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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정체성과 정치적 이면
문화를 잃으면 민족도 무의미하다
요즘 통영에는 과거 단체장과 자치단체에서 해온 일들의 결과가 곁쳐 여러가지 행사들이 중복되고 문화콘텐츠가 생기고 활기찬 것 같은데 잘 훌터 보면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지역 국회의원과 단체장은 통영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문화마인드에 상당한 의혹이 가며, 무지한 군중들과 어울려 배가 산으로 가는 통영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움이 너무 깊어 병이 생길 것 같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 귀에 경읽기에 지나지 않으니 이 성의도 이제는 무의미하여 주민증과 선산을 파서 타 지역으로 옮겨 가 살고 싶은 심정 철떡같다.
매년 폭염속에서 치루는 8월14일의 한산대첩기념축제 시기는 적절한가?
통영[통제영]이 생긴 날은 “,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 장군께서 마침 통제영 감사로 나온 좌의정 한움 이덕형에게 이 자리는 지형상 무(武)가 강한 곳이어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이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1604년 음력 9월 9일 양력 10월 1일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10월 1일이다.
8월 14일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합동작전으로 견내량에 있는 왜군을 한산앞바다로 유인하여 싸워 이긴 한산앞바다 해전의 날짜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2차 원폭투하로 인하여 일본이 항복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날들을 함께 기념하여 1회의 기념일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광복절보다는 승전대첩일이 더 빛나 보인다.>
그리고, 한산대첩기념제전[축제]는 통제영을 통영으로 옮긴 10월1일,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 다음해 한산도에서 제1대 삼도통제사로 선조로부터 교지를 받은 날, 이 날이 바로 10월 1일이다. 지화자 통제영은 바로 이 날, 10월1일에 생긴 일이다.
지난 여름 일부러 한산대첩을 보러 비행기를 타고 갔었다. 살인 폭염 속에 강제 동원된 동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행사진행자들과 공무원들이 기념축제를 떠나 고통스러운 억지 춘향 노릇 한다고 불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400여년전의 일들을 기념한다고 제일 더운 날을 택할 필요가 있는가? 400년전의 8월 14일의 기후와 현재의 기후는 너무 다르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거의 가을이 없어져가는데 우리는 제일 더운 날을 찾아 형식적인 축제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8월14일, 8월15일을 묶어 “항일승전대첩기념일”[假稱]로 하고
10월 1일을 한산대첩기념축제 주간에 통영시민의 날, 통영예술제를 곁들여 행한다면 날씨도 좋아 武와 文[문무와 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보통 추석을 막 지난 후라서 시민과 국민들의 자연 참여도도 상당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한산대첩축제가 유망축제에만 머물고 있는 이유?
한산대첩축제, 독보적인 독창성과 숨은 정체성 [이하 신문기사인용문]
2013 통영의 여름을 달구었던 제52회 한산대첩축제가 밤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과 시민들의 아쉬운 함성으로 5일간의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지화자 통제영'을 올해의 주제로 세운 제52회 한산대첩축제는 유난히도 더운 올여름의 더위와 싸우면서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계획된 행사를 깨끗이 마무리함으로써 올 축제 또한 성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4일 34년 만에 이뤄진 한산대첩기념비 제막식과 통제영지 복원과 발맞추어 ‘지화자 통제영'이란 주제 위에 축제 하루하루마다 작은 주제를 심어 체험행사와 공연, 해상 스포츠대회 등을 결합한 프로그램으로 어느 해보다 관광객의 참여도가 높았다는 평도 뒤따른다.
특히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거행된 조선수군 출정식은 축제의 새로운 별미로 역사성과 볼거리 그리고 지역민 참여도를 높이는 효과와 함께 축제 집행부의 원숙한 연출로 많은 찬사가 뒤따랐고, 전국 매스컴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한산대첩 개막과 때맞춰 통제영지가 12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축제와 더불어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축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를 한 층 높였으며, 낙성식에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2천여 명의 시민이 참석해 통영의 자부심을 대변했다.
