싸여 침범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먼 평원인 요동으로부터 부리나케 달려온 큰 말들은 그만 산세에 위축이 되고 올가미에 걸려들 수 밖에는 없었다. 산에는 조랑말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겹겹이 천리장성을 축조한 그들의 천연지세를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봉화로 돌아서는 길에서 마주한 산과 산들은 바로 그 이유를 보다 선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너무도 깊숙하여 어디로 갔는지 행방도 묘연할 산과 산속을 비집고 찻길이 나있다. 고구려는 산사람들이고 산사람답게 대담했던 것이다. 강으로 퇴로가 차단되고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로도 도망할 수없는 지형은 때론 퇴로가 없어 죽임을 당했고 큰 위험을 자초하기도 하였지만 그래서 결전의 장에서는 공격만이 살길임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여겼던 난공불락의 터전으로서 고구려인들이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여기 집안에서 400년간 압록강을 배수진으로 삼고 한반도를 등받이로 삼아 무궁무진하게 전진을 했던 것이다.
내가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 라는 책을 냈을 때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해주지 않는다. 충주 땅 가금면에는 예로부터 큰 돌이 하나 서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선돌이라고 불렀고 동네이름도 이 선돌 때문에 입석마을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천년을 지내왔다. 묻지 않으니 천박한 신세로 지낼 수밖에는 없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찾고 묻는 이에게만 대답해 줄 뿐이다. 멀고 먼 고대국가는 흔적조차 희미해 설령 찾고 묻는다하여도 진실은 늘 미궁 속에 빠지기 마련이다. 막막한 노릇이지만 오히려 나는 고대국가의 닿지 않는 숨은 미로가 마음에 든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상상하기 때문이다. 내게 역사는 어느 확고부동한 진실의 마침표가 아니라 추상의 끊임없는 도전 속에 비로소 다가오는 엷은 분홍빛 실루엣이며 지평선 너머로부터 끝없이 불어오는 선연한 시간의 바람이다. 나는 종종 은은한 옛 시대의 향취에 취해 미로 속에 갇히곤 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또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던 나라, 고구려. >
고구려는 도도하고 당당하며 거칠어서 좋다. 생각만 해도 드넓은 광야를 향해 달려가는 듯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다. 만주벌판의 황량한 찬바람을 가로지르며 화살시위를 당기는 숨 막히는 순간순간들로 고구려는 당찬 역사를 이루었다. ‘쏜살같이’란 표현이 제대로 실감나는 광속질주의 기마군단이 우리의 선조였다는 게 나는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말 타고 활 쏘는 타고난 무사였던 고구려. 그렇다 . 나는 이번에 멀고 먼 대륙의 시간을 쫓아 그들을 만나보고자 바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September - Tim ja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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