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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미륵섬 미륵산의 용화사. 맞어 미륵님의 상주처에 일주문이 필요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예기치 못한 환대에 민초들의 허리를 굽히고 속세에 묵은 먼지를 털어 버리고 절집을 순례한 자취가 쌓여 있다. 그들에게 조산탑이면 어떻고 성황당이면 뭐가 문제겠는가? 보살님의 정성, 신심은 이미 해탈의 경지를 초월했거늘.
미륵님의 하생을 기다리는 토영 사람들의 염원이 얼마나 강했으면 섬이 되고 산이 되었을까? 그 산 골골에 미륵님이 하생하여 용화법회를 베풀도록 지은 절집이 용화사인 것이다. 미륵산의 미래사 외에도 미륵님이 내려다 보는 토영 앞바다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세존도, 연화도, 보리도라는 섬이 있어 토영은 불국토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70년도 후반 부터 여러 차례 들렸지만 주차장 초입부터 낯이 설다. 진입로에서 뒤돌아 보아도 기억이 전혀 없다. 뷰자데라고 했던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임에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학하며 추억을 반추하는 동안 마눌과 아들놈은 희희낙낙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젊은날 누구누구랑 이 절집에 왔었다고 이야기를 해버릴까? 마누라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한 켠에 품고사는 아름다운 그림를 지우기 싫어 안고 가련다. 잘 살겠지?
해월루. 현판으로 보면 절집 루대라는 느낌보다는 물 좋은 계곡이나 강가에 위치한 정자같다. 새로히 중건한 듯 루하진입은 불가하여 우회하여 보광전 중정으로 들어 설 수 있으며 보광전에서 보면 단층이다.
용화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때 은점스님이 정수사(淨水寺)로 창건하였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고려시대에 와서는 943년(태조 26) 도솔선사가 산내암자로 도솔암을 창건하였다. 그 뒤 1260년(원종 1) 큰 비로 산사태가 나서 가람이 무너져버렸고, 3년 뒤 자리를 옮겨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천택사(天澤寺)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금강산에서 수도한 성화스님이 중창하였다. 그러나 1622년에 심한 폭풍으로 절이 허물어지자 벽담스님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용화사로 다시 바꾸었다.
사바의 고단한 삶을 바꿔 줄 미륵이 하생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여망한 민초들은 미륵이 하생할 땅을 찾았으며 통영의 미륵도, 미륵산, 용화사를 도솔천에서 머물던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서 세 차례에 설법으로 민초들의 염원을 들어 줄 장소로 믿어 왔다. 그래서 미륵산에 미륵도량을 마련하고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세상을 열어줄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미륵성지를 초토화 시킨 아니 민초들의 꿈을 염원을 유린한 저 놈의 케이블카는!!!!! 다른 나라 같았으면 종교 전쟁이 발발하고도 남았으리!!!
용화사와 관음암, 도솔암을 품고 있는 미륵산 북쪽 기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이라고 한다. 속리산 법주사, 모악산 금산사와 더불어 미륵산 용화사가 미륵불 신앙의 중심지로 회자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풍수지리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미륵사 전각 구조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탐진당과 적묵당이 맞보고 있고 해월루가 가로 막은 산지중정의 口자 형의 배치이며 보광전 옆으로 영각과 미륵전이 나란히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포계 건물이다. 자연석 덤벙주초에 기둥에는 배흘림이 약하고 귀솟음은 두렷하지 않다.. 어칸에는 공포가 2개, 양협칸에는 1개가 배치되었다. 임란후에 나타나는 남해안의 여느 절집처럼 후면은 주심포계로 중건 당시의 절집 살림살이를 짐작케한다.
어칸은 협칸보다 넓어 공포가 2개, 양협칸에는 1개가 배치되었다. 창살은 빗살이다.
측면 우물천장
보광전. 대적광전,대광전,화엄전,비로전.보광전,보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협시로 봉안하는 법당이다. 용화사에도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음과 세지를 모셨다.
독성탱 신장탱 칠성탱 괘불대
성파 하동주의 글씨."고종 2년(1865) 거제면 동상리 진양인 하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하동주는 영남의 서예대가로 진주에 나가서 명성을 떨치니 호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3년 세상 을 떠날 때까지 한결 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철종 2년 이조참판 김정희는 거제에 귀양와서 거제 반곡 서원에 나다니면서 거제의 정훈성과 벗하고 서예를 전파 하였는데 하동주는 아버지 하지호와 정훈성으로부터 전 예서와 독창적인 추사체를 전수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글씨 쓰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와 가까이 있으면서 추사체를 배웠고, 추사의 글씨가 담긴 책자를 가져와서 아들인 그에게 서법을 익히게 하면서 배우게 도움을 주었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의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부산의 범어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선생은 소년기에 글씨에 전념하기 위해 진주 의곡사로 옮긴 후 영남과 호남을 다니며 서예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동방의 명필이라 하였으나 활동지역이 영.호남이였기 때문에 영남의 서예대가로 호칭하였다."...출처/다음카페 거제도 이야기
명부전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높이 120cm로 목조상이다.