또 축제 셋째 날 제63회 해병대통영상륙작전 전승행사에 1천 명의 참전용사와 전국해병전우회 그리고 현역들이 함께 통영지국전몰해병 추모식과 강구안 병설마당에서 거행된 전승행사에 참석해 축제 속에 작은 축제로 또 다른 승리의 역사인 통영상륙작전과 구국의 땅 통영을 전국에 알리는데 일조했다.
24반 무예와 해군·해병 축하음악회 그리고 의장대 시범을 비롯한 통영무형문화재 공연, 어린이 인형극과 거북보트 노젓기대회 등이 축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고, 그중 가장 많은 관심과 정체성 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한산대첩 출정식과 군점 그리고 그 중 한산해전 재현을 꼽았다.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으로 나눠진 50여 척의 배들이 일사불란하게 한산해전을 재현하며 펼치는 해상 불꽃 쇼에 3천여 명의 관람객들의 박수와 탄성이 보태져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고, 장대한 스케일은 어디에서도 흉내 내지 못하는 통영만의 자랑이자 자부심 그 자체였다는 평가에 덧붙여 날씨와 재현 시간 등이 조화롭게 맞아떨어졌다는 찬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성공의 뒷면에는 따가운 질타도 있었다. 강구안 일대를 휘감은 체험부스가 그것이다. 대부분 체험부스가 축제의 본질과 주제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어린이놀이 체험장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는 지적이 여지없이 이어졌다.
아동들의 눈높이에 집중된 체험놀이가 전체 체험부스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통영의 1읍 6면 8동의 특징과 특산품, 관광지 등을 활용한 통영 알리기나, 지역민의 참여 코너는 없었고, 거대한 물놀이 기구와 더불어 강구안 일대는 한여름 어린이 놀이터라는 인상마저 들게 했다는 지적이다.
1962년 제1회를 시작해 52회라는 반세기 우리 역사와 함께해온 한산대첩축제, 그 역사만큼이나 정체성과 교육적, 역사적 의미를 다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유망축제에 머물고 있다.
이 대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명분을 가진 한산대첩축제가 유망축제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축제평가단은 축제의 평가기준을 이렇게 말한다. “한산대첩 출정식, 한산대첩 재현 등은 독특하고 역사적, 교육적, 시각적으로 우수하며 최고점을 줄만하다.”고 평했다. 그리고 “그러나 점수는 우수한 한 프로그램에 주는 것이 아니다. 평가기준은 단순하다. 축제의 기본은 보여주는 분위기를 말한다. 바로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느낌 그것이 얼마나 주제와 부합 하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산대첩축제’란 말만 들어도 곧바로 어떤 모습이 연상되고, 행사장에 들어서면 곧바로 “한산대첩축제구나” 하며 떠오를 그런 시각적인 연출과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산대첩축제에 등장한 대형 물놀이 기구는 어떤 인상을 남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리하자면 한산대첩 출정식, 한산대첩재현, 군점 등은 독특한 통영만의 색갈이며, 통영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행사들은 메인 행사장을 벗어나서 진행하고 있고, 관람을 하자면 상당한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한산대첩재현 행사를 관람하는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지만, 메인 행사장 내 부스를 관람하는 사람은 수만 명에 달한다는데 점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관람객 대부분이 강구안 일대에서 축제를 접하고 있고, 그들은 강구안에서 보여주는 것이 한산대첩축제의 전부라 여길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 집중하고 싶다. 메인 축제장 분위기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거기에 불어넣어야 하는 주제는 무엇이며,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수십 개의 부스를 채우기 위해 시대의 흐름이라는 명분과 즐길거리 라는 당위성을 섞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현대적 욕구와 놀이에 오히려 부작용이 나왔다. 부스 전반이 아동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코너들로 채워진 축제장이 축제평가단의 시선에 어떻게 느껴질까?
지역민이 관람객이 되는 축제가 아니라, 참여자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산대첩 축제에는 한산전투 외에 바다와 섬, 그 속에서 살아온 역사와 문화예술, 통영인의 삶을 보여줘야 한다. “한산대첩축제 부스에는 통영이 없다.” 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치욕이고 수치다.
