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시집____
칸딘스키적인, 전혀 아닌
- 강만수 시집 『검푸른 비망록』
나호열
『검푸른 비망록』(2016, 『문장』)은 강만수의 열 번째 시집이다. 1992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한 이듬해인 1993년, 시집 『가난한 천사』를 상재한 이후 17년을 침묵하다가 『시공장공장장』(2010), 『기이한꽃』(2010), 『무연사회』(2011), 『C-1:99』(2012), 『매니큐어』(2013), 『獨坐礪山』(2013), 『앤디워홀시365』(2014), 『아름다운 지느러미』(2014)를 펴냈고 시선집 『피아노 계단』(2015)을 내기도 했다.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 최근의 그의 시력은 등단 이후의 긴 침묵과 관련있을 것이라 어림짐작 할 뿐이지만 그 침묵의 시간은 시인으로서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만행이었음이 틀림없다. “창피하고 부끄럽다 내 젊은 시절은 가슴에 창이 있고 또 벽이 있고 창과 함께 높은 벽이 있었던 까닭에 (…중략…) 그러나 어느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튀어나올 섬뜩한 칼과 같은 노래를 무대 위에서 부르고 싶다”(「7㎝ 365㎏ 12845」)는 토로를 통해서 그 침묵의 시간이 고통과 해찰의 축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검푸른 비망록』은 시인이 기억해야 할, 그러나 명징하지 않은 세계와 삶에 대한 증언으로써의 ‘검푸른 비망록’이며 암호이기도 하다. 암호는 ‘섬뜩한 칼’(언어)인 동시에 노래이기도 한 까닭에—늘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언어의 살점(자서)—을 저며내는 일에 다름없다. 어쨌든 『검푸른 비망록』은 시의 통념을 깨뜨리는, 어느 층위에도 속하지 않은 지대에 놓여져 있다. 무의식을 들어올리는 자동기술도 아니고, 세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차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쉽게 읽히지도, 그렇다고 현학적이지도 않은 강만수의 시를 해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굳이 해독할 필요가 없다면 집어던지면 그만이다—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당혹감으로 가득 찬 강만수의 시(암호)는 두 가지 축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생활의 경험 즉,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 인간(인공)과 자연과의 관계, 문명과 야만과의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며, 두 번째는 그렇게 인식된 세계와 존재를 표명하는 도구인 언어에 대한 성찰이다.
I remember that drawing and a little bit later painting lifted me out of the reality.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칸딘스키는 “세계의 객관성을 부정하며, 어떤 대상의 묘사는 불필요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추상이야말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인식이라고 단정했을 때, 현상 저 너머에는 뼈만 남게 된다. 그 뼈는 다른 말로 환치하면 혼돈이다. 만일 이 세계가 조화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떤 변화도 용납할 수 없다. 많은 생명체가 멸종하고 새로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예기치 않은 전쟁과 같은 불행이 닥쳐오는 이 세계는 무질서 그 자체이다. 따지고 보면 “포도송이가 샛노랗고, 아프리카 코끼리의 코가 사실은 연초록 담쟁이”로 보이는 떠도는 환영일 뿐 인 것이다.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이 인식 너머에 있는 가상이 존재의 실체라면 “붉은 귀에선 붉은 빛과 파란 빛이 뿜어져 나오는”(「외계인」) 사람들은 ‘스나이퍼’, ‘구멍을 들여다보는 이비인후과 의사’, ‘신유목민’, ‘예언자’, ‘불청객’에 다름 아니다. 이 이름들을 가진 존재는 “누군가 엎지른 진한 먹물”(「도플갱어」)인 그림자로 축약되는 동일한 존재인 것이다. 영원히 갑이고 싶은 욕망과, 을에서 갑으로 상승하고 싶은 욕망이 충돌할 때 파생되는 불안과 코스모스에 대한 열망은 “그러다 어딘가로 다가갈 일조차 없는// 생은 그렇다 그 뿐인”(「삶의 방식」)것으로 귀결된다. “광장에서 223일째 농성중인 언제나 잃기만 했다고 주장하는 따분한 사람들”(「어떤 賢者」), 인력시장에서 공치고 “어떤 시리베 자식이냐 시간이 금이라고 떠든 인간을 원망하는”(「인력시장」) 노동자, 형광등 만드는 공장의 여공들을 바라보며 인의예지를 설파하는 백수서당 훈장(「孔子와 형광등」)은 코스모스가 존재한다고 믿는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도플갱어일 뿐이다. “사사건건 왜라고 캐묻는 저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동물인”(「잔인한 원숭이」) 인간은 “함께 사는 걸 배우지 못”하여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외계인이 되었을 때 마주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땅에 떨어져 뒹구는 모가지로 나를 바라보는
단풍잎 굼깊은 눈에는 핏빛이 들어 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계곡엔 핏덩이로 낭자한
후두둑후두둑 단풍잎 시신들이 발꿈치에 걸린다
파리 11구 바타클랑 극장 안에서
13일의 금요일에 일어난 무차별 총기사건처럼
「단풍 유감」 마지막 부분
