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언약
창세기 9:12-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7주일이다. 마침내 코로나19를 조금씩 극복하고 소풍예배를 드리게 되어 참 기쁘다.
소풍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하루의 시간을 소풍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인생을 소풍이라고 여긴다면 조금쯤 생활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다. 더 나아가 마침내 그날이 오면 나는 가볍게 소풍을 떠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소풍은 자연을 더 가까이 느낄 만한 기회이다. 농촌, 해변, 숲, 공동체와 함께 한다. 너무나 인공적인 도시와 아파트 단지에 비해, 농촌과 자연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더욱 친밀하게 느낄 수 있다.
1)
하나님은 홍수 이후 세상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의 증거는 바로 무지개였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13).
무지개는 창조세계의 신비를 보여주는 일곱빛깔 무늬이다. 안개나 물방울에 햇빛이 조절 반사되어 해가 있는 반대쪽 하늘에 일곱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 햇빛이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면 빛의 경로가 꺾이는데 덜 꺾인 빨강색은 아래쪽으로 가고, 가장 많이 꺾인 보라색은 위쪽으로 나온다고 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는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가? 이러한 무지개 현상은 ‘큰비가 그치고 비로소 날이 개이는 그 사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지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기 중에 높은 습도를 조성할 큰비와 강렬한 햇빛이 똑같이 필요하다.
큰비가 온 후에 뜨는 무지개, 이것은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심판과 구원, 책망과 자비, 죽음과 은혜 사이에서 전적으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보여주는 징표인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무지개를 종종 보았다. 그땐 하늘이 맑았고, 또 자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볼 기회가 별로 없다. 차 안에, 집 안에,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무지개를 의식하며 살지 못한다. 무지개에 대한 그런 신비감도 별로 없다.
어른의 마음은 어린이의 마음과 달라 감탄사도, 의문문도 거의 없지 않은가? 무지개의 상징성은 우리 자신을 일깨워 준다. 무지개를 본다는 것은 다시 언약의 한쪽 당사자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무지개를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앞에 선 자신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색동교회 3층 유리창에 창조절 배너가 붙어있다. 무지개와 거울이다. 무지개와 함께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그 무지개 언약이 나를 향하신 것, 나와 맺으신 것,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임을 새삼 고백한다. 그렇게 무지개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2)
무지개는 색깔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흥미롭다. 어떤 모양인가? 마치 활처럼 생겼다. 히브리어 무지개는 ‘케쉐트’인데 활에서 온 말이다. 고대 신화에서 활은 신들의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들 사이 호전성과 적대감을 나타내던 활이란 상징이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표식인 무지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활(무지개)는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가? 활시위는 인간을 향해 있지 않다. 바로 하늘의 중앙을 향해 화살을 팽팽하게 겨눈 형국이다.
즉 무지개는 인간의 반역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죄를 대신 맡으시겠다는 지극한 은총의 표현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으신 영원한 언약과 맥이 통하는 상징적 근거이다.
우리는 하늘에 걸어 두신 무지개를 볼 때마다 심판 후에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와 일방적으로 은혜의 약속을 하셨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셨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며, 의지하는 일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3)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나 자신은 물론 모든 민족과 인류, 더 나아가 모든 생물과 맺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12).
우리는 세상을 오염시키고, 뭇 생명을 병들게 한 잘못된 생활습관에 대해 책임이 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화석 연료를 낭비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지구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기후위기는 점점 임계점을 넘어 파국으로 가는 중이다. 우리 지구는 대규모 산불과 가뭄, 홍수와 태풍, 폭설과 폭염 뿐 아니라 빙하 소멸을 일상적으로 겪는 중이다.
만약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정한 지구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일을 못해낸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 해야 한다지만,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순 0점으로 만드는 것에 희망을 거는 이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미래의 지구>를 쓴 에릭 홀트하우스는 절망이 클수록 희망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2050년 남은 시간까지, 인류가 지구에 가장 도움이 될만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모든 가족, 교회, 마을, 도시, 국가와 함께 상상하고 함께 꿈을 꾸었더니 이루어졌다고 예측하고 있다.
행여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다양한 실험을 한 결과, 지구와 뭇 생명공동체는 유의미하게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희망스런 결론을 도출하였다. 정말 가능한 이야기일까?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렸다. 내 변화가 문제의 핵심이 될 것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이 나와 약속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은 하나님과 언약의 한 파트너로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언약 가운데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남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언약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대하고,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창조신앙을 전하는 창세기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가르쳐 준다. 창조질서 회복은, 무지개 언약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캠페인, 혹은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맞바꾸는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보여준다.
무지개의 한국식 표현은 색동(色童)이다. 그래서 색동을 가리켜 ‘한국 무지개’라고 부른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우리는 무지개, 곧 언약의 백성이란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바라기는 무지개 언약이란 상징을 지닌 교회답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창조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그런 주님의 백성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인생의 소풍을 보내는 여러분의 시간들, 계획들, 희망들, 그 무지개 언약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