명부전에 봉안된 목조 시왕상은 전체적으로 신체가 장대하고 얼굴이 세장하다. 비량이 고준하여 무장의 위풍이 있는데 녹사의 사모 뿔이 길게 상향한 것을 보면 대체로 효종, 현종 연간의 전란 극복기 조성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용화사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도명존자와 오른쪽에 무독귀왕,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귀왕·판관·사자상 등 모두 21구의 불상들이다.
회광 승찬. 회광 스님은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은사, 탄허(呑虛)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어 통도사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은 이후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12하안거를 보냈다. 1984년 전국 불일회(佛日會) 총재와 효봉문도회 문장(門長), 1987년 송광사 부설 연구기관인 보조사상연구원의 총재, 1990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1994년 조계총림 제4대 방장, 199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단일계단 수계산림 증사(證師)의 자리를 두루 역임한 회광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세속 나이 73세, 법랍 50년으로 입적하였다.
영각에는 효봉스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스님이 판사직을 그만두고 엿장수로 떠돌던 시절 통영과 처음으로 인연 지은 후 스님은 용화사에 오래 주석하셨고 미륵산 미래사를 창건 하셨으며 이후로 효봉 문중에서는 구산스님, 법정스님, 일초 스님(시인 고은)이 배출되었다.
현대의 고승. 수안이씨. 속명은 찬형(燦亨). 법호는 효봉(曉峰). 평안남도 양덕 출신. 아버지는 병억(炳億)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밑 에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 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 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10년 동안 법조계에 투신하여 서울과 함흥의 지방 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에 직책상 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지만, 인간이 인 간을 벌하고 죽인다는 데 회의를 느껴 법관직을 팽개치고 전국방랑의 길에 올랐다. 엿판 하나를 들고 3년 동안 참회와 고행의 길을 걷다가 1925년 여름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 수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신계사(神溪寺) 보운암 (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을 찾아 간단한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머 리를 깎고 5계(戒)를 받았다.
38세의 출가는 매우 늦은 나이였으므로 이때부 터 ㄲ달음을 위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좌선하였 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여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출가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깨 닫기 전에는 죽어도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토굴 속에서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여름 도를 깨닫 고 벽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석두화상에게 오 도송(悟道頌)을 지어올리자 석두화상은 오도를 인가하였다. 1932년 사월초파 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菩薩 戒)를 받았다. 그 뒤 1933년 여름 여여원(如如院)에서 수행하며 오후에는 불 식(不食)하였고, 겨울에는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어서 부처 님의 사리가 모셔진 전국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고,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안착하여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 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을 열어주었으며, 이때 대종사 (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의 승려들이 해 인사에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만들고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자, 6·25사변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냈 다. 1956년 11월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동산 (東山)·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 갔다. 귀국한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 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종무원 장이 되어 정화불사에 골몰하였으며, 석우(石友) 종정(宗正)이 입적하자 새 종정에 추대되었다.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초대종정에 추대되었다. 1966 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 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마지막까지 "무(無)라 무라."하였는 데, 이는 평생의 수행도구로 삼았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한시도 놓 지 않았음을 뜻한다. 평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쳤 는데, 문하에서는 조계종의 수행승들을 지도하는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성파 하동주의 글씨
용화전 미륵불 부도전
용화사에는 관음보살이 없었으며, 보살님이 관음암으로 가보라고 했다. 용화사에서 관음암으로 향하는 산길에 조용히 열반에 드신 스님을 만났다. 두 분의 부도인가?
당래선원. 미륵이 하생하여 설법을 하도록 기다리는 선원이라는 의미인가? 편액 글씨는 미래사(1960)와 용화사 주지 (962∼1984)를 역임했던 회광 승찬(廻光僧讚, 1924∼1996) 스님의 필적이다. 불기 2532년은 서기 1978년이니 회광 스님이 용화사 주지로 있을 때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호젓한 산길을 10여 분 오르니 성채가 길을 막는다. 무슨 요새 처럼 보이는 아취형의 불이문이다. 이곳이 관음암인가? 현대식으로 지으진 전각과 남방풍의 중정으로 인해 심히 소란스런 감정이다. 내가 문제인가? 분명 관음전이 주전각으로 보였지만 열쇠로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보호일까?