앞서 축제는 주민이 주인이라 했듯이 읍·면·동이 자기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것을 보여주려 노력하다 보며 지역마다 특징적인 또 다른 관광 상품도 만들어 낼 것이다.“가장 통영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두고 상투적인 말이라고 해선 안 된다. 필자는 그것만한 정답은 없다고 본다. 보기 좋고 화려한 떡이 아니라 이제는 웰빙 떡이 더 잘 팔린다는 것도 새겨보자.[ 윗글 출처는 통영문화투데이 기사전문임]
당포출정식은 통제영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고 출정식을 지휘한 이순신장군의 캐렉터는 원균이나 권율장군에 가까운 캐렉트였으며, 식전행사에서 통영시장축사와 기타 단체장의 기념사가 있었는데도 본행사에서 통제사가 출정하는 소함대지휘 소임장을 임명하는 장소에서 통영시장을 치사하는 것은 행사가 정치적인 흐름을 이끌려가는 느낌을 주어 통영도 없었던 당시 해전의 실감을 더 감하게 해주었다.[2013년8월,당포한산대첩출정식장면]
행정,문화콘센트 그 하드웨어는 제자리에 있는가?
1. 통영시청과 통영시립박물관의 위치.
현재 통영시청과 시립박물관의 위치를 바꾸면, 시민이 평안하고 조상도 편한할 것이다. 통영화장터에서 일을 마지막 보고 나오면 박물관[현재 시청청사]에 기념할 만한 물건들과 자료를 헌납하기도 쉬울 것이고, 물 건너 사는 시민들이 배를 타고 통영와서 여객선터미널에 내려 차 안타고 걸어서 시청에 가서 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옛 군청자리[현 시립박물관]이며 육지시민들은 지금 시청별관 자리만하여도 일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통영의 시위원, 역대 단체장들은 왜 반대로 시민이 불편한 곳에 시청을 짓고, 시민이 편한 곳에 자주 가지 않는 고인들의 유물전시관을 수십억원을 들어부어 다시 만들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종의 개인적인 이해타산이 깃들여 있었는지 의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2. 박경리문학관과 통영역사박물관의 행방.
산양읍 신전리 박경리 문학관에서 한 일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소문에 파견 공무원은 할 일이 없어 컴도박하다 여러 사람한테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 문화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 못해 일어난 일들이며 시청은 관심도 없다. 집만 지어 놓고 헹하니 있다가 비도 조금 왔는데 3년만에 와르르 무너졌다니 이것이 통영문화의 현주소다. 그 곳은 박물관자리 정도 되며 박경리 문학관은 적어도 세병관과 충렬사 중간쯤 있어야 한다. 터 구하기가 어려웠다면 지금의 서피랑 어디에 지어도 문학관은 문학관대로 살고 주변 땅의 가치는 금전으로 따질 수 없는 지역이 된다. 그러나, 적소에 지어 놓고 지금처럼 놀고만 있다면 국력소비다.
그리고, 통영역사박물관도 없앨 것이 아니라 세병관 가까운 곳에, 혹은 문화원 한켠에라도 보존되어야 하는데 멸실되어 안타깝다.
3. 통영국제음악당[윤이상음악당]과 통영문화회관의 위치.
역대시장들이 공연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공연장은 주변 경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수시로 모이더라도 다른 시민이 불편하지 않은 교통의 요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공연장 역시 돈만 많이 들고 경치는 좋지만 시민들과 국민들을 위해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특정한 사람 이외는 공연을 보지 마라는 뜻이다. 물론 최근 음악제가 특정인만 혜택을 본다는 이미지도 있지만 시민과 군중의 편의하고는 정반대의 정책이다.
그렇다면 공연장의 적지는 어디인가? 북신동 공설운동장과 그 부근 옛날 동중, 상고 학교부지, 아니면 용남면 동달리 법원과 오촌 사이 늪지대가 적격이다. 외부인원, 거제시민,고성군민 모두 유리한 곳이다. 거기는 통영~대전고속도로 북통영 출구와 맞닿아 있고 무슨 공연이 있어도 통영시내교통체증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잇점이 있다. 주차장 확보도 싶고, 경치 또한 2등 하라면 서러운 곳이다.
통제영준공에 어울리는 통영정체성 소프트웨어개발은 정말 있는 것인가?
