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반전반핵은 사실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일반화된 주제는 아니다. '지금은 휴전중'이라는 규정하에 아직도 모든 남자들이 유사시에는 '용감한 군인'이 되기를 강요받는 현실 속에서 반전 평화주의는 언제든지 무너져내릴 수 있는 유리성이고, '석유 안나는 나라'이기 때문에 원자력이 최고라는 공익광고가 태연하게 공중파를 타고 있다. 아직도 많은 교육현장에서는 준군사국가화되어 있는 이스라엘이 한국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국가상으로서 포장되고 있다. 다른 국가들보다 역사적으로 (특히 현대에 와서) 전쟁의 참상을 결코 덜 겪은 것도 아니건만, 이런 나라에서 반전반핵이 실질적으로 '사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맨발의 겐'같은 작품이 이제서야 번역 소개되어 들어왔다는 점이 더욱 우리에게 그런 사실을 깨닳도록 만들고 있다.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거의 27년이 흘렀으며, 일본만화가 정식 개방된 이후 10년도 넘어서야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반전반핵의 고전이 되어버린 이 작품이, 한발짝 늦게나마 마침내 한국에도 수입되어 들어오고야 말았다.
맨발의 겐의 작가 나카가와 케이지는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원폭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경험담을 바탕으로 반전 반핵 만화를 그려나가기 시작하던 중, 73년부터 '주간 소년점프'('드래곤볼' 등이 연재되는 등, 가장 중심적인 주류 소년잡지다)에 이 만화, '맨발의 겐'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단행본으로는 총 10권이며, 현재 아름드리 미디어에서 이번에 1,2권을 번역 출간하였다.
겐은 원자의 '原'이다. 핵으로 황폐화된 대지에 맨발로 우뚝 서는 꿋꿋한 소년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는 '미소띤 건전한 표정'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인 한쪽 눈을 감는 얼굴표정 등의 '건전한' 학습만화의 그림체에 속아넘어가는 수많은 독자들은, 그 속에 녹아들어간 처참한 지옥도에 다시금 경악할 것이다. 이 만화는 감성적이고 표현주의적인 화면연출에 의한 스타일리쉬한 극적 과장을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 너무나도 담담하게 생지옥을 그려낸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본 풍경이었을 것이다 - 바로 일상성의 공간 그 자체가 지옥으로 변하는 광경이다. 그 지옥에는 여전히 일상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말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혀 강렬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작가의 그림체는 너무나도 끔찍한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해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학습만화풍'의 그림체는 말 그대로 '학습만화 읽듯'한 내용 학습을 중시하는 독서방식을 유도해 냄으로써 그림체의 스타일보다 극적인 스토리 자체가 주가 되는 이 작품을 읽을 때 사람들의 주의를 스토리에 확실하게 집중시키는 역할도 한다. 물론 스토리 자체의 놀라운 생생함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고, 그것은 그만큼 작가 개인의 강렬한 경험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여러모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비견된다. 하지만 '쥐'가 홀로코스트의 현재적 의미에 관해서 교차적으로 이야기하려 하는 반면, 겐은 과거경험 자체의 충실한 극적 묘사에 비중을 둔다. 물론 두 작품 모두 대단히 우수한 작품이며, 무엇보다 유태인과 일본인을 일방적인 피해자 입장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한발짝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쥐'는 그 피해자가 현재는 편견으로 가득차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피해/가해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반면, '맨발의 겐'은 처음부터 가해 민족, 피해민족 개념을 떠나 있다. 맨발의 겐은 거의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게 반전 반핵을 부르짖고 있고, 전쟁을 유발시킨 이들과 그러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그것이 동네 이장이든, 미국의 과학자든, 옥쇄를 강행하는 우둔한 군인들이든 그 누구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상정되어 있으며, 적당히 '그러니까 모두의 책임 아니겠는가'라는 식으로 두리뭉실 넘어가지 않고, 전쟁을 불러일으킨 그들의 왜곡된 사상을 적나라하게,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점에서 구체적인 악역을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피해자로서의 일본인만이 부각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반전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쥐와 맨발의 겐 두 작품 모두 스토리의 진정성을 만화라는 매체의 그래픽적 특성과 매우 잘 결합시켜서 가장 확실한 이야기 전달을 해낸 우수한 작품이다. 하지만 일본이 피해자이기 이전에, 일본 군국주의가 궁극적인 가해자라는 점을 절절하게 담아내려는 직접적인 반전 반핵의 열정에서는 '맨발의 겐'이 우세하다.
필자는 이 책을 한 유서깊은 사회과학서점에서 구입했다. 이 책을 구할 때, 주인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이런 만화책 더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이러한 추천해야할 만화가 점점 더 많이 출간되어 들어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때까지, '맨발의 겐'이 무사히 10권 완간이 되고, 외전들까지도 출간되기를 희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