관음전에 모셔진 분이 내가 찾던 석조 관음보살인지 확인 조차 불가능 했지만 요사에 흰고무신으로 미루어 스님이 분명 계실터이니 관음암이 떠나갈 정도로 큰소리로 냅다 스님을 찾았더니 젊은 스님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방문목적을 묻는다. 이차저차 해서 관음보살을 뵈러 왔다고 했더니 관음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다고 했다. 그참 이상타!!!
산뜻한(?) 관음전 한 켠의 수수한(적어도 내눈에는 그렇게 보엿다) 조강지처 같은 거지전. 처음 접하는 전각현판의 의미를 질문하였더니 큰스님이 지냈던 선방이며 불상은 없다고 한다. 큰스님이면 효봉 스님을 칭하는 것일까?
측면에는 진산전 현판이 걸려 있어 다시 의미를 여쭈었더니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다며 모르긴해도 차지전과 더불어 효봉스님의 글씨로 생각된다고 했다. 우리카페 오분향님의 설명으로는 진산은 미륵이든 관음이든 준 성인을 모시는 전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미륵님을 모시기 위해 준비한 전각이라는 의미? 아니면 효봉스님 처럼 준 승인이 주석하는 전각이라는 의미인가?
거지전. 수레가 천천히 굴러가는 전각? 미혹한 중생이 무엇을 알겠는가? 짧은 식견으로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일견 스쳐가지만 언감생심 택이나 있겠는가?
웹스핑 중에 네이버 블로그 "달아 노피곰 도드샤"에서 수긍이 가는 짦은 글을 발견했다. "효봉스님은 제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 항상 삼학(三學)을 설했다. 삼학은 보조국사의 정혜(定慧)쌍수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계(戒)를 덧붙인 것이다. 효봉은 스님의 법호인데 법명으로는 학눌(學訥)이라 썼다. 학눌은 ‘지눌을 배운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관음사에 걸린 거지전(車遲殿)이라는 특이한 전각이름도 ‘천천히 수레를 굴려라’라는 뜻이고 보면 효봉 입적 후에 미륵산이 효봉을 대신해서 지눌의 점수(漸修)사상을 은근히 설법하고 있다."
법의는 변형통견식으로,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로 대의를 걸쳐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의 대의를 겨드랑이로 빼내어 왼쪽어깨 위로 넘겨 그 자락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가슴에 위치한 승각기는 수 평으로 접어 띠로 묶어 정리하였다. 결가좌한 양다리 사이로 주름잡혀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발목에서 한 번 반전하여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렸으 며, 좌우 양측으로 퍼지듯이 처리하였다. 이 석조관음보살상은 조성발원문에 의해 康熙22년 癸亥(1683년)에 제작 되었고, 조각승은 전라도지역에서 활동한 사례가 확인된 金魚 色難 비구와 그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발원문 내용으로 보아, 지장시왕상과 관음상 등도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장시왕상은 현존하고 있지 않으며, 지금의 용화사 명부전 지장시왕상은 조선말 고종 연간에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석조 관음보살은 뵙지 못하였지만 유쾌한 숙제를 안고 내려오는 길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그새 아들놈의 문자가 마구 날려온다. 지놈은 통영 맛기행 왔지 절집 기행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아빠는 잊지 말라!!!는 제어미와 공모성이 농후한 협박성 문자이만 어디 내가 바부탱인가?
그나저나 많은 자료에 효봉스님의 부도탑이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는데 나는 왜 뵙지 못했을까? 저 멀리 오르락 내리락하는 케이블카에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려고 작심했는데 동기회 산악회에서 조만간 미륵산 산행을 계획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참 지독한 아이러니구만!!! 2011.08.01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첫댓글 ^^* 글 시작되는 첫 단락에서 자꾸 웃었습니데이. 통영을 계속 토영이라고 쓰셔서 웃었고요. 선과님 소회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사모님께 젊은 날 누구와 왔었노라 확 불어버릴까보다 하셔서 웃었습니다. ㅎㅎ
확 불어버려도 용서가 될 것 같은 분위기라서 말이지예. ^^*
명부전 현판 글씨는 추사의 작품인가 했더니 추사체로 쓴 다른 분의 작품이엇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선과님~~
일부러 토영이라 했습니다. 그 곳 토박이들은 토영이라 합니다.ㅎㅎ
어쩐지~
ㅎㅎ 토영~ 그 이름도 예쁘네요.
미륵도 겉만 보고 왔습니다 닷 가면 아는만큼 보이노라 했는만큼 보고 오고 싶은 디 언제나 다시 가볼란지... ...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
신-맘님 반갑습니다.
새로운 이름이 보여 반가움에 선과님보다 제가 먼저 와락~ 반겨드립니다. ^^*