세병관 없는 통영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진의장 전 통영시장 지방인터넷신문투고글]
만일 세병관이 없었다면, 통영은 여느 한 포구에 지나지 않으며, 큰 역사와 12공방으로 이어지는 통영의 문화 예술도 없었을 것이다. 도시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세병관을 기가 막힌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세병관의 왼편은 동피랑과 남망산, 장좌섬으로 이어지고 오른편은 서피랑과 항남동으로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병관은 게(蟹)의 복장에 해당하고, 오른편과 왼편의 다리는 집게다리로서 공주섬을 구슬로 어루만지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 장군께서 마침 통제영 감사로 나온 좌의정 한움 이덕형에게 이 자리는 지형상 무(武)가 강한 곳이어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이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1604년 음력 9월 9일 양력 10월 1일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통영이 500년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정부주도의 계획도시로 탄생하게 되고 생일을 갖게 된 것이다. 세병관은 1895년 폐영 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하여 근 300년 동안 우리 통영이 경상·전라· 충청의 삼도를 호령하는 남해안의 중심도시가 된 것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기(氣)를 죽이기 위해 기(氣)가 있는 지형에는 온갖 해작질을 했었다. 무(武)가 충만한 이곳 통영을 그대로 둘리가 없었다. 통제영 관아 부속건물 100여 체를 뜯어 버리고 거북선이 정박해 있던 지형이 게(蟹)의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는 그곳을 분질러 매립했다. 100여 체의 세병관 부속건물 들도 뜯어내어 통영국민학교, 세무서, 법원, 검찰청 그리고 일부러 신사와 일본절(옛 천주교)을 들여앉혀 놓았다.
그리하여 필자도 세병관에서 초등학교(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런 세병관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통영국민학교에는 윤이상,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유치진, 유치환, 김용식, 김용익, 이일규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된 듯하다.
필자는 재직 시 많은 관심을 가지고 틈만 나면 복원현장에 들러 일을 챙겨보았다. 세병관 정문에서 일직선으로 선을 그으면 정확히 공주섬을 만나게 된다. 옛 선인들이 말한 구슬을 어루만지는 게(蟹)의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직선상에 문화마당 화장실이 눈에 거슬린다. 또 강구안에서 세병관을 바라보면 지붕만이 보인다. 한마디로 세병관의 맥이 막혀 있은 것이다.
필자는 먼저 일제가 부수어 놓은 게의 오른쪽 다리를 복원하고 그 자리에다 이순신 광장을 만들어 막힌 세병관 앞을 터는 일을 시작하였다. 1차 사업으로 동인당 한의원 일대를 뜯으려면 80억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필자는 문화재청장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본래 명지대학 교수였다. 마침 명지대학 총장 유영구 박사의 필자와 절친한 친구이며, 통영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울의 명지빌딩 15층에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서울지소까지 만들어준 분이었다.
유영구 박사의 주선으로 유 청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유 청장, 세병관이 아름답소, 경복국의 경희루가 아름답소?" 하고 물었다. 그리고 80억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 청장은 “세병관은 국보 중에서도 나라를 지킨 호국의 국보인데 이런 국보 앞이 막혀서 되겠느냐고 통영 국회의원이 저를 야단치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마침 통제영 복원 사업비가 잘 조정되어 세병관 앞을 틔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완공 결과는 엉뚱했다. 지난 14일 통제영 복원 준공 행사에 가 보았더니, 뜯어 놓은 그 자리에 철제 건물 주차장을 지어 도록 막아 놓았으니,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유홍문 청장이 보면 분명 사기당한 느낌이 들것이고 매우 허탈해할 것이다.
행사에 나온 어는 시인이 "두루마기 입을 선비에게 청바지를 입힌 꼴이구나" 하는 푸념이 아직도 내 귓전에 쟁쟁하다. 통영의 정체성을 살릴 정신들이 잘 결집만 하면 언젠가는 세병관이 강구안까지 확 틔어져 연결될 날이 올 것이다.[이상 투고글인용]
[통제영관아에 관한 본인의 글은 다음 호에~~]
첫댓글 외국에서 한글과 사진을 올리려니 아주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주 올리지도 못하고 하니 한국에 계신분들 자주 글 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