무고한 시민들을 난사하여 죽이는 테러리스트이 적자생존의, 혹은 정의로운 행위라고 떠들어댈 때,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가! 운좋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분노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또다른 폭력을 일으키는 이러한 세계의 작동원리는 지금 주어진 현상이 사실이 아니며 진실과는 거리가 더욱 멀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관념론자의 입장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관념을 사회적 약속인 언어로 치환되어야 할 때, 시인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칸딘스키와 만나고 칸딘스키와 결별한다. 말하자면 세계의 추상성을 시인이 동의하는 그 접점에서 “추상화는 자연의 껍데기를 버리지만 그 내면의 법칙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 자연의 내부를 관통하는 에너지를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예술은 위대해진다”는 칸딘스키의 언명은 시인이 걸머지고 있는 표현의 도구인 언어의 속성이 그 언명을 완전히 수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의 발전으로 실제의 묘사에서 경쟁력을 잃은 미술이 선택한 세계의 추상화는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는 문학, 특히 시에서는 온전하게 구현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 어느 곳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어느날 불쑥 갈기를 날리며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오묘한 말을 찾기 위해
오늘도 말광을 뒤지며 말을 다듬고 있다
「입 안에서 노니는 몇 마디 말」 마지막 부분
‘말’(언어)은 ‘말’(馬)이다. 말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의식에 잡히는 순간 ‘말’(언어)은 ‘말’(馬)이 되어 의식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밤에 날 선 언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깨졌다
무참히 배신 또는 배반이란 단어를 노곤함 뒤 나는 또 만났다
매끄러운 언어가 연어를 잡아먹은 시간에
「연어 닮은 매끄러운 말」 마지막 부분
연어는 모천회귀의 물고기이다. 모천회귀의 열망을 지닌 언어는 연어처럼 사회적 약속의 구심력으로, 상징이 아닌 진술의 모천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언어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태어난 사회에 되돌아오는 순간 의미의 왜곡과 불투명한 소문을 남기고 죽어버린다. 그래서 시인은 이 모호하고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언어의 모천회귀를 막아야만 한다. 이러한 분투 끝에 유사성과 근접성이 사라진 채 연상을 하용하지 않는 끊어진 문장은 마치 무조음악처럼 독자의 인내심을 실험하고 급기야 불쾌함을 야기시킨다. 이미지도 메시지도 사라진 불모의 땅, 시인이 의식했든 하지 못했든 간에 이 지점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라캉의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 언어구조이며 생각하지 않는 곳이 무의식이라면 시인은 언어의 고삐를 놓아주는 대신 의식의 해체 즉, 무의식을 제어하고자 한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해괴하며 불안하다는 인식이 언어를 해방시킴으로써 구현될 수 있지만 무의식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한 때 들불처럼 번지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이성의 해체 이후에는 어떤 언명도 유의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검푸른 비망록』은 해체 되어가는 세계를 조망하되, 자아(주체)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곧바로 주체의식의 해체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짱돌은 버려짐이 마땅하다”(「무기력한 돌멩이」)는, 기투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허용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시 전편에 반어로 스며들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강만수는 니힐리스트인 동시에 니힐리스트가 아니며, 아나키스트인 동시에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에 평화가 없으므로” 그는 끝까지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제 몸을 던진”(「깊고 파란 최승희」) 파란만장한 생을 살면서도 끝끝내 도전의 길을 걸어갔던 최승희를 그리워하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냉혹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쉽게 체념의 득도를 꾀하는 대신에 삶의 전면에 괴물로 도사리고 있는 불확정의 시간에 대항하는 변증법의 긴 통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시집의 마지막 5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일련의 시들이 지니고 있는 건강성과 조우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가장 슬픈 가슴을 지닌 위대한 사내”(「검푸른 비망록」)가 건네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고보니 시인 강만수도 이순을 넘었다.
뽁뽁이 비닐을 터뜨리는 소리처럼 뽁뽁뽁
가을 비 내린다
술을 한 잔 마실 때
한 방울 두 방울
술을 두 잔 마실 때
세 방울 네 방울
뽁뽁뽁 비닐로 천장을 친 포장마차 위
비가 내린다
술을 넘길 때마다
뽁 뽀뽁 뽁 보 뽁 보 뽁 뽀 뽁 보보 보
물방울들은 깨지지 않고 구른다
사내들도 깨지지 않고
생을 이어 나간다 저 물방울처럼
「명동 포장마차」전문
나호열 /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눈물이 시킨 일』 외 9권이 있고 ,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한국녹색시인상 수상. 현재 경희대사회교육원에 재직중이며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시와산문』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