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 Don Mclean (Tribute to Vincent Van Gogh)
시간을 뛰어넘는 고전으로 자리잡은 곡 'American Pie'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돈 맥클린(Don McLean)은
1945년 10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나타낸 맥클린은 피트 시거, 조쉬 화이트, 프레드 헬러먼 같은
포크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10대 때부터 이미 아마추어 연주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맥클린은 60년대 중반 동안 뉴욕의
클럽가를 떠돌며 몇 년간의 무명 가수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레나 스펜서의 카페에서 전속 연주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레나의
주선으로 그는 허드슨 밸리 트루바두르라는 이름으로 환경 노래를 부르며 뉴욕 주를 돌아다니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맥클린은
피트 시거와 함께 'Clearwater'호를 타고 환경 문제를 일깨우기 위한 선상 투어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70년,
여전히 무명가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맥클린은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게 바치는 곡인 'Vincent'를 만든 뒤 레코드사와 계약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무려 40개가 넘는 레이블로부터 거절당한 맥클린을 받아들인 곳은 MediaArts라는 조그만 레이블이었고, 그는 여기서
앨범 [Tapestry]를 녹음했다. 이 앨범은 같은 제목의 캐롤 킹 앨범보다 먼저 취입된
것이었다. 이 앨범의 반응은 형편없었으나 수록곡 중 'And I Love You So'를 페리 코모가 커버하여 큰 히트를
거두자 이를 주목한 United Artists 레코드사는 맥클린과 새롭게 계약을 맺는다.
1971년 [American Pie]가
발표되었고, 버디 홀리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슬픈 포크팝 서사시이자 타이틀 트랙인 'American Pie'는 즉각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앨범 역시
차트 1위를 기록했는데, 60년대에 발매된 록 음반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
Vincent' 역시 스매쉬
히트를 기록했다.
이렇게 대성공을 거두자 맥클린은 [American Pie]의 성공이 앞으로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오히려 족쇄로
작용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인 1972년 셀프타이틀 앨범과 1974년 [Playin' Favorites]에서는
일부러 [American Pie] 풍과 비슷한 그 어떤 시도도 피해갔으며, 당연한 결과로 판매량과 차트 순위는 뚝 떨어졌다. 이후
74년작 [Homeless Brother]와 76년작 [Solo]마저 실패를 거두자 United Artists사는 맥클린과의 계약을 파기한다.
그는 다음해 Arista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Prime Time]을 발표하나, 이 앨범 역시 실패를 면치 못했으며 그는 이후 몇 년간을
소속사 없이 보내야 했다.
1980년 [Chain Lightning]으로 맥클린은 재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근 10년만에
처음으로 LP 차트 탑 30에 올랐으며, 로이 오비슨의 고전인
'Crying
'을 커버하여 탑 10에 올렸다. 자신의 곡인 '
Castles in the Air'와 'Since I Don't Have You'
역시 탑 40에 링크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발표한 앨범 [Believers]가 실패함으로써 간만의 중흥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83년
[Dominion]을 낸 뒤 그는 또다시 레이블을 떠나야 했다.
이후 라이브 세트를 발매하거나 옛날 곡들을 재녹음하며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던 맥클린은 1990년 스튜디오 앨범 [For the Memories](팝, 컨트리, 재즈 명곡들을 커버한 앨범)와 1995년
[River of Love]를 발표했다. [
From Changgo.com
재일동포 예술비평가 서경식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고흐는 인생의 마지막 5년 동안 40여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모델을 고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고흐 자신을 능가하는 모델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문학예술인이란 남의 이야기를 쓰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창작을 했던 것이며,그런 뜻에서 그들은 모두가 훌륭한 모델들이었다.그런데 고흐는 그 중 유별났다. 두 눈을 중심
삼아 굵은 붓의 터치로 방사상으로 그린 〈회색 모자를 쓴 자화상〉이란 작품을 일러 서경식은 “이런 자화상을 그린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도,이런 자화상에 걸맞은 자아가 있었던가”라고 반문한다.
▣ 말없는 소년
고흐
고흐의 아버지는 칼빈교 목사였으나 세 삼촌들은 모두 화상이었고 그 역시 소년기의 한때를 화상에서 보냈으며, 고흐의 일생 동안 정신적,
재정적인 후원자 역을 해주었던 동생 테오 역시 화상이었다.앙리 페뤼쇼의 〈고흐의 생애〉를 보면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말이 없는데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도 않아 ‘조용히 하라’는 꾸중이 필요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외톨이로 들판을 떠돌며 각종 동식물과 자연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화가로 성장했을 때 유난히 색채의 조화에 신경을 곤두세운 동기였을 것이라는 풀이이다.열여섯살 때부터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화상에 취직했던 고흐는 헤이그 지점에서 런던 지점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그곳 하숙집 딸에게 뜨거운
사랑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고흐를 흔히들 ‘유배된 천사’로 부르는 이유인즉은 일생 동안 한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못해 본 고독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 〈반 고흐, 지상에 유배된 천사〉). 실연의 충격을 방랑과 전업과 귀향으로 달래다가 스물네살 때 목사가 되고자 시도했으나 이내 포기한 고흐는 이듬해 전도사 양성소 과정을
마치고 임시전도사 자격으로 탄광지대로 갔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를 바꾸었다. 어빙 스톤은 소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에서 탄광의
폭발과 사고로 말미암은 파업의 와중에서 고흐가 신의 사도로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마치
노동운동가처럼 노동자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하여 거처도 오두막으로 옮기는 등 전력을 다했으나 얻은 것은 절망뿐이었고, 여기서 고흐는 “신을 잃고
그림을 얻었다”.
남편이 급사해서 귀가해 있던 이종사촌에게 구혼했다가 집안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뒤 그림에 전념하는가 했으나 모델이었던 창녀와 동거하는가
하면 아홉살이나 연상인 시골 여인과 결혼하려다 좌절하는 등 그에게는 계속 실패만 거듭되었다. 서른세살에 안트워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이미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져 동생이 있던 파리로 옮겨가 당시의 전위적인 예술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고갱을 만난 것이 이 무렵이었다.퇴폐적인 생활로 몸을 망친 그는 파리를 버리고 아를로 가서 창작에 전념하면서 곤경에 처한 고갱을 불러들였는데, 동지이자 천적인 이 두
화가는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지만 만나면 싸움질이었다.
▣ 창녀에게 귀잘라
바친 고흐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듯이 그 와중에 고흐는 그곳의 단골 창녀에게 약속한 대로 오른쪽 귀를 면도칼로 싹둑 잘라 종이뭉치에 싸서 갖다
바쳤다. 그 뒷 이야기는 사족이리라. 주민들은 환각증상을 일으키는 고흐를 고발하여 병원에 감금시켰고, 말짱해지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는 등 그는 정상과 발작을 거듭했다. 동생의 화상에서 〈붉은 포도밭〉이란 그림이 4백프랑에 팔리는 등 전망도 없지 않았으나 서른일곱살 때
권총자살을 시도해 이내 죽는다. 케이 제미슨은 〈천재들의 광기〉에서 고흐를 간질과 조울증 환자로 보면서 여름철에 유난히 창작열이 고조되어 많은
작품을 남긴 사실을 그 증거로 들었다.
[ From Gogh1853 ]
첫댓글 빈센트--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줄 어떻게 아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